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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산우회 특별산행
문산, 백두산 가다 ( 2012. 7. 16 ~ 7. 19)
이말라
*출발
출발 전날은 심한 바람과 폭우로 온 밤을 마음 졸였다. 몇 번씩이나 아파트 아래를 내려다 보며 비행기가 뜨긴 뜰까, 출발을 할 수는 있을 건가, 설레는 마음을 날씨에 얹어 잠을 대신한다.
다음날, 걱정은 무색해지고, 언제나처럼 문산의 장도에 날씨가 발을 묶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새벽의 하늘은 그야말로 쾌청, 장마 중에 화들짝 갠 우리 날씨처럼 그곳의 하늘도 맑기를 바라며, 가방 속에 여벌의 시간 3박4일을 집어 넣고 길을 나선다. 이 자유의 가벼움으로 일상이 주는 무거움은 잠시 잊기로 하자. 일상의 시계는 여기서 잠시 멈춰있을 지이다.
김해공항 국제선 청사 안, 남자 여덟, 여자 여섯으로 이루어진 연길, 백두산 탐방 문산사람들은 설친 잠도 아랑곳없이 눈빛이 초롱초롱 날씨마냥 좋다.
익숙한 문산회원 열 하나에 회원들의 지인 셋이 더해진 여행도반들- 얼마 전 사전 만남을 한 지라 웃음과 악수로 재회의 인사를 나눈다. 아침잠을 걱정하던 최연근 회장님, 박달수 고문님, 강현호, 박지현, 강신구, 이상훈 선생님과 감윤옥, 김명옥 시인의 얼굴이 보인다. 시조시인 김덕남 선생님은 출출한 이 새벽을 준비해 오신 기증떡을 나누어 주며 따뜻한 마음을 연다. 해외여행이 생에 처음이라는 정정희 사무국장의 설레임이 역력히 읽힌다. 덩달아 달뜨는 마음인 것은 우리 모두 공자님이 설파한, 지知는 불여호不如好요, 호好는 불여락不如樂이라는 말에 기대어 이 여행이 아는 것보다 더, 좋은 것보다 더, 더 즐거울 것을 미리 예견하고 있기 때문이겠다.
부산문인산우회의 특별산행- 연길, 백두산 탐방은 연변대학에 정부파견 교수로 나가있는 시조시인 임종찬 교수의 “내 있을 때 한 번 왔다 가면 안 좋겠냐”는 말에 회가 동動해 시작되었다. 기 짜여져 있는 여행사 투어의 틀을 우리일행에 맞추어 조절하고, 한 달여를 연변의 임 교수님은 교수님대로 이곳의 집행부는 집행부대로 전화와 메일로 날짜와 여정을 조정하여 정기산행 외에 특별로 이름 붙인 장도에 오르게 된 고로 익히 아는 여행이 아닌, 그냥 좋기만 한 여행이 아닌, 문산의 호프 임종찬 교수가 1년의 연변생활 회두리에 지금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엄연한 사실이 우리 여행에 알파로 락樂을 더할 것이므로 정 사무국장 뿐 아니라 모두들 다른 기대 하나를 안고 설레임의 첫발을 내딛는 것이다.
하늘에 든다. 설핏설핏 구름 사이,
전날 내린 비로 비행기 아래 중국 땅에도 큰 강, 작은 천 할 것 없이 황토색 물이 가득하고 산들은 푸르다 못해 검은 빛을 띠고 있다. 저기 저 넓고 크게 굽이져 흐르는 강은 압록일까 중국의 송화일까를 가늠해 가며 구름 위를 간다. 김해공항에서 연길공항까지 북한 영공을 피해 멀리 공해를 통해 중국 내륙을 깊이 돌아 2시간을 날아간다. 그러나 1시간이 당겨지는 시차로 1시간을 잃어버리고 연길 공항에 닿았다. 전투기가 보인다. 아마도 군사비행장을 겸하나 보다.
*연길에 닿다
임 교수님과 여행사 가이드가 나란히 손짓하며 반기는 공항에서 그 동안의 회포는 맞잡은 손의 온기로 우선 나누고 작은 공항청사를 나오자 북쪽이라 좀 서늘하려니 했던 선입견은 훅 덮치는 열기가 삼켜버린다. 얼른 기다리는 여행사의 버스에 오른다. 이건 웬 횡재인고... 14명만 타기엔 너무나 큰 대형 이층 버스 전세다. 게다가 버스 몸에는 Vip라고 큼직한 글까지 새겨 졸지에 우리는 중국 땅의 귀빈이 되어 도문을 향한다. 우리 아픈 민족사가 각인되듯 살아있는 연변 땅, 도문을 가면서 차창 밖으로 이역만리 이 땅에서 소수 민족으로 살아온 그들의 세월을 읽으려 눈이 바쁘다. 길 양쪽으로 즐비한 옥수수 밭 사이사이 집들은 지루하게 모양이 모두 똑 같다. 붉은 지붕에 밋밋한 팔작지붕은 중국인들 집이며, 우진각으로 입체적인 모양을 낸 집은 우리 조선사람들이 산단다. 어디에서나 우리 민족은 예술성과 아름다움을 가꾸며 사누나싶어 흐뭇하다.
