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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판도를 흔들다-
게르만족의 대이동
유럽의 기원
유럽이란 이름은 기원전 8세기 고대 그리스 서사시인 헤시오도스의 작품에 처음 등장한다. 어떤 역사가들은 유럽이란 명칭을 그리스 신화의 에우로페(Europe) 전설에 기대기도 한다. 필자도 이 글을 쓰기 전까지 그렇게만 알고 있었다. 재미를 덧댄 신화가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신들의 제왕 제우스가 오늘날 레바논 땅의 페니키아 공주 에우로페의 아름다움에 매혹되면서 신화가 시작된다. 바람둥이 제우스가 변한 황소 등에 올라타고 크레타 섬에 납치된 에우로페는 제우스와의 사이에서 세 아들을 낳는다. 그 중 한 명이 크레타의 미노스 왕이 된다. 이로써 에우로페가 미노스 왕조의 모후에 등극한다.
이 신화를 토대로 역사가들은 새로운 가설을 하나 세웠다. 서아시아의 거대 권력을 가진 세력들이 식민지를 개척하면서 야만상태의 그리스에 동방문화를 전해주었다고 주장한다. 문화의 자긍심이 하늘을 찌르는 그리스로서는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그리스에 동방으로부터의 문화가 유입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당시 그리스인들은 그들이 살고 있는 곳이 아시아 대륙 끄트머리에 붙은 손바닥만 한 땅이라는 사실을 결코 인지하지 못했다. 최소 기원전 5세기 초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경험하고 나서야 유럽과 아시아, 즉 해 뜨는 오리엔트의 언어는 물론 문화와 관습적인 면에서 자신들의 세계와 구분할 수 있었다. 그리스 델포이 박물관의 옴파로스가 세계의 배꼽(중심)이라고 흔적을 나타낸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우리도 옛날에는 세계의 중심으로 생각했었던 적이 있었다. 우리나라 옛 지도를 보면 화폭 가운데 떡 하니 차지한 한반도, 지금의 중국 땅보다 더 넓게 그린 중심사관이 그것을 증명한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다르다넬스 해협과 지중해를 나누면서 세상은 세 지역으로 인식했다는 것이 오늘날의 유럽이라는 명칭을 생산해냈다. 실제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유럽과 아시아의 기후를 비교하면서 그리스인들이 양 대륙의 중간적인 위치에서 두 곳의 긍정적인 특성을 결합한 정치제도를 갖출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로써 그리스인들이 ‘정치적 동물’이었다는 자긍심이 훗날 유럽 사람들로 하여금 타 지역보다 시건방진 사고를 불어넣는 계기로 작용하지만….
유럽의 뿌리는 로마제국으로부터 출발한다.(그리스 문화와 철학은 나중에 끼워 넣기 식으로 이루어진다) 학자들 중 2세기 말 ‘5현제시대’를 끝으로 진정한 로마제국은 막을 내렸다고 보는 견해가 많다. 왜냐하면 이후에는 정치를 제외하면 경제와 문화의 중심지는 동부 지중해를 중심으로 헬레니즘 세계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라고들 한다. 더 나아가 이들의 주장대로 로마의 마지막 황제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다.
더 깊게 들어다보면 훈족의 유럽 침략으로 도미노 현상이 일어나면서 서로마는 해체되지만, 그와 더불어 본격적으로 유럽이 태동하는 시점이 되기도 한다. 훈족에 쫓겨 로마로 밀려든 게르만족에 의해 유럽은 아이러니하게도 안팎으로 확장되는 계기가 마련된다. 게르만족의 로마유린은 문화를 파괴하면서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는 이중적인 성격을 지녔다.
그리스·로마문화는 유럽인의 정신세계에 뿌리 깊게 박혀 있다. 그만큼 그리스와 로마문명을 유럽의 역사적 뿌리이자 모태로 여긴다는 뜻이다. 그러나 중세 서유럽을 보면 당시 그리스 문명의 흔적을 찾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서유럽이 동방제국 비잔티움보다 앞서가기 시작된 것은 11세기가 지나고부터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그리스 철학적 사유의 시점인 아리스토텔레스가 유럽에 소개된 것도 12세기가 도래하면서부터였다. 그것도 아랍인 철학자 이븐루슈드(아베로스)가 이슬람어로 쓴 책이 당시 에스파냐를 통해 서유럽 수도사들에게 전해지면서다. 당시 서유럽의 수도사들은 처음 대하는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생소한 인물에 대해 궁금해 하면서 조금씩 플라톤과 소크라테스를 알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비잔티움제국은 서로마와 달리 이미 그리스 문명을 이어받았고 언어 역시 그리스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서유럽은 동로마, 즉 비잔티움제국의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튀르크의 메메트 2세에게 점령당하면서 본격적으로 지식사회가 형성된다. 당시 서로마는 일부 성직자를 제외하고 거의 문맹사회와도 같았다. 유럽 3대 정복자로 손꼽는 프랑크제국의 카롤루스 대제(Carolus Magnus, 프랑스어로는 ‘샤를마뉴’라고 한다)조차도 글을 읽을 줄 몰랐다는 것은 그만큼 문맹이 보편화되었다는 뜻이다. 오스만 튀르크를 피해 서로마에 비잔티움제국의 지식인들이 몰려들면서 의술, 문학, 그리고 막연하게도 신의 뜻이라고만 생각했던 것들을 일시에 불식시키는 과학이 함께 들어왔다. 그것이 인쇄술의 발달과 훗날 거부할 수 없는 르네상스의 물결, 종교개혁으로 이어졌고, 프랑스혁명을 경험한 뒤 19세기에 오면서 현재 유럽인들 동질성의 개념이 명확하게 자리 잡는다.
