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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 소백주 (1) 신씨 부인
인생사란 참 알다가도 모를 것이었다. 누구는 고대광실 부잣집에서 태어나 먹고 싶은 것 다 먹고 갖고 싶은 것 다 갖고 평생을 꽃 속에서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누구는 천하고 천한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끼니도 굶고 거지처럼 살다가 병에 들어 일찍 세상을 하직하기도 하니 말이다.
더구나 못생긴데다가 사람됨도 형편없어 욕심보만 늘어 온갖 추악한 짓을 서슴지 않고 살아가는데도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고 온갖 복을 다 누리고 살아간다고 한다면 이는 참으로 기차 찰 노릇이지 않겠는가!
이놈 세상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런 경우가 허다하니 말이다. 사람됨이 바르고 덕이 있는 사람은 복이 없어 가난하게 살기 십상이고 사람됨이 못되고 욕심 많은 사람이 잘 사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실상은 사람됨이 바른 사람이 재물에 눈이 멀어 인간의 바른 길을 벗어나는 짓을 하면서까지 평생 재물이나 권력을 쫓아 살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겠다.
그렇다고 한다면 평생 온갖 악행을 서슴지 않고 재물과 권력에 눈이 멀어 그것만 쫓아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살아가는 그런 욕심 많은 사람들이 잘 살 수밖에 없다고 해야겠는데 세상의 실상이 그러한 것임에는 틀림없는 것만 같다.
오직 농사일을 해서 곡물을 수확해 재물을 모으던 시절에는 일 잘하는 사람이 부자로 잘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점점 세상이 변해서 그 곡물을 수확 할 수 있는 땅을 많이 차지한 사람이 부자로 잘 살았다. 돈이라는 것이 나오고 상업이 발달하다 보니 장사를 잘하는 사람 즉 돈을 많이 가진 사람이 부자로 살았던 것인데 아마 요즘 세상이 그렇지 않나 싶다.
그러한 발달사를 생각해보면 일 잘하는 사람의 시대가 가고. 땅 많이 가진 사람 시대가 가고. 돈 많이 가진 사람 시대가 왔는데 가히 땅과 돈을 많이 가진 사람이 그야말로 부자라고 하겠다. 그 땅과 돈으로 권력을 산다면 금상첨화가 아니겠는가! 그런데 그 권력을 틀어쥔 부자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이 무엇인가. 바로 인생사 병들어 늙고 죽는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죽을 때 죽더라도 온갖 부귀영화를 좀 잠깐만이라도 원 없이 누려보았으면 좋겠는데 어째 그것과는 인연이 멀어도 너무 멀다. 아니 이러다가는 명대로 살지도 못하고 금방 죽어 나갈 것만 같다. 도대체 이는 무엇인가. 사람들은 그것을 운명이라고 팔자라고 한다.
자신의 불행을 운명과 팔자에 기대 위안을 삼고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살다가는 것이었지만 참으로 내일 일도 모를 만큼 오묘한 것이 인생살이가 아닌가! 그 인생살이 깊은 속을 좀 속 시원히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마는 하긴 그것을 알아내기란 게 그 누구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는데 또한 묘미가 있는 것이었다.
저기를 좀 보시게! 저기 산골 마을 조그마한 초가집 꽃처럼 발그레하니 피어올라야할 갓 시집 온 새댁 신씨 부인도 지금 그 인생살이가 주는 근심 걱정으로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지 않은가? 도대체 젊은 새댁이 무슨 몹쓸 사연이 있기에 저리 얼굴이 폭삭 늙어 버렸단 말인가?
기생 소백주 (2)기생팔자
세상사 갈팡질팡 꿈은 저 뜬 구름만 같고 사연 많은 인생사 날은 저물어 가는데 내친김에 이 고달픈 길 위에서 잠시 지친 두 다리 쉬어두고 앉아 저 새색시 신씨 부인 사연이나 한번 들어보고 가고 싶어지는 것 또한 인지상정이 아니겠는가!
시집 와서 삼년, 남편이 앓아 눕고 인근의 의원이란 의원을 다 불러와 백약을 다 수소문하여 써 보아도 나을 기미가 없으니 이제 죽을 날만 기다리는 수밖에 없나보다 하고 신씨 부인은 하루 종일 길게 한숨만 내쉬었다.