*도문, 그리고 늪지식당
도문이다. 도문은 연길에서 볼때 용정과 꼭지점을 이루는 삼각형 구도로 북한과 두만강을 사이에 둔 국경 도시로 한반도의 최북단인 함경북도 온성군 남양시와 마주보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두만강이라 쓰고, 중국에선 투먼지앙图们江, 즉 도문강으로 불린다.
두만강은 생각보다 폭이 좁다. 상류로 갈수록 더 좁아지며, 갈수기엔 걸어서 건널 수도 있단다. 15년 전쯤인가? 부산의 김 모 소설가가 술에 취해 두만강을 건너 북한으로 들어간 일이 실감으로 다가온다. 우리의 가이드 역시 외가가 이곳이라 어린 시절 북한에 가서 놀다오기도 했노라 해서 우리는 잠시 놀란다. 두만강은 북한을 바라볼 수 있는 중국과 북한의 접경에 위치한 강이라 우리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많은 탈북자들이 이곳에서 생사를 달리하는 가슴 아픈 장소이기도 하다.
도문공원을 가로질러 강나루에서 배를 타고 북한 쪽으로 거슬러 가보지만 울창한 버드나무와 웃자란 풀들이 시야를 가려 북한 땅은 잘 보이지 않는다. 흐르는 강물 위에서 다리 가운데에 한.중 국경선이 그어져 있다는 도문철교를 바라보며 “두마안강 푸른물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노래 한자리로 아쉬움을 대신한다. 다리는 반반씩 색깔마저 다르다.
배에서 내리자 작동하는 배꼽 시계 .
부산에서 떠나기 전, 여행사가 제공하는 점심을 물리게 하고 좋은 먹거리로 환대하겠다던 임 교수님의 배려는 어떤 것일꼬? 커다란 기대를 안고 두만강 가 한적한 식당에 닿자 연변 작가 허송절 선생이 앵두를 한 아름 따서 기다리고 계신다. 늪지식당- 그곳 시골의 식당에서 잊었던 옛 맛을 들추어 찰밥에 옥수수, 고구마, 두부, 도토리 묵, 푸른 무공해채소, 촌닭백숙과 중국 맥주 등으로 여행의 첫 식사를 포식하고 그간의 향수와 해후를 푼다. 밖으로 나와 교직에 계시는 허송절 선생에게 일행 중 어느 분이 동북공정을 우리 아이들에게 어떻게 가르치는지를 묻는다. “언급을 않지요. 다만 우리는 담담한데 한국에서 너무 목소리를 내면 우리는 점점 설 자리가 좁아져요.” 조심스럽게 내놓는 현지실정을 들으며 소수민족으로 살아가는 동포들 생각과 분단현실에 마음이 무겁다. 들 밭 황톳길이 우리 강토와 똑같은 들판에 서자 아까 강에서는 보이지 않던 건너편 북한 땅이 환하게 보인다. 철길을 따라 걸어가는 주민도 있고, 소달구지를 끌고 가는 사람의 이동이 이웃처럼 선명하다. 정수리까지 깎아 경작지가 된 산이 궁색을 증명하고 있는데 저 산까지 소를 몰고 갈까 생각하니 마음이 짠하다.
때맞춰 어린 시절 보았던 시꺼먼 기차가 지나간다. 청진행 이란다. 창문 하나 없이 검은 상자 같은 북한열차가 달려가는 모습을 보며 그들의 닫힌 마음이 저럴까 가슴이 답답해 온다.
*용정, 대성학교
햇살이 쨍하게 깔린 도문공원을 지나 용정을 간다. 윤동주의 ‘서시’ 시비가 이름을 대신하는 대성학교, 그 모롱이에 새겨진 윤동주의 동시童詩를 읽으며 그가 동시도 썼구나, 머리를 끄덕인다. 마음을 곧추어 그의 시심과 안타까운 죽음, 나라 잃은 설움이 응축된 기념관에서 지난한 삶을 올곧게 지켜나간 수많은 초인들의 일생을 보고 모두들 방명록에 날인을 하고 작으나마 후원금 봉투에 지폐를 꽂았다.
