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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 죽산박씨
 
 
 
카페 게시글
수필, 시 스크랩 치유자로서의 목회자상-정태기 목사(한신대 교수)
sunny 추천 0 조회 22 11.11.15 23:0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제가 여기에 나와 있는 이유는 딱 한 가지입니다. 저와 같은 삶을 살지 말라고 부탁하기 위함입니다. 저는 37세까지 정말 비참할 정도로 어두운 삶을 살았습니다. 제일 큰 문제는 사람을 너무 무서워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신학대학에서 공부했고, 전도사 생활도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무서웠습니다. 두 번째로는 자신이 없었습니다. 산다는 것이 왜 그렇게 불안합니까? 왜 그렇게 걱정이 되는 것입니까? 어디에 가도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저에게 붙여준 별명이 두 가지 있었는데 첫째는 ‘꿔다 놓은 보릿자루’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어느 틈에 몇 사람들 앞에만 서면 다리가 떨리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그것을 몰랐는데 저의 다리 떨리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붙여준 별명이 ‘재봉틀’입니다. 여러분들은 재봉틀이라는 별명을 듣고 웃으실지 모르지만 저는 그 이야기를 들었던 그 날 밤부터 새벽이 되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를 한없이 원망했습니다. 저는 37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알았습니다. 제가 살고 싶은 삶을 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내가 주인이 아니라 전혀 나하고는 상관없는 엉뚱한 어떤 주인이 내 마음속에서 나를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나무꾼이 산으로 나무를 하러 갔다가 나무 밑에 있는 새알을 보았습니다. 그 새알을 먹으려고 가지고 왔다가 자기 집의 닭이 계란을 놓고 부화를 하고 있는데 그 안에 그 새알을 집어넣었습니다. 알이 부화되어 보니 독수리 알이었습니다. 독수리 한 마리가 병아리와 함께 컸습니다. 거의 7~8 개월이 지나니 독수리의 본이 잡혔습니다. 그런데 병아리들 속의 독수리는 자신을 독수리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병아리들과 함께 모이를 먹고 있는데 하늘을 쳐다보니 큰 독수리가 창공을 날고 있었습니다. 병아리 속의 독수리가 창공의 독수리들을 보면서 어떻게 생각했겠습니까? ‘나도 저렇게 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리고는 다시 모이를 먹습니다. 날아갈 생각을 안 합니다. 왜? 자신을 병아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이곳에 서 있는 이유가 분명히 하나 있습니다. 여러분들 자신이 독수리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들 중 아마 수없이 많은 분들이 하늘의 창공에서 날고 있는 독수리만 바라보면서 ‘나도 저렇게 날아 보았으면 좋겠다.’라고 생각만 하면서 한 번도 날 시도를 안해보는, 한번도 날개를 쳐보지 않는 분들이 많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저 역시 37세까지 그렇게 살았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저는 병아리가 아닌데 한 번도 독수리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날개를 쳐서 시도를 해볼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어둡게 살았습니다.

제가 그렇게 어둡게 살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제가 자란 가정에서 받은 상처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아버지로부터 엄청난 상처를 받았고 어머니로부터도 상처를 받았습니다. 저희 집은 꽤 괜찮게 사는 집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사랑이라고는 조금도 느껴볼 수가 없었습니다. 아버지보다 세 살 더 많은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보다 열여섯 살이나 젊은, 그렇게 예쁜 다른 어머니가 또 있었습니다. 우리 집은 이쪽 성이고 그쪽 집은 그쪽 성이고 얼마나 그쪽에 사랑이 많이 갔으면 열여섯 살이나 젊은 그 어머니에게 5남매가 있었고 세 살 더 많은 우리 어머니한테는 4남매가 있었겠습니까?

그 어린 제가 뭘 알아서, 집에 아버지가 있으면 캄캄할 때까지 함께 놀 친구도 없는데 밖에서 마을을 빙빙 돌았습니다. 왜냐하면 집에 무서운 아버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어머니는 아버지의 사랑을 잃어버리고 일에 푹 빠져서 자식에게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인정과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하면 그 자식에게는 분명 훗날의 삶을 어둡게 만드는 상처가 자리를 잡고 그 상처가 주인 노릇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상처가 주인이 되어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불안입니다. 이유가 없이 불안합니다. 그리고 이유없는 짜증과 분노가 계속 끓어오릅니다. 그리고 우울증이 생기고 무기력해지고 나중에는 나이가 들면서 어떤 생각이 지배합니까? ‘내가 감히, 내가 어떻게? 나 같은 것이…….’ 그런 생각에 완전히 지배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속에서는 짜증과 분노가 계속 들끓어 오르는데 그 분노의 대상을 누구로 삼습니까? 만만한 사람을 대상으로 삼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부터(초등학교 들어가기 전부터) 분노의 대상이 있었습니다. 그 분노의 대상은 우리 집에 일하러 오는 아주머니의 아들-저와 동갑인-삼식이라는 아이였습니다. 삼식이를 얼마나 못살게 굴었는지 모릅니다. 심한 방법으로 그 애를 가장 괴롭게 한 것은 빈 항아리에 그 애를 들어가게 하고 항아리 뚜껑을 닫습니다. 그 안에서 그 애가 미칩니다. 저는 37세가 되어서 미국에서 데굴데굴 구르면서 ‘삼식아, 삼식아, 병든 나 때문에 얼마나 힘들었고 너는 어떤 삶을 살고 있니?’하고 절규했습니다. 지금까지 저는 삼식이를 찾고 있습니다. 아마 죽었을 것입니다. 병든 저 때문에 그 애가 얼마나 심한 상처를 받았고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을까를 생각합니다. 반드시 상처 입은 사람은 어떤 대상을, 만만한 대상을 못살게 굴도록 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로 저의 병적인 분노, 상처의 분노의 희생자는 우리 집의 얼룩소였습니다. 우리 집에서는 형과 저에게 소 한 마리씩을 맡겼는데 그 소를 아침에 들에 몰고 가서 풀 뜯어 먹이고 소나무에 매어놓고, 또 오후에 가서 풀을 뜯어 먹이고 집에 데리고 옵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형이 맡은 소는 살이 찌는데 제가 맡은 소는 살이 찌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풀을 먹여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제가 고삐만 잡으면 소가 안절부절 못 했습니다. 그러면 풀 안 먹는다고 때렸습니다. 제가 얼마나 소한테 분노를 폭발시켰기에 고삐만 잡으면 소가 정신을 못 차렸을까요?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 얼룩소가 히스테리 신경증을 앓았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그런 병을 앓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그 상처를 소한테 준 것입니다. 중학교 1학년 여름 방학에 그 소는 아무래도 힘이 없어서 일을 제대로 못 할 것 같아 팔았다고 합니다. 저는 37세가 되어서 그 소를 부르면서 울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갔으면 그렇지 않았을 텐데……. 네가 다른 집에 갔으면 살찌고 행복하게 살았을 텐데……. 왜 하필 상처 입은 나에게 와서 그렇게 고행하다가 팔려갔니? 지금이라도 만일 그 소가 살아 있다면 그 소의 다리를 붙들고 용서를 빌면서 통곡을 할 것 같은데…… 내 분노의 대상! 내 분노의 희생제물들…….’

