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피리
겨우내 벼르고 기다리던 남도 여행길을 떠나기로 하였다. 매화와 산수유 철은 지났지만 새 봄기운을 맞으러 이번에도 역시 동생 및 친구 부부가 동행한다. 그동안 여러 차례 들린 곳이지만 아직도 낯이 설어 처음으로 가게 된 곳이 많다. 더구나 남도 해변을 따라 즐비한 섬 지방은 그다지 많이 가보지 않았다. 찾은 곳은 한산도와 거제도 및 욕지도, 진도와 완도 그리고 신지도 정도였다. 그토록 유명한 흑산도나 홍도에는 아직 발을 담그지 못하고 있다.
최근 들어 해마다 한차례 이상은 남도 여행을 하고 있다. 돌이켜보니 중1 때 맨 처음에 갔던 곳이 웅변대회 참가 차 간 구례였다. 완행열차를 타고 섬진강 굽이굽이를 따라 펼쳐진 풍광에 넋을 잃었는데 멀리 말로만 듣던 지리산 영봉을 보면서 언젠가는 정상에 오르겠다는 다짐을 하였다.
제대로 본 남국의 풍경은 수학여행을 갔던 제주도였다. 목포에서 뱃길로 가면서 본 바다와 섬이 한데 어울려 목선을 좇아 갈매기 떼가 연출하는 모습은 마치 한 폭의 수묵화를 보는 느낌이었다. 이후에 훈련 차 머물던 화순과 지리산에서 여름철 땡볕에 지친 몸으로 청춘을 보냈던 추억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거제도에서 한산도와 광양만과 해남의 ‘대흥사’를 지나 진도까지 갔던 답사 여행도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유달산과 월출산에 오르고, 산수유와 매화를 찾아 광양과 순천만, 여수의 오동도와 돌산도 그리고 강진과 해남 및 무등산 일대의 사찰과 정자와 원림을 찾아 유람하던 시간은 마치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다.
그 어느 곳보다 인상에 남은 장소는 「다산(茶山)」과 ‘백련사’의 「혜장(惠藏)」선사가 유교와 불교를 논하며 거닐던 산책길이다. 동시에 「초의(草衣)」와 「추사(秋史)」가 ‘초의차’를 마시며 담론하던 ‘대흥사’의 「일지암(一枝庵)」도 빼놓을 수 없는 명승지이다. 홍매화가 만발하고 각 종 매화와 보호수 그리고 오랜 건물이 일품이던 ‘선암사’와 ‘송광사’도 아름다운 곳이다. 이에 더하여 달마산 아래 자리한 ‘미황사’의 풍광과 능선 끝자락에 위치한 「도솔암(兜率庵)」의 비경은 천혜의 장관이었다. 바위와 저 멀리 남도의 바다가 연출하는 모습은 마치 금강산에서 동해를 바라보는 듯하였다.
남도로 가는 차창에는 봄기운이 물씬 풍길 것이다. 무엇보다 제법 푸릇푸릇한 보리가 자라고 있는 들판을 바라보면서 옛 생각을 할 것이다. 이 때쯤이면 겨우내 양식은 이미 떨어지고 저 보리가 자라 수확을 할 때 까지는 끼니를 걱정해야하는 ‘보릿고개’ 길이었다. 한줌의 쌀밥은 어린 동생의 몫이었고 보리밥과 밀개떡이나마 만족하였다. 몇 해 전에 「진성」이란 가수가 부른 『보릿고개』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지난 세월을 돌아보며 눈물짓게 하였다.
가난과 궁핍했던 그 시절에 대한 추억은 이미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할머니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으로 다가온다. 일찍이 선친께서는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애통해 하시며 가난을 극복하는 소원을 빈 적이 있다고 하셨다.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석류초(石榴抄)』와 함께 당선된 『소연가(召燕歌)』라는 시의 명칭은 흥부집에 행복을 가져왔던 ‘박씨’와 같은 복된 씨앗이 떨어졌으면 하는 소원에서 지었다고 하셨다. 오늘 날 자손들이 누리는 잔잔한 행복은 모두 선대가 쌓으신 덕에서 비롯된 홍복(洪福)인 셈이다.
오랜만에 선친의 유고 시집인 『모악산』을 꺼내 들었다. 전주에서 바라보이는 「모악산」의 이미지에서 돌아가신 할머니의 모습을 노래하셨다. 먼 옛날에 찾아온 손님에게 밥상을 올리고 함께 식사를 하자는 어른의 말씀에 밥을 먹는 듯이 빈 밥그릇을 숟가락으로 긁었다는 일화를 형상화한 시다. 이웃은 물론이고 지나는 나그네까지도 조그만 대접을 하시면서 가난을 이겨내고 자식을 가르치던 정성이 눈에 선하다.