*연변의 첫 밤-초대의 자리
여행사의 본래 틀대로 라면 이 길로 백두산 아랫마을 이도백하를 향해 차를 달리겠으나 우리는 이미 우리의 일정을 정하고 온 바, 연변에서 흥감하고 흥감한 첫 밤을 맞는다. 연변대학의 학장 및 당서기장 등 주요자리를 맡고 있는 임 교수의 지인 여섯 분이 한국에서 임교수의 친구들이 온다고 마련한 초대자리에 가기위해 연길의 외곽을 1시간 여 달린다. 길은 군데군데 포장 중이라 먼지속으로 연변을 본다. 떠나오기 전 그들은 호텔식사가 좋을까, 연변의 유명한 갈비집이 더 나을까, 양고기 샤부샤부 집은 어떨까 하고 장고에 장고를 거친 것을 아는 지라 황송하면서도 사뭇 기대가 크다. 지금 우리가 가는 곳은 여러 데를 물색하고, 탐색한 끝에 무려 네 번씩이나 바꿔가며 정한 곳이다. 도착한 곳은 연변의 어느 조선인이 평생을 바쳐 조성했다는 어마어마한 정원의 대저택 앞. 입구부터가 심상잖다. 사라져간 시간을 기억하여 다른 시간을 키운 조국애가 예술로 승화되어 새로운 풍경이 눈 앞에 펼쳐진다. 족히 아파트2층 높이는 되어 보이는 화강암으로 검박한 모양의 학을 양쪽에 세워 문을 대신하고, 돌을 쪼아 만든 거대한 거북선은 한국인의 긍지를 대변하고 있다.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연못을 배경으로 독립운동가이며『해란강아 말하라』『격정시대』등, 일제에 맞서 무장투쟁을 했던 전사들의 삶을 쓴 소설가 김학철을 기린 조각물과, 중국에서 우리 임시정부가 독립운동을 계속할 수 있도록 외교적으로 자립기반 확충운동을 총체적으로 전개한 애국자 신규식 선생의 초상 등이 주변의 광활한 자연과 어울려 한 점 예술이 되어 서 있다. 한사람, 한사람 그 공적과 위업을 설명 듣고 마주한 거룩한 음식은 그들의 환대 못지않게 우리의 입을 쩍 벌어지게 했다. 여기에서도 이런 곳은 아무나 이용할 수 없는 대단한 곳이라는 임 교수님의 설명이 아니라도 주눅들 만큼 웅장하다며 입을 모은다. 아직 시절이 일러 어렵게 구했다는 송이버섯과 들쭉술과 쫀득한 맛이 일품인 떡 등을 권하는 대로 먹었다. 한국과 중국 다른 하늘을 이고 있어도 우리는 한 핏줄, 조선인임을 뜨겁게 느끼며 문학적인 교감, 민족정신, 백두산을 말하고, 풀피리로 아리랑을 불며, 가곡 선구자를 부르고,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한 목소리로 노래했다. 그리고 밖으로 나섰을 때, 하늘은 주먹만 한 별떨기와 미리내와 북극성으로 손 벋으면 닿을 듯한 그야말로 별천지를 펼쳐 맑은 공기와 완전한 어둠이 주는 감동의 소용돌이 속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먼 먼 어느 시절 보았던 그 하늘을 황홀하게 만났다.
돌아오는 차속에서 그들은 서툴게 우리 가요를 부르고, 김일성 만세 등의 인민군가를 유창하게 불러 우리를 놀라게 했다. 오랜 세월 북녘을 조국인양 지내온 그들임에랴, 마음을 곧추 세운다.
연변대학에 장학금을 쾌척하고, 그곳 사람들과의 교류로 임종찬 교수님이 닦은 연변생활 1년의 공력을 그들은 우리를 맞아 환대하면서 되갚음 하는 흐뭇한 우정으로 보여주었다.
*둘쨋 날- 백두산을 향하여
다음날, 한 시간의 시차 탓인 듯 새벽4시인데 밖이 낮처럼 환하다. 사람들의 움직임도 많다. 서둘러 백두산을 가기위해 호텔을 나선다. 아침은 중국식 도시락으로 대신하고 가는 길에 용정의 어원이 된 용두레 우물터에 들린다. 지금은 우물의 제 임무는 접은 채 이름만으로 덩그랗다. 두만강으로 흘러 들어간다는 해란강을 스쳐 지난다. 해란강이 가곡 선구자에 언급된 것은 우리 민족이 간도 지방에 처음 자리를 잡은 곳이 바로 해란강 주변 들판이었고 그 중심 젖줄이 해란강이었기 때문이다.
멀리 야산 위에 오롯한 한 채 정자를 본다. 일송정이리라. 전에는 늠름한 자태의 푸른 솔이 한 그루 있었다는데 일송정을 닮은 소나무가 우리 독립운동가의 절개 같다하여 일제가 약품으로 고사시켰으며, 우리나라 대학생들이 심고 다시 심어 지금 소나무가 자라고 있다는 가이드의 설명을 듣는다. ‘일~송정 푸른 솔은~~’ 과 ‘용두레 우물가에 ~~’ 선구자의 1. 2절 첫 소절이 저절로 낮게 읊조려 진다.
도문, 용정을 지나, 연변을 벗어난다.
연변조선자치주, 우리민족이 강제이주 또는 고달픈 삶을 지고와 새 보금자리를 튼 그 옛날 북간도라 불리던 곳,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놓인 섬과 같은 곳이란 뜻처럼 외따로 떨어져 있어도 외로움과 고달픔을 우리말로 말하면서 우리의 고전풍속을 이어가며 소수민족으로 그 맥을 놓지 않고 살고 있는 곳.