또한 제 분노와 상처의 희생제물은 우리 집에서 일하는 저와 동갑인 소녀 막둥이였습니다. 한국 전쟁 때 어머니와 아버지를 잃어버린 그 불쌍한 아이가 일을 하는데 제가 왜 그렇게 못살게 굴었는지 모릅니다. 37세가 되어서 막둥이를 부르면서 한없이 울었습니다. 막둥이가 어디 있는지 궁금해서 고향으로 전화를 해보니 죽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아이를 둘이나 낳아 놓고 죽었다고 하였습니다. 그 죽음은 아마 제가 그 애한테 주었던 상처 때문이 아니겠는가 생각됩니다. 그 애도 상처를 받았고 그 상처 때문에 건강을 제대로 유지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내가 이 상처에서 치유 받고 이제 용서를 빌 만큼 되니까 그들은 다 죽고 없어졌습니다.

그러한 저의 삶은 계속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유별나게 어렸을 때에 까다로웠고 한번 울기 시작하면 이틀도 좋고 사흘도 좋았습니다. 밤에 어머니가 저를 달래지 않고 그냥 피곤하다고 잠이 들면 밤새 울다가 잠이 들었고, 새벽에 일어나 보면 다시 또 울기 시작했습니다. 여름에 모기장을 쳐놓고 잠을 자면 어머니를 괴롭게 하려고 모기장을 들고 모기가 들어오게 했습니다. ‘왜 그렇게 살았을까?’ 그런데 어느 날 어머니가 저의 울음을 달래는 비법을 터득하셨습니다. 그게 낙지를 말려서 가위로 뚝뚝 잘라서 쌀독에 넣어 놓았다가 제 울음이 안 그치면 밤에 주무시다가도 광에 가서 낙지 발 하나를 가져다가 저의 입에 물려줍니다. 그러면 그 낙지 발이 제 입에 들어오자마자 먹지도 못하고 그냥 잠들어 버립니다. 아침에 일어나 보면 그 낙지가 퉁퉁 불어서 입에 물려져 있습니다. 여러분! 제가 낙지가 먹고 싶어서 울었습니까? 아닙니다. 어머니, 아버지로부터 받는 사랑이 고파서 운 것입니다.

이런 분노의 삶은 중학교, 고등학교 나중에 결혼하고 신학교에 들어가서도 계속되었습니다. 가장 비극적인 것은 결혼생활이었습니다. 상처받은 사람, 어머니와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불운한 가정에서 자란 사람들은 상처가 심하다 보면 사람을 제대로 보지 못합니다. 제일 구체적인 증거가 있습니다. 제 아내가 설거지를 하다가 소파에 앉아 있는 저를 보고 싱긋 웃었습니다. 저는 웃는 아내를 보면서 “왜 나 비웃어? 왜 남편을 비웃어?”하면서 화를 내면서 대들었습니다. 아내가 눈물을 흘리면서 “당신 비웃은 거 아니야…….”하는데 저는 그 모습이 비웃는 걸로 보인 것입니다.

제가 목회하는 교회의 교인이 한 명이라도 떠나면 그날부터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교인들은 들어왔다 나가는 게 정상인데, 상처 입은 사람은 누구에게 버림받을까봐 두려워서, 한 사람이라도 나를 거절할까봐, 무시할까봐 겁을 냅니다. 그래서 나온 행동이 ‘얌전’이요 ‘착실’입니다. 건강해서 착실하면 좋습니다.  그러나 상처로 인한 얌전함과 착실함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상처가 있는 사람은 자기의 삶을 자기가 살지 못하고 상처가 주인이 되어서, 어두운 세력이 주인이 되어서 살아갑니다. 그런 사람은 어디에 가나 적을 만듭니다. 이러한 목사는 교인을 적으로 만듭니다. 멀쩡한 교인을 환자로 만듭니다. 제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만일 저와 같은 사람이 있다면, 저와 같은 목회자가 있다면 저와 같은 삶을 살지 말라고 간절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37세가 되어서야 미국 교수로부터 결정적인 선고를 받고 그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6개월 동안 치유 그룹에 들어가서 그 곳에서 사랑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저는 살아있는 성서의 말씀을 경험했습니다. 거기서 저는 예수님이 살아 계신 분이라는 사실을, 그 놀라운 사랑을 통해서 깨달았습니다. 저를 위해서 울어 주고, 저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고, 저와 함께 춤추고 찬양하는 치유 그룹의 공동체 속에서 저는 새로운 세상을 맛보았습니다. 37세가 되어서 저는 한없이, 한없이 울었습니다. 첫 번째는 내가 지금까지 상처를 준 사람들을 생각하며 너무나 가슴 아파서 울고, 두 번째는 억울하고 분해서 울었습니다. ‘이게 웬일인가! 37세까지 내가 내 삶을 제대로 못 살았으니…….’

