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스파이렉스사코 문화가 사라지는 것을 현장에서 봤다
◆1프로의 삶#26》프로는 돈값으로 증명한다
by여유시간
9시간전
나는 한국스파이렉스사코의 문화가 사라지는 것을 현장에서 직접 지켜봤다.
인천 계양구 삼산동에 있는 주식회사 한국스파이렉스사코에 들어갔고, 33세부터 26년을 그 회사에서 일했다.
돌이켜보면 내가 그 회사에 들어간 것은 단순히 한 직장을 얻은 일이 아니었다. 나는 한 조직이 만들어지고 성장하고, 그 조직만의 문화가 자리 잡는 과정을 현장에서 함께 경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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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한국스파이렉스사코에는 지금 생각해도 꽤 멋진 복지 관련 문화가 있었다.
한국인 1대 사장이었던 박인순 대표가 회사를 이끌던 시절이었다.
회사는 영국 본사의 문화를 받아들이면서도 한국적인 조직 운영과 잘 어우러져 있었다.
직원들은 서로 돕고 배려하며 일했고, 부서 간 벽도 높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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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든 일이 생기면 서로 돕고, 휴일에는 가족 동반 파티도 있었다. 부서마다 공간을 개방하는 분위기가 있었고, 다른 부서로 이동해 근무하며 업무를 경험하는 일도 있었다. 회식도 한 부서 사람들끼리만 하는 것이 아니라 부서의 경계를 넘어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힘이 모자란 부서가 있으면 서로 돕기도 했다. 나는 현장에 맞는 아이디어를 마음껏 제공할 수 있었다.
직원들이 서로 자유롭게 돕고 움직이는 문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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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점에서 회사 터가 아파트 부지로 매각되면서 우리 회사는 땅을 팔아 얻게 된 돈으로 남동공단에 3천 평 규모의 터를 구입하여 탁 트인 단층 공장을 설립하게 된다.
시대 감각이 뛰어났던 1대 사장 박인순은 좋은 놀이와 팀워크를 다지고, 부서 간 활동비 등을 지원하며 직원들이 함께 문화를 즐길 수 있도록 했다. 그렇게 수년의 세월이 큰 문제없이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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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박인순 사장은 은퇴를 하게 된다.
자신의 제2의 인생 계획을 세우고 사진기 하나 들고 여행 가이드를 하고 싶다고 하신 것 같다. 멋진 분이다.
대표 이·취임식도 전 직원이 참석해서 파티를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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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장욱 사장으로 바뀌고부터 뭔가 앞에서 박인순 사장이 다듬어온 문화에 대한 거부감이 있던 것일까.
회사의 분위기가 서울 서초동 본사부터 조금씩 문화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회사 직원들 외식 자리에서 사장이 무슨 불편함이 있었는지 직원에게 술잔을 던지고 엄한 말을 했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이후 공장 파티에 참여해서 직원들에게 막말하고 술잔을 던졌으며, 어떤 직원은 뺨을 맞았다고 나에게 직접 말을 하기도 했다. 그는 술을 먹으면 이성을 가끔 잃는 것 같았다.
장욱은 "욱"하는 성질 때문에 큰일을 낼것 같은 사람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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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후 어느 날인가 장욱 사장은 전 직원 개인 면담을 하겠다고 말했고, 인천 공장에도 내려와서 직원들 개인 만남을 실시했다. 당시 그런 걸 하는 이유를 잘 몰랐지만 자기의 자리를 확인시키면서 직원들의 인성을 파악하려고 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가 그때 문항지를 나에게 건넸을 때 5~10년 후의 나의 모습을 써보라는 식의 문항이 있었는데, 거기에 나는 회사를 나가서 이벤트 사업과 노후를 즐기고 있을 거라고 썼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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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만나본 그는 현명한 사람은 아니었다.
무슨 철학을 갖거나 비전을 해결할 인물도 아니었고 그냥 그 자리를 채운 것 같은 느낌 외엔 없었다.
그렇게 4년 이상 지난 후 내 또래인 이재선 공장장이 은퇴하겠다고 선언했고, 나도 은퇴할 때가 된 것을 알았다.
그리고 팀웍행사와 은퇴식이 있었고 이·취임 파티에서 내가 음향을 담당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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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에 의하면
인천 공장장 자리를 그 자리에 딱 맞는 1위 후보인 A/S 사업부 오세진 기술이사에게 타진했으나, 그는 거절했다. 그는 벌 만큼 벌었고 은퇴해서 해외에 나가 노후를 편하게 살겠다고 거절했다고 한다.
