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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6월 경 특유의 노골적인 향기를 뿜어대던 밤나무 꽃차례가 다 마르고, 그 자리엔 제법 모양을 갖춘 밤송이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다. 이제 두세 달만 지나면 밤송이가 쩍쩍 벌어지면서 툭툭 알밤이 떨어질게다. 밤나무는 참나무목 참나무과에 속하는 낙엽교목이다. 참나무과에 속하는 나무들이 대체로 그러하듯 3∼4월에 새잎이 돋아나고 5월경에 꽃이 핀다. 6, 7월이면 밤송이를 맺고 9월이 되면 밤이 여문다.
밤나무는 대체로 물이 잘 빠지는 양지바른 모래흙에서 잘 자란다. 땅이 축축하거나 그늘진 곳에서는 제대로 자라지 못한다. 밤은 나무에 열리는 열매 중에 식량으로 대신할 수 있을 정도로 영양이 풍부하다. 생으로 먹든, 굽거나 쪄서 먹든, 맛도 좋다. 탄수화물이 주성분이지만 지방, 당분, 회분 등 사람에게 필요한 영양분이 골고루 들어 있다. 밥 대신 밤을 먹고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는 뜻이 된다.
여느 씨앗과는 달리, 발아할 때 싹만 밖으로 나오고 껍질은 땅속에 오랫동안 썩지 않은 채 그대로 붙어 있다. 껍질은 부모요, 싹은 자식이라. 끝까지 땅에 남아 싹(자식)을 보호하는 특성을 두고, 옛사람들은 부모의 은덕을 기리는 나무로 보아 귀하게 여겼다. 그래서 제사상에는 꼭 오른다. 절대적인 근거는 없다. 그냥 강력한 ‘썰’일 뿐.
우리나라 성인치고 소설 《홍길동전》을 읽지 않은 사람 흔치 않다. 읽지 않아도 줄거리는 대충 다 안다. 홍길동은 소설의 주인공일 뿐 아니라 실존인물이기도 하다.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와 〈중종실록〉에는 홍길동이 충청도 일대를 중심으로 활약한 도적떼의 우두머리로 기록되어 있다. 장길산, 임꺽정과 함께 조선 3대 도적으로 통하는데, 그들의 행적이 상세하게 전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세간에서는 이 세 인물을 의적(義賊)으로 내세워 은근히 흠모하고 찬양했다. 백성들이 착취에 허덕이고 있을 때 활동했던 인물들이란 점 때문이었을 게다.
소설에서는 홍길동이 활빈당 당원들과 함께 외딴 섬 '율도국(栗島國)'을 점령, 거기에 새 나라를 세웠다는 내용이 나온다. 한자어 율도국을 풀이하면 ‘밤섬나라’가 된다. 소설에서 율도국은 적서차별이나 탐관오리가 없고 만백성이 행복한 이상향으로 설정되어 있다. 시대의 이단아 허균(許筠)이 자신이 꿈꾸었던 이상향이다.
그런데 왜 홍길동이 하필 율도국 즉 밤섬나라를 침략하여 새 나라를 세우는 것으로 설정되었을까? 소설은 그에 대한 이유를 친절하게 설명해주지 않는다. 추측하건데, 앞서 설명한 것처럼 밤이 식량으로 대신할 수 있을 정도로 영양분이 풍부한 과실이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밥이 곧 하늘 아닌가. 밥 없는 이상향은 본디 허구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늘 율도국 같은 이상향을 꿈꾼다. 동서와 고금을 통틀어 세상살이란 게 팍팍하고 고달프며 괴롭기 때문이다. 때와 장소에 따라 이상향을 이르는 이름 또한 다양하다. 종교에서 제시하는 이상향이 있는가 하면, 사람들이 스스로 만들어내는 이상향도 있다.
불교의 대표적인 이상향은 '정토(淨土)'다. 번뇌의 구속에서 벗어난 아주 깨끗한 세상이다. 다른 말로 '극락'이라고 한다. 미륵부처님이 말법시대까지 남아있는 가여운 중생을 제도한다는 '용화세계(龍華世界)' 또한 춥고 배고픈 중생들에게는 이상향이다.
기독교에는 '파라다이스(Paradise)'가 있다. 그리스어 paradeisos(낙원, 에덴동산)에서 파생된 말이다. 고통이 없고 육체적인 욕망이 완전히 채워지는 땅, 죽음을 극복한 완전한 삶을 산다는 곳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천당(天堂)' 또는 '천국(天國-Heaven)'이라고 번역한다. 젖과 꿀이 흐른다는 땅 '가나안(Canaan)'은 오래 전 유대인들의 이상향이다. 고대 이래 지금까지 늘 크고 작은 분쟁이 끊이지 않는 땅이라는 사실이 아이러니지만.
사람들이 만들어낸 이상향은 종류도 다양하다. 시대 순으로 보자면 '아틀란티스(Atlantis)'가 가장 먼저일 것 같다. 기원전 335년 플라톤이 처음으로 언급한 곳으로. 대서양(대서양을 영어로 애틀랜틱 오션Atlantic Ocean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또는 지브롤터해협 어딘가에 있었다는 전설상의 대륙이다. 매우 찬란한 문화를 가진 이상향이었으나, 지진 또는 탐욕과 교만, 사치로 인해 스스로 무너져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다고 한다. 전설이다.
