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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주에 관한 존재론적 고찰
― [비판적 존재론]을 중심으로 ―
성 홍 기 (계명대)
Ⅰ
범주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여 언표 혹은 진술로 규정됨에 따라, 이것은 오성에 관한 사항이지 존재자에 관한 사항이 아니라 생각하기가 쉽다. 언표한다는 것은 인간오성의 판단이고 주장이고 보면, 그것은 사고에 관여된 것이지 존재에 관여된 바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표 혹은 진술의 내용을 고려해 본다면 그렇지만은 않다. 언표되고 진술되는 내용은 다름아닌 존재자의 성질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범주는 존재하는 바의 것과 전혀 무관하지 않다. "그래서 범주가 무엇이냐는 물음은 다시 애매해지는 것 같다. 언표 자체 또는 판단이나 개념은 존재론과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이것들은 고작 인간의 사고 또는 의견이 존재자에게 붙여 주는 것에 관계할 뿐 존재자 자체에 소속하는 것에 관계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혹은 붙여준 것은 소속한 것과 동일하고, 따라서 언표는 존재에 확실하게 결부되어 있어야 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인간이 착오할 여지는 어디에 있으며 더우기 인간의 무지나 불가지의 여지는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존재하는 바의 것은 자신이 인간오성에 의하여 진술되고 언표되는데 대하여 전혀 개의치 않는다. 오직 언표되고 진술되는 것을 본질로 하는 존재자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존재하는 바의 것은 반드시 인간오성에 의하여 언표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언표된다 하더라도 존재자의 성질이 언표의 내용과 전적으로 일치하는 것도 아니다. 책임은 존재자에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범주가 언표 혹은 진술로 정의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전적으로 오성의 사항으로만 규정될 수 없는 노릇이다. 언표가 존재자의 내용에 관한 진술임을 부인할 수 없는 한, 범주는 또한 존재론의 소관이다. "판단은 분명코 사물에 관한 어떤 것을 언표하고, 판단이 언표하는 이 어떤 것은 바로 이로써 사물에 있어서 성립하고 있는 것으로서 표시하고 있는 것이다. 판단 일반에 관하여 타당한 것이 또한 존재론적 근본술어(범주)에 관해서도 타당하다. 즉 범주는 보편적 언표형식 ― 말하자면 가능한 특수적 언표의 궤도 ― 임으로 해서, 언표형식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소관하는 대상의 근본규정을 언표한다. …모든 존재자는 그것이 언표될 때, 술어의 형식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술어는 존재자와 동일한 것은 아니다. 개념과 판단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자를 위해서 있는 것이다. 이것이 판단의 내면적 존재론의 의미이다. …이것이 범주란 개념을 모든 오해에도 불구하고 존재론적으로 유지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범주가 전적으로 오성의 사항으로만 규정될 수 있는 소이는 어디에 있는가. 일차적 원인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있다고 하겠지만, 무엇보다도 칸트에 관한 그릇된 이해 또한 이에 못지 않다. 이것은 인식을 오직 인간오성의 판단이나 작용으로 보는 데에서 비롯된다. 인식은 오성의 전유물이 아니다. 존재자의 몫이기도 하다. 인식은 어디까지나 존재하는 바에 관한 오성의 파악이기 때문이다. 이를 오직 오성의 판단으로만 생각한 나머지 오성의 저편, 즉 존재하는 바의 것을 도외시하는 데에서 비롯된다. 칸트의 아류들은 오성의 행위만을 문제로 삼았지, 오성이 정녕 파악코자 하는 존재자는 안중에 두지도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인식을 곧 오성에 대한 인식으로 오인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인식을 마치 오성의 사항
― 즉 형식, 판단기능 행위 등 ―
에 관한 파악으로 착각하고 이에 관한 분석이 곧 인식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사람들이 인식을 하나의 순전히 마음속의 의식사항, 이를테면 단순한 사유 또는 판단의 소관사로서 이해할 때에만 오해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물론 19세기의 대다수 이론들, 특히 신칸트 학파가 범한 오류이다. 칸트 자신은 이러한 과오를 범하지 않았다."
오해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그것은 한층 더 심화되고 있었다. 급기야 오성의 사항으로서의 형식, 즉 순수직관 및 순수오성개념이 존재자 파악의 행위보다 먼저 있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기에 이른다. 이들을 칭하여 선천적 형식이라 함은 인식상 인식 그 자체보다 논리적으로 선행한다는 말이지, 시간적으로 인식행위에 앞선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선천주의의 그릇된 이해로 부터 야기되는 현상이다. 형식은 이에 관한 내용과 더불어 시작되는 것이다. 이들은 서로 동떨어져 따로 따로 생각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내용이 없는 사고는 공허하고, 개념이 없는 직관은 맹목이라 하질 않는가.
그리고 이들이 설령 대상을 파악하는 원리로서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성격을 갖는다 하더라도 개별적이고 우연적인 것보다 선행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시초에 주어지는 것은 개별적이고 우연적인 것이다. 이들을 통하여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것을 점차적으로 이끌어 낼 수 있을 따름이다. 따라서 이들은 인식상의 최종사항이지 그 시초에 연역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시초에 주어지는 것은 어디까지나 개개의 구체적인 사태인 것이다. "이를테면 인식에 있어서의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것이 선천적이라고 하는 칸트의 규정에서 출발하여, 이제 본래적 대상
― 개별사례 ―
의 의식에 앞서서 이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것, 예컨대 법칙의식의 형식에 있어서의 의식이 있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칸트의 생각이 아니고, 인식의 현상영역에서 제시될 수도 없다.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것은, 가령 그런 것이 있다면, 언제나 나중에 가서 그러한 것으로서 파악되는 것이고, 오성에 대하여 먼저 나타나는 것은 개별사례이다."
순수직관과 순수오성개념은 인식상의 기본범주이고 인식 그 자체를 통제하는 범주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인식행위를 통하여 인식되는 것은 이들이 아니라 이들에 상관하여 있는 대상인 것이다. 이들 형식들은 대상을 인식하는 과정속에서 인식되는 것도 아니다. 이들에 관한 인식이 특별히 선행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이들에 관한 사전의 인식없이도 대상을 인식하는 행위는 가능한 것이다. 이들은 적어도 인식행위에 있어서 선천적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상인식에 앞서 이들 범주에 관한 인식을 선행할 필요가 없다. 설령 이를 인식하고자 하더라도 인식할 수 없다. 범주의 인식은 최후의 인식이기 때문이다. 범주인식은 대상인식과 별개이다. "인식이 행하는 범주사용은, 인식이 범주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으로 하여금 알게 하는 인식론을 기다릴 수 없다. …우리가 범주를 대상의식에 적용하기 위하여 반드시 범주를 알고 있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인식범주가 인식의 첫째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최후의 대상이다."
그렇다면 범주에 관한 인식은 어떻게 가능한가. 칸트의 아류들에 의하여 자행되어 온 바 오성적 사항도 아니고 더구나 인식론적 탐구의 대상도 아닌데 말이다. 최후의 인식, 이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그것은 존재하는 바의 현상지반에서 시작된다. 소여현상을 문제설정에 합당하게 정돈하여 정확히 기술하고 기술한 내용을 철저히 분석하여, 여기로 부터 원리를 이끌어 낸다. 이로써 범주인식이 다해지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존재자가 갖는 특정한 성질에 부합되는 원리이고, 이 원리들간의 재조정을 통하여 <존재자로서의 존재자>에 관한 학에 걸맞은 원리로서 탄생되는 것이다. 범주인식을 최후의 인식이라 함은 주어진 소여현상에서 출발하여 제방법적 과정
― 기술적 방법, 선험적 방법 그리고 변증법적 방법 ―
을 거쳐 원리에 최종적으로 다다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련의 방법은 제1철학이 최후의 학으로서 다른 모든 제과학에 앞서 나타날 수 없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르침에 부합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사실상 범주인식은 고도로 복잡한 형식의 인식이다. 그것은 모든 경험에서 출발하여 경험의 제약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추론이고, 구체자에서 원리에로 계속 분석적으로 탐구하는 작업이고, 따라서 의존의 자연적 방향을 반대로 진행하는 것이다. 처리방식상 그것은 궁극철학(philosophia ultima)이란 성격을 띠고 있다. 그러나 그럼으로써 바로 그것은 내용상 제일철학(philosophia prima)에 속한다는 것과 잘 조화를 이룬다. 왜냐하면 그것이 밝혀내는 것은 제일자(das primum) 즉 원리이기 때문이다."
