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에 있는 영릉은 우리나라 역사상 최고의 성군으로 추앙받고 있는 조선 4대 임금 세종대왕의 무덤이다. 왕비 소헌왕후와 함께 묻혀 있는 세종대왕의 능은 여주시내에서 3.5km 떨어진 넓은 평야지대에 자리 잡고 있는데, 이곳은 한반도에서 몇 안 되는 명당터로 이름이 높고, 조선왕조의 능제를 가장 잘 나타낸 능의 하나로 꼽힌다. 풍수지리설에 따라 주산인 칭성산을 뒤로 하고, 중허리에 봉분을 이룩하며, 그 좌우측에는 청룡, 백호를 이루고 남쪽으로는 멀리 안산인 북성산을 바라보고 있다.
원래는 서울 서초구 내곡동에 있었으나 예종 원년 (1469년)에 더 좋은 명당을 찾아 지금의 여주로 옮겨왔고, 1975년에 성역으로 지정되면서 보기 좋게 정비되었다. 넓은 잔디밭과 수백 년 된 울창한 노송림이 아름답게 꾸며졌고, 세종대왕릉과 효종대왕릉을 잇는 길은 산책로로 조성되어 있다.
세종대왕릉에 들어서면 먼저 왼쪽으로 세종전이 나타난다. 세종대왕의 업적을 전시해둔 곳이다. 특히 세종전 앞뜰에는 측우기와 자격루 등이 당시의 모습 그대로 재현되어 있기도 하다.
정문을 들어서면 먼저 왼쪽에 세종대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1977년 건립한 유물전시관인 세종전이 나온다. 세종전 앞 야외유물전시장에는 해시계, 천상열차분야지도, 자격루, 관천대, 측우기, 혼천의, 간의 등 15점의 각종 복원유물들이 전시되어있어 세종시대의 과학기구들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하였다.
또 세종전에는 <용비어천가>, <훈민정음 언해> 등 세종 때에 간행된 책들과 세종대왕의 어진과 당시에 발명하여 사용한 과학기구, 악기류 등이 함께 진열되어 학술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세종전 맞은편에는 세종대왕 동상과 재실이 있다.
훈민문을 지나 능역의 입구에는 홍살문이 있고, 잔디밭사이로 난 시멘트 길을 따라 들어가면 능 밑에는 제사를 지내는 정자각과 제사 때 음식을 준비하던 수라간, 능을 지키는 관리가 살던 수복방이 있고, 정자각 동편에 능비와 비를 세웠다.
봉분 둘레에는 12면으로 꾸민 돌난간을 돌렸으며, 난간석을 바치고 있는 동자석주에 한자로 12지를 새겨 방위를 표시하였으며, 앞에는 합장릉임을 알 수 있는 2개의 혼유석과 능의 정중앙에 팔각의 장명등을 놓고, 좌우에 석호·석양·석마·문인석·무인석·망주석을 세웠다. 봉분 능침 주변에 석양(石羊)과 석호(石虎)를 서로 엇바꾸어 좌우로 각각 두 쌍씩 여덟 마리를 밖을 향하여 능을 수호하는 형상으로 배치하고, 봉분의 동·서·북 3방향에 곡담을 둘렀다. 봉분앞 한층 낮은 단에 문인석 2쌍과 무인석 2쌍을 세우고 문·무인석 뒤에는 각각 석마(石馬)를 배치하였다.
세종대왕은 조선 제4대왕으로 32년간(1418~1450) 54세로 승하하실 때까지 재위하였다. 태조6년(1397년) 조선조 제3대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태종8년(1408년) 충녕군에 봉해지고, 같은 해 2월 우부대언 심온의 딸(소헌왕후 심씨)과 결혼하였다. 태종12년(1412년)에 충녕대군에 진봉되고 스물두 살 되던 태종18년(1418년) 양녕대군이 폐세자 됨에 따라 왕세자로 책봉되어 그 해 22세의 나이에 조선조 제4대 임금으로 등극하였다. 세종은 여러 왕자 중에서 가장 총민하고 현명하여 맏형인 양녕대군을 두고 왕위에 오르게 된 것이다. 왕위에 오른 대왕은 우리나라 역대 군왕 가운데 가장 찬란한 업적을 남겼다.
