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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재속프란치스코 야고바형제회 원문보기 글쓴이: 세베리노
일기불순.....
9월 트레킹은 변화가 많았던 나날이었습니다. 세째주 토요일, 추석과 이탈리아 아씨시 순례를 떠나시는 형제 자매님들께서 많으셔서 일정을 앞으로 당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참가인원에 대한 파악을 위하여 총무님은 동분서주... 그리고 어렵사리 결정된 인원은 가을장맛비 덕분에 분명 변화가 있을 것이라 예상했었습니다. 과연 몇 분이나 오실까? 예측을 하면서도 자신하는 숫자는 20명선이었습니다. 그동안 겪었던 경험상 판단으로 한 결과이므로 켈럽 조사 수준을 능가하는 예측이라는 자부심을 갖었지만 문제는 기상상태였습니다. 기상도를 구하여 앞에 놓고 세심하게 관찰한 후 그것도 못믿어 강릉예보관에게 전화를 합니다. 그리고 그동안 수없이 넘어 다녔던 태백산맥 줄기의 지형적 특성상 높새바람 영향으로 영동, 영서지방의 기상은 늘 구분됩니다. 새벽4시에 기상, 그리고 서둘러 도시락을 준비한 후 짐을 꾸리는 순간, 번개와 폭우가 동시에 허공을 가릅니다. 그래도 동요 없이 짐을 싸들고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여 1층 현관으로 나섰습니다. 그리고 약속 장소인 반포남단 현대증권 앞 차가 도착하자 이미 4명의 자매님들께서 차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계속 오시는 야고바 트레커들 ... 예정시간 30분을 넘기며 한분이라도 더 모시고 가려는 마음으로 기다렸지만 예상한 인원 보다는 한명 더 적은 19명이 모였습니다. 가을 장맛비가 꼭 여름장맛비 같이 쏫아져 내리며
달리는 차창으로 달라붙는 빗줄기와 물폭탄 등등을 몰아내기 위하여 와이퍼는 너무 바쁘고 분주했습니다. 빗속을 뚫고 도착한 대관령 옛길 시작점, 이곳 역시 가을장맛비가 꾸준히 내리고 있었습니다. 새해벽두에 찾았을 때 흰눈이 펑펑 내렸었는데 오늘은 근사한 물줄기로 하느님께서 환영해 주십니다.
야고바 트레커들의 특유의 기질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걷지 않는 자는 앞으로 나갈 수 없다는 신념입니다. 먼저 스스로 더 한발자국 다가 가는 마음, 바로 이 마음이 하느님을 경애하는 마음과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 원동력입니다. 일기가 불순한 가운데 차안에서 칠락묵주 기도를 그리고 대관령 옛길 초입에서 시작기도를 다시 마음을 모으고 정성을 다해 기도를 드렸습니다.
기쁜마음으로 하느님께 향한 마음을 전하며 이어서 아름다운 숲길로 들어 섰습니다. 길섶 가장자리를 따라 핀 야생화들 물봉선화, 투구꽃, 들국화, 쑥부쟁이, 마가렛 등등이 자태를 뽐내고, 초록빛 향기가 가득한 숲속에는 하느님의 현존이 함께 하셨습니다. 숲 터널을 지나 양때 목장 울타리를 곁을 지나면서 빗속에서 느끼는 형제적 친교의 모습을 보면서 샷다를 눌렀습니다.평화의 상(像) 이 맺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시작된 트레킹, 오랜만에 참석해 주신 세실리아 자매님 너무 반가웠습니다. 제 컨디션을 찾으셨다니 축하 드립니다. 오랜만에 함께 동행 모두를 즐겁게 해 주셨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대관령 옛길은 아흔아홉 구비라했습니다. 걸어도 걸어도 끝이 없는 구비구비 돌아가는 산길 그 구비의 숫자를 셈하고 싶어 시작하지만 금새 잃어버릴 만큼 많은 구비길, 그래서 사람들을 꾀를 냅니다. 곳감 한 접을 등짐지고 오르면서 한 구비를 지날적마다 곳감 하나씩 먹고나니 맨 마지막 남은 것은 한알의 곳감, 그래서 그때서야 아흔 아홉구비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런 구비길을 셈하며 내려셨습니다. 평창군 대관령면을 지나 강릉시 성산쪽으로 넘어서자 빗발은 수그러들기 시작하였습니다. 저에 예상이 적중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깊은 산 숲속을 향하는 트레킹에 있어 가장 중요하게 챙겨야 할 상수칙은 안전입니다. 항상 저는 자신에게 묻습니다. 안전은 확보되어 있는가? 이 물음에 대한 응답을 하기 위하여는 세심한 주의를 기릴 필요가 있습니다.