Ⅱ
범주가 구체자의 원리라 하여, 그것이 구체자보다 존재론적으로 먼저 있거나 혹은 인식론적으로 구체자에 상관없이 이를 파악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즉 규정될 구체자의 존재유무와 상관없이 범주가 상존하는 것은 아니다. 범주는 구체자의 분석을 통하여 이끌어 낼 수 있는 바의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구체자를 고려하지 않는 범주는 원리로서의 그 의의를 상실한다. 원리가 원리인 바의 소이는 바로 구체자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디까지나 원리로서의 범주는 철저히 구체자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다. 구체자를 떠나 있는 범주는 엄밀한 의미에서 원리가 아니다.
범주는 구체자와 뗄레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범주는 그 발생에서 시작하여 적용에 이르기 까지 시종일관 구체자의 곁을 떠날 수는 없다. 그것의 발생기원이 구체자에 있을 뿐만 아니라 적용대상 역시 구체자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곧 범주가 보편자로서 갖는 원리성격이다. "범주의 본질에는, 범주는 구체자에 있어서의 필연적이고 보편적인 모든 특성의 총체를 이루고, 이 구체자에게 그것이 귀속한다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이는 곧 범주는 구체자 내의 원리적인 것(Prinzipielles)이라고 하는, 범주에 있어서의 원리성격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범주는 구체자의 구조에 필요한 것을 포함하고 제공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범주가 구체자를 규정하는 원리인 이상, 그것은 또한 결정성을 그 본질로 하고 있다. 문제는 범주가 구체자를 결정하는 원리라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를 결정하는 방식에 있다. 이 또한 범주가 원리라는 사실 못지 않게 범주의 올바른 인식에 중요한 계기가 된다. "원리와 구체자와의 상호관계에 있어서 범주의 본질을 좀더 상세히 규정지을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 이 가능성은 그 관계를 분석하는 데에 있다. 왜냐하면 이 관계는 하나의 독특한, 다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문제의 열쇠는, 원리는 본래 어떻게 해서 그 구체자를 결정짓는가 하는 데에 있다. 왜냐하면 결정짓는 방식에는 여러가지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원리와 구체자와의 상호관계에서는 결정성격이 어떤 모양으로 되는가 하는 것이 문제로 된다." 이에 관하여는 다음 장에서 다루어질 것이다.
보편자로서의 범주는 일찌기 본질과 형상으로, 근대에 이르러 이것은 대상인식의 법칙성, 필연적 존재로서의 실체 그리고 이법적 존재로 이해됨에 따라, 이들은 각각 실존, 질료, 우연적 존재자 그리고 실사적 존재자를 규정하는 원리로서 인식되었다. 그러나 이들 각각의 대립은 엄밀한 의미에서 보편자로서 원리와 구체자의 상호관계는 아니다. 보편적 원리는 이들이 갖는 성질로서 다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즉 본질이 밖으로 드러난 상태를 칭하여 실존이라 한다. 발생론적으로 본질이 선행하고 실존은 이에 뒤따른다. 본질이 실존으로 부터 이끌어 내어지는 것이 아니라 실존이 본질로 부터 이끌어 내어진다. 따라서 본질과 실존의 관계는 보편적 원리와 구체자의 관계가 아니다. 구체자로 부터 이끌어 내어질 수 없는 원리는 엄밀한 의미에서 보편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자고로 원리는 구체자에 그 발생기원을 두지 않으면 안된다.
이러한 예는 역사적으로 본질철학이라 명명되는 철학적 유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바의 것이다. 플라톤의 이데아론도 그 중의 하나이고,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역시 이에 관한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플라톤의 이데아는 실재이다. 이에 반하여 개별물은 이데아의 그림자이다. 즉 실재의 현상이다. 개별물로 하여금 바로 그 개별물이 되게 하는 바의 것은 어디까지나 이데아에 있다. 이데아가 실재하지 않으면 이에 대응하는 개별물은 현상하지 않는다. "플라톤의 이데아영역은, 그것이 실사적인 것과 대립하여 독자적인 존재방식을 가진 영역을 형성하는 한에서, 대체로 이법적 존재자의 역사상 최초의 파악이자 그 성격규정이다."
그렇다면 형상과 질료의 관계는 어떤가. 형상은 질료의 목적인, 운동인 그리고 형상인을 동시에 갖추고 있는 존재자이다. 질료가 목적으로 하고, 운동하고 지향하는 바 그 자체는 바로 질료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형상에 의하여 이루어지고 있다. 형상은 궁극적으로 자신은 움직이지 않으면서 일체의 모든 구체자를 움직이게 한다. 보편적 원리와 구체자의 바람직한 관계는 이러한 관계는 아니다. 원리는 어디까지나 원리일 수 있는 바의 원인을 전적으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구체자가 가지고 있는 것이다. 즉 구체자로 인하여 원리는 원리로서의 존재의의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구체자와 전적으로 무관하게 그것을 일방적으로 통제하는 존재자는 진정한 의미에서 원리라 할 수 없다. "이리하여 이데아에 관한 플라톤의 견해 속에는 본질관의 모든 요구와 동시에 원리탐구의 요구가 포함되어 있다. …사람들은 이데아적 존재는 또한 존재원리가 아니면 안된다고 밖에 달리는 보지 않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벌써 이 연관을 극히 자명한 것으로 받아 들였다. 그의 형상은 사례들에 대하여 공통한 것인 동시에 사례들 내에 있는 움직이게 하는 원리이다. …이 형상자체 내에 순수한 본질의 성격과 실사원리의 성격이 결합되고 있다."
그리고 실체란 그것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다른 어떤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존재자를 말한다. 이 존재자는 그 자신이 처음 부터 일체의 모든 것을 완전히 갖추고 있는 존재자이다. 따라서 본유적이면서 능산적이고 예정의 조화를 주관하는 이른바 절대유일의 존재자이다. 이러한 존재자 앞에서 구체자란 한낱 소산적 존재에 불과하고 예정된 계획에 따라 움직이는 그야말로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완전자는 구체자의 원리라 할 수 없다. 결코 보편자로서의 원리는 완전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불완전한 구체자와 함께하는 존재자이다. 구체자의 소리에 귀기우릴 줄 아는 존재자이며 또한 이에 응답하는 존재자이다. 그 또한 불완전한 존재자임에는 구체자와 하등에 다를 바가 없다. 참된 원리란 바로 구체자의 활동여지를 남겨두는 자이며, 구체자의 몫을 그에게 되돌려 줄 줄 아는 존재자이다.
대상인식의 선천적 형식으로서 범주, 즉 인식범주와 대상과의 관계는 어떤가. 여기 또한 참된 의미에서 보편적 원리와 구체자의 상관관계를 찾아 볼 수는 없다. 원리는 구체자와 동떨어져 별개의 세계에서 분석되어 나오는 것은 아니다. 원리는 그야말로 구체자 내에서 이끌어 내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지 않는 원리는 구체자의 원리가 아니다.
