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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라는 건 나이가 들어서도 설레이긴 학창시절때 수학여행을 가던 때랑 설레임은 마찬가지인것 같다. 이른 시간에 출발이라 전날 미리 채비를 다 해놓은 상태로 잠자리에 들었는데도 뭔가 빠진듯한 기분에 여러번 자리에서 일어나곤 했었는데 결국 잠을 설치고 말았다. 일어나서 간단하게 세면을 한후 아침식사도 걸리고 바로 6시경에 동래역으로 출발... 새벽형 사람들의 종종 걸음이 쫓기듯하게 바빠 보인다.
동래지하철 역사를 빠져나와 시계를 보니 너무 이른시간대에 도착이다. 커피랑 토스트를 파는 자판대에서 토스트랑 커피를 주문하고 기다리고 있으니 박금수씨 승용차로 회장님과 양철호님 내외간과 박금수씨 부부가 도착했다. 이번 역사 탐방은 무심산우회 창단 300회차 기념으로 이루어진 특별 이벤트였는데 동참자가 너무 적어 아쉬운 탐방길이였다. 무심의 회장이신 이유덕님,총무이신 이호자님,한영옥님,신영신님,송세현님,김성태님,김유한님,성귀순님,김금자님,이경자님, 이용만님,문윤학님,이윤수님,정호권,박이엽님,최규리님,박정임님,권선숙님,신두선님,박동월님,허영심님,진복순님,양철호님, 장정일님,체크맨 박금수님까지 총 25명이 동참이였다. 조이사님과 산대장 이윤홍님 모두 불참이였어니 사실 가이드없는 역사탐방이였다.
이번 탐방길은 07시 부산에서 출발~11:00 여주 신륵사에 도착하여 신륵사를 둘러보고 점심 식사를 해결한후 세종대왕릉과 명성황후생가를 관람, 철원으로 이동하여 철원 삼보연 폭포를 관람한후 고석정 바로 앞에 위치한 숙소에서 1박을 하고, 둘째날 9:30 비무장지대 탐방을 시작 바로 제2땅굴로 이동 관람후 철원평화전망대를 보고 백마고지,노동당사등을 관람후 중식, 바로 부산으로 돌아오는 긴 장거리 코스다.
신륵사에 도착이 11시경.. 이 신륵사는 신라 진평왕때 건립되었고 나옹선사가 이곳에서 세상을 떠난후 고려 우왕 2년에 크게 중창된 유서 깊은 사찰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의 사찰들을 보면 주로 산속 깊은 곳에 짓는게 일반적인데 이 사찰은 남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강변에 위치해 있으며 조계종 제2교구 본사 용주사의 말사로 되어 있다. 이 사찰은 오래전에 두어번 다녀본 경험이 있는 곳이였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도도히 흐르는 남한강물만 흘러갔을뿐 변한게 없었다... 사찰내를 한바퀴 둘러본후 기념품 가게가 있는 주차장 근처 인근 옥천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하였다. 음식은 아무래도 전라도쪽에 가서 먹어야 맛있는데 음식이 짜고 특색있는 맛이 아니였다.
식사후 오후 관광은 세종대왕릉이다.. 이 능은 세종대왕과 소헌왕후를 합장한 英陵이다. 세종대왕은 조선조 제4대 왕으로 1418년에 왕위에 올라 1450년에 승하하셨으니 재위 32년에 당시 춘추가 54세였다고 한다. 세종대왕은 우리 역사상 가장 성군(聖君)으로 한글을 만드셨고, 측우기,혼천의,해시계등 많은 과학기구를 발명 제작하여 과학의 최첨단인 요즘 시대에도 놀랄만큼 정교하고 과학적인 발명품들이 여럿있다고 한다. 또, 아악을 정립하고 북방의 野人을 정벌하고 4군과 6진을 개설하여 우리나라의 국경선을 압록강과 두만강으로 확정하였으며 이때 일본의 대마도를 정벌하였으니 우리도 대마도를 우리꺼라고 우겨야 되지 싶다... 특히 학문을 숭상하여 학자를 기르고 활자를 개량하여 부처의 공적을 칭송한 노래'월인천강지곡' 조선의 창업을 찬양한 노래인 '용비어천가' 농업기술을 모음책인'농사직설' 윤리덕행을 찬양한 '삼강행실도' 한국의 지리책 '팔도지리지' 석가의 일대기를 적은 '석보상절' 의학백과 사전인 '의방유취'등 수많은 책을 발간 하기도 하셨다. 