(35)군산(옥구)지역사건 종합
[제공 신기철 전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관]
<국민보도연맹사건>
국민보도연맹을 살해하라는 명령을 받은 경찰에 의해 군산경찰서 유치장에 감금되었던 주민 일부가 군산시내 야산골짜기에서 총살당했고, 나머지는 경찰서의 후퇴가 임박했던 7월 19일 군산경찰서 유치장에서 총살당했다. 당시 골짜기 3~4곳에서 10여 구씩 방치된 시신들이 목격되었다.
<형무소사건>
같은 시기에 군산형무소에 수감되었던 재소자들도 집단희생되었다.
군산형무소의 재소자 수는 1949년 8월에는 631명이었으며, 정쟁 발발 당시에는 900여 명이었다. 군산형무소 재소자들은 1950년 7월 16일 형무소의 후퇴 직전에 군산비행장 굴(옥녀봉 화산) 등에서 헌병과 경찰에 의해 총살당한 사실이 확인되며, 군산앞바다에서 수장당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희생자의 규모나 가해자의 구체적 신원, 군산 국민보도연맹사건과의 관련성 등은 확인되지 않았다.
<인민군 측에 의한 피해>
군산에서는 인민군 후퇴시기에도 이들에 의해 주민들이 집단적으로 희생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옥구(군산)에서는 9월 27일 옥구군 성산면 채관옥 등 주민 35명이 성산면 노동당원 등에 의해 성산면 고봉리 다리실재 골짜기에서 희생되었다. 사건 관련 판결문에서 당시 2명의 인민군이 나타나 살해를 중지시키고 여자들을 풀어주어 살아 돌아갔다고 하는데, 이들이 살해를 중단시킨 이유는 확인되지 않았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성산면 창오리 농맹위원장이 사형을 선고받았다.
1950년 9월 27~29일에는 미면 주민들이 마을 내 토굴 등에서 희생되었다.
미군이 바다를 통해 군산 오식도에 상륙한 때는 9월 20일이었으므로 27일경 발생한 사건의 가해주체가 인민군 측이라는 주장에 의문이 남는다. 반면 미 25사단은 육로를 통해 9월 30일 군산에 진입했다.
인민군 측에 의한 집단희생사건에 대해 『한국전쟁사 4』는 인민군 사령관 김책이 9월 20일 전국 각지에 내린 무전지령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당시 무전지령의 내용은 ①인민군의 후퇴는 일시적이다, ②UN군과 국군에 협력한 자와 그 가족은 전원 살해하라, ③살해방법은 당에서 파견되는 지도위원과 협의하여 각급 당 책임자의 책임 아래 시행하라는 것이었다고 소개하면서 이는 옥구면 미면 적대세력사건의 피의자였던 옥구군 미면의 신관리 인민위원장 조억연(調億衍)이 9월 28일 검거됨으로서 확인되었다는 것이다.
한편, 사건 가해자 중 하나인 조억연은 대검찰청이 발행한 『좌익사건실록』 11권에서도 확인되는데, 여기에 수록된 판결문은 1952년 전주지방법원 군산지방법원의 것이었다. 이에 따르면, 당시 33살의 조억연은 1950년 7월 9일 신관리당 세포위원장이 되었으며, 8월 16일에는 면민 총선거를 통해 신관리 인민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고 한다.
리 인민위원장으로 활동하던 중 9월 27일 이름이 확인되지 않는 북한정치공작대원인 옥구군당 조직부장으로부터 ①유엔군이 주둔 후 적 진영에 가담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할 자(같은 내용에 대해 국방부 자료에는 ‘활동한 자’로 소개하고 있다)를 학살할 것, ②인민군의 후퇴는 일시적 문제이니 재차 반격하여 올 것은 확실하다, ③학살방법에 대하여서는 구체적인 방법과 조직적으로 행할 것 등 9개 항의 지령을 받았다. 이 재판의 선고가 있던 1952년 4월 2일 조억연 등 24명은 소재불명으로 기소중지되었다.
위 두 자료를 정리하자면, 전국에서 인민군에 의해 저질러진 사건의 학살명령이 1950년 9월 20일 김책에 의해 내려졌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은 옥구군 미면의 신관리 인민위원장 조억연의 진술이다. 그런데 조억연은 1950년 9월 28일 서울 영등포에서 연행되었고, 판결이 내려지던 1952년 4월 2일까지 소재불명이었다.
이는 체포된 조억연이 진술한 후 부역자로 임의처형 당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경우는 이미 다른 지역의 사례에서 쉽게 볼 수 있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서천 적대세력 사건 판결문에 등장하는 가해자 대부분은 부역혐의사건으로 이미 임의 처형당한 사건을 들 수 있다. 실제 옥구군 미면의 주민들이 인민군 측에 의해 희생된 사건은 9월 27일부터 29일 사이에 발생했는데, 위 조억연이 서울에서 체포된 날은 9월 28일이었으므로 이 사건의 가해자가 조억연이라는 주장에 모순이 있다. 결국 조억연을 포함해 위 소재불명의 24명은 재판을 받기도 전에 이미 학살당했을 수 있고, 이럴 경우 위 조억연의 진술은 고문에 의한 임의진술에 근거한 것이므로 인정하기 어렵다.
<부역혐의 피해>
군산지역에서는 수복 후 주민들이 군산경찰서에 연행되어 고문을 당한 후 사망한 사건이 있었다. 채판묵(1남), 채장묵(2남), 채기묵(4남)은 형제인데 채기묵은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형 채판묵과 함께 군산경찰서 유치장에 구금 중 후퇴하던 경찰이 유치장 밖에서 총을 쏘아 사망하였다. 국민보도연맹사건으로 희생되었던 것이다.
이날 채판묵은 시신 속에서 숨어 있다가 살아나왔고 채장묵은 경찰의 출두명령이 나왔을 때 부재중이어서 출두하지 않아 생존했다. 생환한 채판묵이 채기묵의 시신을 집으로 싣고 왔고 얼마 뒤 전쟁이 발발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인민군 점령기 채판묵, 채장묵은 부역을 하였고 이후 수복후 체포를 피해 숨어 다녀야 했다. 수복 뒤 경찰은 입산하여 활동하였던 채장묵을 잡기 위하여 채장묵의 어머니 이동자, 형 채판묵 뿐만 아니라 채판묵의 처, 채장묵의 처 등 전 가족을 연행하여 고문하였다. 채장묵은 산에서 피신하다가 경찰에게 잡혀가던 중 스스로 물속에 빠져 죽었다. 채장묵의 어머니 이동자는 1951년 3월 14일 석방된 후 바로 사망하였고 채판묵은 1951년 3월 15일 군산경찰서에서 사망하였다.
군산경찰서 외에 각 지서에서도 부역 주민을 연행해 살해했다. 진실화해위원회 조사에서 밝혀진 사건은 회현지서에 의한 것이다. 회현지서는 수복 후 5일 만에 부역자 수백 명을 잡아들였다. 1950년 10월 12일 이들 중 원우리 고신곤 등 5명이 금강리 해변에서 살해되었으며, 10월 13일 고사리 김용길 등 10여 명이 회현면 금광리 신기촌 앞 만경강 개펄에서 살해당했다. 13일에 있었던 사건은 회현면 치안대장이었던 김재구가 목격했다. 당시 군 법무관이었던 두창국 대위의 명령에 의해 감금된 주민 중 10여 명이 끌려 나가 군인들에게 총살당한 것이었다.
이상 군산지역에서 집단희생당한 사건을 종합하면 다음 <표>와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