칸트에 있어서 범주는 순수오성개념이며, 그의 인식범주는 대상인식에 관한 객관적 타당성 확보에 있었다. 여기에서 객관적 타당성이란 대상에 대한 표상의 적중이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인식범주에 의한 판단이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사물의 내용과 일치한다면, 판단은 객관적 타당성을 가지는 것이다. "오성개념은, 그것이 사물에 관하여 말하는 성질이 사물에도 현실적으로 성립하고 있는 한에서만, 그 사물에 적중할 수 있는 것이다." 그의 범주론의 주된 과제였던 객관적 타당성의 성립여부야 말로 범주의 특성을 잘 나타내어 주고 있다. 왜냐하면 객관적 타당성의 성립여부를 가리기 위하여, 첫째로 범주는 대상을 규정하고 결정하는 규정자로서의 특성, 즉 결정성을 갖지 않으면 안되고, 둘째로 이를 위하여 범주는 적용대상, 즉 개별적 존재자와 어떤 방법으로든지 상호관계를 맺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칸트의 범주는 개별적 존재자와 전적으로 고립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이는 곧 그의 범주가 원리로서의 범주적 특성을 충족시켜 주고 있음을 뜻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칸트 자신은 여기까지 생각을 확대시키지 못했다. 그는 범주를 인식주관의 선천적 형식으로 생각한 나머지 대상적용 여부에만 심열을 귀울였지, 그것이 원리로서의 특성을 갖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을 간과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칸트에 있어서 범주는 그야말로 반신불구로 전락하고 말았다. "칸트에 있어서 범주들은 극히 자명하게도 순수오성개념인 바 그렇다고 해서 <대상들의 가능성의 제약들>이 아닌 것은 아니다. 이 점에 있어서 범주의 이중기능이 요구되고 있다는 것이 명백하다. 또한 이 이중성에 바로 선천적 종합판단의 객관적 타당성의 근거가 있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도 명백하다. 그러나 순수이성비판이 이 관계에 대하여 아무런 증명도 하지 못했다는 것, 아니 엄밀히 말해서 증명의 시도조차 되지 않았다는 것은 충분히 알려진 사실이다."
이법적 존재의 형상적, 법칙적 계기는 그것으로 하여금 실사계의 본질영역이 되게 하지만, 원리영역이게 하는 데는 충분하지 않다. 거기에 차원 또는 기체계기가 첨가되어야만 비로소 범주적 원리로서의 기능을 다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법적 존재를 범주와 동일시 할 수 없음은 실사권에서는 차원 또는 기체계기의 결여에 있다. "기체계기에 있어서 차이가 있는 이상, 범주들은 본질성과 아주 유사하고 게다가 광범위로 그것과 일치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으로 다하여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런 한에서 범주의 전 권역도 이법적 존재의 그것과 동일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범주에 있어서 형상성격과 법칙성격을 가진 모든 것은 역시 이법적 존재에 속한다. 그렇다면 모든 이법적 존재는 범주의 성격을 가졌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권역을 달리하여 이법계에서는 어떤가. 이법계는 범주에 관한 아포리아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는가. 이법계는 실사적 존재자의 본질, 수학적 규정, 논리적 법칙 그리고 각종 가치가 있다. 이들 존재에 있어서도 원리와 구체자라는 상호관계가 여전히 성립하고 있는가. 이법계에서 범주와 본질간의 차이점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 권역에선 차원과 기체계기가 범주적 성격으로서 더 이상 문제로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이법계가 실사계와 달리 초시간적이고 초경험적인 영역이기 때문이다.
이법계는 실사계의 본질영역이다. 즉 이법계는 형상적으로, 법칙적으로 실사계와 연관을 맺고 있다. 그러나 이로써 이법계의 범주적 성격이 다해지는 것은 아니다. 이법계는 그 자체 나름대로 범주 또한 가지고 있다. 이것은 이법적 존재 그 자체에 대립하여 있는 이법적 존재를 규정하고 결정한다. 실사계에서 원리와 구체자간의 상호관계 속에서 실사범주의 본질를 밝힐 수 있듯이, 사정은 이법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법적 존재 그 자체는 이법적 존재와 연관하에서 이법적 범주로서 참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그러한 한에서 이법적 범주는 원리이다. 이와같이 이법적 존재는 더 이상 보편자로서의 범주적 성격을 갖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것은 이법계 내에서 일종의 구체자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법적 존재는 결코 범주와 동일할 수 없다.
이법계에서도 원리와 구체자간의 상호관계는 성립하고 있다. 이법적 존재 그 자체와 이법적 존재간의 관계가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원리(Prinzip)와 원리임(Prinzip-sein)의 관계이다. 원리와 원리임은 별개이다. 원리는 이법적 존재가 실사적 존재자와의 관계 속에서 갖는 범주적 특성이다. 엄밀히 말하여 이것은 원리가 아니라 원리적 성격으로서 본질성이다. 왜냐하면 이법적 존재는 실사적 존재의 범주일 수 없기 때문이다. 원리임은 이와 달리 실사적 존재와 무관한 범주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이법계 내에서 이법적 존재 그 자체와 이법적 존재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범주이다. "차이점의 둘째점을 끌어 들이면, 이 차이점은 이법적 존재 자체도 자기의 범주를 가지고 있으며, 자기의 내부에서 다양한 구체자가 그 범주에 대립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도 바로 범주적 존재는 어디까지나 원리일 따름이다. 그러므로 범주는 이법적 존재로 끝나는 것이 아닐 뿐 아니라
― 왜냐하면 범주는 오히려 실사적인 것의 존재방식을 충족시키는 것이 아니면 안되기 때문에 ―,
범주가 명백히 이법적인 것의 원리이고 따라서 이법적인 것의 존재방식에 속하며 그것으로 끝나는 곳에서도 역시, 한갖 이법성이란 그것만 가지고서는 특성지어질 수 없는 특이한 어떤 별개의 것이다. 범주에 있어서의 이 특이한 별개의 것은 바로 그 원리임에 있다. 원리임은 실사범주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구체자를 규정짓는 점에 성립하고, 구체자를 결정한다는 점에서는 여기서나 거기서나 다를 바 없다. 이법적 존재와 이법적 존재의 원리임은 별개의 것이다."
이상의 내용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법적 존재는 이법계에서 한낱 구체자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실사계와 연관하여 그것은 본질로서의 범주적 특성을 갖는다. 그러나 범주는 결코 구체자와 동일할 수 없으며 또한 본질과도 일치하지 않는다. 범주는 어디까지나 구체자를 규정하고 결정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며 또한 동시에 그것은 질료적인 측면을 보증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일련의 예를 기하학과 수학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기하학을 성립시키는 규정은 일반적으로 공준·공리·정의와 정리로서 구분된다. 이들의 차이점은 공준·공리·정의는 그 자신 결코 증명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인데 반하여 정리는 이들에 의하여 증명가능한 대상이다.
즉 정리는 공준·공리·정의에 의하여 규정되고 결정되는 기하학적 규정이다. 따라서 공준·공리·정의는 기하학에 있어서 원리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정리는 이들에 의하여 적용되는 구체자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럴 적에 이 형성체들은 의존자이고, 법칙성은 규정자이고 지배자이다. 이것은 기하학에서는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극히 다양한 도형들과 그것들에 속한 이른바 정리들은 구체자이다. 삼각형, 정규의 다각형, 타원 및 그것들에 관하여 정리들이 말하는 바의 모든 것은 원리가 아니라 원리 아래에 있는 것이니, 원리는 그것들과 동일한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이법적 존재이기는 하나 범주적 존재는 아니다. 기하학이 그 첫째의 정의와 공리에 있어서 언표하는 것은 차라리 범주적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지금까지 범주가 이법적 존재와 동일하지 않다는 점을 두 가지 방향에서 설명해 왔다. 그 하나는 범주는 실사적 존재방식의 근간을 이루는 차원계기와 기체계기를 가져야 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질료의 원리를 포함하지 않는 범주는 실사적 세계의 범주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법적 존재는 실사적 존재에 대한 형상적, 본질적, 법칙적 기능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이법적 존재는 범주와 동일할 수 없다. 나아가 이법적 존재가 곧 범주라 하더라도 권역을 달리하면 사정은 변함이 없다. 왜냐하면 이법권 역시 원리와 구체자간의 상호관계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여기에서 이법적 존재는 한낱 구체자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범주는 구체자일 수 없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규정하고 결정하는 원리이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 이법적 존재는 범주일 수 없다. 이것이 다른 하나의 방향이다. "범주란 것은 이법적 존재가 아니라는 명제는 두 가지 방향에서 확인되었다. 즉 한편으로 범주는 이법적 존재방식과는 전혀 이질적인 근본계기를 포함한다는 데서, 다른 편으로 이법적 존재의 내부에서 다시 범주는 구체자와 구별된다는 것이 지적되는 데서 확인되었다. 이 이법적 범주는 바로 그 이법성으로 다하여지는 것이 아니다."