1. 훈민정음(한글) 창제
당시 한문을 무조건 숭상하던 많은 학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세계적으로 가장 우수한 독창적이며 과학적인 한글을 창제하여, 3년 동안 다듬고 실제로 써본 연후에 1446년 9월 이를 반포함으로써 주체적인 민족 문화의 기틀을 확립하였다. 훈민정음이란 백성을 가르치는 올바른 소리란 뜻이다. 조선 제4대 임금인 세종은 그때까지 사용되던 한자가 우리말과 구조가 다른 중국어의 표기를 위한 문자체계이기 때문에 많은 백성들이 배워 사용할 수 없는 사실을 안타까워하여 세종 25년(1443)에 우리말의 표기에 적합한 문자체계를 완성하고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 명명하였다.
글자의 창제 정신은 훈민정음 서문에 잘 나타나 있다. 나라의 체면상 문자가 있어야 한다는 자주정신과, 어리석은 백성으로 하여금 문자생활을 하게 한다는 애민정신, 쉽게 배워 일상생활에 사용하게 하겠다는 실용정신의 3대 정신이 그것이다. 이러한 창제 정신은 우리 민족으로 하여금 자부심을 가지게 한다. 세계적으로 이러한 대의명분을 내세워 자국의 문자를 창제한 예를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세종 28년(1446)에 정인지 등이 세종의 명을 받아 설명한 한글해설서를 전권 33장 1책으로 발간하였는데 책의 이름을 훈민정음이라고 하였다. 해례가 붙어 있어서 <훈민정음 해례본> 또는 <훈민정음 원본>이라고도 한다. 현존본은 1940년경 경북 안동 어느 고가에서 발견된 것으로서 국내에서 유일한 귀중본이다. 세종은 새로 만든 새문자에 대하여 창제의 목적을 밝힌 서문과 새문자 하나 하나에 대하여 개괄적으로 예시하고 설명한 글을 짓고, 집현전의 학자들에게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용례를 짓도록하여 책을 만들고 이것을 백성들에게 널리 공표하였다.
이 책에는 <세종어제 서문(序文)>과 훈민정음 음가 및 운용법을 밝힌 <예의편>이 제자해, 초성해, 중성해, 종성해,합자해, 용자례 순으로 기술되어 있다. 세계의 많은 민족들이 자기의 언어를 표기하기 위하여 문자를 만들려고 노력하였으나, 한글과 같이 일정한 시기에 특정한 사람이 이미 존재한 문자에서 직접으로 영향받지 않고 독창적으로 새 문자를 만들고 한 국가의 공용문자로 사용하게 한 일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일이다. 더욱이 새 문자에 대한 해설을 책으로 출판한 일은 유례가 없었던 역사적인 일이었다. 특히, 이 책에서 문자를 만든 원리와 문자 사용에 대한 설명에 나타나는 이론의 정연함과 엄정함에 대해서는 세계의 언어학자들이 매우 높게 평가하고 있다.
이 책에 실린 정인지의 서문이 1446년 음력 9월 상순에 쓰여졌다고 되어 있어 늦어도 음력 9월 10일에 출판된 것으로 추정된다. 정부에서 이 책의 출판일을 기념하여 한글날로 제정한 것이나 유네스코에서 문맹퇴치에 공헌한 사람들에게 세종대왕상을 주는 것은 이 책의 문화사적 의의를 나타낸다. 훈민정음은 국보 제7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1997년 10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되었다.
훈민정음, 곧 한글은 28자로 된 알파벳으로, 오늘날에는 24자만 사용되는데, 한국어를 완벽하게 표기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배우기와 사용하기에도 편리한 문자체계이다. 문자체계 자체로도 독창적이며 과학적이라고 인정되고 있어 그 의의가 크다 할 것이다.