37세가 되어서 새로운 눈이 떠지는데 세상이 그렇게도 멋있어 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세상이 참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사람이 무서운 존재가 아니라 사랑스럽고 정다운 존재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아버지를 찾았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1학년 때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저를 사랑했음을 알았습니다. 12세에 어머니를 잃어버린 우리 아버지의 삶, 아버지도 어디로 가버리고, 할아버지도 어디로 가버리고, 그렇게 불쌍하게 자란 우리 아버지가 우리들에게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그 삶이 눈에 보여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무서운 우리 아버지가 우리를 사랑했다는 증거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전까지는 이 세상에서 제일 저주의 대상이 아버지였습니다. 저는 아버지 때문에 이렇게 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만나고 새로운 세상을 보면서 눈이 떠졌습니다. 아버지도 저를 사랑했다는 걸 알았습니다.

대표적인 증거가 있습니다. 우리 섬 마을에는 여름마다 아이들이 모여서 운동회를 합니다. 운동회를 하면 점심시간에는 부모님들이 음식을 준비해 와서 자기 아이들을 모아 놓고 점심 식사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집은 아무도 안 나옵니다. 어머니는 들에 나가 계시니까 형과 저는 언제나 운동회 때 점심시간이면 집에 들어가서 밥을 먹고 나와야 하는 것을 당연한 사실로 알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4학년 여름 운동회 때 점심시간이 되어서 집에 가려고 운동장을 벗어나려고 하는데 저쪽에서 아버지가 광주리를 들고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다가오니까 형도 얼어버리고 저도 얼어버리고 둘 다 ‘아버지’란 말이 안 나오니까 가만히 서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아버지가 우리 앞까지 다가오시더니 우리에게 광주리를 내밀면서 “너희들 먹으라고 사왔다.”라고 하셨습니다. 그 광주리 안에는(지금도 분명히 기억합니다.) 참외가 다섯 개 들어 있었습니다. 그 참외를 주고 돌아가셨는데 그 참외를 사려면 우리 집에서 1킬로미터를 걸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곡식이 아니면 돈을 주고 사와야 합니다. 그것을 아버지가 우리들에게 주고 간 기억이 납니다.

그건 분명히 사랑이었습니다. 누가 뭐래도 그건 분명히 사랑입니다. 아버지가 마음속으로 너무나 심한 상처를 입은 분이라 우리들에게 다정하게 대해 주지 못한 것이지, 분명히 사랑했다는 증거입니다. 그것이 깨달아지면서 서른 일곱 살에 “참외 다섯 개, 참외 다섯 개, 이건 아버지의 사랑이다.”하고 통곡을 하였습니다. 미국 아이들은 참외 다섯 개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 모릅니다. 방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면서 “참외 다섯 개 이건 사랑이야. 이건 사랑이야! 내가 아버지를 잘못 알았어!”하는데 미국 친구들이 참외 다섯 개가 무슨 이야기냐고 해서 제가 그 사유를 이야기해 주었더니 저보다 더 상처받은 그놈들이 저를 끌어안고 엉엉 울었습니다. 저는 서른 일곱 살이 되어서야 아버지를 다시 만났습니다.

어머니도 우리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신 행동이었는지는 알지만 어머니의 행동도 우리들에게는 너무나 큰 상처를 주었습니다. 몸이 약한 저와 옆집의 동갑인 애, 그놈보다 내가 일을 못한다고 풀을 베어도 제대로 다 못 벤다고, 그 아이 때문에 내가 당한 일을 생각하면 기가 막힙니다. 6~7년을 그렇게 당하는데 그게 바로 마음속에 깊은 상처가 되어서 더 이상의 삶을 살 수가 없도록 했습니다.

어머니도 다시 찾았습니다. 제 나이 서른 일곱 살이 되어서야 어머니를 다시 찾았습니다. 치유받기 전에는 어두운 상처가, 상처의 응어리가 그 사람 마음 속에서 그 사람을 지배할 때는 눈이 멀어 있습니다. 사랑인지 미움인지 구별하기 어렵게 만듭니다. 그러나 이 응어리가, 상처가 정리되고 나면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저뿐이 아닙니다. 이것은 공통적인 해석입니다. 제가 상처를 치유받고 6개월 만에 집에 들어와서 아내에게 한없이 울면서 “여보, 미안해! 여보, 미안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우리들의 마음속에 어두운 그림자가 사라지면서부터 그 무엇인가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저는 이런 현상을 많이 봅니다. 어떤 남편이 치유함 받고 난 후에 자기 아내를 끌어 안고 통곡하는데 “여보, 당신 얼굴이 웬일이야! 주름살이 웬일이야! 호강 한 번도 못시켜 주었는데, 그 곱던 얼굴에 주름살이 웬일이야!”합니다. 그 주름살이 어제 오늘 생긴 것입니까? 아닙니다. 오래 전부터 생긴 것이지만 한 번도 그걸 눈여겨 본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치유함 받고 나니까 그것이 보이는 것입니다. 치유함 받으면 이상한 현상이 생기는 데 눈이 떠집니다. 새로운 사실을 보기 시작합니다.