기상조건은? 복장과 장비는? 트레커 개개인의 체력조건은? 행동식과 비상식량 준비는? 그리고 돌발상황 발생할 인자는? 있는가!
발생한다면 대처방안은? 이런 것들이 총체적으로 구성되어야 출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일기입니다. 여러 경로의 정보와 대관령 특성에 대한 경험에 의한 판단을 기준으로 9월 트레킹을 우중에도 진행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후로 나갈 수록 기상조건이 좋아진다는 사실은 체력회복에 좋은 결과를 줍니다. 그리고 우중 트레킹에서 느끼셨던 경험들을 기초로 세심하게 향후 우중 트레킹 참여 시 참고하셔서 잘 챙기시기를 당부 드리겠습니다.
매월당 김시습은 단종의 비극을 경험한 후 세상을 등지고 산천을 유람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다다른 서에서 동으로 들며 큰빗장을 여는 순간 광활하게 펼쳐지는 자연의 풍광앞에 서서 시를 한수 읖조립니다.
대관령 구름이 처음 걷히니
꼭대기의 눈이 아직도 남아 있네
양장처럼 산길은 함난도 한데
조도같은 역정은 멀기도 하네
늙은 나무 신당을 에워싸고
맑은 안개 바다 산에 접했구나
높이 올라 글을 지으니
풍경이 사람의 흥을 돋우네
이국희 모니카 회장님은 지금 매월당의 시흥(詩興)에 도취되어 삼매경의 나락으로 빠지는 순간입니다.
구비마다 설치된 판화와 시, 그리고 불망비 등등을 보고 공감하며 드디어 반정에 도착하였습니다. 반정은 구 영동고속도로 대관령
길 중간에 있는 지명입니다. 반정(半程)이란 뜻은 대관령을 넘는 총 여정중(旅程中) 반을 넘겼다는 뜻에서 반정이라 합니다.
이 길을 내려서서 길을 건너면 바로 반정입니다. 조망테크가 있어 강릉 성산일대와 동해 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곳이죠.
지금은 빗줄기가 많이 수그러든 상태입니다. 반정을 알리는 커다란 돌비석 앞에 모여 반정까지 내려 섰다는 인증 촬영이 있었습니다. 트레커들의 모습이 무척 밝습니다.
오늘 점심식사 장소는 계획대로 라면 주막터 정자였습니다. 그러나 많은 트레커들게서 혈당수치가 자꾸 떨어진다는 채근에 계획을 바꿔 휴식 태크로 장소를 변경하였습니다. 나무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을 제외하고는 비는 끝친상태였습니다. 태이블을 붙여 자연 그대로 그 모습으로 옹기종기 모여 앉았습니다. 그리거 각자 준비한 도시락을 함께 나눠습니다. 트레커들은 함께 동행하면서 끝없는 나눔을 실천해야 합니다. 함께 걸으며 배려와 사랑의 나눔, 기도의 나눔, 먹거리의 나눔, 마음 나눔, 위로와 관심의 나눔,
신앙체험의 나눔, 성가의 나눔 등등 나눔을 통하여 자신을 성찰하는 시간을 갖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나눔은 집에 계신 가족들과 함께 이루워져야 합니다.