남들은 혼례식 올리고 깨가 쏟아지게 살면서 아들 딸 낳아 기르며 행복하게 산다는데 무슨 팔자가 이렇게 박복하여 병든 남편 수발하다가 좋은 신혼시절을 다보내고 이제 곧 숨이라도 넘어간다면 송장 치를 일만 남았거니 생각하니 가슴이 꽉 미어지는 것이었다.
산골 농촌마을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자라나 열여섯 살에 일 잘하는 덕대 큰 건강한 이웃마을 총각에게 시집왔건만 남들 다 즐긴다는 그 신혼시절도 없이 혼례식 치르고 얼마가지 않아 그만 골골 앓아 누워버렸으니 밥하고 들일하고 시부모 수발하고 병든 남편 간호에 스스로 생각해 보아도 참으로 눈물 나도록 박복한 인생이었다.
그렇다고 신씨 부인의 용모를 누가 본다 해도 남편이 죽어 혼자 살아갈 팔자 사나운 과부의 상은 아니었다. 키 큰 호리호리한 갈대같이 야들야들한 허리를 가진 날씬한 몸매에 분홍빛으로 이른 봄 살아나는 진달래꽃처럼 윤기 나는 촉촉한 피부, 검은 머리칼, 깊은 밤 반짝이는 별빛처럼 영롱한 눈빛에 은근한 미소 머금은 복숭아꽃빛 감도는 도톰한 입술 생김새에 풍만한 젖가슴 그리고 탄력 있는 암말을 닮은 엉덩이 등이 오목조목 잘 들어박혀있어 젊은 총각들이 첫눈에도 혹할 만큼 건강한 여인네로서 꽤나 아름다운 미인이라 할만 했다.
그런데 그런 고운 얼굴이 죄다 상할 만큼 가슴 펄펄 태우며 남편의 건강을 회복시켜 보려는 일념으로 힘들게 병 수발을 들며 고생고생 살아가는 신씨 부인의 마음속에 푸르게 일어나 자리 잡는 것은 오로지 신세 한탄이요 팔자타령이었던 것이다.
살아갈 날이 구만리 같은 인생길임에도 사랑하는 남편이 저렇게 오늘 내일 하며 죽을병이 들어 방에 누워있으니 말이다. 어쩌면 신씨 부인은 남편과 오순도순 살림해 살며 아들 딸 낳아 행복하게 살아갈 운명보다도 그런대로 생겨먹은 그 미색으로 인해 뭇 사내들의 노리개가 되어 멀리 낯모를 어느 큰 고을로 흘러들어가 기생으로 살아갈 운명이었는지도 몰랐다.
말하기 좋게 그냥 ‘기생팔자!’ 이리 사느니 차라리 그 운명이 더 나을 것만 같기도 했다. 알지 못할 병에 들어 시름시름 앓다가 자리에 드러누운 남편은 가뭄에 말라비틀어져 가는 옥수숫대마냥 시들시들 기운이 빠져가더니 급기야는 밥을 떠먹여야 할 만큼 쇠약해 졌고 탕약도 떠 넣어 주어야 겨우 삼키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으니 말이다.
기생 소백주 (3)친정어머니
때는 바야흐로 봄, 멀리 남쪽에서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고 죽은 듯 겨울 눈발 속에 묻혀있던 푸른 새순들이 발동(發動)을 하는 때라 그런지 젊은 여인인 신씨 부인의 가슴에도 살랑살랑 봄바람이 이는 것이었다. 모든 생명 되살아나는 이 싱그러운 봄에 자신은 죽어가는 병든 남편 옆에서 죽음을 생각하다니 기가 막힐 일이었다.
당장 이 지겨운 곳을 떠나버리고도 싶었지만 시집가서 그 집 귀신이 되어 지켜야할 아녀자의 법도가 엄연하기에 신씨 부인은 밖으로 궂은 마음 한조각 내지 못하고 주어진 상황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오후나절, 그런 신씨 부인 집에 이웃 마을에 사는 늙은 친정어머니가 왔다.
마른 명태처럼 파리하게 말라 비틀어져가는 핏기 없는 얼굴로 눈망울을 굴리며 숨만 겨우 쉬고 누워있는 사위를 바라보고 있던 어머니가 애간장을 태우며 딸을 보고 말했다.
“애야! 앞산 너머 점을 아주 잘 치는 용한 점쟁이가 있다는데 너의 남편이 살아나겠는가 아주 죽을 운명인가 점이라도 한번 쳐보아라!”