주위를 평정한 제왕이라면 자신의 지배체제를 공고히 하기 위해 통치영역 내 정신적 구심점, 즉 동질성의 부여가 필수적인 요소다. 어느 제왕이든 이를 간과하지 않았다. 이를 위해 이들은 곧잘 종교를 활용하곤 했다. 고트족, 반달족, 앵글족 등 여타 게르만족이 자신들의 민족성향 등에 의해 예수를 인간으로 보는 아리우스파를 따르지만, 프랑크족만은 삼위일체설의 로마 가톨릭을 따랐다. 메르베치를 시작으로 그의 손자 클로비스가 프랑크 왕국을 세우면서 로마 교황으로부터 세속권을 인정받고자 로마 가톨릭을 선택한 것이 그야말로 신의 한 수였다. 로마교황과 제정분리를 철저히 지키면서 교황과 윈-윈 관계를 이어간다.
황제가 비잔티움으로 옮겨옴으로서 세속권과 신의 권력인 신권神權이 함께 옮겨온 것이라는 비잔티움 주교와 대립의 각을 세운 로마교황으로서도 하등 손해 볼 것이 없었다. 세속의 지배 권력에 왕관을 씌워주는 막강한 권한을 부여받은 교황은 이민족의 약탈과 잦은 내분으로 폐허로 변해가는 로마의 옛 영광을 되살릴 수 있는 기회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자 야만 이민족을 대상으로 포교를 위한 성상의 다양한 아이콘이 절실했다.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인간으로선 도무지 듣도 보도 못한 하나님을 믿으라는데, 뭘 보고 뭘 믿으라는 것인지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하느님의 말씀과 성경 내용을 이해시키는 데 있어 그림과 조각만큼 유용한 것이 없었다. 이렇게 발전한 아이콘이 우상숭배를 위한 활용도를 높이는 계기가 되면서 동방정교와 로마 가톨릭 간에 갈등은 점점 심화된다. 더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슬람이라는 거대한 물결로부터 가톨릭 성전을 충실히 수행하는 이민족 제왕에게 로마 교황은 황제의 관을 씌워주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샤를마뉴다.
샤를마뉴, 즉 카를로스 대제 그는 누구인가. 7세기 후반 이베리아반도의 서고트왕국은 왕위계승 문제를 놓고 왕족들 간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권력암투의 와중에 위티사 왕이 살해당하고 그의 뒤를 이어 왕좌에 오른 아들 아길라는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아프리카 이민족에게 손을 내밀었다. 구한말 조선이란 나라가 그랬듯 내부 문제를 외부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것이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결과는 참혹했다. 이슬람 장군 타리크는 병사 1만 2천명을 이끌고 지브롤터 해협을 건넜다. 그는 거침이 없었다. 서고트왕국 내분을 안정시키는 동시에 서고트왕국을 아예 통째로 먹어버렸다.
모래사막뿐인 북부 아프리카에서 이베리아반도의 따뜻한 기후와 풍요에 홀딱 반한 이슬람군은 서고트족을 이베리아반도 북부 산악지대로 몰아내는 데 성공하자 이들은 자신감을 얻었다. 8세기에 들어서면서 춥고 척박한 북쪽으로 도망친 서고트족을 쫓는 대신 이슬람의 칼끝은 유럽의 남서부 프랑크왕국을 향했다. 이때 게르만족 일파인 프랑크족의 후예 카를 마르텔이 이들 이슬람세력을 맞아 치열한 전투 끝에 페레네산맥 이남으로 격퇴시키는데 성공한다. 이 전쟁은 유럽문명의 지역적 기반확대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리고 70년이 지나서 그의 손자 샤를마뉴가 서로마 황제로 등극하면서 서방세계는 이슬람으로부터 스스로 승자라는 자부심이 충만해졌다.