우리가 읽은 최서해나 토지 등으로 접한 그 시절 북간도 땅은 환경이 척박하고 거친 곳, 힘들고 지친 모습으로 묘사 되곤 했는데 도심은 활기가 차고 밝고 윤기가 흐르며 땅들은 비옥하여 기름져 보인다. 부지런하고 근면한 조선인들이 가꾸고 일구어 오늘의 연길이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지금은 모두들 잘 살고 있단다. 젊은이들의 차림새나 표정은 우리나라와 조금도 다르지 않아 보인다. 상가의 모든 간판은 크고 또렷하게 한글로 먼저 표기를 하고 그 아래에 작은 한자로 다시 상호를 적어 우리는 한국인이라는 자존심과 자긍심을 나타내고 있다. 중국 정부도 여기에서만은 허용한 상황이라 한다. 아마 신혼이불을 칭한 듯, 첫날 이불이라고 쓴 이불가게가 솜처럼 따뜻하게 다가오고, 칼국수라 쓴 한글 아래 칼 도刀자가 한글에 깔려 숨 죽이고 있는 듯 보인다.
차츰 한글간판이 보이지 않으면서 5시간 쯤 더 달리자 백두산 아랫마을 이도백하다. 임 교수님은 학회가 있어 연길에서만 함께하기로 했으나, 이도백하의 주지사님이 그곳에서 만찬을 마련하고 우리를 초대하기로 했다는 긴급전언이 있어 거절에 거절을 하다가 어쩔 수 없이 우리 일정을 따라 동행하기로 하고 같이 버스에 오른다.
임 교수의 고국에서 온 지인들을 꼭 대접하겠다는 그쪽의 뜻은 우리와 임 교수님을 황망하게 하였지만 거절할 방법을 찾지 못하고 일정대로 백두산을 간다. 이 일은 도문의 늪지식당에 환영 차 왔던 연길의 허송절 선생이 다른 지인에게 임 교수의 일행이 이도백하로 간다 전했고 그 지인이 그곳의 수장께 연락하여 만들어진 자리라 했다. 실제 임 교수님도 이도백하의 그 분은 뵌 적이 없고, 연길의 다른 지인이 명령처럼 그리하라하여 된 것이니 어쩔 수 없이 오늘 밤, 우리 모두는 또 초대손님이 될 수밖에다.
이도백하 고려식당에서 돼지편육과 닭백숙, 싱싱한 상추로 점심을 먹고 백두산에 든다. 근래에 중국사람들의 관광 붐으로 백두산은 그 명성만큼이나 인산인해다.
사람과 사람, 천지를 향하는 길은 우선 사람천지를 지나야 했다. 사람이 너무 많아 기다리는 시간을 줄이고자 장백폭포를 먼저 보기로 한다. 저 멀리 물소리와 하얀 포말을 날리며 허공에 걸려있는 장백폭포를 향해 계단을 오른다. 시간은 흐르는 게 아니라 쌓여 가는 것인가, 켜켜로 쌓인 화산토가 방금 흘러내릴 듯 기물이다. 오랜 시간에 걸쳐 층층이 퇴적된 지층을 지나 거대한 소리로 역사를 토하는 물의 기함, 그 키가 무려 68m라니, 이것이 장백폭포가 아니라 백두폭포여야 하지 않은가, 우리의 심사에 물줄기도 끄덕이는가, 용트림하는 폭포를 보고 또 본다. 넋을 잃은 듯 삼삼오오 사진으로 그 허기를 달래고 임 교수님이 끄는 대로 산길을 에둘러 하산길에 든다. 탈 때 자작자작 소리가 난다는 자작나무 즐비한 숲 아래 취나물 한 잎이 호박잎만 하고 낯익은 우리 산야의 꽃들도 크기가 엄청나다. 아마도 화산재의 성분이 식물에 유익한 것이든지, 아니면 여기가 뭐든 크고 큰 중국이라서인지.
하산길 중간쯤에 뜨거운 온천수가 고여 있어 두 손을 담구며 백두산이 화산임을 몸으로 실감한다.
다시 천지를 가기위해 뱀처럼 구불텅구불텅한 줄 속에서 선다. 어찌하다 보니 우리 일행이 가운데 나무 펜스를 사이에 두고 두 패로 나뉘어 버렸다. 안내자의 안내대로 들어온 것인데 돌아가 보아도 앞으로 나아가 보아도 합류가 어려워보이자 높다란 펜스를 다른 줄에 선 일행의 도움을 받아 몇 사람이 손을 잡고 넘어간다. 마지막으로 넘어오던 강현호 선생님의 지인인 강명조 사장님이 넘어오는 순간, 그만 발로 강현호 선생님의 코를 차 버리고 말았다. 강현호 선생님의 비명은 두 시간여의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이 하행하는 하얀 벤츠승합차가 올 때 마다 외치는 환호성에 묻히고 코를 싸맨 선생님의 “아이고, 이참에 코나 커져라” 하는 소리를 들은 정정희 국장과 감윤옥 시인이 자지러진다. 순간을 유머로 대치한 선생님의 재치는 긴 기다림의 무료와 여행의 피로도 잊게 한 우리 문산사람의 여유와 해학일 터, 박수를 보낸다.