보기만해도 성찬입니다. 그리고 춥다하여 비상용 젯트보일를 꺼내 물을 끓여 커피를 타고 숭늉을 만들어 함께 나눴습니다. 라면을 끓이기에는 준비된 코펠이 작아 포기한 후...... 다음 일기가 불순한 트레킹 날은 양질의 라면으로 모시겠습니다.
식사후 기도 역시 중요한 기도의 순서입니다. 기도를 드린 후, 나머지 구비길을 걷기 위하여 다시 트레킹에 나섰습니다. 바람이 참 소슬하고 숲은 고요속에서도 간혹 바람이 일꾸는 힘에 따라 잎새들은 너울을 만듭니다. 붉은 적송인 금강송 자태가 군락을 이루며 원시적 튼튼함이 숲을 찾은 트레커들의 혼을 빼앗습니다. 아 ~ 낙락장송이로다~~
온전하게 살아 있는 극상림, 원시형태의 숲은 평화 그 자체였습니다. 트레킹내내 우리들은 분명하게 느껴습니다. 하느님께서 자연속에 숨결을 불어 넣어 주시고 우리들과 함께 현존하심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걷는내내 기쁨이 넘치고 은총으로 충만된 마음을 유지하게 됩니다. 숲길을 걷는 일은 그 자체가 평화이며 생존을 확인하는 즐거움입니다. 숲에서는 오름과는 달리 내림은 숨 마저 단순해져 평화의 결이 마음에 고요하게 스며듭니다. 숲의 청정한 공기와 푸르름처럼 온 세상 것들과 소통하며 아름다운 평화와 사랑으로 살아 가야겠다는 교훈을 이 원시의 숲 가운데에서 배우며 걸었습니다. 발목에 정숙한 평화가 깃드니 발품은 줄곧 경괘한 컨디션이 유지되어 걷는 일에 고단함이 묻을 겨룰이 없었습니다. 순례자의 발걸음은 어느시인의 시귓처럼 구름에 달가듯
야고바 트레커들의 걸음 걸이는 월광빛 걸음이었습니다.
어느 때는 짧고 어느 때는 긴 느림의 구비가 기다리는 대관령 옛길, 그러다 다시 급한 구비 길로 바뀌는 지형과 지세에 따라 몸은 변신해 가며 숲에 달라 붙습니다. 호젓한 내림 길에서 부터 웅장한 계곡 물소리를 들었습니다. 정숙한 침묵의 길이 사라진 그 곳에는 웅장한 환타지아성 음악같은 웅장하게 흘러가는 물의 노래소리는 수 많은 여울목을 지나며 만들어 내는 灘 灘 灘의 소리입니다. 그 소리는 나름 숲의 음율이 되어 숲의 모든 것과 조화를 이루며 남대천으로 흘러갑니다. 잠시 얕으막한 계곡으로 내려 섰습니다. 평창에서 시작하여 강릉 성산으로 걸어 온 자신의 발품과 마음의 품을 추수리기 위하여 잠시 계곡물과 마주 했습니다. 손을 담그자 신선한 맑은 기운이 손끝을 통하여 전신으로 퍼져듭니다. 그리고 물을 입술에 적시자 금새 갈증은 달아납니다. 그리고 솔향기가 코끝을 진저리치게 합니다. 아~ 이것이 바로 상쾌함이다. 저절로 탄성이 모아졌다가 숲속으로 숨어버립니다.