“점을 쳐봐요”
신씨 부인이 길게 한숨을 내쉬며 늙은 어머니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래 이것아! 이렇게 넋 놓고 한숨만 쉬고 있느니 혹시 좋은 방법이라도 있는지, 아니면 살 사람인지 죽을 사람인지라도 알아야 할 것 아니냐?”
늙은 어머니가 골 깊은 이마의 주름살을 찡그리며 속이 팔팔 끓는 목소리로 말했다.
물에 빠지면 지푸라기라도 잡는다고 백약을 써도 효과가 없으니 용한 점쟁이가 있다면 조마조마하며 사는 것보다야 어찌되건 앞일이라도 시원하게 알고 싶은 신씨 부인이었다. 남편이 단명할 운을 타고났거나 남편이 죽어 나갈 상부할 팔자라면 그것도 운명이니 받아들여야 할 것이었고, 또 사내들의 손길에 길들여지며 기생으로 살아갈 팔자라면 또 그것도 받아들여야 할 것이었다.
누구나 이 한세상 바르고 정직하게 고대광실 좋은 집에서 떵떵거리며 부부간에 잘살고 싶겠으나 세상일이란 맘과 같이 풀리지 않으니 닥치는 대로 순간순간 스스로를 위안하며 자신이 가진 지혜대로 살아갈 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면 인생은 어쩌면 이미 정해진 운명이라는 기다란 길이 강물처럼 아스라이 구불구불 펼쳐져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 점쟁이가 그렇게 용해요?”
신씨 부인이 다시 길게 한숨을 내쉬며 늙은 어머니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이! 그런다고 온 고을에 소문이 자자하다! 그 점쟁이 정씨 영감이 귀신같은 신통력이 있어서 도둑놈이 도둑질을 할 수 없다고 하더라.”
그러면서 늙은 어머니는 그 정씨 영감이라는 점쟁이가 점을 쳐서 소도둑을 잡은 이야기를 했다.
기생 소백주 (4)소도둑놈
이웃마을 덕만이라는 중년의 농부가 봄날 소 쟁기질을 논에서 하고 논둑에 소를 매어 두었다. 힘들게 일한 소에게 논둑에 무성한 풀을 뜯어 먹으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덕만은 논에서 삽으로 논둑을 고치고 흙을 고르는 일을 했다.
한참 일을 하고 있으니 건너 논에서 일하는 늙은 농부가 집에서 새참을 내왔는지 막걸리를 한잔 하라고 오라고 손짓하며 소리쳤다. 덕만은 흙 묻은 손을 논물에 씻고 개울을 건너가 늙은 농부와 두어 잔 막걸리를 마시고 돌아왔다.
덕만이 다시 일을 하려고 삽을 손에 들며 얼핏 소 매어둔 자리를 보니 소가 보이지 않았다. 분명 쇠말뚝을 실하게 박아 소고삐를 매어 두었는데 소가 보이지 않다니 이상한 일이었다. 덕만은 가슴이 덜컥 내려 앉아 한달음에 논둑으로 뛰어가서 소 매어둔 자리를 확인해 보았다. 쇠말뚝이 뽑혀져 버린 것이 풀을 뜯어먹다가 어디로 가버린 것 같았다. 멀리 주위를 휘둘러보는데도 소가 눈에 보이지 않았다.
‘오메! 이거 환장허겄네! 소가 어디로 갔지! 대낮에 눈앞에서 소를 잃어 버렸단 말인가!’ 농촌에서 소는 귀한 살림밑천이었다. 논밭 쟁기질 부려먹고 수레 달아 무거운 짐 나르고 집안에 혼례 등 대사 치를 때 팔아서 요긴하게 돈을 쓰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소를 잃어 버렸다니!
덕만은 절망으로 가슴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생각해보니 쇠말뚝이 소가 풀을 뜯어 먹으려고 힘을 쓰는 바람에 빠져 나가버렸다면 풀을 뜯어먹으면서 그 자리를 맴돌 것이었는데 누군가 소도둑놈이 일부러 사람 눈 잃어버린 틈을 타서 훔쳐가 버렸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덕만은 소 잃어버린 낙망한 가슴으로 이리저리 미친 듯이 들을 뛰어 달리며 찾아보았으나 어디에도 소는 그림자도 없었다. 필시 소도둑놈이 소를 훔쳐 이 좁은 산골짜기를 빠져 나가버린 게 분명했다.