나와 동갑이었고, 기술을 가장 많이 다듬은 사람이었다. 그다음으로 할 만한 사람은 전혀 없었다.
그런데 사장 장욱은 영업직이던 정정만에게 공장장 제의를 했고, 그 사람이 공장장이 되면서 내가 있던 인천 공장의 조직문화가 하나씩 더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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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정만은 영리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나는 그 사람이 처음부터 조직을 넓게 보는 능력이 부족하다고 보았다.
큰 그림을 보고 조직 전체를 연결하기보다, 큰 조직을 잘게 쪼개 부서별로 관리하려는 방식이었다.
공장에 처음 와서 한 일이 부서 사이에 칸막이를 설치한 것이었다. 부서 간 정보 이동을 차단했고, 교환근무가 없어졌다.
부서 간 회식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던 협력업체와의 교류도 제한되기 시작했다. 외부 업체와 만나는 직원에 대한 감시도 생겼다.
직원들이 서로 자연스럽게 만나고 이야기하며 정보를 주고받던 통로가 하나씩 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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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 출입구에는 차단기를 설치했고, 20년 이상 거래해 오던 외부 협력업체 차량과 출입자의 신원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직원들은 출근카드를 체크했고, 공장 내부뿐 아니라 외부까지 거의 모든 각도에서 감시할 수 있도록 CCTV를 곳곳에 설치했다.
회사 정문도 전문 경비로 맡겨버렸다.
감시와 관리, 통제가 점점 강화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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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회사에서는 이를 제품 감시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그 회사는 금괴가 있는 곳도 아니고, 그냥 쇠붙이가 있는 공장이었다. 특별히 외부로 흘러나가면 안 되는 노하우가 있는 곳도 아니었다.
수입 부품과 가공품은 이미 관리되고 있었고, 제품마다 관리 코드가 새겨져 있어 사용처가 분명했다. 누가 외부에 팔거나 반출한다고 해도 추적할 수 있는 구조였다. 한국 공장도 하나뿐이었다.
더구나 공장 울타리 안에 제품을 며칠 놔두어도 한 번도 없어진 일이 없었다.
그런 제품을 감시한다며 공장 안팎에 CCTV를 대폭 설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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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직원들은 다들 그 이유에 대해 의문을 가졌다.
나는 그것이 단순한 제품 감시가 아니라 사람을 감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더구나 저녁에 퇴근한 뒤 외부 협력업체 사람들과 술자리를 가지면 징계 사유가 될 수 있다는 공지까지 나왔다.
그 외부 업체들은 회사와 오랫동안 거래하며 서로 돕고 지내던 공생관계의 협력업체였다. 예전에는 함께 축구도 하고 서로 친목을 다지며 자연스럽게 소통하던 거래처였다.
그런 관계까지 통제하기 시작한 것이다.
참 씁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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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변화를 현장에서 지켜봤다.
내가 보기에는 단순히 회사의 관리 체계를 정비하는 정도가 아니었다. 오랫동안 직원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있던 신뢰와 소통의 방식을 잘게 잘라내고 있었다.
뭔가 오픈 마인드가 아니고, 자꾸 조직을 잘게 쪼개가고 있었다.
나는 그가 자기에게 충성할 사람들을 부서장으로 외부에서 데려와 조직을 다시 짜려한다고 보았다.
생산부에는 사료를 관리하던 공장의 과장을 데려와 부서장처럼 쓰려고 했다. 내가 보기에는 현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엉터리 수준이었다.
창고물류팀의 부서장도 외부에서 관리자를 데려왔다.
그런데 수입품 관리를 잘못해서 본사에서 난리가 났고, 결국 그 사람은 자기 손으로 잘라야 했다. 내가 회사를 다닐 때 먼저 잘려 나갔고, 나보다 1년 먼저 회사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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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외부에서 들어온 관리자들 가운데 한 명만 남고 나머지는 모두 갈렸다.
결국 사장과 공장장도 회사에서 사라졌다.
나는 그 과정을 현장에서 지켜보면서 생각했다.
‘이렇게 가면 시스템이 망가지겠구나.’
그때의 내 판단을 지금 와서 굳이 증명할 필요는 없다.
나는 그 과정을 직접 봤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서로 만나고 배우던 회사에서, 각자의 부서 안에 머물며 관리받는 회사로 변해가고 있었다.
큰 그림을 함께 보던 조직이 점점 작은 부서들로 쪼개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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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도 바로 회사를 떠나지는 않았다.
퇴직한 뒤에도 4~5년 동안 프리랜서로 회사 일을 추가 지원했다.