어떤 여자 집사님은 집에 들어가기를 싫어합니다. 그래서 왜 안 들어가냐고 물으니까 ‘물건’ 보기 싫어서 안 들어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아내가 무슨 물건이 있는데 안 들어가냐고 물었더니 자기 남편이 최 집사인데 최 잡시라는 물건 보기 싫어서 안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이 여자 집사님이 6개월 동안 치유 그룹에 들어가서 엄청난 자기 마음속의 응어리를 정리해 내더니 한없이 울었습니다. 우리 그룹에 자기 남편이 옆에 있는데 그 옆에 앉은 물건을 계속해서 쓰다듬었습니다. 그러면서 한다는 이야기가 “이 남편을 나에게 주신 하나님께 너무 너무 감사해요. 목사님! 세상이 왜 그렇게 아름다운 겁니까? 지나가다가 풀잎 하나만 봐도 왜 이렇게 좋은 겁니까?”였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속에 만일 저와 같은 어두운 상처의 그림자가 있다면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세상을 살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 다시 한번 제가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성공적인 목회자가 되고 싶습니까? 유명한 목회자가 되고 싶습니까? 신바람 나는 목회를 해보고 싶지 않습니까? 유명한 목회자가 되고 싶습니까? 신바람 나는 목회를 해보고 싶지 않습니까? 마음은 원이로되 그렇게 안 되는 목회자가 만일 이 자리에 계시다면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뭘 모르기 때문입니다. 알면 세 살 먹은 어린아이도 할 수 있는 그런 일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제 이론을 말씀드리면 사람은 자동차와 똑 같습니다. 모든 구조가 똑같습니다. 만일 목사님을 자동차라고 비유해 보면 많은 목사님들이 자동차를 몰지 않습니다. 자동차라는 이 물건은 안에 들어가서 시동을 걸고 액셀러레이터를 밟고 신바람 나게 달리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목사님들이 ‘자기’라는 자동차를 몰지 않고 있습니다. 밖으로 나와서 자동차를 뒤에서 밀고 다닙니다. 어쩔 때 “왜 그렇게 사세요? 자동차를 왜 밀고 다니세요?”라고 물으면 “자동차는 밀고 다니는 것 아닙니까?”라고 합니다. 자동차를 밀고 다니는 목회자! 그런데 간혹 가다 보면 자동차 속에 들어가서 시동 걸고 액셀러레이터를 밝고 신나게 달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여러분이라는 자동차를 이렇게 내주셨을 때 어떠한 몇몇 사람만 차 안에 들어가서 시동을 걸고 달리게끔 하셨나요? 하나님은 그렇게 불공평하신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이라는 자동차를 이 땅에 주셨을 때는 차 안에 들어가서 시동 걸고 달리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병아리들 속의 독수리와 똑같습니다. 자동차를 뒤에서 밀고 다니는 목회자! 이런 목회자한테 저는 이런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피곤해요. 그리고 못 해먹겠어! 아이고 죽겠어! 왜 그렇게 힘들어? 왜 사람들이 귀찮지? 왜 그렇게 짜증이 나나!”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나이 많은 목사님이 자기 아들한테 “얘야! 빨리 일어나서 교회 가야지.”라고 하니 아들이 “교회 가기 싫어요.”라고 합니다. 한참 후에 “일어나! 빨리 일어나서 교회 가야지.”하니 계속 교회 가기 싫다고 합니다. “왜 교회를 안 가!”라고 했더니 “교회 안가는 이유가 있어요. 사람들이 싫어요! 교회가 재미가 없어요! 교회가 시시해요!”라고 이 아들이 누워서 세 가지 이유를 댑니다. 그러니까 이 나이 많은 목사가 하는 말이 “네가 교회 가야 하는 이유 세 가지를 대겠다. 네가 교회에 가야 하는 것은 네 의무(?)야. 두 번째는 네 나이 지금 마흔 다섯이야. 세 번째는 네가 그 교회의 담임목사야. 그러니까 네가 교회에 가야하는 거야!”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혹시 이런 목사가 여기에도 있지 않습니까? 자기가 담임목사이면서도 “나 교회 싫어, 나 교회 사람들 싫어, 나 그 사람들 재미없어, 나 피곤해, 나 힘들어…….” 누가 이러한 이야기를 합니까? 자동차를 밀고 다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라는 자동차를 주실 때에 여러분 안에 창조적인,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엔진을 이미 장착해 주셨습니다. 그 엔진의 시동을 걸면 역사는 일어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인생을 성공적으로 사는 사람들, 의미 있게 사는 사람들, 보람있게 사는 사람들, 전부 다 엔진 시동을 걸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기적을 일으키는 엔진이 있다는 사실을 지금 증명해 드릴까요? 2000년 1월 1일 밤 11시 30분에 방영한 프로그램인데 보신분 계십니까? 젊은 분인데 대학교수로 최면 심리학 교수입니다. 앞에 여자들이 20~30명이 앉아 있었는데 아무나 나오라고 했더니 40대 초반의 여자가 나왔습니다. 그 여자를 의자에 앉혀 놓고 그 교수가 최면을 걸었습니다. 최면을 걸고 난 후에 그 여자에게 물었습니다. “4455×4927이 뭡니까?” 그 여자가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계산이 나옵니다. 또 “2955×4627”이 뭡니까? 또 말이 떨어지자마자 대답이 나옵니다. 이건 전자 계산기입니다. 이 여자가 최면에서 깨어난 후에 뒷방에 가서 다시 질문을 합니다. “21×3은 뭡니까?” 그러니까 계산을 못합니다. 연필을 꺼냅니다. 여러분! 이 여자에게 최면을 걸고 있는 몇 분 사이에 “4455×4927”하니 대답이 그냥 나옵니다. 어디서 귀신이 들어왔나요? 아닙니다. 그 여자 안에 하나님께서 이미 장착해 주신 엔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엔진이 시동이 안 걸리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이 놀라운 엔진이,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엔진이, 지금도 여러분 안에 있는 그 엔진이 시동이 안 걸리고 있습니다. 왜 시동이 걸리지 않는 것입니까? 그것은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상처 때문입니다. 이 상처는 하나님께서 이 땅에 주신 인간을 인간답게 살지 못하도록 어둡게 만드는, 일종의 사탄의 세력이라고 저는 봅니다. 어린 시절부터 자라오면서 우리들이 90% 이상 들어온 이야기와 보아온 환경이 전부 다 ‘인간은 그래’, ‘너 왜 그러냐?’, ‘너 욕하지 말아라.’ ‘너 그것 하지 말아라.’ 등이고, 그러면서 수시로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누구는 안 그러는데, 너는 왜 그러냐?’하는 식으로 대부분 부정적인 이야기만 듣습니다. 이러한 부정적인 이야기만 듣다 보니 그러한 환경 속에서 우리는 어두운 세력과 상처에 최면을 당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라오는 환경 속에서 우리를 어둡게 만드는 상처의 환경과 말에 의해서 우리가 이렇게 어둡게 살고 있다는 증거가 있습니다. 예비고사-지금은 수능고사로 바뀌었지요?- 결과가 발표되고 대학을 선택해야 하는 1월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예비고사 성적이 발표되고 난 후에 저는 수유리의 한신대학원 안의 교수 사택에 살고 있었는데 연구실이 캠퍼스에 있습니다. 제 연구실에 들어 와서 앉아 있는데 누가 문을 두드려서 “들어오세요.”했는데 기절초풍을 했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은 한신대학원에서 70m 밖에 안 떨어져 있는 그 유명한 화계사의 등치가 엄청나게 큰 스님이 회색 겨울 적삼을 입고 문을 들어서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깜짝 놀라 일어나서 “아니 웬일이세요?”하는데 그 스님이 “아니, 날 이렇게 밖에다 세워둘 거예요?”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미안한 생각이 들어 “들어오세요. 앉으세요.” 해놓고는 또 물었습니다. “아니 웬일로 스님이 신학교에 오셨습니까?”했더니 스님이 “교수님 도움을 좀 받고 싶어서 왔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무슨 도움인데요?” “지금 우리 화계사에 남자 아이가 하나 와 있는데, 죽을 것 같습니다. 눈만 뜨면 자살할 것 같아요. 그래서 이 아이를 좀 도와달라고 왔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니 자살할 것 같으면 화계사에서 처리를 해야지요. 왜 신학교로 찾아왔소?” 그랬더니 그 스님이 웃으면서 하는 이야기가 “교수님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도움을 구하러 온 겁니다. 한 중생을 살려야 할 것 아니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스님과 화계사 방안을 제 생전 처음으로 들어갔습니다.