덕만은 손에 흙도 씻지 못하고 그 길로 용하다는 이웃마을 점쟁이 정씨 영감을 찾아 갔다. 점쟁이 정씨는 인근에서 몰려온 사람들에게 점을 쳐주고 있었다. 자기 차례가 오자 덕만은 부리나케 정씨 영감 방으로 들어갔다.
“영감님! 논에서 쟁기질 한 소를 논둑에 매어 두었는데 없어져 버렸소. 소도둑놈을 좀 잡아 주어야겠소.”
덕만이 다급하게 말했다.
“가만! 가만! 임자가 논에서 놓아버린 소를 날더러 찾아 달라니! 그 참!”
수염이 허연 점쟁이 정씨 영감이 덕만을 바라보며 말했다.
“영감님! 애간장이 펄펄 타서 못견디겠구만요. 소만 찾아주면 복채는 두둑이 드릴 테니 어서 빨리 좀 점을 쳐주시오.”
덕만이 우는 소리로 애걸하며 말했다.
기생 소백주 (5)중의 지팡이
“복채는 무슨! 아무튼 잃어버린 집안의 귀중한 물건이니 찾긴 찾아야겠는데…”
점쟁이 정씨 영감이 눈을 가늘게 뜨고 덕만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더니 점을 치려고 산통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마침내 팔괘를 뽑아 놓고 한참동안 유심히 살펴보다가 입을 열었다.
“지금 당장 장터로 향하는 삼거리 길로 나가면 지팡이를 짚고 오는 늙은 중을 만나게 될 것이야! 그러면 다짜고짜 그 늙은 중에게 달려들어 그 지팡이를 빼앗아 여러 토막 분질러 버리게!”
“예에”
잃어버린 소와 늙은 중의 지팡이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덕만은 점쟁이 정씨 영감의 뚱딴지같은 말에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았다.
“어서 빨리 가! 소 찾아야 한다며 뭘 하고 있어!”
정씨 점쟁이 영감이 덕만을 노려보며 대답 대신 사납게 호통을 쳤다.
덕만은 심하게 호통을 치는 터라 뭐라 대꾸도 못하고 머리를 긁적이며 쫓기 듯 정씨 점쟁이 영감 집을 빠져나왔다.
‘쳇! 잃어버린 소를 찾아 달랬더니 길 가는 늙은 중의 지팡이를 빼앗아 분질러 버리라니!’
덕만은 참 별스런 점괘도 다 있다싶어 이상하게 여겼으나 급기야 밑져야 본전이라 생각하고는 장터로 향하는 삼거리 길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저 점쟁이 영감이 앉아서 천리를 본단 말인가. 과연 늙은 중이 이 시간에 그 길을 오기는 온단 말인가. 그래도 아무렴! 소만 찾을 수 있다면 무슨 일이든 시키는 대로 해야 했다.
덕만이 삼거리 길에 도착하여 급한 숨을 몰아쉬고 있는데 잠시 후 거짓말같이 늙은 중 하나가 바랑을 등에 짊어지고 반들반들 손때 묻은 구부러진 지팡이를 짚고 터덜터덜 걸어오는 것이었다.
‘바로 저 늙은 중을 말하였구나! 허허! 참으로 신통하구나!’
덕만이 다짜고짜 정씨 점쟁이 영감이 시키는 대로 성난 범처럼 늙은 중에게 달려들어 지팡이를 사납게 낚아 채 빼앗아 여러 토막 분질러 길가에 사납게 내팽개쳐 버렸다.
"허어! 나 참 오늘 별스런 일을 두 번이나 보는구나!"
늙은 중이 웬 불한당 같은 농투성이가 불쑥 나타나 짚고 가던 지팡이를 빼앗아 분질러 버리는 황당한 꼴을 당하자 덕만을 황망한 눈길로 멍하니 바라보며 이렇게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아니 스님, 그럼 오늘 별스런 일을 또 보았단 말인가요 "
덕만이 늙은 중을 바라보며 말했다.
"글쎄, 방금 저 산 너머 마을을 지나오는데 어떤 사람이 소를 외딴집 방안으로 끌고 들어가지 않겠소."
