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로부터의 수기』
1. 도스토예프스키는 처형 직전, 극적인 사면을 통해서 살아난다. 그 후 발표한 작품이 『지하로부터의 수기』이다. 이 작품은 형식이나 문체 그리고 내용에서 매우 색다른 느낌을 준다. 스스로 타인들과의 삶으로부터 은폐한 후, 다만 글쓰기를 통해 자신을 표현하는 이 남자는 극단적인 이상주의와 회의주의 사이를 방황한다. 그가 토해내는 고백은 열등감이 넘치는 사람들의 자기 보호에 가깝다. 하지만 결코 자랑스럽지도 않은 고백과 ‘수기’를 통해 우리는 찌질하게 살아가는 인간들의 실체와 내면의 혼돈을 발견하고 때론 동감하게 된다.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꾸려는 시도하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그는 세계를 향해 발언한다.
2. 하급 공무원 생활을 하다 친척의 유산을 상속받은 후, 타인들과의 접촉을 끊고 지하에 칩거하여 살아가는 중년의 남자는 스스로의 약점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는 이상적이고 숭고한 것에 대한 신념을 갖고 있음에도 ‘결단의 부족’으로 인해 항상 무력하게 뒤쳐져 있다. 세상 사람들의 허영과 악행에 대해 분노하지만 어떤 행동을 통해 변화를 시도하려 하지 않는다. 때론 이런 굴욕감을 쾌감으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그는 지하 속에 숨어있는 자신의 모습을 ‘생쥐’라고 비하하기까지 한다.
3. 그는 새롭게 변화하고 있는 과학에 대한 찬사나 이성 중시의 흐름에 대해 회의적이다. 세상은 수학 공식처럼 세상을 이해하고 개조할 수 있다고 믿지만, 인간이 갖고 있는 근본적인 불안과 제멋대로의 행동방식은 이성이나 과학적인 인과관계적 전망에 종속되지 않는다고 확신한다. 인간이 가장 선호하는 삶의 형태는 ‘독립적인 욕망’의 실현이다. 그것은 객관적인 결과로 증명할 수 없는 인간의 독특함이다. “인간은 언제나, 어디서나, 그가 누구든간에 절대 이성과 이익의 명령이 아닌,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행동하길 좋아했던 것이다. 심지어 자기 자신의 이익에 반해서라도 그렇게 하고 싶어 할 수 있고 이따금씩은 꼭 그래야만 한다.”
4. 인간의 삶은 결코 완전한 긍정에 이르기가 쉽지 않다. 인간은 자신의 삶을 지속적으로 부정하면서 살아가는 어쩌면 ‘배은망덕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보통의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나름 존경을 받고 있는 박애주의자들도 결코 완성된 삶을 살지 못한다고 말한다. 인간이 갖는 한계, 어리석음에 대한 냉철한 관찰이 아닐 수 없다. 그의 발언은 최근 우리 사회에서 일어났던 존경받던 존재들의 불행한 끝을 기억하게 만든다. “박애주의자들 중 대다수가 이르든 늦든 인생의 끄트머리에 가서는 무슨 사건을, 그것도 이따금씩은 가장 점잖지 못한 축에 들어가는 사건을 일으킴으로써 스스로를 배반해왔다.”
5. 그는 지하에서 하나의 ‘수기’를 완성한다. 그것은 자신에 대한 부끄럽지만 솔직한 고백이다. 부끄러운 사건을 통해 표현되는 그의 삶은 어쩌면 사소한 일에 분노하고 절망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과 닮아있다. ‘수기’에서 그는 길에서 우연히 만난 익명의 장교에 대한 까닭없는 열등감과 분노를 터뜨리는 인물이다. 그는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 직접적인 부딪힘을 시도하지만 그때마다 뒤로 물러나는 소심함의 극치를 보인다. 결국 길을 걷다 길을 양보하지 않은 행위를 하고나서 환희에 찬 마음으로 다음과 같이 발언한다. “문제는 내가 목적을 달성했고 자긍심을 지켰으며 한발짝도 양보하지 않음으로써 대중 앞에서 나 자신을 그와 사회적으로 대등한 지위에 세웠다는 데 있다.”
6. 그의 이중성은 창녀와의 만남에서도 드러난다. 우연하게 방문한 창녀와의 만남에서 그는 한바탕 그녀에게 삶의 소중함을 위해서는 이상적이고 숭고한 것을 추구해야 한다는 의미로 이야기해준다. 그것은 추상적인 표현이며 “당신은 왠지 꼭 책을 따라하는 것 같아요”라는 그녀의 말처럼 관념적인 표현에 지나지 않았지만, 자신을 위해 이야기해주는 남자에게 어떤 따뜻함을 느낀다. 하지만 그것은 잔혹한 게임 또는 쾌락적인 놀이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불행한 처지에 있는 한 존재에 대한 심각한 놀림이었던 것이다. 창녀촌을 나오면서 전달한 자신의 주소로 그녀가 찾아오자 그는 불안해진다. 마치 한 존재의 삶을 갱신시키기 위하여 인류의 모든 사랑을 전파하던 그가 막상 그녀가 나타나자 그녀와 자신이 얽힐가 전전긍긍하는 것이다. 결국 그의 실체를 안 그녀는 쓸쓸하게 떠나고 그러한 모습을 보며 그는 또다시 자책한다. “나한테서 모욕당하고 짓뭉개진 리자가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이해했던 것이다. 바로 나야 말로 불행한 인간이라는 사실 말이다.”
7. 지하에 숨어 살아가는 한 인간의 고백은 생생한 그의 실존적인 삶의 형태를 보여주며, 또한 허위와 위선으로 찌든 모습이지만 그와 못지않게 왜곡되고 변덕스런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현재를 보여주는 듯하다. 겉으로는 이성과 이상의 가치를 이야기하고 인간의 사랑을 설파하면서도 결국 몇 푼의 돈 때문에 불안해하고, 불이익이나 불편을 가져오는 인간관계를 두려워하며, 단지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인을 수단으로 이용하려는 존재들로 넘치는 인간들의 군상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
8. 도스토예프스키는 사회주의 혁명에 참여한 일로 목숨을 잃을 뻔했다. 그 후 살아난 작가는 매우 보수적인 작가로 변신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혁명과 사회적 개혁을 외치면서도 구체적 삶에서는 위선적으로 살아가는 모습이 아니라, 경건한 삶의 실체를 전달해주는 따뜻하고 진정한 사랑의 형태였다. 그 후 작품, 특히 <죄와 벌>에 명확하게 드러났듯이 진정한 삶의 이상적인 전형은 헌신적이고 절대적인 소냐의 사랑이었다. 그것이 맹목적이고 위선적인 라스콜리니코프의 삶을 변화시켰고 그에게 구원의 손길을 제공하였다. <지하로부터의 수기>는 당시 러시아 사회가 추구했던 서구적 이념과 이상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담고 있으며, 인간의 진정한 가치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사람에 대한 근본적인 신뢰와 무한한 사랑의 중요성을 제시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것을 매우 색다르고 흥미있는 형식과 언어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 이 소설의 매력이다.
첫댓글 체면... 그래도 자신은 보다 나은 인간이라는 착각! 거기서 나오는 위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