들어가 보니 머리를 빡빡 깎은 남자아이가 오들오들 떨고 있는데 보니까 이상했습니다. 한참 이 얘기 저 얘기 물어 보았습니다. 이 아이가 화계사에 며칠 전에 들어와서 심부름시키고 밥만 먹여 달라고 했답니다. 가만히 보니까 이 애가 예비고사를 본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너 예비고사 봤지?” 그랬더니 깜짝 놀라면서 “네” “너 몇 점 맞았어?” 그랬더니 170점 맞았다고 했습니다. “너 왜 여기 들어왔어?” 그랬더니 서울대학에 못 가면 죽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야! 170점 맞아서 어떻게 서울대학을 가?”라고 했습니다. 그 아이는 막무가내로 자기는 죽어야 된다고 했습니다. 자기 부모들이 서울대학에 못 가면 죽으라고 한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애는 종로학원에 다니는 삼수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모의고사를 보면 열 번이든 스무 번이든 360~370점을 받았다고 합니다. 한번도 360점을 내려가 본 적이 없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본고사만 보면 170점이 안 넘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면 본고사시험 4일 전부터 땀을 쭉쭉 흘리면서 잠을 못 자는 것입니다. 4일 잠을 못 자면 보통 사람은 다 정신병에 걸리는데 이 아이는 정신병도 안 걸리고 시험을 봤습니다. 3년을 연속 그랬던 겁니다. 왜 그럴까요?

이 아이는 어떤 이상한 세력에 의해 최면을 당해 있습니다. 이 아이가 중학교 1학년 2학기 때에 몸이 아파서 학교 시험을 못 치른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보니 성적이 62명 중에 62등이었습니다. 그런데 교체된지 얼마 안된 담임 선생님이 종례 시간에 들어오더니 아무 소리 안하고 “꼴등한 새끼 나와!”하니까 아무도 누가 꼴등한지를 모르는 것이었습니다. 이 애도 자신이 꼴등한 것을 몰랐습니다. “나와, 나와!”하더니 안되니까 이름을 부르면서 “너 이 새끼 나와!”라고 하였습니다. 이 애가 불려나갔는데 선생님이 주먹을 쥐더니 머리를 톡톡 치면서 “이 새끼야, 꼴등을 해! 너는 시험 가지고 네 인생 꽃 피긴 틀렸어, 이 새끼야!”라고 하면서 톡톡 치는데 이 애가 넘어져 버렸습니다. 밀리다가 넘어지니까 아이들이 와 하고 웃어 버렸는데 그때 이 아이는 기절을 한 것입니다. 그 다음부터 이 아이는 본고사 날이 돌아오기 3~4일 전부터 불안에 떨며 식은땀으로 잠을 못 자게 된 것입니다. 그때까지 이 세력이, 그 말에 의해서 얻어진 세력이 이 아이를 지배해 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듯 어둡게 살아가는 사람, 자신의 삶을 제대로 못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러한 세력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열다섯 살 때부터 서른 살까지 여자를 무서워하는 병에 시달려왔습니다. 이성 공포증! 그런 게 달리 오는 게 아닙니다. 상처를 입은 사람들은 특별히 어두운 세력의 지배를 빨리 받도록 되어 있습니다. 중학교 2학년 1학기이던가 제 나이 열다섯 살 때에 하숙집에서 고등학교 다니는 누나 친구들이 웃으면서 이야기를 하는데, 어느 한 여학생이 제가 옆방에 있는 것도 모르고 제 이름을 부르더니 “태기는 못생겨서 여학생들이 아무도 안 따를 거야!”라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부터 여자가 무섭기 시작했습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 3년 동안을 여학생만 나타나면 숨었고 저쪽에서 여학생이 나타나면 길이 아무리 멀어도 돌아서 갔습니다. 이게 삶입니까? 나이 서른에야 비로소 아내를 통해서 제 자신을 조금씩 발견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제가 잃어버린 15년이 지금도 원통합니다. 누가 그 이야기를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소송이라도 걸고 싶은 생각이 간절합니다.