이 길 후반으로 갈수록 아름다운 비경의 계곡이 트레커들을 반기는 곳입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금강송이 지천입니다. 산신령에게 제물과 제주를 차려 놓고 제를 올린 후 벌목꾼의 우두머리는 어명이요! 소리칩니다. 그리고 도끼와 톱을 이용하여 금강송을 쓰러트립니다. 그리고 우마와 한강의 땟목을 이용하여 나랏님 사시는 한양성으로 이동후 궁궐의 재목으로 사용했던 금강송들... 금강처럼 단단하고 붉은 빛이 돈다하여 금강송 또는 적송이라 불렀습니다. 거북이 등처럼 갈라지는 수피는 해를 더할수록 견고하며 아름다운 틈 모습으로 송(松)의 귀품을 들어내고 있습니다. 걷다 적송을 보는 재미 솔솔했습니다.처음 만나 계곡 다리밑에서 잠시 쉬어가기로 하였습니다. 행장을 추수리는 시간입니다. 데레사 자매님께서 무엇인가 꺼내시다 카메라에 딱 걸렸습니다.
트레커들의 모습은 바로 숲 그자체입니다. 사람이 숲에 드니 바로 숲이 되더라!
딱 맞는 말입니다. 지극히 조화로우며 아름다운 공생을 유지 해야할 이유는 바로 천지동근(天地同根)이며 그 속에 깃든 인간을 포함한 모든 것들은 하느님의 반영이기 때문입니다.
이곳에서 출발부터 입고 내려 온 오버트러스 바지를 벗고 행장을 수습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시 주막을 향하여 길을 재촉하였습니다.
목마름을 해결하기 위하여 샘물을 받아 마시며 갈증을 날려 보내고 계신 실비아 자매님~~ 보기만해도 상쾌해 집니다.
물래방아 상틀에 떡 버티고 앉아 청개구리는 지금 쉬하는 중입니다. 물줄기가 얼마나 센지 ㅋㅋㅋ
총무님 모시고 인증샷을~~~
이어서 도미나, 수산나 자매님을.....
요셉, 골롬바 형제 ,자매님도......
아네스 자매님도.....
세례자 요한 형제님도..
모니카 회장님도.....
많은 물것들을 물리친 후(?) 조촐한 마음으로
주막 앞에서 자연스런 형태로 단체 사진을 찍었습니다.
두 형제님도......
양재 삼총여도~~~
보너스로 청개구리 쉬하는 곳으로 이동하여 다시 인증을 남겼습니다.
꽃보다 아름답다 하신 자매님들이 계셔서 할 수 없이 비교사진을 찍어 보았습니다. 그 결과는 과연?
그것은 보시는 분들의 판단에 맡기겠습니다. 혹시 꽃이 질 것 같아 자매님들 얼굴을 아웃포커스 시켰습니다 만은.....
예정보다 많은 시간이 지체되어 산문을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대관령박물관과 올아우 숲을 찾는 일정은 차후 벙개로 해결 하기로 한 후 초당의 교산으로 이동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차를 이동하는 사이 천주교와 지봉유설의 작가 이수광 그리고
양천 허씨의 명문가 교산 허균의 연관성에 대하여 설명해 드렸습니다. 이 연관을 알기 위하여는 우선 마태오릿지가 저술한 천주실의에 대한 내용을 알아야 하고 서양선교사로 중국에 들어와 활동했던 마태오 리지에 대한 행적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회 선교사 였던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중국선교 소망을 이루지 못하고 선종하던 날, 1552년 이탈리아 교황령 마체라타에서 출생한 마태오리지, 고향에서 예수회학교를 졸업, 로마로 가 법학을 공부합니다. 그리고 다시 1571년 예수회 수련원에 들어가 예수회에 정식으로 입회 합니다. 1577년까지 신학을 공부했던 리치는 신학과 철학 그리고 그레고리력 제정에 공헌을 했던 크리스토퍼 클라비우스 신부를 통하여 수학, 천문학, 역법,시계, 지구의, 천제관측기구 제작법도 사사를 받습니다.