그리고 또 농업을 장려하고 백성을 사랑했던 어진 성군이셨던 대왕이시다.. 재수가 있을려니 우리가 들린 이날은 매월 마지막 수욜은 무료로 문화재를 관람시키는 날이라 무료 입장까지 했다. 세종대왕릉을 관람후 들린곳은 명성황후생가였다. 우리 구한말의 마지막 국모였던 명성황후는 1851년11월17일 여주 근동면 섬락리(지금의 여주시 능현동)에서 출생,어려서 일찍 아버지를 여위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으나 총명하고 행동이 남달랐다고 한다. 1866년 16살의 나이로 고종의 왕비로 간택되었으며 구한말 어지러운 국내외 정세 속에서도 탁월한 정치력을 발휘 하였다고 한다. 1895년 10월8일 일본놈에 의해 시해 당하셨고 29세의 짧은 생을 사신 불행한 생애였다. (현장의 입간판에서 발췌)
여주의 역사 탐방을 마치고 바로 철원으로 이동을 할려니 약 2시간이 소요 된다고 했다. 슬그머니 회장님이 노래방을 켜서 분위기를 잡는다. 보통 술이 한분배 돌고 은근히 술기운에 노래도 하며 흥을 돋구는데 맹숭맹숭한 가운데 쉽게 분위기가 안 잡혀 할수없이 오지랍 넓은 내가 선창을 했더니 자연 노래가 술술 나온다. 모두 노래 실력이 가수 뺨을 때릴 기세다. 은근히 진짜 프로같은 노래 실력자도 있었다. 김해에서 오신 성귀순님과 한영옥님은 노래 실력이 웬만한 트로트 가수는 정말 엄마야 할 정도다... 한두차례 노래를 하다보니 철원이다.. 바로 삼부연이라는 철원 8경에 속한다는 폭포에 도착을 하였다. 신철원리에서 동쪽 2km 지점 용봉산(374m) 중턱에 가느다란 물줄기를 솓아 내리고 있었다. 한탄강 유역 내의 명소란다. 3단 폭포로 이루어져서 가마솥 처럼 생긴 소3개를 만들어 놓았다 하여 삼부연이란 이름이 붙여졌다고 전한다. 천년동안 아무리 심한 가뭄에도 물이 말라본 적이 없어 기우제를 지내왔던 곳으로도 유명하다고 한다. 삼부연 관람후 바로 숙소인 고석정 앞에 있는 그린 가든으로 이동.. 각조별로 방을 배정받아 짐을 풀고 저녁 식사를 한후 운동겸 고석정으로 양철호님과 하늘바다님을 데리고 갔더니 뜻밖에 멋진 야경을 볼수 있었다. 고석정은 철원평야를 가로 질러 흐르는 한탄강 중류에 위치한 철원8경중의 한곳인데 빼어난 경관에다 조명을 설치하여 야경으로 보니 정말 화려한 볼꺼리라 방에서 쉴려는 사람들을 데리고 다시 갔다가 볼거 다보고 올려니 조명이 꺼진다. 밤이라 자세한건 다 볼수 없었지만 옛 선인들이 풍류를 즐길만한 장소임엔 틀림이 없었다..... 숙소에서 고스톱도 치고 술도 한잔 하시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후 자정이 되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이른 새벽인 6시경에 기상.. 아침 공기가 청량제 같은 달콤함이 콧끝을 파고든다... 우리보다 더 일찍 일어나서 벌써 고석정을 둘러보고 돌아오는 분들도 있었지만 날이 훤한 고석정을 보기 위해 또 발길을 옮겼다. 아마도 孤石亭이란 강 양쪽은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한쪽 강가에 10m 정도의 큰 바위가 우뚝 솟아 있는 모습이 외로워 보여 붙어진 이름일것이라고 유추해 본다... 이곳이 조선 명종때의 의적 임꺽정이가 석굴에 은거하면서 활동을 했다해서 후대 사람들이 이를 기리기위해 정자를 짓고 고석정 이라는 이름도 붙었다고 한다... 아침 식사를 한후에 본격적인 철원 관광을 나섰다. 이곳이 행정구역은 강원도지만 경기도와 인접해 있고 휴전선과는 얼마 떨어지지 않는 최전방 지역이다. 지금은 철책선이라고 하는 휴전선 까지 민간인들도 관람이 가능한 시대지만 보안이 철저했던 지난 시절엔 꿈도 못꿀 정도로 통제가 심했던 지역이였다. 그래서 고석정에서 문화해설사가 동승을 하였고 처음 들린 곳이 제2 땅굴이였다. 땅굴의 깊이나 길이는 듣긴 했지만 잊어 버려 기억도 안나고 북한 놈들이 3년간 뚫은 땅굴이라는 기억밖에 없다. 