내려왔다 다시 올라가는 승합차에 새겨진 번호는 300을 훨씬 넘어 있다. 모르긴 하나 몇 백대는 되나보다. 그렇지만 너무 많은 관광객과 군데군데 재포장 공사를 하느라 상하행의 차들이 교행을 못하고 교대로 통제하고 있어 더 많이 기다려야 하는 이유가 되고 있다. 드디어 승합차에 오르자 곡예 하듯 천지를 향해 긴 오르막 길을 차는 잘도 달린다. 몸이 이쪽저쪽으로 맥없이 쏠리며 왔다갔다 한다. 7월 중순인데도 봄꽃처럼 낮고 작은 백두산 야생화들이 땅에 붙어 퍼부은 듯이 피어있다. 군데군데 남아있는 골짝 눈과, 으슥한 어느 골짜기엔 스키장에나 있음직한 리프트도 보인다. 발 아래로 꼬리를 물고 따라오는 몇 백대나 되는 하얀 승합차들의 행렬이 꼭 꼬물꼬물하는 누에 같다. 계산해 보니 입장료가 우리돈으로 65,000원, 하루에 20만명이 찾는다하니 그 수입에 입이 벌어진다. 북한은 왜 우리 백두산을 가지고도 이런 관광수입을 못 올리나 싶어 억울한 마음이 인다.
그렇게 천지를 알현하는 일은 과정이 있고나서야 결과를 만나게 되는 신선함의 극치. 운무가 감싸고 있더니 어느덧 알몸을 들내고는 불현 듯 다시 아릿해지는 시야, 그렇게 뜨거운 감동과 따뜻한 설레임으로 두 손을 모으게 하는 2744m 그 영산 아래에 우리는 섰다. 둘레를 확인하듯 절벽길을 조심조심 둘러본다. 여기서 내려다보는 저기 저 푸른 물, 예서 제서 바라보는 하얀 산, 바람도 안개도 구름도 귀하지 않은 것 없고 신령치 않은 것 없다. 그야말로 명불허전 명불허전 名不虛傳, 보지 않고는 말을 말을 일이다. 고즈넉한 고요나 자연이 들려주는 진실의 소리는 사람들의 탄성에 묻혀 버린다. 이 높은 곳에 저리 깊은 청지淸池를 감춘 백두산의 신비라니, 아래서 솟는 물이 70%에 빗물이 합수 되어 있다는 가늠할 수 없는 깊이에 경외감이 엄습한다. 이 물이 다시 압록과 송화 등 네 강물의 모천母泉이 된다는 신화 같은 사실 앞에 오직 일망무애 一 望無涯, 일망무제一 望無際다.
얼기설기 펜스로 갈라놓은 중국과 북한의 경계에 서서 장백이 아닌 백두를 하염없이 본다. 연전에 갔던 서파지구는 어디인가를 살피는데 멀리 초소에 북한 병사 두엇의 움직임이 실루엣으로 보인다. 이것이 엄연한 우리의 현실이구나.
하행 역시 기다려야 한다는 명제가 긴 줄을 증거로 버티고 있다.
임 교수님의 전화기에는 백두산에서 지체된 우리 일행을 기다리고 있다는 연락이 계속 날아든다.
이도백하의 수장인지라 공사가 다망할 터, 바쁜 마음을 아는 우리의 가이드, 체질적으로 새치기 도사라며 중국인을 경계하라더니 급기야 도착한 차량에 우리를 밀치고 먼저 타는 한 무리의 중국인 패거리와 몸싸움을 한다. 표준체격보다 훨 떨어지는 작은 몸매의 가이드와 장군만한 덩치의 중국인과의 주먹다짐에 우리 모두는 일제히 뜯어 말리고 분개하던 차, 정정희 문산국장이 온 몸을 날리며 중간에 끼어 이 싸움은 목하 끝이 나는 이변이 벌어졌다. 오~ 문산이여! 우리의 국장이여! 여행 중 두고두고 이 살신성인(?)한 여인을 치하하기에 우리의 입은 바빴으니...
* 둘쨋 날 밤, 다시 초대-국제토의
서둘러 약속된 장소에 도착하자 회전원탁에는 중국정통식 최고의 만찬과 그 고장의 수장이라기엔 젊디젊은 주지사님이 자리하고 있다. 국제적인 예를 갖춰야 한다는 임 교수님의 말에 따라 우리는 졸지에 중국인인 주지사님과 국제적인 만찬장에 앉게 된 셈이다. 초대에 감사하다는 말, 젊고 미남이라는 말, 눈을 맞추며 술잔을 들고 중국식으로 간빠이를 외치는 등으로 국제적인 예를 갖추며, 천지에서 잡힌다는 산천어 회와 온갖 진미의 음식과 갖가지 술로 거나한 저녁을 먹었다. 통역을 통해 부산에 한번 오시면 우리가 잘 대접하겠노란 인사를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런 일련의 일들로 삶에 있어 여행은, 주어도 동사도 아닌 부사나, 형용사쯤으로 긴 문장의 사이사이에 틈을 내놓은 수식어처럼 신선함을 들이키는 여유로 들앉는다. 다시 5시간, 길를 달린다.