기생 소백주 (6)방으로 들어간 소
늙은 중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뭐 뭐라 소를 방으로 끌고 들어가요?”
그 말을 들은 덕만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아니,?그렇다니까요! 세상에 참! 오늘 내 별일을 두 번이나 당하네! 저 나무 지팡이가 무슨 죄가 있다고... 나무아미타불!...”
늙은 중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기가 막힌 듯 끌끌 혀를 차며 말했다.
“그래요!?그럼 스님,?소를 방으로 끌고 들어가는 그 집이 어디던가요?”
덕만은 그 말을 듣고는 그 소가 자신이 잃어버린 소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번쩍 뇌리에 스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저 산 고개 너머 마을인데... 아마 그 집이 커다란 소나무 바로 위에 있는 외딴집이었던가....”
늙은 중이 지나온 길을 뒤돌아보면서 뒷산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리고는 덕만을 의아스런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왜 그리 꼬치꼬치 묻소? 무슨 일이 있소?”
“사실은 스님, 오늘 논을 갈고 있다가 소를 논둑에 매어 놓고 옆 논으로 내온 새참을 좀 얻어먹으러 잠시 갔다 온 새에 소가 없어져 버렸소, 아무리 찾아보아도 없어서 애간장이 타서 정씨 점쟁이 영감에게 달려가 점을 쳐보니 지나가는 늙은 중의 지팡이를 다짜고짜 빼앗아 분질러 버리면 찾을 수 있다기에 그리 했던 거요. 그러니 그 집을 좀 자세히 가르쳐 주시오.”
“나무관세음보살! 흐음! 그리된 연유라면 기필코 그 소를 찾아야겠지요.” 늙은 중이 말하며 그 집을 자세하게 일러주었다.
“으음! 그래요. 스님, 소를 찾으면 지팡이는 좋은 걸로 새로 만들어 드리리다!”
덕만이 미안하다는 듯 늙은 중에게 고개를 수그리며 말했다.
“허허! 그럴 거 뭐 있소! 소 잃어버린 거사(居士)에게 소를 되찾게 해주는 공덕으로 저 지팡이가 세상에 인연을 다한 것이라면 그 또한 저 지팡이의 업이겠지요. 까짓것 노승의 지팡이야 아무려면 어떻소! 농부에게 잃어버린 소보다야 중하지는 않겠지요.”
늙은 중이 그렇게 말하며 길가에 부러진 나뭇가지를 하나 찾아 주워들고 지팡이를 삼아 짚고 말을 이었다.
“이거면 족하지 않겠소! 늦기 전에 어서 그 집으로 가서 잃어버린 내 소인가 확인해 보시오! 허허! 정씨 점쟁이 영감님이라!.. 나무관세음보살...”
덕만이 늙은 중이 길을 재촉해 가는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고 서 있다가 부리나케 소를 방으로 몰고 들어가더라는 그 집을 향해 내달렸다.
기생 소백주 (8)산(山)서방
신씨 부인은 남편 병 구환하느라 없는 살림살이에도 불구하고 겨우 두어 냥 복채를 주머니에 깊이 챙겨 담고 푸른 풀잎 돋아나는 들길을 지나 어느새 호젓한 산길로 접어들었다.
그새 강남 갔던 여름 철새들이 돌아왔는지 연둣빛으로 눈을 뜨는 나뭇가지 사이에서 맑은 새 울음소리가 들려오고 봄바람이 살랑거리며 싱그럽게 낯을 스치고 지나는 것이었다.
나뭇잎이 새로 돋고 이름 모를 풀잎들이 땅에서 돋아나 그새 봄꽃들을 달고 방긋이 웃고 있었다. 이런 산 속에는 고사리 꺾는 사람들이며 산나물 캐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었다. 인생의 봄도 이렇게 싱그러운 것이련만 도무지 신이 나지 않는 것은 그 삶속에 탐욕이 있고 분쟁이 있고 또 아픔이 있고 병이 있고 이별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저런 생각을 하며 신씨 부인은 산 수풀 피어나는 칙칙한 오솔길을 올라 고개 너머로 발길을 돌렸다. 그런데 그 고갯길을 막 내려가려는데 바로 그 옆 수풀에서 인기척이 났다. 높은 산도 아니고 또 깊은 산중도 아니어서 대낮에 호랑이나 여우같은 산짐승이 나타나는 것은 아니겠지만 나무하는 사람이거나 나물 캐는 사람 혹은 인기척을 피해 달아나는 다람쥐나 산토끼려니 하고 그 쪽으로 자신도 모르게 눈길을 던졌다.
