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열의 얼이 떠도는 곳, 서대문 역사박물관을 찾아
스승의 날 식사 대접을 하겠다는 제자들의 전화를 받고, 먹은 것이나 진배없다고 사양했다. 50대에 접어든 장년들인데 마음 씀씀이가 고마웠다. 새벽부터 서둘러 안골노인복지관에 나가, 오늘 출발할 문학기행 준비물을 점검했다. 전날 총무와 같이 장보기를 했고 떡과 김밥은 출발 전에 배달해 주기로 했다.
여행사의 관광버스가 도착하고 일행 29명이 승차했다. 대부분 7∼80대 노년이지만, 모처럼의 나들이에 들뜬 분위기였다. 오전 KBS 방송국을 견학하고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들었다. 미리 맞춘 식단이라 괜찮은 편이었다. 여행은 항상 먹는 것 하고 잠자리가 문제다. 이번 여행은 당일치기이니 점심과 저녁을 잘 준비하면, 그런대로 불만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오후 1시 서대문 현저동에 있는 서대문 형무소 역사박물관에 도착했다. 주로 초·중·고생이 체험학습 활동으로 참가했다. 하루 수천 명씩 찾아오는 뜻 깊은 역사교육의 현장이었다. 문화해설사를 섭외했는데, 시간이 맞지 않아 개별적으로 관람했다, 첫인상은 기대에 못 미쳤다. 게시물이 조금 조잡하다고 할까. 너무 많은 내용을 적어놓다 보니 그리된 것 같다. 자세한 내용은 팸플릿으로 대체하고 게시물은 깔끔하고 세련되게 정비했으면 싶었다. 학생들을 상대로 한 교육이 주를 이루는 것 같았는데, 아이들은 우르르 몰려다닐 뿐 진지하게 게시물을 살피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인솔자나 해설사가 설명을 해주지도 않았다. 관람 요령에 대하여 사전에 지도했으면 좋았을 것을.
일제 통감부는 1907년 무악재 아래, 서대문 밖 인왕산 기슭의 금계산(金鷄山)을 병풍처럼 둘러친 삼십여 만 평의 영천(靈川) 자리에 신식 감옥을 짓기 시작했다. 조선 초 무학대사가 고개 위에서 ‘명당 중의 명당이나 삼천 명의 홀아비가 탄식할 곳’이라 예언했다는 얘기가 전해온다. 이승만, 김구 선생이 수감된 곳이고, 3.1운동 당시에는 관련자 1,692명이 수감되기도 했다. 유관순 열사는 갖은 고초 속에 1920년 10월 12일 이곳에서 순국했다. 유 열사는 이화학당 1년생으로 천안에서 체포되어 공주법원에서 7년 형을 선고받고, 경성복시원에서 형이 확정되어 복역 중이었다. 열사는 매일 아침, 저녁으로 만세를 열창했고, 그때마다 죽도록 매를 맞았다. 1920년 3월 1일에는 동료 재소자들과 대대적인 옥중 시위를 벌였다. 이때부터 한 평짜리 지하 독방에 이감되었고 모래와 쇳가루가 섞인 밥을 먹은 뒤 영양실조에 시달렸다. 계속된 고문과 익형에 시달리다 옥중 순절했다.
나의 관심은 유관순 열사에 대한 것이었다. 모두 얻어갈 수 없을 바에야 집중하는 게 나을 듯싶었다. 박물관 입구 옆에 ‘여옥사’가 있었다. 8개의 방으로 구성되었는데, 유 열사가 수감된 8호 감방을 복원하여 자료를 전시하였다. 열사의 사진은 평범한 얼굴이지만, 눈매가 매섭고 꼭 다문 입엔 궂은 의지가 엿보였다. 머리 중앙의 가르마가 그분의 성품인 양 반듯하다. 옆에 그려놓은 흰 치마와 흰 저고리를 입고 두 손으로 태극기를 꼭 잡고 앉아있는 모습은 범접하기 어려운 위엄이 서려있다. 죽은 뒤 천사가 되어 하늘나라에 사는 모습 같았다. 내 귀에는 천안 아우내 장터에서 목이 터지라 소리치던 16세 소녀의 외침이 환청처럼 들려왔다 ‘대한독립 만세!’
나는 그 나이 때 고등학교 1학년생으로 군부 박 정권 하의 ‘혁명공약’ 따위를 믿고 나라에서 시키는 대로 살았던 순진한 청소년이었을 뿐이었다. 성인이 된 뒤에는 파출소와 교도소에 가는 것을 커다란 불명예로 일고 살았었다. 전과자를 꺼려했으며, 시위에 참여하는 제자들을 못 마땅해 했다. 지나고 보니 겨레의 정기를 지켜온 사람들은 이곳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고, 많은 희생을 바쳤다는 것을 깨달았다.
최근 지난 정부의 재판 간여 의혹으로 사법부가 요란스럽다. 민주정부에서도 이럴진대 과거 군부독재정권 하에서 시국사범에 대한 재판은 어땠을까? 일제강점기시대에는 독립운동가와 사상범에 대한 탄압이 얼마나 잔학했을까 생각해본다. 기행에 참여한 문우들은 심사가 착잡한 듯 말을 아꼈다.
서대문형무소는 개소한지 79년 동안 줄잡아 35만 명이 수감되었다. 감방문은 3중으로 잠금장치가 되어있고 위, 아래에 감시구와 배식구가 설치되어 있다.
재소자 운동장 담 벽을 끼고 길을 따라가다 삼거리에서 교도관이 오른쪽으로 인도하면 죽음의 집에 도달한다. 속칭 지옥의 삼정목이라 했다. 사형 집행장은 초라하고 협소했다. 닫힌 마룻바닥 위에 놓인 작은 의자에 사형수가 앉혀지면 목에 밧줄이 감기고 커튼이 닫혀진다고 한다. 교수대 뒤편에 설치된 사형집행 레버를 당기면, 털거덕하고 교수대 마룻바닥이 내려앉고 목에 밧줄이 걸린 사형수의 몸은 아래로 곤두박질친다. 서부영화에서 보았던 교수형 모습이 떠올랐다.
취사장의 거대한 무쇠 솥이 야외에 전시되어 있었다. 한쪽에선 사형이 집행되고, 물고문에 시달리는 수형자가 있는가 하면, 취사장에선 땀을 뻘뻘 흘리며 콩밥을 짓는 사람이 있었으니 세상이란 게 이런 것인가. 울컥 속이 뒤집히는 것 같고 식은땀이 흐르며 다리가 휘청거렸다. 가까운 곳에 보이는 기념품 매장에 들어가 태극기 배지를 샀다. 나는 옥사 벽에 게시된 대형 태극기를 생각하며 상의에 배지를 달았다.
누군가 전해준 짠한 얘기도 있었다. 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김약수가 수감되었을 때, 그의 애인 우봉운과 동지 정칠성 여인이 형무소 뒤편 금계산에 올라 매일 저녁 소프라노로 노래를 불러 동지들을 격려했다는 일화가 있다고. 사랑과 동지애가 전설처럼 남아 있어 그나마 쓸쓸함을 달래주었다.
‘나는 이천이백이십삼번 죄인의 옷을 걸치고/ 가슴에 패를 차고/ 이름 높은 서대문형무소 제삼동 이호실 북편 독방에 혼자 앉아/ <네가 광섭이냐>고 혼잣말로 불러보았다.
(김광섭*의 시 <이름 높은 서대문형무소>의 일부)
(2018. 6. 6.)
* 김광섭 : 일제의 창씨개명을 공공연히 반대하다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3년 8개월간 옥고를 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