여러분! 여러분들도 뭔가 여러분들이 원하는 삶이 안되고 있는 것은 어두운 상처의 세력이 여러분을 붙잡고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합니다. 거기서 벗어나야 합니다. 눈떠야 합니다. 일어나야 합니다.

여러분! 벗어나야 합니다. 자 그러면 어두운 세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비결은 무엇이겠습니까?

첫째,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생명의 놀라운 역사를 창조할 수 있는 그 엔진이 현재 내 안에 들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분명히 지금 들어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주님을 만나서 새로운 눈을 뜨게 된다면 분명히 여러분에게는 그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그 생명의 엔진! 기적의 엔진이 발동만 걸리면 신이 납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아무리 일을 많이 해도 피곤치 않습니다. 재미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엔진이 가동되기 때문입니다. 이 엔진만 가동되면 교회를 열 개 해도 상관없습니다. 엄청난 기적 같은 힘을 그 엔진이 발휘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둘째, 행복한 환경은 내가 만들어 가야 합니다.

놀라운 사랑을 체험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여러분들이 만들어 가야 합니다. 주위에서 다른 사람이 여러분들을 사랑해서 여러분들의 엔진이 가동되기를 기다리지 마십시오. 그 사랑, 행복한 환경은 자기가 만들어 가야 합니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북쪽에 사는 부자가 남쪽으로 여행을 갔습니다. 여행을 갔더니 여름에 남쪽 사는 섬의 어부가 나무 밑에서 하루종일 빈둥빈둥 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부자가 답답해서 “아니 지금 고기 안 잡고 뭣하고 있는 거요?”라고 물었더니 어부가 “오늘 먹을 것은 잡아 놓았는데요?”하였습니다. “고기 더 잡으면 되잖아요?” 그랬더니 “더 많이 잡아서 뭘 하게요?” “더 잡으면 돈 벌지.” “돈 벌어서 뭘 하게요?” “편안히 살잖아요.” 그러니까 그 어부 이야기가 “지금 나는 어떤데요?”라고 하더랍니다.

여러분! 행복은 외부적인 조건이 해결된다고 해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교인이 한 명 있을 때 행복하지 못한 목사는 교인이 천 명 있어도 행복하지 못합니다. 행복은 지금 이 순간에 여러분 자신이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나 불행이 습관화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여러분들은 행복을 만들어 내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네덜란드에 이러한 속담이 있습니다. “행복한 사람치고 심술궂은 사람없다.” 하버드 대학교에서 세계 속담을 연구하는데 이 네덜란드 속담을 연구해 보니 의학적으로나 과학적으로 분명하더랍니다. 행복한 사람은 화를 안 냅니다.

자! 정신적으로 생기는 병이 어느 정도인지 살펴봅시다. 우리가 병원에 가서 환자들을 조사해 보면 정신적인 문제로 병이 생긴 환자가 87% 정도 됩니다. 암을 비롯한 거의 모든 병이 정신적인 문제로 인해서 생기는 것입니다. 정신적인 문제로 인하여 생기는 모든 병은 그 원인이 불행합니다. 그런데 의사들은 무엇만 취급합니까? 겉으로 나타난 증상만 취급하려고 합니다.

어떤 여자가 유방암에 걸려서 수술을 했습니다. 초창기에 수술해서 걱정 없다고 생각했는데 8~9개월 후에 또 다른 곳에 암이 생겼습니다. 불행이 원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87%의 거의 모든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유일한 약은 행복입니다.

흔히 많은 분들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부모들 이야기가, 우리 아이들을 결혼시키고 나면 행복할 것 같다고 합니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입니다. 제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 수없이 많은 유학생들이 말하기를 “박사학위 받아서 한국에 가서 교수하면 행복할 것 같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 중에 한 사람도 행복한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 교인이 500명만 되면 나는 행복할 거 같아!”라고 생각하지만 절대로 행복하지 않습니다. 행복은 지금 이 순간에, 내가 마음속에서 만들어 내지 않으면 안되는 법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불행의 연습이 너무나 잘 되어 있습니다. 불행의 연습이 철저히 잘 되어 있기 때문에 조금만 하면 불행할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습관을 바꿔야 합니다. 습관을 바꾸는 데 며칠이 걸리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날짜는 21일입니다. 21일밖에 안 걸립니다. 본격적으로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 21일 동안만 날마다 명랑하게 살아보십시오. 어떤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도 미친 듯이 명랑하게 한번 살아 보십시오. 둘째, 21일 동안 사람들을 대할 때마다 다정하게 대해 보십시오. 셋째, 21일 동안 다른 사람의 결점이나, 단점은 말하지 마십시오. ‘저 사람은 왜 저럴 수밖에 없을까?’라고 생각하고 넓은 아량으로 한번 봐 주십시오. 넷째, 여러분들이 앞으로 원하는 상이 있을 것입니다. 그 상을 21일 동안 미래에 놔두지 마시고 지금 끌어들이십시오. ‘내가 앞으로 이러한 목회를 하고 싶고 이렇게 살고 싶다!’라고 생각하면 그 세계를 앞으로 당겨 오십시오. 저는 이것을 ‘외상’이라고 합니다. 지금 내가 그런 환경에 살고 있지 않지만 그 환경이 지금 내 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상상 속에서 살아 보십시오. 21일 동안만 그렇게 살아 보십시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히 11장 1절)라고 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미래에 있는 이야기를 미래에 놔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끌어다가 지금 현실의 삶으로 살라는 이야기와 일맥 상통하는 것입니다.

