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공원에 있는 충혼탑(忠魂塔), 정기 참배를 할 때였다. “저게 무슨 꽃인지 아세요?” 청장이 잘 가꾸어진 잔디밭 위에 조그맣고 앙증맞게 생긴 자주색 앉은뱅이 꽃을 가리키며 넌지시 물어왔다. 잘 모르겠다고 하니 입가에 미소가 묘하다. 가만히 살펴보니 잔디밭 군데군데 제법 떼로 피어있다.
몸가짐을 단정히 하고 하늘을 향해 우뚝 솟은 충혼탑 아래에 선다. 충혼탑은 정부 수립 이후 순직한 부산 출신 국군과 경찰관을 비롯한 전몰용사들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1983년 8월 15일에 건립하였다. 같은 해 9월 영령들의 위패를 탑신 아래 봉안실로 모셔오기 전 까지, 현충일 추념식은 용두산공원 동쪽 좁은 장소에 자리를 깔아놓고 했었다. 그때는 참석한 유족도 많았고 활기가 넘쳤다. 4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무렵, 중앙공원 충혼탑 잔디밭에는 참석한 유족도 적은 데다 모두 꼬부랑 할머니가 되었다. 듬성듬성 늘어난 빈자리는 장성한 손・자녀들이 대신 매웠다.
참배 후 사무실로 돌아와 눈여겨 봐뒀던 꽃을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제비꽃이다. 강남에 갔던 제비가 돌아올 때쯤 꽃이 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지방에 따라서는 꽃의 뒷모습이 오랑캐의 뒷머리를 닮았대서 오랑캐꽃이라고 부르기도 한단다. 마치 호국영령들이 오랑캐꽃에 포위당한 모양새다. 순간 기분이 묘해진다.
1979년에 입사한 동기들 중 13명이 부산으로 왔다. 다시 부산, 울산, 밀양, 마산, 진주, 함양, 제주 등의 지청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나는 부산지청과 청사를 같이 쓰는 부산지방청 관리과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이곳이 전쟁터로 착각할 정도로 소란스러웠다. 매일 찾아와서 행패를 부리는 몇몇 과격한 민원인들 때문에 정상적인 근무가 어려웠다.
“네놈들이 누구 때문에 여기서 근무하는 줄 아느냐?”
의족을 벗어던지며 내뱉는 살벌한 욕을 실컷 얻어먹거나, 와장창하고 유리창 깨지는 소리를 들어야 하루가 간 것 같았다. 젊은 직원 들 중에는 이런 상황을 견디지 못해 다른 부처로 옮겨가거나, 시험을 다시 쳐서 면서기를 하겠다고 그만둔 직원이 많았다. 부산으로 온 동기 들 중 우리 처에서 끝까지 완주한 직원은 나를 포함해 고작 5명에 불과했다.
한국 전쟁이 발발할 당시에는 산업 기반이 갖추어지지 않아 몸으로 힘을 쓰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이 대다수였다. 그런 이들이 팔다리를 잃고 노동력을 상실한 채로 사회에 내던져졌다고 상상해 보라. 그들이 무엇으로 이 험난한 세상을 버텨낼 수 있었을까. 나라 살림이 어렵다는 명목으로 희생과 인내만을 강요한 세월이었다. 그에 대한 불만을 일선 기관에서 젊은 직원들이 고스란히 몸으로 받아내고 있었다.
지금이야 보상금도 어느 수준까지는 올라와 있지만, 당시만 해도 6개월에 한 번 지급하는 보상금이 겨우 쌀 한 말값 정도였다. 실생활에 별반 도움이 되지 않는 상징적인 것에 불과했다. 그래서 우리 처에서 내부적으로 정한 목표가 자식이나 남편, 아버지를 여윈 데 대해 적어도 매월 쌀 한 가마값 정도는 지원할 수 있도록 하자는 거였다. 영향력 있는 인사에게 연줄을 동원해 여론몰이를 할 정도로 정말 절실했다.
그 정책 목표가 이루어진 게 서울 올림픽이 있던 해인 1988년도였다. 이때 정확히 쌀 한 가마값인 매월 10만 원 정도를 보상금으로 지급할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난 지 무려 35년이나 지난 뒤였다. 전몰군경 유족 및 미망인은 물론 상이를 입은 국가유공자 본인과 그 유가족들이 엄청난 고통 속에서 긴긴날 견뎌왔던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국민이 그분들에게 큰 빚을 졌다고 할 수 있겠다.
다행히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훌륭하게 성장해 준 자녀들이 많았다. 행정소송을 수행하려 한참 법원을 출입할 때였다. 담당 재판장이 고등법원 수석부장판사였다. 준비 절차로 판사실에서 직접 대면하여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자신도 전몰군경 자녀라고 한다. 사무실에서 자료를 찾아보니 어머니가 장한 미망인 상을 수상하신 분이다. 나중에 지법원장으로 영전했을 때는 내가 몸담고 있는 기관이 그렇게 자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시절도 세월 따라 변하는 모양이다. 보훈처에 오래 근무하다 보니, 그간 힘든 기관이라고 천대받던 곳이, 신규 공무원에게 선호도가 꽤 괜찮은 것으로 나온다고 한다. 격세지감(隔世之感)이긴 하지만, 그만큼 보훈정책이 국민들에게 잘 스며들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나이가 들수록 남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기를 권한다. 그런데 나의 근무처는 국가를 위해 희생하고 헌신한, 특별한 분들을 모시는 기관이 아니던가. 그분들을 위하는 일에 평생을 봉직할 수 있었으니, 복도 이런 복이 없다. 생활실태조사를 위해 가정방문을 나가면 꼭 전사한 아들이 살아온 듯이 반겨주던 유족 어머님들, 비만 오면 떨어져 나간 팔 부위가 쑤시고 아프다며 술로 달래던 전상 국가유공자들, 그분들과 함께한 애환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 가며 가슴 뭉클한 감회가 새롭다.
나는 2013년에 은퇴한 후에도 매월 초만 되면 마음을 정결히 하고 집 뒤편 구덕산 기상관측소까지 산행을 한다. 1시간 가까이 힘들여 올라가서 산 정상에 서면, 멀리 구봉산 기슭을 장대하게 딛고 서 있는 충혼탑이 나타난다. 옷깃을 여미고 나라를 지켜주신 데 대한 검사의 인사부터 한다. 곧이어 깊숙이 머리 숙여 가신 님의 명복을 비는 묵념을 올린다. 더불어 전몰군경 유가족들을 위로하는 마음 인사도 한다. 이렇게 해야 한 달 내내 마음이 편하다. 구덕산을 오르는 일이 점점 힘에 부쳐간다. 그래도 다리에 힘이 있을 때까지는 계속할 생각이다.
충혼탑 앞에 선 탑비(塔碑)의 글로, 호국영령들의 고귀한 희생을 가슴속 깊이 되새겨 본다.
“파수병처럼 멀리로 바다를 바라보고 서 있는 이 탑산을 쳐다보면서 그대는 무엇을 생각하는가.… 한번인 들 오늘 햇빛같이 밝은 자유 속에서 베개를 돋우고 잘 수 있는 근원이 어디에 있는 것임을 생각해 본 적이 있었으며 눈부신 국제무대에서 선진조국의 위용을 빛내고 있는 실력이 어디서 왔던 것임을 돌이켜 본 적이 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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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녀가심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