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장에는 다윗의 죄악이 나옵니다. 봄은 건기라서 전쟁에 적합한 시기였습니다. 지난번 암몬과의 전쟁에서 이스라엘 군대는 승기를 가졌지만, 계절 문제로 회군을 하였습니다. 이제 다시 건기인 봄이 돌아와 제2차 출정이 가능해진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요압과 그 신복과 온 이스라엘의 군대를 보내고 자신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마치 전쟁이 없는 평안한 때처럼 다윗은 예루살렘 왕궁에 남아서 낮잠을 자고 일어나서 옥상을 거닐다가 목욕하는 한 여인을 보았습니다. 지금 다윗은 자신의 안목의 정욕을 이기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4절에 나타난 동사를 보면 다윗이 얼마나 죄악을 향해 돌진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가 보내었다, 데려왔다, 동침하였다.” 왕의 자기 방종 행위는 시간이 그래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대화도 돌봄이나 애정이나 사랑도 없이 오직 정욕만 있을 뿐입니다.
밧세바가 임신한 사실을 안 다윗은 전쟁터에 있던 우리아를 집으로 돌려보내면서 선물을 후하게 주려 합니다. 그는 그 다음에도 자신의 뜻대로 운전석에 앉아 모든 상황을 통제하려 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우리아를 자신의 마음대로 통제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죄를 가리기 위하여 우리아를 집으로 보냈으나 우리아는 끝까지 집에 가지 않고 왕의 신복들 사이에서 잡니다. 그 이유는 언약궤와 이스라엘과 유다가 암몬과 싸우느라 바깥에 진을 치고 있는데 자기만 집에서 가서 먹고 마시며 처와 잘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아의 대답을 통하여 우리는 헷 사람 우리아가 진정한 이스라엘인임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순간만은 다윗은 진정한 하나님의 용사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우리아를 집으로 보내어 자신의 죄를 숨기려 했던 다윗은 이제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우리아를 죽이려 합니다. 요압으로 하여금 우리아를 가장 격렬한 싸움터에 보내어 적의 손에 죽게 만들었습니다.
결국 우리아는 그렇게 죽었습니다. 7일간의 모든 장래 절차를 마쳤습니다. 그러자 다윗이 보내어 밧세바를 궁으로 데려와서는 자신의 아내를 삼고 아들을 낳습니다. 다윗의 이런 죄를 알지 못하는 백성들에겐 다윗의 행동이 나라를 위하여 용감히 싸우다 전사한 한 젊은 미망인을 불쌍히 여기고 죽은 자에게 보답하려는 뜻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 27절은 이렇게 끝이 납니다. “다윗이 행한 그 일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 여호와께서는 결코 다윗처럼 그냥 넘기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반드시 다윗은 하나님의 심판에 부딪힐 것입니다. 숨겨진 죄는 있을 수 없음을 우리는 늘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