이 책은 정인지, 신숙주, 성삼문, 최항, 박팽년, 강희안, 이개, 이선로 등 집현전의 8학자가 집필한 것으로 훈민정음의 내용을 살펴보면 두 부분으로 되었는데 제 1부는 세종이 지은 것으로 책의 본문에 해당된다. 본문의 내용은 새문자를 창제한 목적을 천명한 훈민정음 서문과, 새문자 28자를 초성 11자로 나누어 차례로 예시하고 설명한 다음에 이들을 결합하여 우리말을 표기하는 방법으로 제시한 예구로 되어 있다.
제2부는 세종의 명령에 따라 젊은 학자들이 지은 본문에 대한 주석이다. 그것은 새문자의 제작원리를 설명한 제자해, 음절 두음을 표기하는 자음 17자를 설명한 초성해, 모음 11자를 설명한 중성해, 음절말지음을 설명한 종성해, 초성·중성·종성이 결합하여 음절을 표기하는 방법을 설명한 합자해, 새문자로서 단어를 표기한 예를 보인 용자례의 6장으로 나뉜다. 끝에는 정인지의 훈민정음해례본 서문이 붙어있다.
훈민정음은 전체 분량이 본문 4장, 주석과 정인지의 서문 29장으로 된 33장에 지나지 않으나, 이론 전체가 정연하고 서술이 과학적인 내용의 책이다. 문자를 만든 원리와 문자 사용에 대한 설명에 나타나는 이론은 현대의 세계 언어학자들이 높이 평가하고 있다.
훈민정음을 서지학적으로 살펴보면 본체가 33장, 표지가 2장으로 된 책인데, 세로 32.3cm,가로 20cm의 크기로 되어 있다. 장정은 전통적인 방식에 따라 5침안으로 된 선장본이다. 책의 크기가 당시 중국과 일본의 책들보다 크다. 이 책은 유려한 글씨로 정교하게 새긴 목판으로 인쇄되어 있다. 사용된 종이나 먹도 우수하여 한국의 15세기 출판문화의 우수함이 드러나 있다. 책장은 각기 2면이 인쇄되어 있는데, 인쇄된 1면의 크기는 세로 23.3cm, 가로 16.5cm이다. 이 책에는 구두점과 성조 표시의 구너점이 사용되어 있다. 세종이 창제한 새 글자는 오늘날까지 자형이 조금씩 변화되어 왔으나 이 책의 자형이 가장 초기의 모습이다.
2. 학문의 창달
집현전을 부활하여 우수한 젊은 학자들로 하여금 학문을 강론하고 옛 제도를 연구하여 많은 서적을 편찬토록 하였다. 특히 개량활자를 만들어 월인천강지곡· 용비어천가·농사직설·고려사·삼강행실도·팔도지리지·석보상절·의방유취 등 귀중한 책을 간행하고, 경제육전을 반포하여 농업을 크게 장려하여 전제(田(전)제)와 세제를 정비하는 등 문물제도를 크게 개건하였다.
3. 과학의 진흥
농업을 진흥하려는 데 뜻을 두고 한 평생을 천문, 지리 등 과학기술을 연구 보급하는데 전력을 쏟았다. 장영실, 이천 등 젊은 과학자들을 격려하여 천문관측기구인 대·소간의, 일성정시의, 혼천의, 시간을 재는 앙부일구(해시계)와 자격루(물시계) 등을 만들었다. 또한 측우기를 제작하여 서울과 지방에서 강우량을 측정토록 했으며 수표를 만들어 하천의 수위를 재게 하고 외국의 역법(曆法)을 참작하여 역서와 천문도를 제작했다.
4. 외치와 국방
대왕은 역대로 신사상과 신기술의 통로였던 중국의 명나라와의 교류정책을 적극 펼치면서 한편으론 왜구를 응징하여 이종무로 하여금 대마도를 정벌하는 한편 3포를 개항하여 일본과의 선진관계를 도모하였다. 북방으로는 최윤덕으로 하여금 평안도의 야인을 평정케 하여 4군을 설치하고 김종서로 하여금 함경도에 6진을 개척하여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하는 우리나라의 국경을 확정시키는 등 국력을 강하하였다.