유럽은 9세기에 들어서면서 또 한 번 판도를 뒤흔드는 민족의 대이동이 일어났다. 북유럽의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흩어져 살던, 바이킹으로 불리던 노르만족의 이동이 시작된 것이다. 이 사건으로써 서구유럽은 스칸디나비아반도를 포함한 북서부까지 유럽으로 영입되고, 10세기에는 봉건세력의 왕성한 활동에 힘입어 동부유럽과 서슬라브의 폴란드, 헝가리 등이 서방세계에 자연스럽게 편입된다. 마치 이민족에게 정복을 당하면서 땅을 넓혀간 중국을 빼닮았다.
지금까지를 재정리하자면 유럽에 현재의 문화와 역사적 사고가 정착되기까지 고대 그리스의 자유와 민주정, 중세에 오면서 철저한 기독교적 공화국의 실질적인 사상과 세력균형, 그리고 18세기의 과학문명이 합친 총합의 결과다. 아시아와 접경지대로 완충역할을 충실히(사실은 하루하루 피를 말리는 방어) 해내면서 의도하진 않았지만, 페르시아, 이슬람 등 아시아 국가들로부터 가톨릭의 수호자 역할을 충실히 해낸 상처투성이의 비잔티움제국 덕을 톡톡히 본 셈이다. 비잔티움제국은 단 하루도 잠잠할 날 없이 새로운 것과 마주해야 하는 지리적 요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들은 이 모든 것을 보존하며 간직하고 있다가 그들의 멸망과 함께 서방세계로 전해주었던 것이다.
훗날 이베리아반도에 그라나다를 마지막으로 아랍 세력들이 완전히 사라지면서 서유럽은 기독교 천지로 굳혀진다. 지독한 가톨릭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에스파냐와 합스부르크왕가가 중세유럽 권력의 양대 주축을 이루면서 유럽은 더 큰 구획으로 경계가 명확해졌다. 그러나 배타적 종교라는 인류미래에 있어 영원히 해결되지 않을 문제를 남기기도 했다. 11세기 말에 시작된 십자군원정의 성지회복전쟁이 13세기말까지 이어지면서 유럽은 상처만 남았다. 이것이 훗날 세계대전으로 확장(?)되면서 아랍세계와 서방은 지금까지 갈등국면에서 벗어날 기미조차 없다.
야만 게르만족의 대이동
이유 없는 무덤은 없다. 어떤 민족이든 부족이든 간에 그 근간이 되는 뿌리가 있게 마련이라는 뜻이다. 게르만족은 원래 북유럽 발트해 연안, 즉 스칸디나비아반도를 아우르며 현재의 노르웨이, 필란드, 스웨덴, 덴마크(학자들에 따라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도 포함한다) 등지에서 흩어져 살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군집을 이루거나, 혹은 외따로이 떨어져 살거나, 혹은 꾸준하게 이동을 하면서 살았다. 낮이 짧고 밤이 긴, 겨울이 길고 여름이 짧은 척박한 기후에 적응하면서 수렵과 어로행위, 가축을 기르거나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기후의 변화와 인구의 팽창, 농사지을 땅이 부족해지면서(외부의 침략, 혹은 내부 갈등) 일련의 사람들이 지도자를 중심으로 따뜻한 기후를 찾아 남쪽으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수십 수백 년간 이동하면서 지금의 독일과 헝가리, 더 멀게는 발칸반도와 러시아남쪽까지 내려와 정착하며 그들만의 삶을 영위했다. 인류 역사가 그랬듯 힘이 센 부족을 중심으로 병합되고 융합되면서 겨레라는 이름으로 결속되고 나라의 기틀이 마련되자 국가가 탄생하면서 이웃과의 협력과 때론 갈등 속에 역사를 만들었다. 이들 중 글로벌 제국 로마에 누구는 정복당해 흡수되고, 또 야만족으로 폄하되면서 이민족의 설움을 겪기도 했다. 때로는 대등하게, 때로는 강력한 적으로 대를 이어왔다.
