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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4장 관중과 포숙 (4)
관중(管仲)과 포숙에 관한 일화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계속 이어진다.
관중의 사상과 업적을 기록한 <관자>와 진시황 때에 지어진 <여씨춘추>라는 책에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왔다.
관중의 재능을 아낀 포숙(鮑叔)은 또다시 제희공에게 그의 등용을 적극 추천했다.
이에 제희공은 관중을 자신의 아들을 보좌하는 후견인 역에 임명했다.
당시 제희공(齊僖公)에게는 여러 아들이 있었는데, 그 중 맏아들인 세자 제아(諸兒)와 둘째 아들인 규(糾), 그리고 셋째 아들인 소백(小白)이 나름대로 공족 사이에 지위를 확보하고 있었다. 이중 관중이 보좌하게 된 사람은 바로 둘째 아들인 규였다.
제희공으로부터 제수받은 관중의 공식 관직명은 공자 규의 부(傅).
'부(傅)'란 스승, 후견인, 시중군이란 뜻이다.
다시 말해서 규(糾)를 가르치고, 보좌하고, 돌보는 임무를 맡은 것이다.
얼핏 생각하면 대단한 관직인 듯싶지만 실은 한직 중의 한직이랄 수 있는 직위였다. 당시에는 세자를 제외한 나머지 공자들의 활동을 극히 제한하였다.
세자보다 공자들의 힘이 세면 공실이 어지러워지기 때문에 일부러 나머지 공자들의 활동과 세력을 약화시켰던 것이다. 따라서 공자의 스승이라는 것은 허울 좋은 관직일 뿐 실제로는 보좌관이나 시종꾼에 지나지 않았다.
제희공의 이러한 조치에 천거자 포숙(鮑叔)은 실망했으나, 의외로 관중 본인은 기꺼이 그 자리를 받아들였다.
그런데 얼마 안 있어 생각지도 않은 일이 발생했다.
무슨 생각에서인지 제희공이 포숙을 셋째 공자인 소백(小白)의 보좌관으로 발령을 낸 것이었다. 이것은 포숙에게 있어 좌천이나 마찬가지였다.
포숙(鮑叔)은 발끈했다.
그는 이내 병을 핑계로 사직서를 내고 집안에 틀어 박혔다.
이 소식을 관중이 들었다.
그는 친구이자 규의 또 다른 보좌관인 소홀(召忽)과 함께 포숙의 집을 찾아갔다.
"자네는 무슨 까닭으로 관직을 사퇴하고 집 안에 칩거하고 있는가?"
관중의 물음에 포숙이 분개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옛말에 부모보다 자식 일을 잘 아는 사람이 없고, 군주보다 신하의 일을 잘 아는 사람이 없다고 했네. 당연히 나의 능력에 대해서는 주공께서 가장 잘 아실터. 그렇다면 이번에 나를 소백(小白)공자의 보좌관에 임명한 것은 무엇을 뜻하겠는가. 내가 그런 한직에 있어도 상관없을 정도로 무능하다는 의미로밖에 해석할 수 없는 일 아닌가. 주공께서는 나 같은 신하는 없어도 괜찮다. 라고 생각하고 계심에 틀림없네."
포숙(鮑叔)이 비분강개한 어조로 말을 마치자 소홀(召忽)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옳거니. 이를테면 시위를 하는 셈이로군. 그거 좋은 방법일세. 자네 가문이나 능력으로 보아 어디 소백 공자의 보좌관이 말이 되는가. 세자의 보좌관이라면 모를까. 주공께서 물으시면 나도 자네 병이 심상치 않다고 말하겠네. 그러면 주공께서도 자네의 인사 문제를 다시 고려해볼걸세."
그말을 듣고 포숙(鮑叔)은 기뻐했다.
"자네가 도와준다니 고맙네. 주공께 잘 말씀드려주게."