5. 아악의 부흥과 향악의 창작
고려시대부터 전해오던 음악과 중국음악을 정리하여 아악의 부흥과 향악의 창작을 도모하였다. 박연 등으로 하여금 각종 악기를 만들게 하고 특히 편경과 편종을 새로 제작하였으며, 악곡·악보 등을 종합 정리하여 바로잡아 아악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그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문화재청은 대왕의 탄신일을 맞아 매년 양력 5월 15일(오전 10시 30분) 세종대왕의 유덕과 위업을 기리는 숭모제전 행사를 국가행사로 개최하고 있으며, 문화예술계를 비롯한 각계 주요인사, 세종대왕위업 선양단체, 일반 관람객이 참석하여 세종대왕릉 정자각에서 봉행한다. 이 때 탄신 다례행제에는 대왕이 친히 지으신 봉래의를 국립국악원 연주단 및 무용단에 의해 공연되며, 해마다 세종시대의 과학유물을 복원하는 제막식을 거행한다.
효종대왕릉 영릉(寧陵)
세종대왕릉에서 나와 왼쪽으로 돌아나가면 17대 효종대왕이 언덕하나를 사이에 두고 묻혀 있다. 효종대왕릉 역시 영릉이라 불리는데, 다만 한자가 다르다. 왼편 세종과 소헌왕후의 능을 ‘영릉(英陵·)’, 오른쪽 효종과 영선왕후의 능을 ‘영릉(寧陵)’으로 쓴다. 이 두 능은 사적 제 195호로 지정되어 있다.
* 가는 길 : 영릉으로 가려면 영동고속도로를 이용하는 것이 편리하다. 영동고속도로 여주 나들목을 나오자마자 만나는 37번 국도에서 여주 시내 방향으로 우회전하여 5분쯤 달리면 버스터미널사거리를 만난다. 이 사거리에서 이천 방향으로 좌회전하여 계속 직진하면 큰 사거리를 하나 지나 다시 약간 엇갈린 사거리를 만난다. 이 엇갈린 사거리에서 좌회전하자마자 다시 우회전해야 한다. 우회전하여 365번 지방도로를 잠시 달리면 길 왼쪽으로 다리가 하나 있는데 이 다리를 건너 조금만 들어가면 영릉이다. 이정표가 잘 되어 있어 찾기 어렵지 않다. 영동고속도로(여주 I·C)에서 차량으로 10분 거리.
* 맛집
1. 쌀밥집 ‘산에산에’ - 여주 쌀밥 허영만 작 ‘식객’의 주인공 성찬은 “밥상의 주인은 밥”이라고 말했다. 맞는 말이다. 찬이 아무리 많아도 밥이 맛 없으면 금방 수저를 놓게 된다. 여주는 일교차가 다른 지역보다 커 당도와 전분이 높은 쌀이 생산된다. 임금님께 진상됐던 역사적인 가치를 지난 쌀로도 유명하다. 서울 원주간 영동고속도로에서 여주톨게이트를 나오면 카페처럼 분위기 있는 쌀밥집 ‘산에산에’(031-883-4646)가 있다. 셀 수 없을 만큼 끝없이 상 위로 펼쳐지는 맛깔스러운 반찬과 꿀밤 같은 ‘여주 밤고구마’가 들어 있는 솥밥, 거기에 계속해서 음식이 더해지는 주인의 인심까지 1인분 1만2천원이 아깝지 않다.
2. 천서리 막국수집 - “천서리막국수”와 “홍원막국수” - 막국수 하면 춘천을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여주 막국수 맛을 본 사람은 여주를 먼저 떠올리게 된다. 여주의 중심을 가로지르는 남한강 옆 대신면 천서리에 위치하고 있다. 여주에서는 해마다 9월이면 ‘천서리 막국수축제’가 열린다. ‘천서리막국수’(031-883-9799)는 각 주요 일간지에 소개될 만큼 그 특유의 맛으로 유명한 여주맛집 대표선수다. 그러나 이보다 더 고객들을 끄는 이유는 다름 아닌 주인장의 맛에 대한 고집과 후덕한 인심 때문이다. 또 할아버지, 아버지 그리고 이제는 아들이 그 뒤를 잇는 홍원막국수(031-882-8259)는 3대를 이어온 전통만큼이나 손맛이 살아 있다. 가격은 막국수 5천원, 편육 8천원.
