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바로 알고자 6.25전쟁에 대해 쓴 수필을 보내드립니다.
안녕하십니까
(주)도이퍼니쳐와 (주)쏙쏙이식품 대표이사 이한형입니다.
6.25를 경험한 사람입니다.
아래는 경의선문학 2015. Vol 13에 실린, 제가 쓴 수필입니다.
6.25 전쟁
1950년 6월25일, 북괴군의 남침은 3년1개월 전쟁에 양측사망자(실종자포함)가약530여만 명이며 부상자는 600여만 명이 발생하였다. 단군역사 5천년은 물론이고 전 세계 역사적으로 보아도 6.25전쟁처럼 참혹한 동족상잔의 전쟁은 없었다. 65년 전, 6.25전쟁에서 남북한 민간인 희생자가 3백만 명 이상이다. 이러한 어마어마한 희생자는 왜 발생하였는가? 양측 군인에 의한 희생자만은아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6.25전쟁을 되돌아보고, 왜 상상할 수 없는 사망자가 발생하였는가를 되돌아 보아야 할 것이다.
원인은 길게 보면 조선조 5백여 년간의 반상班常의 계급에 의한 것이며, 짧게는 1917년 러시아혁명이다. 러시아혁명의 주제사상은 만민의 평등이며 모든 생산은 공동으로 생산하여 평등하게 분배하는 것이다. 공산주의 이론이 이러하다는 것이지 실질상은 이론과 같이 공산주의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연이나 5백년간 천민계급 또는 노비로 억압적이고 또한 노예처럼 살아온 계층에서 볼 때는 꿈에도 그리는 구원의 등불과도같은 주체사상으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천민계급은 아무리 똑똑하여도 학문을 배울 수 없었으며 희망과 비전을가지고 생활할 수가 없었다.
펄벅(Pearl S. Buck)의「대지大地(The Good Earth. 1937)」에서 중국을 배경으로 서두序頭는 왕릉의 결혼일 것이다. 왕릉은 대감댁의 하인이며 대감이 예쁘고 젊은 하녀를 본처 몰래 데리고 놀았다가 본처에게 들키자 하녀를 머슴인 왕릉에게 시집을 보내는 내용이다. 이와 같이 비인간적인 행위가 조선조 5백여년간얼마나 많았던가. 또한 비인간적인 처사를 당해도 어디 억울함을 하소연할 수도 없고 천민 또는 쌍놈으로태어난 것으로 저주하며 살아왔다. 물론 양반계급이 모두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6.25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이미 공산주의사상은 우리 민족에게 엄청난 영향을 주었으며 좌우익세력 중 좌익세력이공산주의추종자라 할 것이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기전 이미 남과 북에서는 좌우익 세력간의 끓임 없는 보복행위가 계속되었으며 남한에서 발생한 1946년 10월 대구 폭동에서는 경찰들이 산채로 화형을 당하고, 산채로 껍질을 벗기어 죽임을 당했고, 1948년 4월 3일 제주도 폭동에서는 6.25전쟁이 끝날 시기인 1953년 6월까지는 공비들에 의해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였고, 1948년 10월 여수순천반란사건 또한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상기와 같이 김일성도당은 남한의 좌익세력을 준동하여 남한사회를 혼란케하는 한편 소련의 지원 하에 철저한 전쟁준비를 해 자신들의 사상인 김일성장군의 영도를 교육시키며 남침을 준비하였던 것이다. 6.25남침 후 공산치하에서 인민군과 남한의 좌익세력과 민청원 등은 남한의 저명인사들을 북으로 납치하였으 며 또한 인민재판이라는 미명하에 증오대상으로 삼던 주민들을 무차별 학살하였다. 반대로 유엔군과 국군의 반격으로 공산군이 후퇴할 때 민청원과 북괴군에게 학살당하고 살아남은 유족들은 북으로 쫓겨가지 못한 괴뢰잔당들은 가만 두었겠는가? 학살이 보복을 낳은 참혹한 동족상잔의연속적인 비극이었다. 연이나 북한에서는 공산도당들의 만행에 우익세력의 반항이 없었겠는가? 오죽하면 공산군이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후퇴하면서 우익세력을 반동분자라는 이름으로 주민들을 산채로 껍질을 벗겨죽이고 입술에 철사로 꿰어 죽이는 등 그 만행이 극에 달하였다.
당시 북한군의 실체를 살펴보면 강제로 징용되어 동원된 15~16세의 어린학생들이 많았다. 이같이 김일성 정권은 남침의 야욕을 채우기 위하여 어린학생을 전선에 보내서 총알받이로 이용한 악독한 괴뢰정권이었다.
6.25전쟁의 민간인 사망자의 원인을 살펴보자.
1. 전쟁중 군인에 의한 사망자.
2. 인민재판등 무차별학살을 당한 사망자.
3. 학살당한유족들의 보복에 의한 사망자 등이다.