리치는 1577년 로마를 출발하여 포르투칼 코임브라로 건너가 머물다 1578년 3월 루제리 등등 13명의 선교사와 함께 리스본을 출발하여 인도 고아지방을 경유, 1782년 마카오에 도착한 후 다시 1583년 9월10일 선교사들과 함께 중국 광동지방 자오징에 머물며 선교의 첫발을 딛습니다. 그리고 이마두란 중국 이름으로 바꿉니다.이마두는 천문성상과 산수역법 등등 박식했던 자신의 학문을 중국에 전하기 시작합니다. 이마두(利瑪竇) 는 6년의 중국생활 동안 중국어와 한문, 중국의 문화와 풍속을 익히는데 전념합니다. 그리고 광동성 광시를 총괄하는 총독 왕반 요청을 받고 여지산해전도를 제작하고 광동성 추방 후 소주로 근거를 옮겨 곤여만국전도를 1602년 제작하게 되는데 이 세계지도가 선조36년 1603년에 조선에도 들어 오게됩니다.
리치는 중국에서 처음에는 불교 승려 복장을 하고 전교에 나섰으나 승려의 신분이 낮다는 사실을 깨닫고 중국사회 지배층인 유교 지식인과, 관료계층에 접근하고자 유사(儒士) 복장으로 바꿉니다. 유교에 대해서는 카돌릭 교리와 유사성과 일치점에 대하여 강조하며 선교의 기틀을 다짐니다. 드디어 1594년 사서(四書)를 라틴어로 번역한 후 천주실의를 집필하기 시작하여 1603년 간행합니다. 사실 선교사 루제리가 번저 간행한 천주실록이 있었습니다. 실의는 그 책의 개정판이라 보아야 합당합니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천주실록에서는 불교와 도교 중심으로 집필되었다면 천주실의는 서양의 중세철학과 카돌릭 교리를 유교와 비교하며 서술하여 동서양 사상교류에 매우 값진 문헌으로 자리를 잡습니다. 리치는 하느님 즉 천주를 유교경서에 나오는 상제(上帝) 개념을 통해 설명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중화중(以中化中)인 중국을 빌어 중국을 변화시키는 의중이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유교와 가톨릭은 이질적인 것이 없다. 공자숭배와 조상숭배도 용인하고 존중해야 한다는 선교방침이었습니다. 조선 천주교 성립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친 천주실의, 이 책의 반입으로 조선의 덕망 높은 유사들을 매료시킵니다. 그렇다면 천주실의 내용에는 무엇이 담겨 있을까?
이 이야기는 잠시 뒤로 미루고 리치의 사후, 리치방식의 전례에 대하여 시비가 붙습니다. 예수회 보다 뒤 늦게 중국선교에 나선
도미니꼬회와 프란치스코회에서는 예수회를 비난하며 오랜 논쟁을 끌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1742년 교황 베네딕도 14세가 반포한 교서에 따라 예수회 방식은 최종금지되게 됩니다. 그러나 다시 1939년 교황청은 종교적 의미를 두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공자숭배와 조상숭배 전례에 교인들이 참여하는 것을 용인하였으며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1965) 때 전통의례를 수용하기에 이릅니다.
그래서 오늘날 한국의 각본당에 차례상이 선 보이기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그럼 천주실의에 대한 내용을 살펴 보겠습니다.
모두 8편으로 나누어 174항목을 서양학자와 중국학자가 대화를 통하여 토론하는 형식의 카돌릭 교리서이다. 중국학자의 입을 통하여 전통유학사상과 불교와 도교를 논거하게 한 후 서양학자인 리지 자신의 입을 빌려 스콜라철학과 선진공맹의 고전을 열거하며 이어진다. 천주실의란 원제의 이름은 De Deo Verax Disputatio로서 직역하면 " 하느님에 대한 참된 토론"이란 뜻이 된다.