여주에 있는 영릉은 우리나라 역사상 최고의 성군으로 추앙받고 있는 조선 4대 임금 세종대왕의 무덤이다. 왕비 소헌왕후와 함께 묻혀 있는 세종대왕의 능은 여주시내에서 3.5km 떨어진 넓은 평야지대에 자리 잡고 있는데, 이곳은 한반도에서 몇 안 되는 명당터로 이름이 높고, 조선왕조의 능제를 가장 잘 나타낸 능의 하나로 꼽힌다. 풍수지리설에 따라 주산인 칭성산을 뒤로 하고, 중허리에 봉분을 이룩하며, 그 좌우측에는 청룡, 백호를 이루고 남쪽으로는 멀리 안산인 북성산을 바라보고 있다.
원래는 서울 서초구 내곡동에 있었으나 예종 원년 (1469년)에 더 좋은 명당을 찾아 지금의 여주로 옮겨왔고, 1975년에 성역으로 지정되면서 보기 좋게 정비되었다. 넓은 잔디밭과 수백 년 된 울창한 노송림이 아름답게 꾸며졌고, 세종대왕릉과 효종대왕릉을 잇는 길은 산책로로 조성되어 있다.
세종대왕릉에 들어서면 먼저 왼쪽으로 세종전이 나타난다. 세종대왕의 업적을 전시해둔 곳이다. 특히 세종전 앞뜰에는 측우기와 자격루 등이 당시의 모습 그대로 재현되어 있기도 하다.
정문을 들어서면 먼저 왼쪽에 세종대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1977년 건립한 유물전시관인 세종전이 나온다. 세종전 앞 야외유물전시장에는 해시계, 천상열차분야지도, 자격루, 관천대, 측우기, 혼천의, 간의 등 15점의 각종 복원유물들이 전시되어있어 세종시대의 과학기구들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하였다.
또 세종전에는 <용비어천가>, <훈민정음 언해> 등 세종 때에 간행된 책들과 세종대왕의 어진과 당시에 발명하여 사용한 과학기구, 악기류 등이 함께 진열되어 학술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세종전 맞은편에는 세종대왕 동상과 재실이 있다.
훈민문을 지나 능역의 입구에는 홍살문이 있고, 잔디밭사이로 난 시멘트 길을 따라 들어가면 능 밑에는 제사를 지내는 정자각과 제사 때 음식을 준비하던 수라간, 능을 지키는 관리가 살던 수복방이 있고, 정자각 동편에 능비와 비를 세웠다.
봉분 둘레에는 12면으로 꾸민 돌난간을 돌렸으며, 난간석을 바치고 있는 동자석주에 한자로 12지를 새겨 방위를 표시하였으며, 앞에는 합장릉임을 알 수 있는 2개의 혼유석과 능의 정중앙에 팔각의 장명등을 놓고, 좌우에 석호·석양·석마·문인석·무인석·망주석을 세웠다. 봉분 능침 주변에 석양(石羊)과 석호(石虎)를 서로 엇바꾸어 좌우로 각각 두 쌍씩 여덟 마리를 밖을 향하여 능을 수호하는 형상으로 배치하고, 봉분의 동·서·북 3방향에 곡담을 둘렀다. 봉분앞 한층 낮은 단에 문인석 2쌍과 무인석 2쌍을 세우고 문·무인석 뒤에는 각각 석마(石馬)를 배치하였다.
세종대왕은 조선 제4대왕으로 32년간(1418~1450) 54세로 승하하실 때까지 재위하였다. 태조6년(1397년) 조선조 제3대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태종8년(1408년) 충녕군에 봉해지고, 같은 해 2월 우부대언 심온의 딸(소헌왕후 심씨)과 결혼하였다. 태종12년(1412년)에 충녕대군에 진봉되고 스물두 살 되던 태종18년(1418년) 양녕대군이 폐세자 됨에 따라 왕세자로 책봉되어 그 해 22세의 나이에 조선조 제4대 임금으로 등극하였다. 세종은 여러 왕자 중에서 가장 총민하고 현명하여 맏형인 양녕대군을 두고 왕위에 오르게 된 것이다. 왕위에 오른 대왕은 우리나라 역대 군왕 가운데 가장 찬란한 업적을 남겼다.