오랫동안 몸담았던 회사였으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마지막까지 해주고 싶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해준 일은 시스템에 들어가는 부품들의 성능을 테스트하는 지그 세트를 모두 정비하고 기록을 남겨두고 나오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일이 끝나는 어느 순간 미련 없이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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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내보내기 위해 여러 가지 술책이 있었다는 것도 알았고, 나중에 추가로 들은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이유로 그들을 악마화하고 싶지는 않다.
그들은 눈으로 봐도 모르는 공장장이나 부서장은 내 기준으로 해결책 없는 바보였다.
내가 회사에서 본 것만으로도 그들의 경영 방식이 어떤 것인지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나는 결국 26년을 마치고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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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회사를 나온 뒤 약 2년쯤 지나 당시 사장과 공장장이 함께 회사를 떠났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과정에 그 둘은 회사에서 문제가 있었다는 이야기도 전해 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직접 확인한 일이 아니다.
그 후의 이야기는 여기서 판단하지 않으려 한다.
내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직접 경험한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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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33세에 들어간 회사에서 26년을 보냈다.
그리고 그곳에서 살아 있던 조직문화의 시작과 변화, 그리고 그 문화가 사라지는 과정의 끝자락까지 지켜봤다.
1대 박인순 사장이 퇴임할 때 이·취임식을 직접 지켜봤다.
그런데 그 이후 취임했던 사람은 기록에 제대로 남아 있지 않았고, 다음 대표가 취임하기까지 약 6년 이상의 공백기가 존재했으며 그 사이에 다른 인물이 거쳐 갔다는 점도 나중에 알게 됐다.
하지만 나는 그들과 한 시대에 한 회사에 있었다.
나와 그 당시 함께 다녔던 직원들이 증인인 셈이다.
아마 나는 그 조직문화의 마지막 세대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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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 글을 쓰는 것이다.
회사에는 공식적인 기록이 남는다. 대표가 언제 바뀌었는지, 어떤 사업을 했는지, 회사가 언제 성장했는지는 자료로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직원들이 어떻게 서로를 대했는지, 부서 사이에 어떤 공기가 흘렀는지, 사람들이 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는지,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그 모든 것이 어떻게 사라졌는지는 공식 기록에 남기 어렵다.
나는 그 현장에 있었다.
나는 그들과 한 시대를 한 회사에서 살았다.
그래서 내가 본 것을 남겨두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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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경험했던 26년의 시간이 단순한 개인의 직장생활이 아니라 한 시대의 조직문화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사라졌는지를 보여주는 작은 기록이 될지도 모른다.
나는 그곳에서 일했고, 그곳의 사람들과 함께했고, 그 변화 속에서 결국 은퇴했다.
그러니 이 이야기는 남의 회사 이야기가 아니다.
내가 살아온 시대의 한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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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글로벌 CEO 성공 手記 - 朴仁淳 한국 스파이렉스 사코 사장
『달걀을 사람이 깨면 프라이가 되지만 달걀 스스로가 깨고 나오면 닭이 된다. 여러분은 어느 쪽을 택하겠는가?』
달변과 유머, 배려와 포용력을 갖춘 키 작은 사코인 시대적 거인 박인순 사장
한국스파이렉스사코 남동공단 전경
1978년: 영국의 Spirax-Sarco Limited와 합작투자 계약 체결 및 한국스파이렉스사코(주)설립 맞음: 1978년 5월 한영 합작법인으로 설립되었습니다.
1984년: 한국인 최고경영자 체제 출범 (박인순 대표 취임) : 영국인 크리스 볼 사장에 이어 1984년에 박인순 대표가 한국인 초대 사장으로 취임했습니다.
1990년대: 증기 및 열에너지 제어 관련 기술 연구소 설립 및 전국 영업 네트워크 확장 : 1990년대 남동공단 이전과 함께 고객기술연수원 및 연구소 준공, 전국 영업소 확장이 이루어졌습니다.
2000년대 이후: ISO 품질/환경 인증 획득, 시스템 절전 및 에너지 절감 설루션 기업으로 사업 확장 : 해당 시기 사업 다각화 및 인증 획득 과정이 맞습니다.
현재: 영국 Spirax Group 계열사로서 증기 설루션 및 열에너지 관리 전문 기업으로 운영 중 : 현재도 영국 스파이렉스 그룹 산하 계열사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한국스파이렉스사코는 남동공단으로 이전하기 전 인천 삼산동에 공장이 있었으며, 1989년 9월 남동공단(인천 남동구 청능대로 327) 신공장이 개설되면서 삼산동에서 남동공단으로 이전·가동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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