교리의 본질적인 문제만 다루며 신앙과 게시에 도달할 수 있도록 하고 인간의 이성과 자연의 식견을 입증하는 방식의 전개성을 띄고 있다. 전 내용을 요약하면 우주만물에는 창조주와 주제자가 존재하며 모든 만물을 안양(安養)하며, 인간의 영혼은 불멸한 것이다. 그래 후세에 각자 행실여하에 따라 상선벌악으로 응징할 것이며 불교의 윤회설을 배격하고 사랑의 그리스도 신앙만이 구원을 준다. 이런 내용은 이미 중국 오랜 경서에 이미 가르치고 있으니 천주에 관하여 공부하고 귀의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이러한 내용을 처음 조선에 소개한 사람은 바로 지봉유설을 지필한 이수광이다. 지봉은 이수광의 호다. 芝峯은 상산(商山)의 한 봉으로서 낙산에서 창신동으로 흘러 내린 산을 상산이라하는데 작은 산줄기의 한 봉의 이름이다. 이수광은 태종 후궁인 효빈 사이에서 태어난 경녕군 이비가 선조이다. 왕족 후손으로 100여년 동안 벼슬 길이 막혔다. 이수광 부친인 이희검이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을 지냈으며 선조의 절대적 신임으로 호조, 병조, 판서를 지낸 청백리다. 이수광이 52세에 완성한 지봉유설(芝奉類說)은 최초 문화백과 사전으로 평가 받는 책이다. 명나라를 다녀 온 경험과 평생 수집해 온 국내외 자료를 바탕으로 편찬한 책으로서 총 20권으로 천문 ,지리, 역사, 정치, 경제, 인물, 시문, 언어, 복식, 동식물 등 방대한 주제를 갖고 3,435 항목에 달하며 등장인물만 2,265명에 이른다. 실학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태동된 1930년경 국학자들은 이수광을 실학의 선구자로 인식하였다. 학문을 하는 사람은 모름지기 실천에 힘써야 한다. 말로만 떠들어서는 학자가 아니다라 하며 이수광은 실천과 학문의 유용성을 강조하였다.
특히 지봉유설 속에 마테오 리지가 등장한다. 그리고 상세하게 천주실의가 조선에 알려지는 단초를 제공한 사람은 바로 지봉이다.
그리고 이어서 천주실의는 허균의 손에 들려 진다. 허균, 자유분방한 파격적인 삶을 살았던 정치가이자 호민사상을 내세웠던 사상가였다. 그 시대의 이단아 허균의 삶의 말미는 참혹했다. 최초의 한글소설 홍길동전으로 잘 알려진 허균의 호는 교산(蛟山)이다
그가 태어난 강릉 사천진에 있는 얕으막한 산 이름이 교산인데. 산의 형상이 꾸불거려 붙여진 교산의 蛟자는 용이되지 못한 이무기를 뜻한다. 위정자들에게 경고하며 호민들을 두려워 하라 했던 그에 사상은 결국 홍길동전으로 출간된다. 평등을 주장하고
성인은 하늘보다 아래다. 성인의 말을 따르려 하늘을 어길 수 없다 한 허균에게 까지 다다른 천주의 맥은 국문과 고문으로 세상을 참혹하게 마감한 허균 이후에도 이벽, 정약전형제들과 권철신 형제들에게 까지 내림되어 조선의 천주교는 대학자들의 중심으로 강학을 통하여 태동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연유에서 9월 트레킹과 성지순례 일정에 교산의 생가이며 그에 누이인 허난설헌 생가인 초당 송림안 생가를 방문 하게 이룬 것이다.
허균의 가문을 칭송하는 글이 선조실록에 실려 있다.
“세 아들인 성(筬)·봉(篈)·균(筠)과 사위인 우성전(禹性傳)·김성립(金誠立)은 모두 문사로 조정에 올라 논의하여 서로의 수준을 높였기 때문에 세상에서 일컫기를 ‘허씨(許氏)가 당파의 가문 중에 가장 치성하다.’고 하였다.” (선조수정실록중) 또한 당시에는 드물게 여자로서 오빠인 허봉의 손에 이끌려 시문을 배운 동북아시아 베스트셀러 작가였던 허초희가 있다. 그는 허균의 누이 이며, 安東 金氏 김성립에게 시집을 가지만 결혼생활내내 불행하였다. 돌림병으로 두 아이를 잃고 태중에 아이까지 유산으로 잃는다.아래 곡자란 시는 아이들을 잃고 짓은 시로서 애미의 마음을 잘 표현하고 있다. 난설헌은 감우(感遇)란 시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감우란 뜻은 느낀대로 노래한다는 뜻이다.