1. 훈민정음(한글) 창제
당시 한문을 무조건 숭상하던 많은 학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세계적으로 가장 우수한 독창적이며 과학적인 한글을 창제하여, 3년 동안 다듬고 실제로 써본 연후에 1446년 9월 이를 반포함으로써 주체적인 민족 문화의 기틀을 확립하였다. 훈민정음이란 백성을 가르치는 올바른 소리란 뜻이다. 조선 제4대 임금인 세종은 그때까지 사용되던 한자가 우리말과 구조가 다른 중국어의 표기를 위한 문자체계이기 때문에 많은 백성들이 배워 사용할 수 없는 사실을 안타까워하여 세종 25년(1443)에 우리말의 표기에 적합한 문자체계를 완성하고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 명명하였다.
글자의 창제 정신은 훈민정음 서문에 잘 나타나 있다. 나라의 체면상 문자가 있어야 한다는 자주정신과, 어리석은 백성으로 하여금 문자생활을 하게 한다는 애민정신, 쉽게 배워 일상생활에 사용하게 하겠다는 실용정신의 3대 정신이 그것이다. 이러한 창제 정신은 우리 민족으로 하여금 자부심을 가지게 한다. 세계적으로 이러한 대의명분을 내세워 자국의 문자를 창제한 예를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세종 28년(1446)에 정인지 등이 세종의 명을 받아 설명한 한글해설서를 전권 33장 1책으로 발간하였는데 책의 이름을 훈민정음이라고 하였다. 해례가 붙어 있어서 <훈민정음 해례본> 또는 <훈민정음 원본>이라고도 한다. 현존본은 1940년경 경북 안동 어느 고가에서 발견된 것으로서 국내에서 유일한 귀중본이다. 세종은 새로 만든 새문자에 대하여 창제의 목적을 밝힌 서문과 새문자 하나 하나에 대하여 개괄적으로 예시하고 설명한 글을 짓고, 집현전의 학자들에게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용례를 짓도록하여 책을 만들고 이것을 백성들에게 널리 공표하였다.
이 책에는 <세종어제 서문(序文)>과 훈민정음 음가 및 운용법을 밝힌 <예의편>이 제자해, 초성해, 중성해, 종성해,합자해, 용자례 순으로 기술되어 있다. 세계의 많은 민족들이 자기의 언어를 표기하기 위하여 문자를 만들려고 노력하였으나, 한글과 같이 일정한 시기에 특정한 사람이 이미 존재한 문자에서 직접으로 영향받지 않고 독창적으로 새 문자를 만들고 한 국가의 공용문자로 사용하게 한 일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일이다. 더욱이 새 문자에 대한 해설을 책으로 출판한 일은 유례가 없었던 역사적인 일이었다. 특히, 이 책에서 문자를 만든 원리와 문자 사용에 대한 설명에 나타나는 이론의 정연함과 엄정함에 대해서는 세계의 언어학자들이 매우 높게 평가하고 있다.
이 책에 실린 정인지의 서문이 1446년 음력 9월 상순에 쓰여졌다고 되어 있어 늦어도 음력 9월 10일에 출판된 것으로 추정된다. 정부에서 이 책의 출판일을 기념하여 한글날로 제정한 것이나 유네스코에서 문맹퇴치에 공헌한 사람들에게 세종대왕상을 주는 것은 이 책의 문화사적 의의를 나타낸다. 훈민정음은 국보 제7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1997년 10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되었다.
훈민정음, 곧 한글은 28자로 된 알파벳으로, 오늘날에는 24자만 사용되는데, 한국어를 완벽하게 표기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배우기와 사용하기에도 편리한 문자체계이다. 문자체계 자체로도 독창적이며 과학적이라고 인정되고 있어 그 의의가 크다 할 것이다.