그러다가 어느 해부터 로마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끝으로 200년 태평성대가 기운을 다하며 저물어가기 시작했다. 여느 제국처럼 내부로부터 망조의 기운이 움트고 있었던 것이다. 긴 태평성대가 가져온 사치와 향락은 몰락의 비극을 싹틔운다. 50년간 무려 18명의 장군들이 무력을 동원해 황제에 오르는 기염(?)을 토한다. 평균 제위기간이 채 3년도 되지 않았다. 어딘가 곪아 있는 사회는 도독을 영웅시한다. 물론 반대도 있다. 의외의 인물이 등장해 위기의 순간을 지혜롭게 넘기며 진정한 영웅으로 거듭나기도 한다. 이때 콘스탄티누스대제가 등장했다. 지도자의 위엄은 청렴에서 나온다. 믿음 또한 성실함에서 생긴다. 콘스탄티누스는 로마에 대한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 하면서 오로지 옛 로마의 명성을 되찾고자 노력했다. 그는 카톨리케, 즉 일반적인, ‘보편적’이란 뜻인 기독교를 공인하고 제국을 하나로 묶을 구심점으로 활용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로마의 서울을 유럽과 아시아가 맞닿는 비잔티움으로 옮긴다. 이때가 330년이다. 수도의 이름도 자신의 이름을 따 콘스탄티노플이라 고쳐 불렀다. 그러자 부富가 옮겨가고, 사람과 경제가 이동했다. 남겨진 이탈리아 로마는 방치되고 마치 주인이 떠나고 없는 빈집처럼 변해갔다. 주인이 없는 집은 이방인이 주인행세를 하게 마련이다. 주변에 붙어살며 서러움을 겪던 게르만족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이들은 거칠 것이 없었다. 게르만족의 로마침탈이 본격화 된 것이다. 게르만족은 로마를 제집처럼 들락거리며 약탈을 일삼고, 노략질을 밥 먹듯 해댔다. 결국 서로마 황제는 덩치가 남달리 크고 힘이 센 게르만족을 용병으로 받아들이는 정책을 펼치면서 이이제이以夷制夷가 아닌, 이민족으로 이민족을 방어하는 이상한 구조로 근근이 이어갔다. 이것이 서로마의 끝을 재촉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4세기 중반, 엎친 데 겹친 격으로 생전 듣도 보도 못했던 훈족이 유럽을 유린하기 시작했다. 로마인들이 야만족이라 무시했던 도나우강 동쪽의 게르만족 일파인 반달족과 동고트족, 서고트족 등 이들은 살길을 찾아 우왕좌왕하며 서쪽으로 밀려들고 있었다. 이 과정은 반드시 전쟁이 뒤따랐다. 이들은 막바지 안간힘을 발휘해 로마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뭉치지 않으면 죽거나 노예로 전락한다. 게르만족이 이동하면서 로마는 물론 유럽의 역사에 광풍이 몰아쳤고 일대 파란을 겪는다. 비잔티움이 훈족에 의해 두들겨 맞고 치욕과 굴종을 겪는 사이에 서로마 역시 훈족에게 쫓겨 도망쳐온, 그들이 야만인이라 부르는 게르만족에 의해 굴욕을 맛봐야 했다. 결국 서로마는 야만족 출신의 젊은 장수 오도아케르에 의해 제국의 간판을 내린다. 그리고 동로마, 즉 비잔티움제국의 하수로 전락하다가 534년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에 의해 로마수복이 이루어지기까지 60년간 암흑의 시대로 지내야 했다.
권력의 힘은 늘 그 한계를 실험하라고 부추긴다. 제왕을 자처하는 자들은 추호의 의심도 없이 그 실험에 기꺼이 동참한다. 도무지 만족할 수 없는 욕망의 화신인 까닭이다. 그 결과는 상상을 뛰어넘어 참혹하기 짝이 없다. 그것이 결국에는 민족의 이동을 낳는다. 이동이란 필연적으로 이별을 동반하고, 격변의 시간을 제공한다. 그 와중에 새로운 영웅이 나타나고, 약탈의 본능이 생사를 좌우하면서 정의로 포장되는가 하면, 민족의 스승으로 우상화되기도 한다. 타인에 의해 터전을 버리고 고난의 이동을 이어가는 민족 앞에 보이는 것은 모두 적일뿐이다. 이들의 이동경로를 보면 어느 한 순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동안 생사를 넘나드는 전투를 이어가면서 쫓기고 또 쫓아내면서 이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4세기 중엽 훈족이 유럽의 최동단 알란국을 정복할 당시 동유럽의 상황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흑해 북부의 평원에 고트족이 넓게 퍼져 살아가고 있었다. 돈강과 드네프르강 사이에 동고트족이, 서쪽에는 비지고트, 즉 서고트족이 자리 잡고 있었으며, 또 발칸반도의 트란실바니아와 갈라티아에 게피드족, 헝가리의 티사강변에 반달족이 살았다. 이 외에도 발칸반도와 흑해 북부 일대를 장악하며 슬라브계와 이란계, 그 외 게르만족의 중소 종족들이 넓게 분포해 살고 있었다. 이들은 훈족의 침략으로 유럽 각지로 흩어지면서 역사를 만들다 사라지고, 또 흡수거나, 혹은 현재 서유럽 국가에 뿌리내린다.
첫댓글 이유없는 무덤 없다 누구든 뿌리가 있는 법이다
추석을 보내면서 의미있는 말이네요
한두번 읽어서 이해하기 힘든 글 같지만 자꾸 읽다보면 쫌 알겠지요
좋은글 감사합니다 항상 건필하세요
그냥 구라쟁이에서 해박한 역사지식을 가미한 노련한 구라쟁이로 변모.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