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9.17<무조건 살아, 단 한 번의 삶이니까>(문학동네) 105~154/343P
14살에 처음 알게 된 이름 '최성봉'이었다. 야학 거북이 선생이 기초생활수급자 신청을 하자고 해서 따라갔다. 파출소에서 신원조회를 하니 이름은 최성봉, 1990년이라고 했다. 엄마는 없지만 아버지가 있다고 했다. 나는 고아도 아니고 지성이도 아니었다. 거북이 선생은 내게 삼촌이 있다고 말했다.
아버지와 연락이 되지 않아 삼촌에게 전화를 했는데, 앞으로는 연락하지 말라는 말뿐이었다고 했다. 어차피 상관이 없다. 나는 혼자 살아가면 그뿐이다. 늘 그래왔듯이, 예전과 마찬가지로. 동사무소에서 수급 신청을 했지만 아버지가 있어서 안 된다고 했다. 과정이 엄청난 스트레스였다. 거북이 선생님도 좌절하는 것 같았다.
나는 포기하지 않고 며칠을 혼자 동사무소를 들락거렸다. 더 이상 껌을 팔 수도 도둑질을 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날 밤 야학의 소파에 누워 혼자 노래를 불렀다. 내가 아는 유일한 노래 <바위섬>이었다. 노래를 부르면 저절로 껌팔이 형이 떠올랐다. 나를 구해준 사람, 처음으로 내게 노래를 들려준 사람, 그가 어디에 있는지 결코 그를 잊을 수가 없다.
인터넷 카페에서 '성악 레슨 합니다'라는 광고를 보고 찾아간 곳은 배재대학교였다. 음대 건물의 연습실에서 젊은 남자가 레슨 공지를 올린 사람이다. 그가 바로 내 은사인 박정소 선생님이다. 노래를 불러보라고 해서 거북이 선생님이 준 MP3에서 들었던 유행가를 불렀다. 노래를 시작하자 그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박정소 선생님은 기독교 신자였다. 선생님은 그 교회의 성가대 지휘자였다. 선생님을 따라 성가대 연습실에 들어가자 피아노와 성가대 가운을 입은 낯선 어른들이 보였다. 나도 가운을 입고 서있으니 기분이 묘했다.
야학에서 살아온 시간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고마울 것도 미안할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고마운 사람, 미안한 사람이 왜 그렇게 많을까. 그들 중 누구도 나를 좋은 사람으로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즐의 기억에서 언제까지나 골칫덩어리로 남아 있을 것이다.
[55]9.18<무조건 살아, 단 한 번의 삶이니까>(문학동네) 155~182/ 총 343P
의사는 내 눈 밑을 까보고 피를 뽑아 검사를 하더니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빈혈에 영양실조네, 철분이 너무 없어요." 의사 선생님은 내게 콩을 먹으라고 말했다. 그때의 내 체중은 40킬로그램 안팎이었다. 노래로 뭘 할지는 생각해본 적 없었다. 하지만 노래를 부르고 있으면 나는 모든 것을 잊을 수가 있다. 나의 일상에서 도망갈 수 있었다.
중졸 검정고시 성적이 60점 커트라인을 턱걸이로 통과한 것이다. 대전예술고등학교 13명 뽑는데 내가 13등으로 통과되었다. 박정소 선생님이 내 방을 계약해 주었다. 보증금은 선생님과 교회 집사님이 만들어 주었다. 어느 땐가부터 눈물은 잘 안 흘리지만 가슴은 절로 반응을 했다.
기초생활수급자가 되었다는 소식도 들렸다. 수급자 혜택으로 고등학교 입학금과 급식비도 나라에서 지원받을 수 있었다. 먹고 자는 문제가 해결되었다. 십 년을 넘게 이름도 없이 캄캄한 절망 속에서 살았는데 한꺼번에 세 가닥의 빛줄기가 비친 것이다. 나만의 공간, 최소한의 생활비, 그리고 학교이다.