이 책은 정인지, 신숙주, 성삼문, 최항, 박팽년, 강희안, 이개, 이선로 등 집현전의 8학자가 집필한 것으로 훈민정음의 내용을 살펴보면 두 부분으로 되었는데 제 1부는 세종이 지은 것으로 책의 본문에 해당된다. 본문의 내용은 새문자를 창제한 목적을 천명한 훈민정음 서문과, 새문자 28자를 초성 11자로 나누어 차례로 예시하고 설명한 다음에 이들을 결합하여 우리말을 표기하는 방법으로 제시한 예구로 되어 있다.
제2부는 세종의 명령에 따라 젊은 학자들이 지은 본문에 대한 주석이다. 그것은 새문자의 제작원리를 설명한 제자해, 음절 두음을 표기하는 자음 17자를 설명한 초성해, 모음 11자를 설명한 중성해, 음절말지음을 설명한 종성해, 초성·중성·종성이 결합하여 음절을 표기하는 방법을 설명한 합자해, 새문자로서 단어를 표기한 예를 보인 용자례의 6장으로 나뉜다. 끝에는 정인지의 훈민정음해례본 서문이 붙어있다.
훈민정음은 전체 분량이 본문 4장, 주석과 정인지의 서문 29장으로 된 33장에 지나지 않으나, 이론 전체가 정연하고 서술이 과학적인 내용의 책이다. 문자를 만든 원리와 문자 사용에 대한 설명에 나타나는 이론은 현대의 세계 언어학자들이 높이 평가하고 있다.
훈민정음을 서지학적으로 살펴보면 본체가 33장, 표지가 2장으로 된 책인데, 세로 32.3cm,가로 20cm의 크기로 되어 있다. 장정은 전통적인 방식에 따라 5침안으로 된 선장본이다. 책의 크기가 당시 중국과 일본의 책들보다 크다. 이 책은 유려한 글씨로 정교하게 새긴 목판으로 인쇄되어 있다. 사용된 종이나 먹도 우수하여 한국의 15세기 출판문화의 우수함이 드러나 있다. 책장은 각기 2면이 인쇄되어 있는데, 인쇄된 1면의 크기는 세로 23.3cm, 가로 16.5cm이다. 이 책에는 구두점과 성조 표시의 구너점이 사용되어 있다. 세종이 창제한 새 글자는 오늘날까지 자형이 조금씩 변화되어 왔으나 이 책의 자형이 가장 초기의 모습이다.
2. 학문의 창달
집현전을 부활하여 우수한 젊은 학자들로 하여금 학문을 강론하고 옛 제도를 연구하여 많은 서적을 편찬토록 하였다. 특히 개량활자를 만들어 월인천강지곡· 용비어천가·농사직설·고려사·삼강행실도·팔도지리지·석보상절·의방유취 등 귀중한 책을 간행하고, 경제육전을 반포하여 농업을 크게 장려하여 전제(田(전)제)와 세제를 정비하는 등 문물제도를 크게 개건하였다.
3. 과학의 진흥
농업을 진흥하려는 데 뜻을 두고 한 평생을 천문, 지리 등 과학기술을 연구 보급하는데 전력을 쏟았다. 장영실, 이천 등 젊은 과학자들을 격려하여 천문관측기구인 대·소간의, 일성정시의, 혼천의, 시간을 재는 앙부일구(해시계)와 자격루(물시계) 등을 만들었다. 또한 측우기를 제작하여 서울과 지방에서 강우량을 측정토록 했으며 수표를 만들어 하천의 수위를 재게 하고 외국의 역법(曆法)을 참작하여 역서와 천문도를 제작했다.
4. 외치와 국방
대왕은 역대로 신사상과 신기술의 통로였던 중국의 명나라와의 교류정책을 적극 펼치면서 한편으론 왜구를 응징하여 이종무로 하여금 대마도를 정벌하는 한편 3포를 개항하여 일본과의 선진관계를 도모하였다. 북방으로는 최윤덕으로 하여금 평안도의 야인을 평정케 하여 4군을 설치하고 김종서로 하여금 함경도에 6진을 개척하여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하는 우리나라의 국경을 확정시키는 등 국력을 강하하였다.