하늘거리는 창가의 난초 가지와 잎 그리도 향그럽더니, (盈盈窓下蘭 枝葉何芬芳)/ 가을 바람 잎새에 한번 스치고 가자 슬프게도 찬 서리에 다 시들었네. (西風一被拂 零落悲秋霜) / 빼어난 그 모습은 이울어져도 맑은 향기만은 끝내 죽지 않아, (秀色縱凋悴 淸香終不死)/ 그 모습 보면서 내 마음이 아파져 눈물이 흘러 옷소매를 적시네. (感物傷我心 涕淚沾衣袂)
조선중기 천재 여류시인이었던 허난설헌( 허초희,1563-1589)는 난초처럼 살다가 고작 27년의 삶을 마감한다. 고려와는 달리 성리학 이념체제의 가부장적 환경에서 조선의 여성들은 정치, 사회, 경제적으로 위축된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 환경에서 자신의 이름으로 시를 쓰고 자신을 밖으로 들어낸다는 일은 극히 이례적인 삶이었다. 그러나 이런 그녀의 삶 안에는 당시 여성으로서의 고통과 천재성이 그의 시를 통하여 깨닫게 된다.
그녀는 자신의 죽음을 예언한 듯한 시가 있다.
碧海浸瑤海 푸른 바닷물이 구슬 바다에 스며들고
靑鸞倚彩鸞 푸른 난 새는 채색 난 새에게 기대었구나.
芙蓉三九朶 부용 꽃 스물 일곱 송이가 붉게 떨어지니
紅墮月霜寒 달빛 서리 위에서 차갑기만 해라.
그 예언은 적중해 허난설헌은 부용꽃 스물 일곱 송이가 지듯이 27세의 나이로 목숨을 거두었다.
그녀는 유언을 남동생 균에게 남긴다. 모든 시를 태워버리라 말하지만 허균은 누이의 시를 읽고 아까워 버리지 못하다. 친정에 놓고 간 시들과 자신이 암송하고 있던 시들을 모아 난설헌집을 펴내었다.북인의 영수 이이첨과 손을 잡고 권력을 잡았을 때 명나라 사신들을 만나면서 누이의 시를 보여줄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이 시를 본 명나라 사신들은 극찬을 아끼지 않으며 명나라로 돌아 가 시집으로 만들어 여러사람들이 칭송하게 된다 일본까지 알려 진 허난설헌의시는 그래서 동북아시아의 최초 베스트셀러가 되는 것이다.
천재시인 아내가 버거웠는지 남편은 밖으로 만 돌았다. 글을 알고 시를 짓는 며느리가 마땅치 못했던 시어머니와의 갈등과 아이들의 죽음을 통하여 그녀는 점점 쇠약해저 죽음에 이르고 사후에는 경기도 광주시 초월읍 지월리 선영에 묻히지만 사후에도 남편곁에 가지 못하고 앞서간 아이들을 품고 나란히 묻혀 있다.
哭子(곡자) / 허난설헌(許蘭雪軒)
去年喪愛女 (거년상애녀) 지난 해 사랑스런 딸 잃고
今年喪愛子 (금년상애자) 올해 사랑스런 아들 잃었네.
哀哀廣陵土 (애애광릉토) 슬프고 슬프다 광주 땅에는
雙墳相對起 (쌍분상대기) 무덤 둘이 마주하고 있구나.