이상의 내용은 범주에 관한 전통적 선입견으로 부터 벗어나기 위한 하르트만의 첫 시도이다. 여기에서 전통적 선입견이란 범주를 어디까지나 본질적 존재와의 동일시에 있다. 본질적 존재란 형상성, 법칙성 그리고 이법성 등을 특성으로 하는 존재자이다. 이를 벗어나기 위한 시도는 보편적 원리와 구체자간의 상호관계 속에서 범주를 파악하고 있다는 데 있다. 왜냐하면 하르트만은 이 관계에서 비로소 범주의 본질을 좀더 상세히 규정지을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고 있음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질적 존재가 결코 범주와 동일할 수 없음을 하르트만의 말을 직접 인용하면서 이를 마무리 짓고자 한다. "범주를 이법적 존재의 방식에 따라 이해한다는 것은 불행한 오류이다. 그것이 존재관계를 허락하는 한, 범주는 본질성과 유사하게 보이기도 하리라. 그렇다고 해서 범주가 본질성으로 다하여지는 것은 결코 아니며 범주의 체계가 이법적 존재의 체계일 수도 없는 것이다. 양자를 동일시하는 역사적 선입견에서 풀려날 때 비로소 실사적 세계의 구조에 있어서의 범주적 보편성을 추적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Ⅲ
앞 장에서 예고했듯이 여기에서는 범주가 구체자 파악의 원리로서 갖추어야 할 특성 중 그 두번째로서 결정성에 관하여 다루고자 한다. 이를 문제로 삼는 소이는 범주에 관한 그릇된 인식으로 인하여, 특히 그 구체자와 관계 정립이 올바르지 못하다는 데 있다. 앞에서 다루었던, 범주가 본질적 존재와 결코 동일할 수 없음은, 범주개념의 특성이 본질적 존재의 그것 보다 한층 더 포괄적이고 광범위하다는 데 있었다. 일종의 개념분석이었다면, 여기에서는 범주를 구체자에 적용시켜 나아가는 과정 속에서 야기되는 문제라 할 수 있겠다. 즉 결정방식에 관한 문제이다. 이 또한 범주의 올바른 파악에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거기서나 여기서나 범주의 올바른 이해를 위한 열쇠는, 범주는 철저히 보편자이지 않으면 안된다는 데 있다. 왜냐하면 보편자는 그 자체 고립하여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보편자가 원리인 바 그것은 바로 구체자에 의하여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본질적 존재는 구체자와 꼭 결부되어야 할 이유가 없다. 구체자와 상관없이 그것은 원리로서의 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구체자에 관한 범주의 올바른 관계는 어떻게 정립되어야 하며, 구체자에 관한 범주의 올바른 규정이란 무엇인가? 즉 구체자를 어떻게 다루어 나가는 것이 올바르게 규정하는 것인가? 하르트만은 문제해결을 플라톤에서 시작한다. 이데아론은 또 다른 범주적 선입견을 잉태하고 있다. 이데아와 개별물의 동질화가 바로 그것이다.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이데아는 완전하고 개별물은 불완전하다. 이데아는 진상이고 실물인데 반하여 개별물은 모상이고 그림자이다. 완전과 불완전, 진상과 모상 그리고 실물과 그림자 이것을 가름하는 기준은 무엇이며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다름아닌 이들 존재의 <내용규정성>이다. 쉽게 말하여 빛의 강도이다. 내용규정성이 이데아에서는 완전하고 개별물에서는 불완전하다. 즉 빛이 이데아에는 직사해 있고 개별물에는 그것이 굴절해 있다. 따라서 이데아는 윤곽이 뚜렷하고 개별물은 그렇지 않다. 이것이 곧 그것들의 차이점이다. 이것은 처음부터 둘이 아닌 하나였고, 이 하나가 내용을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 서로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다. 차이성은 동질성에 근거한다. 처음부터 질적으로 서로 다른 두 존재가 별개의 모습으로 이원화 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여기에는 유사성이 있는 것이지, 이질성이 가로 놓여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데아론에 해당하는 것으로 정당하게 볼 수 있는 다른 선입견이 있다. 이것도 관여에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그 가능성에 해당한 것이 아니라 그 내용적 의미에 해당한 것이다. 이 선입견은 또 사물이 이데아로 부터 분리되어 있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양자의 지나친 동질성에 있는 것이다. . …따라서 이데아와 사물의 내용적 규정성은 동일하고, 다만 그 규정성이 이데아에 있어서는 완전하고 사물에 있어서는 불완전하므로 윤곽이 뚜렷하지 않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데아와 사물간에는 유사성이 성립한다. 동일성과 차이성이 성립한다는 말이다. 동일성이라 함은 그 됨됨이가 내용적으로 같은 것이고, 차이성이라 함은 이 됨됨이가 순수하게 인각되어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이데아와 사물은 성질상 동질이고 다만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원리는 구체자와 구별되지 않으면 안된다. 원리는 어디까지나 구체자를 규정하고 결정하는 지배자인데 반하여 구체자는 철저히 원리에 의하여 규정되고 통제되는 피지배자 즉 의존자이다. 이데아와 개별물의 관계에 있어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곧 제약 혹은 제약자가 제약된 것 즉 피제약자와 동일할 수 없음이다. 마치 빛과 그림자가 일치할 수 없듯이 말이다. "우리는, 이데아에 있어서의 <원리>라고 하는 근본사상이 동어이의에 의하여 극도로 위협되고 있다는 것을 은폐할 수 없다. 여기에 분명한 점은 바로, 이데아는 사물의 <근거>가 아닐 수 없다는 점, 즉 그것을 근거로 하여 사물이 그러한 사물로 되는 바의 제약이라는 점이다. 그럴 적에 전혀 간과 되고 있는 점은, 제약된 것과 구별될 수 없을 만큼 유사하게 보여진 제약은 ― 그리고 이것이 바로 동어이의를 의미하는 것인데 ―, 벌써 그것의 제약일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여기에 인식이 안되고 있는 것은, 제약이 제약된 것과 유사해야 할 필요는 전혀 없다는 것이다. …즉 제약에 매개됨으로 해서 제약된 것에 있어서의 그 어떤 것이 설명되거나 이해될 수 있도록 되어야 한다면, 제약은 또 제약된 것과 결코 유사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이 점이 분명하지 않다. 이데아와 개별물은 성질상 동질이면서 단지 내용규정성에 의하여 선명함의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이데아와 개별물의 동음이의(同音異義)는 원리와 구체자간의 범주적 관계를 정확히 나타내고 있다고 볼 수 없다. "플라톤이 아무리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하더라도, 내용상 그것은 잘 잡혀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단계를 통하여 사물과 이데아는 동일의 규정성에 의하여 특징지어지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양자는 동일의 <명칭>을 띠는 것이 아닌가. 미의 이데아는 아름다운 사물과 똑같은 의미에서 <아름다운> 것이다. 더우기 <아름다운 것 그것이> 비로소 정말 아름다운 것이다. 같다는 이데아는 같은 사물들과 똑같은 의미에서 같고, 더우기 <같음 그것이> 비로소 정말 같은 것이다. 동일한 규정성이 다시 나타나거니와 다만 완전성으로 높여질 뿐이다. 혹은 반대로, 사물이 이데아에 관여함은 이데아의 내용적 규정성이 사물 속에 재현함이거니와 다만 완전성을 결하고 나타날 뿐이다. 사물은 이데아와 같이 되려고 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지만, 그러나 약한 상태에 있다."