5. 아악의 부흥과 향악의 창작
고려시대부터 전해오던 음악과 중국음악을 정리하여 아악의 부흥과 향악의 창작을 도모하였다. 박연 등으로 하여금 각종 악기를 만들게 하고 특히 편경과 편종을 새로 제작하였으며, 악곡·악보 등을 종합 정리하여 바로잡아 아악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그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문화재청은 대왕의 탄신일을 맞아 매년 양력 5월 15일(오전 10시 30분) 세종대왕의 유덕과 위업을 기리는 숭모제전 행사를 국가행사로 개최하고 있으며, 문화예술계를 비롯한 각계 주요인사, 세종대왕위업 선양단체, 일반 관람객이 참석하여 세종대왕릉 정자각에서 봉행한다. 이 때 탄신 다례행제에는 대왕이 친히 지으신 봉래의를 국립국악원 연주단 및 무용단에 의해 공연되며, 해마다 세종시대의 과학유물을 복원하는 제막식을 거행한다.
효종대왕릉 영릉(寧陵)
세종대왕릉에서 나와 왼쪽으로 돌아나가면 17대 효종대왕이 언덕하나를 사이에 두고 묻혀 있다. 효종대왕릉 역시 영릉이라 불리는데, 다만 한자가 다르다. 왼편 세종과 소헌왕후의 능을 ‘영릉(英陵·)’, 오른쪽 효종과 영선왕후의 능을 ‘영릉(寧陵)’으로 쓴다. 이 두 능은 사적 제 195호로 지정되어 있다.
* 가는 길 : 영릉으로 가려면 영동고속도로를 이용하는 것이 편리하다. 영동고속도로 여주 나들목을 나오자마자 만나는 37번 국도에서 여주 시내 방향으로 우회전하여 5분쯤 달리면 버스터미널사거리를 만난다. 이 사거리에서 이천 방향으로 좌회전하여 계속 직진하면 큰 사거리를 하나 지나 다시 약간 엇갈린 사거리를 만난다. 이 엇갈린 사거리에서 좌회전하자마자 다시 우회전해야 한다. 우회전하여 365번 지방도로를 잠시 달리면 길 왼쪽으로 다리가 하나 있는데 이 다리를 건너 조금만 들어가면 영릉이다. 이정표가 잘 되어 있어 찾기 어렵지 않다. 영동고속도로(여주 I·C)에서 차량으로 10분 거리.
* 맛집
1. 쌀밥집 ‘산에산에’ - 여주 쌀밥 허영만 작 ‘식객’의 주인공 성찬은 “밥상의 주인은 밥”이라고 말했다. 맞는 말이다. 찬이 아무리 많아도 밥이 맛 없으면 금방 수저를 놓게 된다. 여주는 일교차가 다른 지역보다 커 당도와 전분이 높은 쌀이 생산된다. 임금님께 진상됐던 역사적인 가치를 지난 쌀로도 유명하다. 서울 원주간 영동고속도로에서 여주톨게이트를 나오면 카페처럼 분위기 있는 쌀밥집 ‘산에산에’(031-883-4646)가 있다. 셀 수 없을 만큼 끝없이 상 위로 펼쳐지는 맛깔스러운 반찬과 꿀밤 같은 ‘여주 밤고구마’가 들어 있는 솥밥, 거기에 계속해서 음식이 더해지는 주인의 인심까지 1인분 1만2천원이 아깝지 않다.
2. 천서리 막국수집 - “천서리막국수”와 “홍원막국수” - 막국수 하면 춘천을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여주 막국수 맛을 본 사람은 여주를 먼저 떠올리게 된다. 여주의 중심을 가로지르는 남한강 옆 대신면 천서리에 위치하고 있다. 여주에서는 해마다 9월이면 ‘천서리 막국수축제’가 열린다. ‘천서리막국수’(031-883-9799)는 각 주요 일간지에 소개될 만큼 그 특유의 맛으로 유명한 여주맛집 대표선수다. 그러나 이보다 더 고객들을 끄는 이유는 다름 아닌 주인장의 맛에 대한 고집과 후덕한 인심 때문이다. 또 할아버지, 아버지 그리고 이제는 아들이 그 뒤를 잇는 홍원막국수(031-882-8259)는 3대를 이어온 전통만큼이나 손맛이 살아 있다. 가격은 막국수 5천원, 편육 8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