그때 관중이 얼굴빛을 달리하며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방금 전 자네들의 말은 옳지 못하네. 나라의 녹을 먹고 있는 이상, 아무리 한직이라도 임무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 법일세. 더욱이 지금 세자는 성품이 너무 포악하여 군위를 이어받을 수 있을지조차 장담할 수 없을 지경이네. 설사 군위에 오른다 해도 오래 가지 못할 것이네. 그렇게 되면 규(糾) 공자나 소백 공자 중 한 사람이 임금의 자리에 오를 것인데, 자네는 어찌 그때에 대비하지 않는 것인가."
그러자 소홀(召忽)이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두 눈을 빛내며 다시 의견을 내었다.
"관중의 말을 듣고 보니 그럴듯하네. 지금 세자는 너무 포악해서 제대로 임금 노릇을 하지 못할 게 분명하네. 내 생각에는 ..... 규(糾) 공자가 군주의 그릇이네. 세자 제아(諸兒)나 소백 공자는 둘 다 임금감이 아니네. 그러지 말고 우리 셋 모두 규 공자를 모시는 것이 어떻겠는가? 그리하여 규 공자를 임금으로 올린 후 우리 셋이 국정을 전담하면 제(齊)나라는 매우 부강한 나라가 될 것일세."
소홀(召忽)의 말에 포숙은 마음이 흔들렸다.
'기왕 이렇게 된 마당에 소홀의 말대로 규 공자를 섬기어 후일을 도모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포숙을 위로하려던 자리는 어느덧 나라의 앞날을 염려하고 예측하는 시국 토론장이 되고 말았다.
포숙(鮑叔)의 마음을 눈치챈 관중은 고개를 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닐세. 자네는 역시 소백 공자를 보좌하는 것이 나을 것 같네."
포숙이 물었다.
"어째서 소백 공자라고 생각하는가?"
"내가 지금 비록 규(糾) 공자를 섬기고 있기는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는 권력에 대한 욕심이 너무 많네. 뿐만 아니라 그 어머니가 노나라 공녀인 관계로 나라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많이 받고 있는 처지네. 반면, 소백 공자는 약삭빠르지는 못하지만 인품이 온후하고 마음 씀씀이가 넓은 사람이네. 만일 우리 제나라가 위기에 빠진다면 그것을 타개해나갈 사람은 소백(小白) 공자뿐이라고 나는 단언하네. 이런 점에서 포숙 자네는 소백 공자의 보좌관을 맡아야 하네. 만일 내 안목이 맞아 소백 공자가 군위에 오르면 그때는 자네가 나와 소홀을 천거해야 하네. 알겠는가?"
관중의 말에 눈꼬리를 치켜뜨며 흥분한 사람은 관중과 함께 공자 규를 보좌하는 소홀(召忽)이었다.
"자네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인가? 어떻게 포숙에게 소백 공자를 권유할 수 있단 말인가? 세 공자 중 임금이 될 만한 자격을 갖춘 사람은 오직 규(糾) 공자뿐이네. 더욱이 자네와 나는 지금 규 공자를 섬기는 사람이네. 만에 하나 소백 공자가 군위에 오른다해도 우리는 규 공자를 배반할 수가 없네. 어찌 주군을 배반하고 다른 공자를 주군으로 섬길 수 있겠는가? 우리는 이미 규 공자와 생사를 함께 해야 할 운명이네."
그러나 관중(管仲)은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아니,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네. 불사이군(不事二君)은 어리석은 자들의 생각이네. 진정한 신하라는 것은 주군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나라를 섬기는 것일세. 어찌 규(糾) 공자 한 사람을 위해 나의 목숨을 바칠 수 있겠는가.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네. 나는 제나라를 위하고 천하를 위해서만이 내 목숨을 바칠 것이네. 내가 죽고 없다면 제나라도, 천하도 안정되지 않을 거란 말일세."
관중의 말을 듣고 있던 포숙은 퍼뜩 깨달아지는 바가 있었다.
"이제 되었네. 자네들의 말을 듣고 나는 마음을 정했네. 내일 당장 나는 궁으로 들어가 소백(小白) 공자의 보좌관직을 수락하겠네."
이렇게 해서 포숙은 소백의 보좌관이 되고, 관중은 계속 규의 보좌관직에 머물렀다.
🎓 다음에 계속........
출처 - 평설열국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