“사실 우리 모두는 어머니가 남다른 고귀한 미덕이 있어서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다. 어머니는 어머니이니까 그립다. 늙어서 대지의 어머니 품에 안기려 할 때 태아로서 가장 편히 살던 어머니의 자궁과 유아로서 어머니의 품에 안겨 젖을 먹던 그 행복한 시절로 돌아가고자 하는 욕구가 어머니의 영원성을 형성했을 것이다.” 문학평론가, 오 하근의 해제(解題) 중에서
한편, 남도하면 「한하운(韓何雲 ; 1920~1975)」시인의 『보리피리』라는 시가 떠오른다. 시인 자신이 ‘한센병’으로 인해 주변의 사람들과 등질 수밖에 없었던 안타까운 사연이 담겨 있다. 지금도 그 먼 시절에 시인에 대한 막연한 동정을 느끼면서 읊조리던 기억은 ‘한센인’에 대한 연민과 두려움이 오버랩 되어 떠오른다. 당시만 해도 ‘한센인’은 일반 사회에서 배척의 대상인지라 산비탈의 격리된 지역에서 겨우 연명을 하며 거의 버림을 받던 시절이었다.
보리피리 불며/봄 언덕/고향 그리워/ 피—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꽃 청산/어린 때 그리워/ 피—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인환의 거리/인간사 그리워/피—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방랑의 기산하 /눈물의 언덕을 지나/ 피—ㄹ 닐니리.
※인환의 거리:사람사는 거리,기산하 :이곳저곳의 여러 산하
그는 지병에 절망하지 않고 자신이 겪는 고통을 아름다운 시로 표현하였다. 낭만적이고 서정적인 이 시 속에는 유년시절에 대한 향수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담겨 있다. 시 전편에 흐르는 애잔한 ‘보리피리’ 소리는 천형(天刑)의 병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이 피울음으로 들리는 듯하다. 이 는 고향과 부모형제를 두고 남도 멀리 소록도(小鹿島)를 향하는 길에 속으로 흐느끼는 애처로운 몸부림 소리이다.
그의 시는 우리 모두에게 돌아 갈 수 없는 고향을 일깨우는 촉매제의 역할을 한다. 가족과 친구 그리고 어린 시절의 그리운 산하를 잊지 못하게 만든다. 보릿대가 올라오던 그 시절에 초등학교 ‘보리피리’를 불며 집으로 돌아오곤 했던 친구얼굴이 떠오른다. ‘보리피리’는 ‘버들피리’, ‘풀피리’와 함께 자연 속에 절로 피어나는 순수한 우리의 가락이었다. 새 알을 찾아 쏘다니고 물고기를 잡으면서 아카시아 꽃잎을 따먹던 그 시절이 바로 엊그제 같다. 하지만 그 고향 땅에는 반겨줄 부모형제와 친구마저 없으니 마음속으로만 그리움을 가늠해볼 뿐이다.
여하튼 이번 여행 중에 풍광을 즐기면서 추가적으로 「허소치(許小癡)」 일가의 ‘운림산방(雲林山房)’과 「윤선도(尹善道)」가 머물던 보길도의 ‘부용동(芙蓉洞)’을 찾을 예정이다. 해남에 있는 ‘녹우당(綠雨堂)’엔 몇 차례 가보았는데 이들 세 군데에 얽힌 사연을 눈으로 확인하기 위함이다. 「소치」 가문이 일가를 이룬 남종화(南宗畵)의 산실과 그 업적에 대한 배경 지식은 이미 「이 선옥」박사의 『호남의 감성으로 그리다』와 「유홍준」 교수의 『완당평전』을 숙독하였다. 여유가 생기면 「일지암」으로 「법강스님」을 예방하여 그 유명한 ‘초의차’를 마시며 담론을 나눌 생각이다.
(2024.4.14.작성/4.17.발표)
첫댓글 남당 <피~ㄹ 닐리리--피~ㄹ 닐리리--피~ㄹ 닐리리--피~ㄹ 닐리리> 추억속에 담겨있는 고향의 소리를 생각나게 하네만 지금의 내 마음의 고향은 아무데도 없으니 슬픈현실이구먼 항상 건강하시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