그러나 고대철학에서 플라톤의 이데아론이 지닌 범주적 한계를 넘어선 일련의 존재론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아낙시만드로스의 무한자, 헤라클레이토스의 로고스, 엠페도클레스의 사랑과 미움 그리고 데모크리토스의 빈공간 등은 개별물의 성질과 그것의 존재방식을 전적으로 달리하면서도 어디까지나 물적 존재를 지배하고 통제하는 원리로서의 범주적 기능을 다하고 있었던 것이다. 거추장스러운 이데아의 동음이어의 틀을 벗어나 진정한 원리로서 역할을 서슴없이 해 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플라톤은 이 동의어반복의 덧에 걸려 불행한 오류를 자처하고 있었다. "원리라는 사상은, …아낙시만더가 맨 먼저 그것을 파악하여 세계근거로서 <무한자>에 적용했다. …물적 세계보다 어디까지나 내용적으로 전혀 다른 것이다. 헤라클릿트의 이른바 불(火)과 로고스는, 그것들이 설명해야 할 사물의 흐름과는 조금도 유사성이 없다. 엠페도클레스의 이른바 <미움과 사랑>, 데모크릿트의 이른바 <허공>도 마찬가지이다. 이 모든 것은 동어이의나 동의어반복이 아닌 <진정한 원리>이고, …플라톤의 이데아는 그렇지 않다."
"동어이의는 범주와 구체자와의 잘못된 동질화이다."
범주에 관한 그릇된 선입견은 동어이의 이외에 범주적 한계답월이 있다. 범주적 한계답월이란 특정한 존재층에서 발견한 범주를 그 존재층에 소속되어 있는 존재자들에게 적용시켜 나가는 것 이외에 여타의 다른 존재층의 존재자 파악에 까지 확대 적용시킴으로써 발생하는 일종의 범주적 오류이다. '특수한 범주의 잘못된 보편화'라 할 수 있겠다. "존재자의 한정된 분야에서 일정한 범주군(또는 개개 범주)을 발견하고, 이것에 의하여 이 분야에서 일정한 문제상태의 이해를 지배한다. 그리고 나서는 이 발견이 그 처음 분야의 한계를 넘어나가 인접분야로 옮겨 놓여지고 마침내 세계전체에로, 따라서 실상인 즉 전혀 다른 범주를 가지고 있는 존재자의 층으로 확장된다. 이리하여 철학적 세계상에 있어서 그 자연적 타당한계를 넘어서 처음 발견된 범주를 보편화하는 잘못이 발생한다. 여기에 범주의 한계답월이 성립한다."
범주적 한계답월의 전형적인 유형은 위로 향한 범주적 한계답월과 아래로 향한 범주적 한계답월로 구분된다. 위로 향한 범주적 한계답월의 대표적인 철학적 유형은 피다고라스학파의 수론(數論)과 수학에 기초를 둔 실증주의와 자연과학, 고대의 원자론 그리고 유물론 등을 들 수 있으며, 관념론, 범신론, 단자론 그리고 목적론 등의 철학적 유형은 아래로 향한 범주적 한계답월에 해당된다.
피다고라스학파는 수를 만물의 근원이라고 보았다. 이 학파에 있어서 수는 하늘의 운행과 인간의 삶을 규정하는 아르케적 원리이다. 천체계와 인간계의 일체의 모든 것은 한결같이 수의 일정한 비율로서 이루어져 있다. 이 학파가 최초로 사용한 개념으로 전해 오는 <코스모스 (Kosmos)>, 조화와 균형의 세계도 수 혹은 수적 비율에 의하여 질서화된 세계이다. "피다고라스학파에 따르자면, 하늘의 구조전체가 음계(조화)요 수다." 인간과 인간의 생활에 밀접하게 관련있는 영혼, 이성, 사랑, 결혼, 행운, 심리, 윤리, 법, 국가 등도 수적 관계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 특징적이다.
이 학파는 특히 음악, 의학 그리고 천문학에서 괄목할만한 성과를 거둔 것으로 후대인들은 평가하고 있다. 음색과 음향은 현의 길이와 일정한 수적 비율에 의하여 8도 음정, 5도 음정, 4도 음정 등으로 조절가능하다는 것, 건강은 육체를 구성하고 있는 다양한 요소들의 일정한 수적 비율에 의한 균형으로 부터, 병(病)은 이들 요소의 수적 비율에 의한 불균형으로 부터 나타나는 증상으로 파악하였다. 그리고 지구와 여타의 별들은 일정한 수적 거리를 두고서 빛을 내는 구체(球體)로, 또한 별들은 태양을 중심으로 하여 원운동을 하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세계의 과정은 직선적이 아니라 커다란 원(순환)을 그리고 있다. 별들과 세계의 체계는 항상 거듭해서 다시 같은 장소에 되돌아 온다."
이상의 피다고라스학파의 수론(數論)을 하르트만은 위로 향한 한계답월의 전형적인 예로서 제시하고 나섰다. 왜냐하면 이 학파는 수 혹은 수적 관계야 말로 땅에서 하늘에로 향하는 절대유일의 원리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음향학(현의 길이와음의 높이의 관계)의 가장 단순한 관찰과 일정한 천체운동의 계산가능성에서 출발하여 고대 피다고라스학파는사물의 원리는 수라는 유명한 명제에 도달했다. 이 테제의 기초에는 제일급의 발견이, 물리적 세계에 있어서의 수학적 관계의 유력한 역할에 관한 최초의 예감이 풍부한 지식으로 되고 있다. 그러나 일찌기 없었던 이 사상은 거기에 머무르고 있지 않았다. 이 사상은 당장 모든 존재자에로, 다시 말해서 실사세계 전체로 파급되었다. 만물은, 인간의 심리적 존재도, 덕성과 국법을 포함해서, 수의 관계에서 성립해야 한다고 생각되었던 것이다. 우주 내의 수학적 범주의 발견에서 주저없이 하나의 보편적 수학주의가 나온 것이다."
콩트를 중심으로 하는 실증주의 역시 피다고라스학파가 범한 한계답월의 선상에 있다. 실증주의의 기본입장은 다음과 같다. 즉 철학을 비롯한 정신과학 및 사회과학 등은 그 대상에 있어서나 방법에 있어서 경험과학의 그것과 하등의 다를 바가 없다. 따라서 이 과학들도 여전히 경험적 사실에 토대를 둔 지식체계를 가지지 않으면 안된다. 또한 이들 지식체계 역시 경험과학과 마찬가지로 실증, 즉 관찰과 실험에 의하여 그 타당성이 확보되어야 한다. 콩트가 제시한 <인류의 지식발달의 3단계>와 <과학분류의 기준>이 이를 대변해 준다. 전자는 과학적 탐구의 자세나 태도 혹은 그 방법에 따른 단계 분류라 한다면, 후자는 탐구의 대상 혹은 그 내용에 따른 분류이다. 우선 인류의 지식발달의 3단계는 일차적으로 신학적 단계에서 출발하여 형이상학적 단계를 거쳐 최종적으로 실증적 단계에 이르게 된다. 마지막 실증적 단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과학의 과제와 본질이 정확하게 제시된다. "이 시기의 인간은 <실증적으로 주어져 있는 것>, 즉 내적 외적인 감성적 경험 속에서 파악할 수 있는 것 및 실제로 <직접적으로> 주어져 있는 것만 다룬다. 이런 것이야 말로 현실(실재)이고 허구가 아니다." 즉 "측정할 수 있는 것만이 현실적이다."
그리고 과학분류의 기준은 다름아닌 <실증적 단계에 도달하는 속도>이다. 이는 곧 어떤 대상을 다루느냐에 따라 그 속도가 달라진다. 탐구대상이 단순하면 단순할수록 그 만큼 속도는 빠를 것이고, 그것의 내용이 복잡하면 복잡할수록 이에 비례하여 속도가 늦어질 것이다. 쉽게 말하여 관찰과 실험을 얼마나 쉽게 할 수 있는 대상을 추구하는 과학이냐에 따라 그 과학은 여타의 과학들에 비하여 한층 실증적이고, 보다 발달된 과학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실증적이면 실증적일수록 보다 더 과학적이 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콩트는 과학들을 수학·천문학·물리학·화학·생물학·사회학의 순서로 배열한다. 이 배열 속에서 수학이야 말로 가장 실증적이고 가장 발달된 과학이다. 즉 가장 과학적이다. 이것은 과학중의 과학이다.