이제 조금씩 참는 것을 해낼 수 있었다. 나는 이제 나를 책임져야 하는 소년 가장이었다. 보모 같은 건 내 인생에 없다. 레슨으로 기본기가 생겨나자 조금씩 성악에 눈을 떠갔다. 집안 좋은 애들은 나보다 조금 못한다고 생각했다. 레슨비를 자기가 벌어서 내지 않으니까 배울 때도 나만큼 처절하지 않을 거라고 했다.
음악회 때문에 대전일보에 나에 대한 기사가 나가고, 라디오 방송에도 소개되었다. 장학금도 보내온 이웃도 있었다. 어린이재단과 결연한 후원자들이 오는 자리에서 노래를 불렀다. 조그만 보답이라도 할 수 있어서 뿌듯했다. 노래가 내가 가야 할 길이라고 믿었다.
56]9.19<무조건 살아, 단 한 번의 삶이니까>(문학동네) 183~242/ 총 343P
퇴원은 했지만 입원 전과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었다. 다리를 다쳐서 입원했다 나왔을 때는 걸을 만큼 나아 있었는데, 정신의 문제는 금이 간 뼈나 파열된 인대보다 심각한 듯했다. 내 정신은 여전히 불안하게 삐걱거리고 있었다.
죽기 전에 한 번 만나고 싶다. 엄마라는 사람은 충청도 어느 소도시에서 살고 있다. 수소문하여 찾아갔다. 반나절 동안 서성거리다가 결국 다리가 아파 저릿해질 무렵 나는 마음을 다잡고 전화를 걸었다. 만나자고 한 장소에 엄마가 나타났다. 서로 아무 말도 없었다. 보자마자 엄마라고 알 수 있었다. 눈매가 나랑 비슷했다.
엄마가 타고 온 호화로운 차를 타고 가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방에 도착해서 마주 앉아 엄마는 '왜 왔어'? 첫 말이다. 내가 상상도 못한 첫 말에 할 말을 잃었다. 엄마처럼 감정 없는 목소리를 내려고 노력했다. 20년 전 나를 버린 사람이 고작 하는 말이 왜 왔느냐는 것과 아버지란 작자와 똑같다는 차가운 비난이라니, 나는 아무 잘못이 없었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가면서 마지막으로 뒤돌아보았다. 하지만 엄마는 꼼짝없이 앉아 있을 뿐 나를 부르지도 따라 나오지도 않았다. 엄마와 마주 앉았던 시간은 고작 20여 분에 불과했다.
낯선 도시에서 죽음만 꿈꾸던 어느 날 박정소 선생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코리아 갓 탤런트>에서 섭외가 왔는데 나가서 노래해볼래? 선생님이나 나가세요. 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죽음만 생각하고 웅크려 있는 내가 노래를 부르다니. 선생님은 계속 전화를 해왔다. 선생님을 생각하면 항상 맘이 약했다. 부모도 버린 나를 선생님이 거둬줬고, 노래를 가르쳐줬고 교회도 다니게 해줬다.
<넬라 판타지아>를 연습한 대로 불렀다. 1차 예선을 통과한 며칠 뒤 대전지역 본무대가 체육관에서 열렸다. 내 컨디션은 엉망이었다. 전날 공사장에서 벽돌 등짐을 쉬지 않고 달랐던 탓인지 열이 나면서 몸이 으슬으슬했고 녹초 상태였다. 조용히 한구석에 앉아 내 차례를 기다렸다. 네 시간을 기다렸다가 무대에 올라갔다. 노래를 불렀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객석에 앉아 있는 방청객과 심사원들이 내 노래를 들으며 하나둘 눈물을 보인 것이다. 나는 의아하고 어리둥절한 마음으로 무대에서 내려왔다. 어서 집에 가서 쉬고 싶었다. 자고 일어나 보니 유명해져 있더라는 말, 그 일이 나에게 생겼다. 방송이 끝나자 실시간 검색어 1위에 랭크되어 있었다.