저도 제 주위 여건이 그렇게 행복한 것만은 아닙니다. 너무나도 스트레스 쌓이는 환경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저의 행복의 사건을 만들며 삽니다. 주위의 여건이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상상 속에서 스스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이 몇 가지가 있습니다. 은퇴하고 난 3년 반 후에 나에게서 일어날 그 세계를 지금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날마다 신바람이 납니다. 그 미래! 앞으로 일어날 그 세계를 끌어다가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엔진! 이 기적의 엔진은 상상을 하고 있느냐 실제 경험하고 있느냐를 분간하지 않습니다. 미래의 것을 끌어다가 내가 지금 즐기면 내 엔진은 그대로 가동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 그 엔진이 조금씩 가동되고 있는 것을 느낍니다. 지금 그 현실이 펼쳐져서가 아니라 미래의 것을 미리 끌어다가 즐기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 18평짜리 집에 살고 있는데 꼭 굴 속 같습니다. 그런데 그런 데서 안 삽니다. 잠만 잡니다. 그러면 어떤 세계 속에서 사는 줄 아십니까? 거기 바로 누워서도 집을 하나 짓습니다. 고향 섬에 짓습니다. 섬의 바닷가에서 조금 언덕으로 올라가면 바다가 보이는 멋있는 집을 지었습니다. 저 혼자 상상으로……. 그리고 날마다 거기서 삽니다. 여러분 서울에서 100평짜리 아파트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한번 물어 보십시오. 행복한지 행복하지 않은지! 그런데 그렇게 사나 눈감고 내 고향 섬 바닷가에 상상 속에서 지어 놓은 집에서 사나 마찬가지입니다. 오히려 제가 더 행복합니다. 돈 안 드는 집에서 걱정 없이 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살다보면 뭐가 달라지는 줄 아십니까? 하나님이 주신 기적을 일으키는 엔진이 내 신경 조직과 내 세포를 전부 다 구성하고 있는 데 그게 기적을 일으키도록 달라져 버립니다. 그러면 건강이 좋아지고 집중력이 좋아집니다. 주위의 세계가 행복해서 좋습니다. 여러분! 꿈을 미래에 두지 마십시오. 21일 동안만 철저하게 한번 끌어다가 살아 보십시오. 하루에 세 번 웃어 보십시오. 전철을 타든 무엇을 타든 길을 지나가다 가도 “안녕하세요?”하고 인사하며 웃어 보십시오. 그러면 사람들이 “저 사람이 미쳤나?”할 것입니다. 어떤 이야기를 들어도 상관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하루에 세 번 이상 교인들을 향해서, 집 식구들을 향해서 미소를 지어 보면서 21일 동안만 살아 보십시오. 사람의 습관이 바뀌는 데 21일이 걸립니다.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난 아이가 이 세상의 기후에 적응하는 기간이 3주라고 합니다.

여러분들이 지금까지는 불행에 길들여져서 살아 왔을지라도 철두철미하게 21일동안만 위에서 말한 것처럼 살면 하나님께서 주신 기적을 일으키는 엔진이 바뀌어지도록, 또 행동을 만들어 내는 엔진으로 달라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21일 동안에 어떤 불행한 사건이 일어나도 거기에 여러분의 생각을 가미하지 마십시오. 불행한 사람들은 어떤 사건이 일어나면 거기에다가 자기의 생각을 가미해서 더욱 불행해집니다.

어떤 처녀가 남자와 3년을 사귀고 결혼까지 약속하였습니다. 그런데 한 두어 달 후에 남자로부터 편지를 받았는데 청첩장이었습니다. 이 처녀는 너무도 어이가 없었습니다. 그 다음에 이 처녀가 어떻게 된 줄 아십니까? ‘대한민국에 믿을 놈은 한 명도 없어!’하고는 몇 년 동안을 남자하고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보십시오. 이 여자를 대한민국의 2천만 남자 가운데 배반하고 떠난 남자가 몇 명입니까? 단 한 명뿐인데 왜 거기다가 자기 생각을 뒤집어씌웁니까? ‘대한민국에 믿을 놈의 남자는 한 명도 없어!’라고. 이건 자기 생각입니다. 어떤 사건에다가 자기의 생각을 가미시키지 말라는 것입니다.

1998년 IMF사태가 일어났을 때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7월 한 달 동안 중소기업 사장 몇 명이 자살한 줄 아십니까? 129명입니다. 무슨 생각으로 그들이 자살을 했습니까? 자기 회사가 부도가 났습니다. 부도났는데 거기다가 자기 생각을 뒤집어씌웁니다. ‘이제 난 끝이야!’ 끝은 무슨 끝입니까? 그러면 정주영은 백 번을 죽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끝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의 교회에 어떤 문제가 생겨도 그건 끝이 아닙니다. 거기에다가 여러분 생각을 뒤집어씌우지 마십시오. 그리고 불가능한 일이 일어났을 때는 생각도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들로 말미암아 여러분들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사건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지난 5월 11일이 석가탄신일이었습니다. 그때 서울의 많은 교회들이 야외로 나가서 체육대회 등 소풍을 구상했습니다. 그런데 그 날 하필이면 비가 왔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하루종일 기분 나빠서 하는 말이 “왜 하필 오늘 비가 오는 거야?”하는 것입니다. 아니 비 내리는 걸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까? 그런 사건 앞에서는 ‘에라 모르겠다.’하고 지워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 힘으로는 불가능한 사건을 그렇게 물고 늘어지는, 그래서 잠 못 이루는 성격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겁니다. 21일뿐입니다. 21일만 여러분들이 정말 착실하게 이와 같이 한번 살아보면 여러분들에게는 엔진이 다르게 돌아갈 것입니다.

셋째,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치유 받고 문제가 해결되었는데도 ‘멍’해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맥이 탁 풀려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목표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 기적을 일으키는 엔진은 목표가 있을 때만 발동이 걸리는 것입니다.

