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그는 한족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학문을 중시했다. 그는 특히 주자학에 열중해 스스로 유학자의 삶을 살고자 했다. 조정 대신들과 경연이나 조회에서 유교 경전을 논하는 것을 즐겼으며, 학식이 매우 깊어 대신들이 그와 유교 경전을 논하지 못할 정도였다. 강희제의 포용력은 유학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삼번의 난과 러시아와의 전투를 통해 서양의 앞선 기술을 도입해야 할 필요성을 깨닫고 서양의 학문을 과감히 수용했다. 그는 예수회 선교사에게 서양의 지리, 천문, 수학, 음악 등을 배웠는데, 특히 천문학과 수학을 열심히 공부했다고 한다.
이러한 강희제의 학문에 대한 열정은 그의 치세에 반영되었다. 강희제는 ‘박학홍유과(博學鴻儒科)’라는 과거를 통해 인재를 선발하고 전국에서 유명한 학자들을 소집해 편찬 작업을 하게 했다. 이리하여 《명사(明史)》, 《강희자전》,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 《연감유함(淵監類函)》, 《패문운부(佩文韻府)》, 《역상고성》, 《수리정온》, 《전당시》 등이 편찬되었다.
■ 강희제의 삶의 핵심 사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