내가 서니 대체로 허리를 조금 수그려야 다닐 정도의 높이로 뚫었으니 얼마나 지독하게 노동력을 착취했을까 싶어 북한 김정일 일당이 정말 잔인무도한 괴뢰 집단임을 상기시켜 주었다. 휴전선 일대에 이런 땅굴이 4곳이 있다는데 3곳은 가봤는데 파주에 있는 땅굴은 아직도 못가본 곳이다. 땅굴을 파는 기술은 아마도 세계에서 북한이 가장 잘 팔것인게 열악한 장비를 가지고도 이런 땅굴을 팟다는것이 보고도 믿기지 않을 지경이였다... 초병이 근무를 서다가 땅이 흔들리고 폭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러 상부에 보고가 되었고 땅굴 발견용 시추공을 약 45개를 박아 그중에 7개가 관통되어 찿아 냈다고 한다. 땅굴 관람을 마치자 시간이 10:30이다.... 바로 또 철원평화전망대를 향했다.. 차를 달리는 길 양쪽이 민통선으로 구분이 된단다. 그러니 한쪽은 자유로운 곳이고 한쪽은 아직도 왕래는 자유로운데 신고를 해야만 되는 곳이라니 참 아이러니 하다. 전망대에서 북한 지역이 훤히 바라다 보인다.. 광활한 철원지역의 옥토가 비무장 지대에 묶여 있다는게 아깝기도 하고 안타깝기 그지없다. 12시가 다되어서야 백마고지 전망대로 이동을 했다.. 사실 백마고지라면 아주 높은 고지로 생각을 했었는데 멀리서 바라보니 나즈막한 야산 같은 높이의 산이다. 6.25당시 가장 치열했던 전투현장이였던게 이 백마고지를 밤낮으로 12차례의 공방전에 24번이나 주인이 바뀌였고 무려 백마고지의 높이가 1m가 깍여나갈 만큼 30여만여발의 포탄을 쏘아 부었다니 엄청난 전투였고 중공군이 개입하면서 결국 육탄전까지 전개 되었 던 곳이라 한다 이때 산하한 장병과 군인이 843명있었고 북한군과 중공군은 떼거지로 죽었다고 한다.. 육군제9사단과 중공군 제38군과의 치열한 전투로 제9사단이 총 3천4백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었고,중공군도 1만4천여명이 죽거나 다치거나 포로가 되었다고 하니 떼거지로 죽거나 다치거나 포로가 된 셈이다. 이 산의 고도가 395m인데 하도 폭탄을 퍼부어 산의 능선이 공중에서 바라다 보니 햐얀 백마가 누운 형상이라하여 백마라는 이름이 붙여 졌다고 하니 당시의 모습이 상상만 해도 치가 떨린다. 백마고지에서 바라다 보이는 북쪽에 김일성 고지가 있었는데 이 고지에서 철원을 빼앗긴 슬음에 김일성이 3일동안 식음을 전패하고 울었다고 전해온다. 아마 철원을 빼앗기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북한이 식량난으로 허덕이지는 않았을련지.... 백마고지 전망대를 둘러보고 월정리역으로 이동.... 월정리역은 서울에서 원산으로 달리던 경원선의 중간역이였는데 6.25동란으로 현재 비무장지대 남방한계선 철책에 근접한 최북단 종착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역의 바로 맞은 편에는 "철마는 달리고 싶다"라는 간판이 60여년 동안 간절한 울림으로 서있다... 당시 이 역에서 마지막 기적을 울렸던 객차의 잔해와 유엔군의 폭격으로 부셔진 인민군 화물열차가 앙상한 골격을 드러낸채 누워 있어 분단의 한을 실감케한다.. 원래 경원선은 한일합방 이후 일인들의 강제동원과 당시 러시아의 10월 혁명으로 추방된 러시안인을 고용 1914년 8월 강원도에서 제일 먼저 부설되었는데 서울~원산간 227km를 연결하는 산업철도로서 철원에서 생산되는 생산물을 수송하는 간선철도 였다고 한다. 역사 바로 앞에 두루미 전망대가 잘 지어져 있고 각종 조류들이 실제 실물박제물로 만들어져 전시되어 있었다. 돌아 나오는 길목에 노동당사라는 뼈대만 앙상한 건물이 있었다. 이 건물은 1945년8월15일 해방후 북한이 공산독재 정권 강화와 주민 통제를 목적으로 건립하였고 6.25전까지 북한노동당 철원군 당사로서 악명을 떨치던 곳이라고 했다. 시멘트와 벽돌 조적으로 지어진 3층건물인데 당시 이 건물 일대가 철원읍 시가지로서 6.25전란 당시 여타 건물들이 모두 파괴. 