왜냐하면 오로지 실증이 곧 발달된 과학의 기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콩트는 실증적 단계에 도달하는 속도가 가장 느린, 즉 제 과학들에 비해 발달순서가 가장 늦은 사회학을 가장 빠른 그리고 가장 발달된 최고의 실증과학으로 만들고자 했고, 이를 통하여 새로운 사회의 건설을 구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콩트가 꿈꾸었던 최고의 실증과학으로서의 사회학과 이에 따른 새로운 사회 건설은 요원한 문제일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꿈의 전제인 수학이 아직 잠자리에 들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콩트는 사람들의 생각이 아직 가장 뒤떨어져 있는 영역에서 과학적 내지 실증적 태도를 촉진시키고자 하였다. 그는 이러한 뒤떨어진 영역들은 인류의 도덕적·정치적 및 종교적 방면이라 생각하였다. 도덕과 정치와 종교의 문제들은 사회학의 분야에 속하며, 이 사회학은 과학들 가운데서도 최후에 도달될 완숙한 발달단계의 것이요, 또 그런 것으로 기대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장하였다. 그 까닭은 과학들이 상호관계상 하나의 자연적 연속을 이루기 때문이다. 과학들의 자연적 순서는 수학·천문학·물리학·화학·생물학 그리고 사회학의 순서로 되어 있으며, 그 하나 하나는 이 리스트에서 그것에 앞서는 모든 것을 전제로 하지만, 반대로 그 어느 것에 의하여도 미리 추정될 수는 없는 것이다. 콩트는 사회학이 이 분야에서 그 자신의 노력의 결과로 바야흐로 탄생하려 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콩트의 바로 이러한 생각이야 말로 하르트만이 볼 때 여전히 범주적 <일반화와 같은 무절제성>을 나타내며, 그는 이를 수학적 자연과학의 위대한 성과가 불러 온 <사고습관의 단순한 타성력>이라 일축해 버린다. "그러나 그 결과는 원리와 구체자간의 엄청난 오해이고, 보다 높은 존재현상의 본질과 특성에 대한 불행한 간과이고, 소속 학문분야에 있어서의 인식과 오해의 점점 더 바람직스럽지 않게 진행되는 관계이고 결국 이론의 총 붕괴이다."
피다고라스학파가 오직 수로서 천체계 뿐만 아니라 인간사 일반을 파악코자 한 것이나, 또한 실증주의가 오직 실증에다 과학적 발전의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은 다 같이 동일한 선상에 있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자연과학도 오직 연장적인 혹은 분량적인 계기를 대상의 성질 파악의 절대 유일의 원리로서 확신하고 있다면, 그 확신은 곧 바로 한계답월의 덧에 걸려 있다. 천체계와 인간사의 내용이 오직 수적인 관계로서만 파악가능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오직 이로써 설명가능한 성질의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수 혹은 수적 비율로서 파악불가능한, 그야말로 비산술적인 성질을 이 양세계는 그 내용으로서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실증 역시 과학과 비과학의 절대적 구별기준이 되지 않는다. 과학의 특성
― 과학의 대상, 방법 그리고 그 내용 등 ―
이 오직 실증에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비실증적인 내용을 대상으로 하는 과학 역시 그에 못지 않게 과학으로서 존재의의를 갖는다. 정신, 문화, 가치, 종교 등의 영역을 다루는 과학이 바로 여기에 해당된다. 마찬가지로 생명체나 무생명체가 오직 크기나 길이 혹은 분량에 의해서 전적으로 그 본질파악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여기에도 연장적, 분량적으로 파악불가능한 여타의 다른 성질들이 생명체 혹은 무생명체를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내용들은 그야말로 비산술적이다. "자연현상과 물질적 물성 부터가 벌써 크기의 관계만 가지고 다 설명하기에는 거리가 멀다. 성질, 의존성과 법칙성에는 그것들이 실제로 수학적 구조를 가지고 있는 한에서도, 역시 언제나 다른 요인을 포함하고 있다. 이 요인은 순전히 수의 형식으로 풀어지지 않는다. 질량, 연장, 시간지속, 속도, 힘, 저항력, 타성과 같은 근본계기들의 대립은 양적인 것으로 번역되지 않는다. …생물의 세계는 벌써 전혀 다른 성질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는 양적인 것은 겨우 구성요소를 함깨 구성하는 완전히 종속적인 요소로 격하된다. 그것은 완전히 소멸하지는 않지만, 그러나 유기적 생명에 독특한 것, 생명없는 것에 대립한 그 새로운 것은 양적인 것에 의하여 설명되지 않는다. 그것은 독자적인 다른 범주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심리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으로 점점 더 올라 갈수록 양적인 것의 요소는 더욱 더 자취를 감추게 되고, 수학적 원리의 일반화를 불러 일으키는 오해가 더욱 더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정신적 생활의 존재높이에 있는 구체자를 그렇게 내용이 빈약한 분량범주를 가지고 처리하려고 하는 것은 웃음거리가 될 뿐이다."
피다고라스학파, 실증주의 그리고 자연과학의 범주적 공통점은 철저히 수에 기초해 있다는 점이며, 동시에 다같이 수의 범주적 적용에 따른 한계답월에 걸려있다는 점이다. 수의 범주적 한계답월은 수를 그 적용범위의 한계를 넘어서 다른 영역으로 지나치게 확대함으로써 범하게 되는 일종의 범주적 오류이다. 이것들과 마찬가지로 유물론 역시 위로 향해 한계답월하는 경우를 종종 경험하게 된다. 고대의 원자론이 이에 해당되고, 현대에는 포이에르바하의 유물론과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변증법적 유물론이 그 대표적이다.
유물론은 어디까지나 <물질적 존재의 이론>에 기초해 있다. 따라서 물질영역의 기체와 그 역학 그리고 물질, 운동, 힘, 에너지 등을 기본범주로 하고 있다. 이 점에서는 유물론이 여타의 <물질적 존재의 이론>과 하등의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이 기본범주를 물질적 존재가 아닌 비물질적 존재의 영역에 까지 확대적용하고 있다는 사실이 유물론으로 하여금 여타의 다른 물질적 존재의 이론과 구별짓게 하며, 이로 인하여 그것은 한계답월의 오류에 또한 놓이게 된다. 유물론은 물질적 존재의 이론과 달리 이 기본범주를 살아있는 유기적 존재의 현상이나 심리적 존재의 현상 혹은 정신적 존재의 현상에 까지 적용시킨다. 이 점이 유물론으로 하여금 물질적 존재의 이론이 아닌 그야말로 유물론이 되게 하는 요인이다. "유물론의 배후에도 아주 단순한, 자체에 있어서는 완전히 정당한, 물질적 존재의 이론이 있다. 이 이론에 있어서는 앞에서 열거한 범주들이 사실상 표준으로 되고 있다. 이것들의 한계를 넘어설 때에 비로소 하나의 유물론이 되는 것이다. 즉 이런 종류의 범주를 가지고 유기적 및 심리적 생활을, 심지어 사유와 의욕의 현상을 설명하려고 할 때 유물론이 된다.
지금까지 고찰해 온 범주의 위로 향한 한계답월의 오류와는 달리 아래로 향한 한계답월의 오류가 있다. 이것은 그것과 동일한 범주의 근본과오이다. 다만 그 방향에 있어서 정반대이다. 즉 전자는 낮은 존재단계의 범주를 높은 존재단계에 속해 있는 존재자를 규정하는 데서 성립하는 범주적 오류인데 반하여, 후자는 높은 존재단계의 범주를 가지고 낮은 단계의 존재층에 속해 있는 존재자를 규정하고 결정하는 데서 발생하는 한게답월의 오류이다. 아래로 향한 한계답월의 오류는 일반적으로 철학의 관념론적 유형에서 종종 찾아 볼 수 있다. "관념론은 다 그런 종류의 예이다. 그것은 주관의 ― 이성, 정신, 의식의 ― 범주에서 모든 대상의, 따라서 나머지 세계 전체의 구조와 존재방식을 이해하려고 한다. 물질세계에 대한 억지 해석의 흔적은 여기서 특별히 역력하다."