*세쨋 날, 통화- 집안의 고구려 유적
다섯 시간을 달려 백두산을 보고, 또 다섯 시간을 달려 하루 동안 열 시간 차를 타고 통화에 닿아 피로와 여독을 잠에 묻는다. 새벽, 호텔에서 간단한 아침을 먹고 내다보니 연전에 서파를 갈 때 통화에서 묵었던 적이 있어 창밖 공원 풍경이 낯익다. 호흡을 가다듬으며 손짓, 발짓으로 운동하는 사람들과 출근하는 이들의 분다한 모습.
고구려 유적을 보기위해 집안集安으로 가는길, 집안은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라 기온이 높다. 유리집에 모셔진 광개토대왕 비를 둘러볼 때는 땀이 줄줄 흘렀다. 광개토대왕의 능은 도굴되어 허물어진 돌무덤으로 있고, 거대한 크기와 조형미를 갖추어 동방의 금자탑, 동양의 피라밋으로 불리는 장수왕릉은 집안에 남아있는 만 2천여 개의 묘지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완전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어 그 위용이 빼어나다. 본래는 아들 장수왕릉 보다 광개토대왕의 능이 더 크고 위엄이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가이드는 장수왕릉이 장군총으로 불리는 것은 발견 당시 그 대단함으로 하여 어느 장수의 능일 것이라고 짐작하고 붙인 이름이므로 그 진위가 밝혀졌으니 꼭 장수왕릉으로 말할 것과,광개토대왕도 광개토태왕으로 높여 불러야 옳을 것이라 한다. 왕의 왕이기에... 그도 우리의 피가 흐르는 구나, 이 만주벌을 아쉽고 아까웁게 생각하는구나 싶어 마음이 짠하다.
더운 열기를 얼른 식히려 버스에 오르니 이상훈 선생님의 지인으로 오신 사진작가 반재용 선생님이 얼음과자 한 보따리를 안고 차에 오르신다. 총무를 맡은 내가 미처 챙기지 못한 틈새를 번번히 선생님은 파고들어 나를 짐짓 부끄럽게 하시지만, 그런 여유가 참으로 고맙고 반갑다. 전날도 뜨끈한 옥수수랑, 한 알에 2,000원씩이나 하는 정말 맛난 사과를 한 아름 들고 오시어 우리를 즐겁게 해 주시더니만, 여행 중에 먹는 맛있는 먹거리의 즐거움을 이리 몸소 나눠 주시다니... 선생님께 복 있으시라!!
인근의 오회분오호묘를 찾아 간다
집안 고구려 유적지에서 화강석의 벽에 그림이 그려진 5개의 석벽화 고분을 오회분이라하고 그 중 다섯번째 묘가 바로 오호묘이다. 큰 봉토분 다섯 개가 동서방향으로 일렬로 나란히 서있는 모습이 마치 투구 같다하여 '투구 회'자를 붙여 오회분이라 하며 그중 다섯 번째에 해당하는 분묘라는 뜻으로 '오호묘'라고 칭한다. 내부에는 세 개의 석관이 나란히 있는데 피장자를 사이에 두고 부인과 첩의 관으로 추정된다는 고구려고분 안으로 들어서자 밖의 더운 열기는 서늘히 식고 세 개의 나란한 석관 위로 천정과 사방에 고구려 벽화가 붉고 푸르게 1300년 전의 역사를 채색하며 화려하게 펼쳐진다. 동식물, 광물의 염료를 채취하여 돌 위에 직접 그렸기에 지금까지도 금방 칠한 듯 너무나 또렷하게 남아있다고 한다.
무용상과 생활상, 백호 청룡 주작 현무 등의 그림이 날을 듯 선명하나 안팎의 기온 차와 사람들의 입김으로 하여 벽화에 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것을 보며 보존을 생각할 때 안타까운 마음이 인다.
'산성자산성' 혹은 '위나암산성'이라고도 불리는 환도산성丸都山城을 향해 가는 길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여행길의 비라 반가울 리 없지만 이 후덥한 집안에서야 우산을 받지 않아도 될 만큼 반갑다. 물소리를 들으며 한적한 산길을 올라 아득한 어느 시대 쌓아 놓은 산성 길을 돌아본다. 우리 땅의 소와 똑같은 누런 어미소가 한가로이 풀을 뜯으며 한 시절 전장이었던 이 땅을 네 발로 딛고 평화로이 서 있다. 국내성으로 천도 후 주위의 반원형 산봉우리와 능선을 이용해 만든 환도산성은, 국내성이 평성인 도성인 반면 유사시 적군과 대치하기 위해 쌓은 군사적 위성으로 총둘레 7km 중 현재는 북쪽 화강암 성벽과 말에게 물을 먹이던 음마지, 전투를 지휘하던 점장대를 비롯해 병영 터와 궁전 터 흔적들이 일부 남아있다. 환丸의 의미대로 출구만 막으면 천혜의 요새가 되는 둥근 지형에 돌로 쌓은 점장대에서 돌 하나하나를 고구려의 얼굴인 양 오래 바라보았다.