인멸되었는데도 유독 이 건물만 수많은 총탄과 폭격을 당하고도 남아 잇는 것으로 봐서 철근도 없이 지어진 이 건물이 얼마나 견고하고 튼튼하게 지어졌는지 짐작이 간다. 공산치하 5년 동안 북한은 이 건물에서 철원,금화,평강,포천 일대를 관장하면서 양민수탈과 애국인사들의 체포,고문,학살등 소름 끼치는 만행을 자행했고 이곳에 끌러 들어가면 시체가 되거나 반송장이 되어 나올만큼 무자비한 살육의 현장이기도 하였다고 했다. 이 건물뒤 방공호에서는 많은 인골과 함께 만행에 사용된 수많은 실탄과 철사줄들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 건물은 2002,5,27 근대문화유산 제22호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노동당사를 보고 또 들린곳이 도피안사라는 천년 고찰이였다. 이 사찰은 서기 865년 통일신라시대 제48대 경문왕 5년에 도선국사가 향도 천여명을 거느리고 천하에 산수가 좋은 곳을 찿던중 영원한 안식처인 피안(彼岸)과 같은 곳에 이르렀다고하며 화개산 현 위치에 도피안사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밖에서 보면 건물이 잘 보이질 않았는데 입구에 들어서니 경내의 요사채가 여러채이고 넓은데 놀라웠다. 이곳도 예외없이 6.25때 모두 소실되었던것을 군에서 복원하여 군에서 관리를 해오다 민간인에께 관리를 이양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고 했다.
이 철원이라는 곳이 화산이 분출된 곳이라 곳곳에 제주도에서나 볼수있는 현무암들이 많은 곳이여서 농사가 잘 안될줄 알았는데 금화,평강,철원 일대가 땅도 비옥하고 일조량도 좋아 논 농사에 적당한 곳이라고 한다. 특히 토고저수지라는 곳은 가보진 않았지만 엄청나게 큰 저수지라는데 인공으로 조성된 수자원시설인데 사변이 종료된 후에 북한쪽에서 흘러오는 물을 중단시켜버려 한 5년간 물이 부족하여 농사를 망쳤다고 한다. 그 이후 이곳 철원엔 공장은 안짖드라도 저수지는 꼭 지어야 하는 절박함이 있어서 지금은 여러 곳에 저수지가 형성되어 있는데 올 겨울에 강수량이 적은탓에 올봄 농사에 지장이 있을까 걱정을 하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그래서 한탄강에 한국의 나이야가라라고 불리는 직탕폭포가 있는데 물이 전혀 흐르질 않아 이번 여행코스에선 들러 보질 못했다. 점심 시간도 훌쩍 지난 1시반경에 승일교라는 인공폭포가 조성되어있는 곳에 도착..아직도 겨울에 얼었던 고드름이 절벽에 붙어 있어 신기하기도 했고 조금은 낡은 다리위를 걸어보기도 했다. 이 다리는 처음 공사는 북한이 시작하여 다리 골조를 만들었는데 휴전이 되면서 우리쪽에서 상판 공사를 마무리한 다리라고 한다. 70년대 빨간 마후라라는 영화를 찍을때 경비행기가 이 다리 밑을 통과하면서 유명세를 탓던 다리라고 한다. 돌아오는 길목에 한정식 부페에 들러 늦은 점심을 해결하고 먼 부산으로의 장도에 올랐다.. 이번 역사탐방길에 조이사님이 갑작스러운 집안 사정 때문에 불참을 하셔 조금 아쉬웠고 단골 손님이신 채점순 감사님 내외도 몸이 불편한 관계로 동참을 못하셨다고 전해왔다.. 돌아오는 차안에서 유흥을 즐기면서 지루한 부산으로의 귀환을 다소 즐겁게 올수있도록 배려해준 것과 장거리 안전운전으로 피로해했던 박태호 기사님께 감사함을 전해본다. 사실 친분관계가 없는 기사없다면 그렇게 구석구석 돌아다니면서 관광을 시켜줄리도 없고 우리 기호에 맞는 분위기도 기대할수 없을텐데 오랜 정때문에 묶여 어쩔수 없는 긴 여행 길을 돌아 왔다고 본다. 무사하게 늦은시간에 부산에 도착하여 가락가는 길목의 할매추어탕집에서 저녁까지 깔끔하게 해결시켜서 귀가를 시켰다. 이번 역사탐방길에 동참을 하신 분들 모두 다음 만날때 까지 몸 건강하게 잘 지내시길 바래본다. 똥배 촬영기사 소담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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