1.4 후퇴에는 왜? 수많은 북한주민들이 목숨을 걸고 남으로 피난했겠는가? 고향을 버리고 모든 재산을 버리고 왜? 남으로 피난을 했는가! 공산정권의 김일성정권이 살기 좋은 지상천국이었는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라도 살기 좋은 자유의 남쪽으로 피난을 한것이다.
여기에서 실화 한 토막을 소개한다.
영화 국제시장에서 처음장면이 흥남부두 철수장면이다. 영화장면같이 미군함정을타고 철수했지만 대부분의 피난민들은 작은 중소형의 목선을 타고 피난했다. 목선은 험한 파도를 뚫고 달렸다. 뱃머리에 부서진 파도가 튀어들면서 얼어붙어 온몸에 얼음조각을 뒤집어썼다. 엄마품에 안겼던 아이가 새파랗게 얼어죽기도 했다. 그때 피난민 한사람이 벌떡 일어섰다. 아이를 업고 있던 30대 중반의 젊은 여자를 노려보더니, “이 에미나이의 남편이 빨갱이다. 이 악질빨갱이가 무슨 낯짝이 있어이 배를 탔음!" 누가 말릴 틈도 없이 주위사림들이 악에 바친 소리로 아우성 쳤다. “저년 죽이라-일, 배에서끌어 내우다." 새파랗게 질린 여자는 주르르 눈물을 쏟더니 이를 악물고 아이를 업은 채, 배에서 뛰어 내린 것은 순간이었다. 그냥 있어도 맞아 죽었을 것이다.
이 여인은 누구인가! 빨갱이사상에 광분이 된 남편에게 여인의 친척까지도 죽임을 당하자 자유를 찾아 어린자식을 업고 남편 몰래 남쪽을 향한 목선에 탄 가련한 여인과 자식이다. 이여인과 어린자식이 무슨 죄인가!
현재도 북에서는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을 위대한 백두혈통이라고 우상화하고 있으나 6.25전쟁에 중공군이 참전하면서 두만강 백두산 반 압록강 반을 중국에 넘겨주어 조국강토를 팔아먹은 것이다. 백두혈통의 근원이 되는 백두산을 자신들의 권력야욕을 위해 팔아먹은 만고역적이 어찌 위대한 백두혈통이란 말인가.
노무현 대통령 당선 후에 과거를 청산하고 가야한다면서 친일세력에 대하여 말하였다. 지금은 위안부문제와 일제의 침략행위에 대해 잊고 있는 국민이 대다수 인 것 같다. 전에는 학교교육과정에서 반공을 국시의 제1로 삼는 반공교육이 있었는데 지금은 어떠한가?
6.25 전쟁 1천일 간 사망자가 5백만이 넘었으며 이는 하루에 평균 5천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던 것이다. 세월호 참사에 필자도 눈물 많이 흘렸다. 세월호 참사를 우리는 절대 잊어서는 아니 된다. 그러한 참사가 다시는 생기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러면 6.25 전쟁 중에는 3년간 매일 약 5천명의 사망자, 즉 세월호 희생자의 16배가 넘는 사망자가 3년간 매일매일 희생당한 참혹한 6.25전쟁을 절대 잊지 말아야 하며, 교육과정에서도 6.25전쟁의 진실과 실체를 정확히 일깨워 주어야 한다. 여기에서 종북세력 또한 절대 간과해서는 안된다.
얼마 전 뉴스에 북한을 방문하고 온 재미교포 신XX씨의 예를 들어보자. 김일성 도당들의 남침으로 3년간 매일매일 5천여 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한 것을 신XX씨나 종북세력들은 알고있는가?
필자도 6.25당시 10살로 남으로 후퇴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시체를보았으며, 시체 옆에 먹을 것이 있으면 주워 먹기도 하였다. 어린나이에 춥고 배고파 굶어죽을 상황인데 매일 보는 시체가 문제였겠는가?
종북세력인 신XX씨가 시체 옆에 먹을거리를 주워먹는 참상을 겪어 보았는지 묻고 싶다. 또한 피난행렬에서 부모를 잃어버린 2~3살 어린아이가 길가에서 울다지쳐 굶어죽는 참상을 알기나 하는가? 이러한 종북세력을 없애기 위해서라도 6.25전쟁의 참상과 진실을 교육과정에서 철저히 가르쳐야 할 것이며 역사 교육과정에서 6.25전쟁에 대한 진실된 교육을 최우선시 해야 할 것이다.
지난 4월 15일 경 동네식당에 계시는 할머니(1926년생)께 “6.25 전쟁중가장 잊지 못한 사연을 말씀해주십시오” 하니 88세의 할머니께서(당시 23세) 친척집에간 사이에 온 가족이 인민재판으로 몰살당했다는 것이다. 그것도 평생을 같이 살아온 일꾼들(하인)에게 온 가족이 몰살당했다며 친척집에 있었던 할머니만 생존하였다고눈물비치며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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