목표! 여러분들이 추구해야 될 목표를 분명히 정하십시오. 그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생각을 절대로 버리지 마십시오. 목적은 버리지 않고 가만히 붙들고 늘어지면 이루어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특별히 그 목적을 멀리 놔두지 말고 끌어다가 ‘지금’ 내가 그 목적 안에 깊이 한번 빠져보면서 기도해 보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이루어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여러분들에게 부탁할 것이 있습니다.

목사님들! 행복 연습하려면 잘 웃으십시오. 웃음처럼 우리 사람들을 좋게 하는 것이 없습니다. 사람이 암에 걸린다는 것은 이미 3년 전에서 9년 전부터 암세포 하나를 만들어 내려고 열심히 살아온 겁니다. 그러니까 내게서 암이 발생했다는 사실은 이미 내가 그 암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철두철미하게 살아 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암이 생길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 ‘와’하고 배꼽 잡고 웃어 버리면 이상하게 암이 사라집니다. 그 웃는 기간동안 굉장히 많은 생명 에너지가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웃음은 신비의 약입니다.

제가 미국에서 공부할 당시 주임교수였던 놀만 커슨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핵 반대 위원회의 위원장이요, 윤리학 교수입니다. 그런데 그가 불치병에 걸렸습니다. 시한부 인생으로 생명이 8~9개월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놀만 커슨은 병원을 잘 알고 현대 의사들을 잘 알기 때문에 하는 이야기가 “난 병원에선 안 죽어!”하고 강의를 모두 중단하고 산으로 올라갔는데, 진통제와 세 상자의 배꼽 잡게 웃기는 비디오 테이프만 가지고 갔습니다. 가서 진통제 먹고 4시간 동안 웃으려는 마음으로 비디오 테이프를 보고 배꼽 잡고 웃는데, 이상한 현상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마음이 웃으면 진통이 더 늦게 오고, 적게 웃으면 진통이 빨리 오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는 더 많이 웃으니까 진통이 6시간 만에도 오고 8시간 만에도 왔습니다. 12시간 만에도 오고 나중에는 하루 만에도 왔습니다. 그러다가 6개월 동안 진통이 오지 않기도 했습니다. 놀만 커슨이 건강한 몸에 대해 아무 연구가 없을 때 스텐버드 의과대학, MIT 의과대학 등에서 자기 기록을 토대로 도대체 웃음이 무슨 작용을 하는지 연구를 했습니다. 3년 만에 결과가 나왔습니다. “인간의 병을 치유하는 데에 하나님께서 주신 최고의 약이 웃음이다.” 그러므로 많이 웃으시기 바랍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지난번에 많이 우셨다는데 웃음과 울음, 그것은 신비의 약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신비의 약입니다. 절대로 웃음을 참지 마십시오. 울음을 참지 마십시오. 목사님들! 남자라고 해서 ‘남자가 어떻게 울어!’하고는 슬픈 드라마를 보면서도, 슬픈 이야기를 하는데도 이를 악물고 안 운다면, 그것은 “나는 오래 안 살고 빨리 죽을래요!”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그리고 우리 목사님들께 부탁합니다. 이 민족을 살리기 위해서 여러분이 살아나야 합니다. 여러분이 건강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건강해야 교회가 건강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이 잘 놀아야됩니다. “나는 내 양들을 위해서 24시간 바쳐!” 그러지 마시고 잘 쉬고 잘 놀 수 있는 목회를 하십시오. 정말 기분 좋게 찬양하면서 춤을 출 수 있는 목회를 하십시오.

제가 감명 깊게 경험한 사건이 있어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지금 목회하고 있는 목사님들을 만나보면 “당신 오래 못살아!” “당신은 꽤 오래 살겠구만!” “당신 정도면 돼!” 적어도 이 정도는 압니다. 그런데 강서구 쪽에 있는 나이가 50대 초반인 어느 목사님이 있는데 아무리 몇 년 내에 죽을 것 같아 보였습니다. 어떤 목사가 주로 오래 못 사는지 아십니까? 너무 거룩한 목사! 어디 가도 웃을 줄도 모르고 울 줄도 모르고 자기가 하나님 노릇 하려고 하는, 실수 안 하려고 하는 목사는 오래 못 삽니다. 그리고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그렇게 유지하다 보면 오래 못 살고 죽어 버립니다. 저는 미국에서 정신병원에 있으면서 수많은 목사들이 이러한 이유로 정신병원에 들어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잘 놀 줄만 알면 절대로 병에 안 걸리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이 목사님이 계속 5~6년을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상하다고 생각하던 차에 나중에야 마음을 서로 드러내어 알게 되었는데 그 목사님이 사는 방법이 있었습니다. 잘 노는 것이었습니다. 서재가 있는데 침실에 들어가려면 서재를 지나가야 갈 수 있습니다. 주일 예배가 끝나면 서재를 잠그고 침실에 사모님과 둘이 들어갑니다. 그리고 침실 문도 잠굽니다. 그리고는 둘이 옷을 벗고 “내게 강 같은 평화” 아니면 “예수님이 좋은걸 어떡합니까?” 틀어놓고 춤을 추는데 하여튼 땀이 쭉쭉 빠지도록 춤을 춥니다. 그 목사님은 그때 춤을 추면서 많이 웃는다고 합니다. 보면서 웃음을 참지 못한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게 그 목사님과 사모님이 사랑하는 비결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웃음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특효약으로서 우리의 영을 아주 강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웃는 사람은 정신병에 안 걸립니다. 운동을 안 해도 웃기만 하면 운동 이상의 효과가 있습니다. 영적으로 강하게 해주면서 정신적으로 신체적으로 아주 특이한 효과를 가져다 줍니다. 잘 놀고 웃고 우는 삶을 여러분들은 생활 습관으로 만드십시오. 그러면 여러분들에게는 놀라운 기적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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