고마운 사람들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내 비극적인 스토리를 알리는 게 아니라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다. 더 좋은 노래를 들려줘야 갚는 거라라고 생각했다.
[57]9.20<무조건 살아, 단 한 번의 삶이니까>(문학동네) 243~279/ 총 343P
<코리아 갓 탤런트> 그 이후 세상 속으로, 사람들 사이로 들어왔다. 내가 만약 1등을 했다면 큰 혼란을 겪지 않았을까 하고. 노래보다 내 드라마가 더 부각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1등을 했다면 또 다른 자괴감에 시달렸을지도 모른다.
내 삶도 많이 달라졌다. 길을 가다가도 밥 먹으러 가다가도 사람들이 나를 알아보고 격려해준다. 사인을 해달라는 사람도 있다. 나를 후원하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나의 펜 페이지를 만들어서 나와 지속적으로 소통하려는 사람도 생겨났다. 자발적으로 후원금을 모금해 내게 전달해주기도 했다. 세상이 나를 알아주고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주는 게 고마울 따름이다. 외신들도 꾸준히 관심을 보여줬다.
지난 20년 동안 이런 사랑을 받아본 일이 없었기에 두렵기도 했다. 사랑받는 게 익숙지 않아서 도망가고 싶고 숨어버리고 싶을 때도 있다.
나를 초청한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서 노래를 해야 한다. 내가 할 일이 노래이고, 노래를 통한 치유를 멈추고 싶지 않았다. 노래를 통해 사람들과 소통이 된다. 그동안 갇혀 있던 틀이 무너지고 있다. 꿈꾸지 못했던 일들이 지난 3개월 동안 일어나고 있었다. 사람들과 나 사이에 막혔던 벽이 마법처럼 허물어가고 있었다.
세상 밖에서 겉돌던 내가 비로소 세상 속으로 사람 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 사이에서 사람을 상대하는 법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세상 속에 들어온 내가 할 일이다. 인터뷰를 할 때마다 내 과거 얘기를 수없이 반복하면서 사실 마음이 고단했다. 그렇지만 과거의 내가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없다.
도움을 받고 살아온 내가 이제는 도움을 주고 싶었다. 객석엔 나를 보러 온 사람들이 꽉꽉 들어찼고, 두 시간 이상 서서 공연을 보는 사람들도 많았다. 소식을 듣고 외국에서 온 사람도 있었다. 강연 요청도 이어졌다. 나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꿈을 가지십시오.라는 주제의 희망 특강을 했다.
대학교, 기업체, 군부대, 보호관찰소, 교육청 등에서 강연 만족도 평가에서 95퍼센트를 받았다는 뒷얘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 강연에 온 사람들이 내 이야기를 듣고 꿈의 소중함을 다시 깨닫는 시간이었다고 고백해올 때마다 나 역시 꿈을 이룬 게 아니라 이제 시작이라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 최근에는 프로 축구단이 팀 사기 진작을 위해 내 영상을 선수들에게 틀어주었다는 소식도 들었다.
청화대 연말 행사에 강연 초청이 왔다. 노영심, 법륜스님, 이지선 씨도 함께 했다. 청화대 직원과 가족을 위한 행사였다. 장관들과 자녀들이 많이 모였다.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했다. 사랑을 받을 나이에 구걸을 하며 살아왔던 이야기와 내가 왜 성악에 매료되었는지, 어떻게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게 되었는지에 대해 말했다.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이 내 동영상을 보고 고맙고 미안하고 사랑한다는 얘기를 남기고 마음 편히 하늘나라로 갔다는 얘기도 했다. 집에 돌아와서 걸인이었던 내가 청화대에서 강연을 했다는 것이 뿌듯함이 밀려왔다. 미국에서도 초청이 왔다. 한국의 반응 보다 더 미국에서는 더 큰 위로가 되었다고 나를 반갑게 맞이해주며 눈물을 흘린 사람도 있었다.