내려오는 산 길섶에서 선한 얼굴의 여인이 그릇 가득 오이를 담아놓고 우리말로 2천원이란다. 중국의 오이는 작달막한 것이 단맛이 있고 아삭아삭하며 연하다. 지갑을 차에 두고 온 지라, 회장님의 주머니에서 4천원을 지불하고 두 손 가득 오이를 사들고 내려와 냇물에 발을 담구고 선 박달수 고문님께 씻어 달라며 첨벙 던져둔다. 버스 속에서 모두들 와그작와그작 오이를 먹으며, 비가 먼지를 달래는 길을 달린다.
압록강 가에서 점심을 먹고 비 내리는 압록강을 내려다보며 『압록강은 흐른다』고 책 제목으로 역사를 말한 이미륵은 그 먼 이역에서 얼마나 이 땅, 이 강이 보고 싶었을까, 여여히 흐르는 강물에 여린 빗방울이 섞이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번다한 일상 속에서 아픔으로 소원한 사람의 이름이 잠시 떠오른다. 돌아가면 물과 물이 섞이듯 선한 마음으로 마주하리.
*국내성
차는 잠시 시가지로 들어가 국내성 석축 앞에 섰다. 유리왕 22년, 서기 3년부터 장수왕이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기 전까지 약 400 여 년 동안 고구려의 수도가 자리했던 곳, 졸본성에 이은 고구려 제2의 수도였던 국내성은 사각형 방형으로 북쪽 우산과 서쪽 칠성산에 에워싸인 배산임수의 천연요새였다. 그러나 1921년 중국정부에서 성을 개수하면서 옹성의 모습은 흔적조차 없이 사라져 버렸다. 또한 동서남북에 각각 세워져 있던 성문마저 1947년 중국공산당과 국민당의 전투 때 소실되고 석축만이 명실공한 역사라는 이름 앞에 더러는 아파트의 주춧돌이 되어 서있는 이 현실, 애석하고 아쉬운 마음을 애써 누르며 어제의 강행군으로 피로가 쌓인 기사와 차도 쉬고, 또 다섯 시간을 달려 심양으로 가야하는 일행들도 피로를 풀 겸, 맛사지를 받기로 의견을 모은다. 며칠간의 여독이 쌓인 몸을 남의 손에 온통 맡긴 채 여유롭게 누웠다가 심양을 향해 먼 길을 간다. 이동하는 차중에서의 여흥은 이루 말로 다 표할 수가 없다. 노래면 노래, 여담이면 여담, 거기에다 먹거리면 먹거리, 그 긴 길이 전혀 지루하다거나 힘들지 않은 것은 여행의 일행들이 문산이란 이름으로 하나였기에 흥겹고, 신나고, 아름다운 시간들이었으리라.
이상훈 선생님의 여유로운 사회와 이제 막 물이 오른 민요조의 소리, 젊음으로 되돌아가시어 보이스카우트 대장으로 언제까지나 싱그러운 우리의 영원한 젊은 오빠 달수 고문님, 주저함 없이 선선한 작은 장수 김덕남 선생님, 첫 자리인데도 당당하게 제 역할을 하신 이정자 사장님, 분위기를 위하여 애쓰신 최연근 회장님, 청년 같은 목소리로 가곡과 동요를 들려주신 강현호 선생님, 소년 같으신 박지현 선생님, 지칠줄 모르는 정정희 국장, 김명옥 재무님,너그럽고 멋진 반재용 선생님, 점잖고 과묵하신 강신구 선생님, 강명조 사장님, 그리고 재담꾼 임종찬 교수님, 한사람 한사람 모두 정수整數가 모여 자연수가 된 우리 문산식구들, 그러나 꼭 한 사람, 아름다운 문산여인 감윤옥 시인의 그 고통을 짚지 않을 수 없다. 우리 모두가 이렇듯 재미있고 맛난 시간을 만끽할 때, 멀미에 시달리며 녹초가 되어 있던 그녀의 아픔을 나누어 할 수 없는 안타까움에 모두들 마음만 탈 뿐이었음도 얘기 해 두자.
*세쨋 날 밤 -신빈新賓마을의 만찬
비도 멎고 어둠이 내리는 시간, 차도 기사도, 차멀미에 녹초가 된 감 시인도 쉴 겸, 통화에서 심양을 가는 노중에 신빙新賓이란 만주족의 마을-누루하치의 고향에 차를 댄다. 신빈이라, 오늘은 우리가 새 손님이다. 연변에서, 그리고 이도백하에서 대접받느라 남은 밥값도 꼬불쳐 놓았겠다, 맛있는 저녁을 위해 강을 낀 공터에 즐비한 간이식탁에 앉아 가이드가 날라다 주는 소고기, 돼지고기, 양고기, 물고기, 새우, 오징어등을 구운 꼬치 안주와 매운 가재 요리로 질펀한 야외 만찬이 차려진다. 중국식 배갈도 한 병 시킨다. 우리식으로 하면 포장마차 촌 같은데 강을 가운데로 건너편과 이켠의 생활상이 확연히 달라 보인다. 아마도 한족과 만주족의 생활상이 우리의 강남, 강북 같을는지 모르겠다. 만주족은 익히지 않은 음식은 먹지 않는다더니 심지어 부추까지도 꼬치에 끼워 구워서 나온다. 그 밤, 술도 거나하게, 배도 빵빵하게 채우고 심양으로 오는 길, 그 차중의 신명이야 일러 무삼하리오.