그러나 눈앞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잘못 보았거니 하고 눈을 의심하며 멀리 산 아래 마을을 향해 발길을 옮겼다. 그렇게 신씨 부인이 막 발을 띠려는 순간 뒤에서 보드라운 몸을 사정없이 거머잡는 칡넝쿨 같은 우악스런 손이 있었다.
“아악!”
그것은 거친 사내의 손길이었다. 신씨 부인은 자신도 모르게 짧게 비명을 토해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이 으슥한 인적 드문 산 고갯길에 더러 산 도둑들이 있기도 하겠지만 그런 적은 없었던 것이다.
“누 누구야!”
신씨 부인이 사납게 손을 뿌리치며 소리쳤다,
“보름 전 집나간 니 년의 산(山)서방을 그새 잊어 버렸느냐?”
사내가 낮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난 너 같은 산 서방 둔 적 없다! 이놈아! 놔라!”
신씨 부인이 사내의 팔뚝에 붙잡힌 몸을 풀어내려고 안간힘을 쓰며 소리쳤다.
“어허! 이년이 기억이 없나 보구나! 내가 너의 전생(前生) 서방이다!”
“그런 거 난 없다! 이놈아! 어서 이 손을 풀어라!” ?
“어허! 꽃 피는 봄날 이녁 좋고 나 좋고 벌 꽃 꿀 따는 재미를 좀 보자는데 앙탈이라니!”
사내가 신씨 부인의 허리를 더욱 옭죄며 윽박질렀다.
기생 소백주 (9)봉변
길가는 아낙을 유린하는 그 사내 하는 꼴이 반항이라도 했다가는 생사람을 당장 죽일 기세였다. 정말로 벼락 맞아 죽을 놈이었다.
“아! 아악! 사 사람 살려!”
순간 신씨 부인은 자신도 모르게 있는 힘을 다해 소리쳤다. 사내의 커다란 손이 신씨 부인의 입을 사정없이 틀어막았다. 사내가 젊은 신씨 부인을 사납게 번쩍 끌어안더니 그늘진 숲속 칙칙한 수풀 우거진 그늘 밑으로 끌고 갔다.
힘이 약한 신씨 부인은 사내의 억센 팔에 안겨 그대로 버둥거리며 끌려가는 수밖에 다른 방도가 없었다.신씨 부인을 끌고 가던 사내가 산 수풀 으슥한 곳에 신씨 부인을 벌렁 드러눕히고는 사정없이 입술을 덮쳐 오는 것이었다. 까맣게 수염 돋아난 불같은 사내의 거친 입술에 신씨 부인은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그만 온몸이 사납게 짓눌려지고 말았다.
사내가 신씨 부인의 입을 한손으로 틀어막고 한손으로는 저고리 끈을 풀어 헤치는가 싶었는데 사납게 치마 위를 더듬더니 엉덩이 깨를 거칠게 쓸어 헤집어 오는 것이었다. 신씨 부인은 온힘을 다해 그 사내에게 맞서 저항했다. 그럴수록 사내의 힘은 더욱 거세져만 갔다.
“아아!........”
더 이상 사내의 완강한 완력을 버텨낼 수 없었다. 신씨 부인은 순간 몸의 모든 힘을 풀어버리고 길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때야 신씨 부인은 사태가 어찌 되었는지를 분명하게 파악해 알고는 두 손을 휘저으며 있는 힘껏 몸을 비틀며 육중한 사내의 몸을 밀어냈다.
그러나 사내의 완력은 마치 철근처럼 강했다. 바윗덩이처럼 육중한 몸으로 가느다란 신씨 부인의 온몸을 짓누르며 한손은 풀어헤쳐진 저고리 속 뽀얀 젖무덤을 향해 맹수의 발톱처럼 사납게 헤치며 달려들고 있었다. ‘허억! 남편 병들어 죽게 생겨 점이라도 쳐볼까하고 가는 산길에 흉악한 놈에게 걸려 또 봉변(逢變)을 당해 몸마저 잃는구나!’