봄비 / 허난설헌(許蘭雪軒)
보슬보슬 봄비는 못에 내리고 春雨暗西池(춘우암서지)
찬 바람이 장막 속에 스며들 제 輕寒襲羅幕(경한습라막)
뜬시름 못내 이겨 병풍 기대니 愁依小屛風(수의소병풍)
송이송이 살구꽃 담 위에 지네. 薔頭杏花落(장두행화락)
대관령 옛길 트레킹을 끝낸 후 초당으로 가기 위하여 차에 오르자 하늘은 가을하늘이 되었다. 맑고 곱다. 그리고 들녁에는 벌써 황금물결이 일렁인다. 교산이 꿈틀거리며 동에서 서북방향으로 흐르다 떨군 송림사이로 난설헌의 생가가 단아하게 서 있다.
간략한 설명을 한 후 함께 집으로 들어섰다. 한옥의 멋은 아늑한 여백의 멋이 살아 숨쉬기에 친근한 것이다. 한옥의 용재는 소나무다. 결이 곱고 참하며 모든 풍상을 잘 참고 견디어 주는 나무가 바로 소나무다. 허씨내 자식들은 애비를 닮아 그랬는지 전부 문재(文才) 들이었다. 집이란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의 삶을 닮는다고 하였는가! 사랑채, 안채, 정원, 후원까지도 시상이 흐흘 수 있는 분위기다. 특히 초희가 머물며 자란 안채 한옥의 형태는 무척 아름다운 곳이다. 퇴마루나 방 안에 앉아서도 자연을 불러들일 수 있도록 배치되어 눈길을 끈다. 한옥은 스스로 자연의 한점을 자초하는 형세지 자연을 지배하지 않았다. 육즁한 서양건물들은 자연을 위축시키지만 한옥은 자연을 집안밖으로 끌어 드려 서로 소통 보완하며 함께 어울렸다. 안채 북쪽 쪽마루에 앉아 사각추녀 끝을 덮은 하늘천을 보면 그 이유를 단박에 알 수 있게 된다. 해가 뜨고 남중으로 이동하여 서쪽으로 지는 모습을 화폭에 그려진 그림처럼 아름답다. 이 모습을 본 후 잠시 쉬었다. 후원으로 나갔다.
후원은 꽃과 나비가 몰려 드는 곳입니다. 나무와 화초들로 구성된 정원, 장독대와 굴뚝과 광, 그리고 황토빛 담장과 그 위에 실려 있는 와(瓦)는 안정감을 줍니다. 이곳에서 잠시 쉬며 옛길 여독을 풀고 사진과 관련된 이야기를 나눔하며 망중한을 즐기다. 일어 섰습니다.
느릿한 오후빛에 드러 난 형제님들 마음 또한 느릿한 행복이 드러 난다. 항상 우린 하루 계획에 의하여 매듭되는 일정 끝은 여유롭기 마련입니다. 경포로 발을 옮겨 철지난 해변의 기슭을 싶었지만 일정상 시간이 없어 바로 강릉시내로 이동하였다. 9월 트레킹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동행에서 얻은 기쁨은 바로 은총과 형제적 친교 안에서 행복이었습니다.
언제나 평화와 함께 하시기를~~~~
사진 촬영을 위한 교재용으로 찍은 사진입니다.
배경이 잘 정리된 곳으로 피사체를 몰아 넣고 찍으면 이런 사진을 얻을 수 있습니다. 특히 배경이 어둡고 푸르른 색감을 갖고 있는 배경이라면 꽃은 아름답게 연출됩니다. 인물이든 꽃이든 어떤 배경에 놓고 찍느냐에 따라 결과는 달라지는 것 입니다. 사진은 사실적인 표현이지만 찍는 사람의 감성이 깃들게 되면 비로서 회화의 성격으로도 바뀔 가능성이 충분히 있습니다. 빛과 구도, 그리고 배경은 사진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좋은 배경을 얻기 위하여는 카메라를 들고 섬세하게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좌에서 우로 우에서 좌로 상에서 하로, 하에서 상으로 다각적으로 살피며 찾아 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배경에 찍고자 하는 피사체가 들어갈 수 있도록 카메라의 위치를 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감성을 넣고 찍게될 때 사진은 비로서 완성될 수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