세계적인 이목을 받았다고 해서 갑자기 부자가 된다거나 스타가 되지 않는다. 그걸 바라지도 않는다. 내가 할 일은 꾸준히 음악으로 나라는 존재를 만들어 갈 뿐이다. 나는 이제 시작이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도 최성봉처럼 하면 이룰 수 있다. 그처럼 노력한다면 못 이길 상대는 없다. 우리는 쉽게 포기하고 현실을 탓하고 있다. 최성봉이 보다 더 어려운 상황이 누가 있겠는가. 이제는 현실을 탓하지 말고 자신을 채찍질하며 내일의 꿈을 이루어 나가자. 우리 애들도 이 책을 꼭 한 번 읽었으면 좋겠다.
[58]9.21<무조건 살아, 단 한 번의 삶이니까>(문학동네) 280~290/ 총 343P
1990년에 태어나 2011년에 방송 출연으로 21년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음악을 만나기 전의 나의 모습은 목숨을 걸고 물살을 가르 지도 못하고, 적극적으로 구조 요청도 못한 채 허우적거리기만 했다. 거친 세상에 내던져져 생존만을 생각하며 살아온 동안 나쁜 짓도 많이 했고 상처받은 만큼 남에게 상처를 주며 살아왔다.
막장 인생, 하류 인생으로 살아온 제가 하루아침에 다른 얼굴을 하고 세상은 살만한 곳이라고, 희망이 가득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인생이 하루아침에 뒤바뀌지 않듯 사람도 한순간에 달라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희망을 말하고자 한다.
나를 두고 행운아라고 말한 사람도 있지만, 행운이 아니라 실낱보다 가늘고 바늘구멍보다 좁은 희망이라고 말하고 싶다. 방안에 있는 나만 몰랐을 뿐 창밖에는 언제든 햇빛이 비치고 있다. 나를 둘러싼 세상이 너무 캄캄하게만 여겨져 세상의 어느 곳에 빛이 내리쬐고 있다는 것을 보지 않으려고 했다. 스스로 어두운 골방에 갇혀 있기만 했다.
아무 연고도 없는 나를 받아주고 음악을 알게 한 박정소 선생님, 복지 혜택을 주려고 백방을 뛰어다니신 김경은, 유현정 복지사님, 후원해주신 분들, 이름을 지어주신 떡볶이 아줌마, 따뜻하게 품어준 전화방 누나, 길바닥에 쓰러진 저를 구해주고 짜장면을 사준 껌팔이 형, 인간관계 속으로 끌어준 야학의 선생님들, 교회에 데려갔던 예종이 형, 자취방에 살림을 가져다준 집사님들 무엇으로도 환산할 수 없는 엄청난 사랑을 받아왔습니다.
어둡고 우울한 과거를 까발린 뒤 비난만 듣는 게 아닐까 무서웠다. 제 안에 꽁꽁 숨겨놓았을 때는 그토록 거대해 보이던 콤플렉스와 열등감 덩어리들이, 막상 사람들 앞에 풀어놓고 보니 실체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것은 내 마음속에서만 뿌리내리고 거대하게 뻗어나가던 것이었을 뿐, 뿌리가 뽑혀 만천하에 드러난 그것들은 예전처럼 나를 괴롭히지 않았다.
음악을 통해 다리 하나를 건넌 제가 할 일이 있다. 절망이 있는 곳을 찾아가 노래를 부르는 일이다. 어두운 곳에 손을 내밀며 밝혀줄 수 있으면 더 바랄 게 없다. 말기 암 환자의 이야기를 생각하면서 하루하루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그분을 통해 깨닫고 더 열심히 공부하고 연습하겠다고 마음을 채찍질한다. 장차 '안드레아 보첼리'와 같은 크로스오버 테너가 되기 위해 정진하고 노력하겠다.
앞으로 어떤 시련이 닥쳐와도 어떤 순간에도 희망을 노래하고 희망을 전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걸 멈추지 않겠다. 저에게 살아갈 이유를 주신 여러분 감사하고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