존재하는 일체의 모든 것은 한결같이 신(神)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범신론은 아래로 향항 한계답월의 대표적인 예이다. 왜냐하면 "자연의 형태를 그 최하의 형태에 이르기 까지 신적 근원존재의 변형으로 보고 이것의 (대개 모든 것을 포섭하는 이성으로 이해된)범주를 거기다 옮겨 놓기" 때문이다. 스토아학파의 <자연에 따라 행하라>는 금욕주의적 윤리관과 스피노자의 <신은 곧 자연이다>(神 卽 自然)는 합리주의적 실체관 그리고 쇨링의 주관과 객관의 동일이 바로 이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못지않게 단자론도 이에 대한 적절한 예가 될 수 있겠다. 일체의 모든 존재는 단자(Monade)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것은 원자(Atom)와는 달리 살아 움직이는 정신적 존재이다. 단자는 소멸되지 않는다. 또한 이것은 외부로 통할 수 있는 문이나 창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외부로 부터 어떠한 영향도 받을 수 없다. 이것은 일체의 모든 것을 그 자체 스스로 구비하고 있지 않으면 안된다. 단자는 외부와의 관계에서 철저히 독립적이다. 이것은 곧 단자가 실체적 존재임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실체는 그것이 존재하기 위하여 여타의 다른 존재자를 전혀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단자는 자립적이고 자기 충족적인 존재임과 동시에 어디까지나 살아 움직이는 정신적 존재로서 실체이다. 단자에 관한 이러한 규정이 곧 그것의 기본범주로서 근간을 이룬다. 단자는 바로 이러한 일련의 범주로서 이루어져 있으며, 단자론은 단자에 관한 이러한 기본범주들로서 짜맞추어진 <이즘>( - ism)이다. "단자론도 같은 도식을 보여 준다. 그러나 단자론에서는 실체가 모두, 물질의 요소까지도, 심적인 것의 종류에 따라 생각되고 있다."
하르트만은 아래로 향한 범주적 한계답월의 오류로서 범신론과 단자론 이외에 식별하기 어려운 그야말로 <잠복한 선입견>도 상당수 있음을 지적한다. 범주 사용시 이것들에 의한 오류 또한 서슴치 않고 자행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것들이 "의식적으로 변호되거나 혹은 반박된 세계상의 배후에 거의 알려지지 않고 철저히 숨겨져 있다"는 데 있다. 여기에서 눈에 띄지 않게 잠복한 선입견이란 목적론, 가치론, 형식주의의 유형을 들 수 있다.
목적론은 다름아닌 "세계는 그 모든 층에 있어서 목적에 의하여 지배되고 있다고 보는 견해"이다. 이 견해는 이미 고대철학에서 널리 행해져 왔던 일종의 사고 유형이다. 특히 플라톤의 이데아론과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서 ― 존재자의 운동이나 변화의 설명에 있어서 ― 일반화 되어 있다.
의심할 바 없이 목적범주는 인간의 소관이다. 인간은 목적의식을 가지고 사유하고 의욕하며 또한 활동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타의 다른 생명체에 있어서는 이러한 현상을 찾아 볼 수 없다. 이것들은 오직 자연의 규칙에 따라 철저히 움직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목적활동성은 곧 인간으로 하여금 여타의 존재자들과 구별짓게 하는 일종의 척도라 할 수 있겠다. "목적이란 범주는 정당하게 인간의 영역에 속한다. 그리고 특히 인간의 의욕과 행위의 영역에 속한다." 이러한 사실은 인간이 이성적 사유의 존재라는 데 근거해 있다. 즉 인간이 이성적 사유의 존재라 함은 곧 인간은 목적활동적 존재임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인간은 여타의 존재자들 보다 고귀한 존재이고 존엄한 존재이다. 나아가 인간은 이들 보다 상위의 존재층에서 이들을 지배하면서 군림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목적범주를 여타의 다른 존재자들에 까지 확장시켜 나간다면, 이것은 말할 나위없이 아래로 향한 한계답월의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존재자의 각 특수분야는 자기 고유의 오직 자기에게만 적합한 범주를 가지고 있으니, 이것은 결코 다른 범주로 대체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또한 그 자신도 결코 간단히 다른 존재분야로 옮겨 놓여지는 것이 아니다. 범주는 구조적으로 보다 높은 존재의 분야로 멀리 뻗혀 들어 갈 수 있지만, 그러나 거기서 본래의 중심적인 그리고 보다 높은 구체자에 대하여 특성적인 범주는 아니다."
앞에서 플라톤의 이데아론과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이 행한 범주적 오류 ― 범주와 본질의 동일시, 원리와 구체자간의 동음이의 ― 을 지적한 바 있다. 이외에 목적론이 안고 있는 아래로 향한 한계답월 역시 이들에게서 엿 볼 수 있다. 플라톤의 존재론은 이데아론이다. 그에게 있어서 있음이란 곧 이데아이다. 이데아가 있다. 현상계의 사물은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이데아의 그림자이다. 그림자는 있음이 아니다. 이것은 있다가도 없어지고 없다가도 있게 되는 바의 것이다. 이를 있음이라 하지 않는다. 있음은 언제 어디서나 늘 일정하게 본래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는 바 그것이다. 이것은 곧 참된 있음이다. 즉 실재이다. 플라톤에 있어서는 이데아가 곧 실재이다.
그러나 그림자는 가상이고 모상인 바 가짜이다. 실재의 특성은 무엇인가. 이것은 보편성·본질성·이상성·완전성·원리성·목적성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실재의 성격이 이데아의 기본범주이다. 플라톤은 이 기본범주를 가지고 현상계를 규정한다. 그 결과 현상계는 개별성·현실성·불완전성·구체성 등으로 특성화 된다. 현상계는 이데아의 기본범주들로서 구성된 세계이다. 현상계는 이데아계와 일종의 짜맞추어진 구조 속에 놓이게 되고, 그 결과 현상계로 하여금 이데아계의 틀을 벗어 날 수 없도록 만들어 버린다. 여기에는 분명히 범주적 잘못이 내재해 있다. 플라톤은 이데아계를 실재계로 파악하고 이 실재계를 규정하는 기본적인 원리들을 비실재계인 현상세계에 까지 확장시킴으로써 한계답월의 오류를 범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물을 내용적으로 규정하면서 철저히 지배하기 위하여 이데아에서 나오는 목적론적 결정성은 플라톤이 이데아에 있어서의 사물의 관여라고 부른 것의 형이상학적 도식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그의 존재론은 한 마디로 성층설이다. 있음은 하나의 체계적인 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일 아래층의 순수질료와 제일 윗층의 순수형상 사이에 무기층, 유기층, 심리층 그리고 정신층이 자리하고 있다. 이것이 곧 그가 말하는 현실세계이다. 현실세계는 플라톤의 현상세계와는 달리 그 본질적인 내용인 원리 즉 형상이 내재해 있다. 따라서 개별물은 물질적인 내용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원리적인 요소도 동시에 지니고 있다. 즉 개별물은 형상과 질료로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순수형상은 질료적 계기를, 순수질료는 형상적 계기를 전혀 포함하고 있지 않다.