중국 동진(東晉)시대에도 이상향이 등장한다. 시인 도연명(陶淵明)이 말년에 쓴 《도화원기》에 나오는 '무릉도원(武陵桃源)'이다. 관리 없고 세금 없이 자유롭고 평화롭게 사는 곳이다. 다분히 아나키즘(anarchism)적인 이상향이다. 도연명이 가렴주구가 극에 달한 시기에 살았기 때문에 그렇게 그렸을 게다.
올리비아 뉴튼존의 노래이자 뮤지컬영화 주제곡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 '재너두(Xanadu)'도 있다. 서양에서 이상향이라는 뜻으로 쓰이는 재너두는, 중국 그 중에서도 원(元)나라 시대 쿠빌라이 칸의 여름 수도인 '샹두(상도上都-Shàngdū)'의 서양식 표현이다. 지금 허허벌판이 된 내몽골자치구 정람기(正藍旗) 부근에 있었던 도시다.
샹두는 서양인들에게 동양에 대한 환상을 품게 한 책 《동방견문록》에서 처음으로 언급된다. 베니스 출신 허풍쟁이 마르코 폴로가 1274년 원나라에 도착, 17년 동안 중국 곳곳을 여행하면서 보고들은 것을 적은 책인데, 마르코폴로가 말하고 루스티첼로라는 이가 옮겨 적었다. 그것도 감옥에서 함께.
《동방견문록》에는 샹두의 화려한 궁궐이 마치 초원에 펼쳐진 지상낙원 같았다고 쓰여 있다. 이렇게 마르코 폴로의 환상은 유럽전역에 전파되고, 거품처럼 점점 부풀어 올라 샹두 즉 재너두는 이상향의 또 다른 이름이 된다.
게다가 훗날 이 책에 영향을 받은 영국의 시인 새뮤얼 콜리지가 더욱 부풀렸는데, ‘그(쿠빌라이)는 환락의 궁전에서… 천국의 우유와 꿀을 마셨다.’라는 시까지 씀으로써 이상향 재너두가 중국에 존재하게 되고 만다. 정작 중국인들은 아무도 모르는 재너두가.
아일랜드가 낳은 시인 예이츠의 시 <이니스프리 호의 섬>에서 비롯된 '이니스프리(Innisfree)' 또한 이상향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이니스프리는 아일랜드어로 ‘자유의 섬’이라는 뜻이다.
'엘도라도(El dorado)'도 있다. ‘황금의 땅’이라는 뜻의 스페인어다. 대항해시대에 중남미를 침략한 스페인 침략자들이 소문만 듣고 찾아 헤매던 황금의 도시이자, 끝내 발견되지 않은 미지의 땅이다.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엘도라도라는 ‘침탈’의 의미가 강한 단어이지만, 그냥 이상향이라는 뜻으로 쓰인다. 지금도 금이 많이 생산되는 콜롬비아의 수도 보고타 인근에 있는 공항도 '엘도라도국제공항'라는 이름을 가졌다.
각설하고, 동서와 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이 이렇게 이상향을 만들어내는 까닭은 딱 한 가지다. 현실세계란 게 지극히 고달프고 괴롭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상향이란 문자 그대로 이상적인 땅일 뿐이다. 이상향이란 말 자체가 곧 ‘없는 땅(U+Topia=유토피아)’이 아닌가. 실제로는 아무도 그곳에 가서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없다. 주관적 자아의 객관적 상대로서 절대행복이란 그 자체로 모순이다. 내가 분리된 절대행복이란 결코 따로 존재할 수 없다.
그렇다면 정토나 천당은 종교적 사기인가? 그럴 리가. 유토피아를 영어로 표현하면 ‘nowhere(어디에도 없는 곳)’가 된다. nowhere를 두 토막으로 나누면 ‘now here(지금 여기)’가 된다. ‘지금 여기’가 ‘세상에 없는 곳’의 이면인 만큼 정토나 천당은 존재한다. 우리가 지금 힘들어하고 괴로워하고 있는 ‘지금 여기’의 이면에는 유토피아(이상향)가 숨어 있다는 뜻이다. 철자의 유희이긴 하지만 진리다.
이상향의 세계는 나를 분리한 저 먼 곳에 있지 않다. 내 마음 속에 있다. 지금의 상황에 만족하면서 스스로 즐기는, 현법낙주(現法樂住)의 삶이 이상향의 삶이다. 세상사가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마음먹기에 따라 ‘지금 여기’에 천당이, 정토가, 용화세계가, 파라다이스가, 아틀란티스가, 무릉도원이, 재너두가, 이니스프리가, 엘도라도가 바로 눈앞에 펼쳐질 수도 있다는 뜻이다.
첫댓글 참으로 의미심장한 글이라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Nowhere 가 아니라 Now Here !
천국은 아무곳에도 없는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있다.
천당이 어디있는냐? 예수님이 어디 계시냐? 지금 여기.
지금 여기에서 이웃과 형제들에게 사랑을 배풀고 선한일을 하는것이 천당이 아니겠는가? Now and Here. 지금 여기에서.
잠시 생각에 머물다 나간다.
표야, 고맙다. 건강해라
정말 깊고 유익한 글,
표 형님,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