심양은 옛 청의 수도 봉천으로 중국에서 다섯 번째 큰 도시다. 코리아타운이 있어 롯데리아 같은 한글 간판이 간간히 보인다. 늦은 밤 서탑가의 야경을 보며 호텔에 들어와 여행의 마지막 밤을 다시 한 잔 술로 적시며 문산의 특별산행의 회포를 다진다.
*심양의 아침
아침 일찍 호텔 밖에 즐비한 가게가 문을 열었다.
어느 틈에 임 교수님이 우리 일행들이 먹으라며 과일을 한 봉투 사 왔다. 양귀비가 가장 즐겨 먹었다는 ‘리지’란다. 겉껍질을 까고 맛을 보니 달디 달다. 양귀비처럼 예쁜 사람만 먹는대도 좋고, 먹으면 양귀비처럼 예뻐진대도 좋고. 거푸 몇 개를 까먹으며 든 생각...
마지막 행장을 꾸려 심양을 나서면서 중산광장의 모택동 동상을 보았다. 중국에는 전국에 10여개의 모택동 동상이 서 있는데 북경 것만 빼고 하나같이 손가락을 북경을 향해 ‘북경으로 갑시다’ 하고 있다한다. 심양관광은 일정에 없으니 누루하치 궁이니 하는 것들은 다음 기회로 두고 연길로 돌아가야하는 임 교수님과 작별 한 후 심양공항으로 가는 길, 부산의 집으로 전화를 한 김명옥 시인이 부산은 태풍으로 굉장하단다고 전한다. 아니나 다를까 공항에 닿으니 떠야할 비행기가 부산에서 순연되어 연발이란다.
시간도 남고, 우리는 아직도 여행 중!!
그 때 뻬어난 사진작가이신 반재용 선생님께서 우리들의 프로필 사진을 찍어주시겠다고 급 제안하셨다. 우리 모두는 심양공항 푸른 나무 앞에서 헤벌쩍 입을 벌리거나 폼을 잡고 사진을 찍었겠다. 유명한 작가 선생님께 프로필 사진 찍기가 그리 쉬운 일인감, 황공하고 고맙고 감사한 마음 두고두고 잊지 않겠노라고 새기면서...
그리고 기다리고 기다리는 그 긴 시간, 면세점 구경을 가도 남은 그 시간, 우리의 국장 정정희 시인의 '나의 상훈 씨'로 시작한 여가선용 한 페이지, 천기가 누설될까 염려되어 접어둔다. 그렇게 탄 비행기는 기상이변으로 심한 흔들림, 다시 우리의 감윤옥 시인은 멀미로 물 한 모금 먹지 못 하고 지옥 같은 여행의 마침표를 찍기 전 기진맥진 김해공항 트랩을 넘어질 듯 내려와 한 점 아픔으로 남았다.
*다시 일상 속으로
그리고 집으로 돌아온 다음날 아침 녘 걸려온 임 교수님의 전화에 나는 그만 아연실색하였다.
심양의 지인에게 예약을 부탁한 연길행 비행기는 우리가 오는 그날 저녁 심양 발이라 종일을 심양을 둘러보고 지인도 만나면서, 아침 일찍 떠난 우리와의 시간 갭을 메우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그 지인이 예약한 비행기는 날짜만 같은 한 달 뒤였다는 것, 어쩔 수 없이 기차표를 끊어 14시간의 지루하고 지루한 중국기차로 여직 연길로 가고 있다는 거였다. 아이쿠나, 우리를 그리 칙사 대접하고, 정을 나누어 주며 타국 여행길을 함께 하다가 마지막에 그런 낭패를 당하다니, 비행기로 1시간 거리인 심양-연길이 기차로 14시간이라니 난감하고 난감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 고생하십시오 하며 전화를 끊을 수밖에, 우리가 남긴 안주로 맥주나 마시며 가고 있노란 쓸쓸한 말이 귓전에 남았다.
꽉 매인 삶과의 결별을 감행한 연길, 백두산을 둘러본 이번 여행은 인간미와 정으로 쌓아 올린 산 같은 사람들의 기백으로 하여 문산답게 마무리하다라고 꾹꾹 눌러 써 둔다.
다시 째깍째깍 일상의 시계가 가고 있다.
첫댓글 생생한 후기 잘 읽었습니다...역시 대단하시네요...알뜰한 일정도 탐나구요....아쉬울 따름입니다.....ㅠ.ㅠ.....
부러울 뿐입니다! 언젠간 저도 이런 날이 올 것이라 믿으며 이만 총총
함께하고싶었지만 ......아쉬움만~~~~~역시알차고 즐거운 여행 부러울 따름입니다. 너무나 생생한 여행기 눈앞에 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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