어느 급살 맞아 죽을 놈이 길가는 남의 아낙을 강제로 붙잡아 덮쳐 이 지랄이란 말인가! 신씨 부인은 짐승 같이 포악한 사내 아래 깔린 채 참으로 서러운 제 마음을 쓸어보는 것이었다. 이게 연약한 아녀자의 운명이고, 이게 인생살이란 말인가! 미처 그럴 생각을 할 새도 없이 이제는 사내의 급한 손길이 치마끈을 찾아 더듬더듬 아래로 점점 쓸어내려오고 있었다.
혼례 치르고 남편이 앓아 누운 탓에 사내를 경험했던 기억도 아스라한데 그 달콤한 기억의 틈새를 억세게 비집고 들어오며 이 대낮의 흉악한 괴한이 제멋대로 비밀스런 곳을 침범하고 있었다. 신씨 부인의 젖무덤이 괴한의 커다란 손에 물큰 잡히고 치마끈이 풀어지고 훌러덩 벗겨지는가 싶더니 삽시간에 뜨겁게 타오르는 사내의 커다란 불기둥이 몸 한 가운데를 사정없이 뚫고 대담하게 들어오는 것이었다.
기생 소백주 (10)운명의 장난
“아-? 윽!”
신음 같은 선 비명을 짧게 지르는 신씨 부인의 눈 끝에 파란 봄 하늘에 불 번개가 인 듯 번쩍 비추었다가 산산이 부서져 흩어져 내리더니 이내 가물가물 빨갛게 물들어 버리는 것이었다. 봄 하늘의 아득한 벽공(碧空)이 깨어져 이지러지는 처참한 고통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한참동안 드높은 태풍 몰아치듯 격랑 하는 파도가 몸을 수십 차례 휩쓸고 지나가더니 어느 결 파란 봄 하늘이 눈앞에 잔잔하게 펼쳐지는 것이었다. 육중한 바윗돌처럼 온몸을 짓누르던 고통도 사라지고 홀가분한 미풍이 깊은 속살을 차갑게 건드리며 파고 들었다. 희미하게 가물거리던 정신이 아물아물 돌아오고 있었다.
“에구머니나!”
이 험한 꼴을 누가 보기라도 한다면 어쩔 것인가! 신씨 부인은 자신이 온통 새하얗게 발가벗겨져 으슥한 풀숲위에 누워있음을 발견하고는 소스라치게 놀라 일어서며 재빨리 풀어헤쳐진 저고리며 치마를 바르게 둘러매었다. 그리고는 산발한 듯 늘어진 머리칼을 바르게 했다.
‘천벌을 받아 급살을 맞아 죽을 놈!’ 신씨 부인은 그렇게 웅얼거리며 가느다란 숨을 몰아쉬면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 사내놈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 무슨 가혹한 운명인가? 사나운 흉몽이라도 꾼 것은 아닐까? 자신의 처지가 서러워 북받쳐 오르는 슬픔을 애써 외면하며 신씨 부인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어서 이곳을 피해 가던 길을 갈밖에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그곳을 벗어난 신씨 부인은 산 아래 정씨 점쟁이 영감이 사는 마을을 향해 부리나케 발걸음을 재촉하는 것이었다. ‘이 무슨 기구한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가까스로 혼비백산한 정신을 겨우 가다듬으며 신씨 부인은 허겁지겁 도망가듯 산길을 내려갔다.
구불구불한 산길을 얼마간 내려가니 산 아래 삼십여 호 초가가 옹기종기 들어선 아담한 산골 마을이 나타났다. 신씨 부인은 마침 한손에 호미를 들고 들을 나가는 마을의 늙은 할머니를 길에서 만나 정씨 점쟁이 영감 집을 물었다.
“할머니, 귀신처럼 점을 잘 본다는 영감님 집이 어디인가요?”
“아! 점 보러 오는 아낙인가 보네! 그 영감이 귀신은 귀신이지! 사방에서 사람들이 다 몰려와!”
늙은 할머니가 그렇게 말하며 저 위 골목 돌담길을 지나 대나무 숲이 빙 두른 집이라며 손가락질을 하며 자세히 가르쳐주는 것이었다. 신씨 부인은 돌담길을 따라 푸른 대나무가 숲을 이룬 집을 어렵지 않게 찾아갔다.
눈앞에 너른 마당 안에 지난 가을 초가를 새로 해 올린 아담한 초가집이 보이는데 그곳이 정씨 점쟁이 영감 집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