그리고 플라톤의 현상세계와 마찬가지로 그의 현실세계도 변화와 운동을 그 특성으로 한다. 현실세계의 운동은 질료가 형상을 향하는 데서 일어나다. 이를 성층세계와 연관하여 살펴 본다면 변화는 아래 층이 윗 층을 향하는 데서 일어난다. 왜냐하면 윗 층은 아래 층의 형상이고 아래 층은 윗 층의 질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변화 혹은 운동은 일관성 있게 아래 층이 윗 층을 향해서 일어난다. 이것은 최종적으로 순수형상의 실현에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순수형상은 <부동의 원동자> 이다. 자신은 전혀 움직이지 않으면서 일체의 모든 존재자들에게 자신은 향해 움직이게 하는 일종의 원리이다. 형상 그 자체가 질료인을 제외한 형상인, 목적인 그리고 동력인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존재자 혹은 그 존재자가 속해 있는 각 존재층은 끊임없이 형상 혹은 윗 층인 형상층을 향하여, 긍극적으로 순수형상을 향하여 나아가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성층체계가 질료적 계기에 의하여 구성된 것이 아니라 형상적 원리에 의하여 체계화되어 있음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이는 곧 형상적 기본범주를 아래 층에 속해 있는 존재자들에 일방적으로 적용시키는 데서 비롯되는 범주적 오류이다. "이 사상이, 플라톤에 있어서는 아직 느슨하게 동요되는 것이었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서는 확고히 조직된 학설로 되었다. <형상>은 여기서 움직이는 힘이고, 순수한 <에네르게이아>이다.
그리고 이것은 물질적 실재적 형태의 생성과정을 하나의 궁극목적을 지향하듯이 형상의 실현으로 향하여 이끌어 나가는 데에 성립한다. 이에 대응하여 보편적 목적으로서 제1원동자가 있으니, 이것은 <사랑의 대상이 움직이듯이> 즉 자기에게로 끌어당기듯이 움직이며, 이 끌어당김이 세계의 모든 생성과정을 관철하고 지배한다. 개개의 형상은 이 전횡적 힘 아래, 개개의 과정을 이끌어감으로써, 소규모의 특수한 것에 있어서의 그 모상과 같이 작용한다."
그러나 범주가 갖는 원리로서의 결정성은 목적활동성이 아니다. 범주로서의 원리는, 마치 이데아와 형상이 개별물을 규정하듯이, 위에서 아래로 향하여 일방적으로 개별물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범주로서의 원리와 구체자간의 상호관계는 수직적이고 종속적인 관계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수평적이고 대등한 관계이다. 원리는 구체자없이 원리로서의 기능을 다 할 수 없듯이, 마찬가지로 구체자 역시 원리없이는 구체자로서의 존재기반을 상실하게 된다.
"1. 두 가지 영역의 이원론을 원칙적으로 지양할 것, 원리와 구체자와의 모든 간격을 다리놓는 연관에 의하여 세계의 통일을 회복할 것이 요구된다.
2. 이 통일은 사후에 비로소 만들어지는 통일이라고 생각되어서는 안되고, 오히려 원리와 구체자와의 근원적인 상호간존재(Ineinandersein)요, 오직 - 피차간에 - 성립할 - 뿐임(Nur-mit-einander-bestehen)이라고 생각되어야 한다. …
3. 그러므로 원리는 구체자 없이 고립하여 있는 것이 아니고, 구체자의 밖에서나 곁에서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므로, 구체자가 원리 없이는 성립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 . . 범주가 원리임은 바로, 범주가 고립한 존재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에 대한 존재를 가진다는 것, 또는 원리가 원리인 바의 것은 오직 구체자에 대하여 그리고 구체자에 붙어서만 원리이라는 데에 있다. …
4. 이는 또 범주의 존재는 구체적 존재자를 규정하는 것으로 다하여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범주는 그것에서 나와서 구체자에 적용되는 결정성 이외의 다른 어떤 존재도 가진 것이 아니다."
또한 범주로서의 원리는 이데아나 형상처럼 존재론적으로 절대우월성을 갖지도 않는다. 변화하지 않고 언제나 일정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지 못한 존재자들 보다 완전하고 우월하며, 종잡을 수 없이 시시각각 변화하고 언제나 늘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하여 불완전하고 열등한 것은 아니다. 이것은 존재방식의 특성으로 부터 비롯되는 것이지 거기에 무슨 모종의 존재의미가 있어 그런 것은 아니다. "사변적 근거에서 가치의 우위를 결정하는 이론은 처음부터 그 권능의 자연스런 한계를 넘어서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데아나 형상은 변화하지 않고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완전하고 절대적이며, 그렇지 못한 존재자는 불완전하고 열등하다.
따라서 수시로 변화를 일삼는 존재자는 그렇지 않는 존재자를 위하여 존재해야 하는 것으로, 그 존재자를 목표·이상·목적으로 삼아야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플라톤의 이데아 영역은 완전성의 영역으로 생각되고 이와 반대로 사물의 세계는 약화되고 격하된 존재의 영역으로 보인다. 이에 대한 논증으로서 사람들은 사물의 유한함과 무상함을 내새운다. 중세의 보편자론은 본질의 영역에다 완전히 성스러운 광채를 부여하고 있다. …그 형이상학적 가치판단에 대하여 <순수성>이란 술어마져 사용한다." 그것은 그야말로 한낱 신념이나 믿음에 불과한 것이지 사실은 그렇지 않다. "무슨 까닭으로 어떤 보편적 원리가, 그 아래 속해 있는 어떤 임의의 실사적 특수사례보다 더 좋고 더 가치가 있어야 하는지, 정말 전혀 통찰되지 않는다. …보편적인 것과 원리적인 것이 구체자보다 앞서는 가치우월은 도대체 어디에 있어야 한단 말인가. 우리는 어떤 가치가 개별사례 속에 실현된 것을 가치 있다고 느끼지 않는가. …사람들은 흡사히 모든 것이 실제로 하나의 <무엇을 위해서>를 가지고 있게끔 그렇게 되어 있기나 한 것처럼, 모든 생기와 사태에 있어서, 무엇을 위하여 그것이 그렇게 되어 있는지를 물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믿는다. …모든 존재자가 그것의 <무엇을 위하여>를 가지게끔 되어 있는 것이 아니듯이
― 왜냐하면 실사적 세계의 구조에는 목적적 결정성 이외의 다른 결정성도 있기 때문에 ―,
모든 존재자에 어떤 <의미>가 붙어 있어, 그것을 체득하는 것이 인간의 과업일 수 있게끔 그렇게 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만일 처음부터 범주를 가치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애당초 범주문제를 그르치게 된다."
마지막으로 범주에 관한 그릇된 선입견으로서 범주적 형식주의를 들 수 있겠다. 범주적 형식주의의 유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과 질료에서 비롯된다. 여기에서 형상은 <부여하고, 활동하고, 규정하거나 또는 형태형성하는> 역할을 하고, 질료는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형상은 그야말로 규정자이고, 질료는 어디까지나 피규정자이다. 문제는 규정자와 피규정자의 관계 즉 형상과 질료의 관계를 범주적 원리와 구체자의 관계와 아무런 전제없이 동일시하는 데 있다. 형상은 규정자이므로 범주적 원리와 같고, 질료는 피규정자이므로 구체자와 같다. 이것이 범주적 형식주의의 일반적 입장이다. 그러나 형상과 범주적 원리는 그 기능적인 면에서 동일할지 모르나, 이것들이 각각 질료와 구체자와 맺고 있는 관계의 전체적인 구조와 그 내용면에서 본다면 결코 일치될 수 없다. "형상은 존재자의 유일한 원리는 아니다.
그러나 역시 원리의 근본계기임에는 틀림없다." 아무런 전제없이 무조건적으로 형상과 범주적 원리를 동일시 함으로써 범하게 되는 범주적 선입견을 앞에서 여러 차례 경험한 바가 있다. 특히 범주를 본질과 동일시 하는 데서 오는 범주에 관한 그릇된 인식과 원리적인 것과 개별물의 동음이의 및 위로 부터 혹은 아래로 부터의 한계답월이 그것이다. "범주적 목적론과 마찬가지로 형상형이상학도 역시 한계답월 및 동음이의와 밀접히 연관하여 있고 간접적으로는 심지어 분리설과도 연관하여 있다."
범주적 원리와 구체자간의 상호관계가 형상과 질료의 그것과 동일시 할 수 없음은, 범주적 원리는 어디까지나 구체자와 대등한 수평적 관계에 놓여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형상과 질료의 관계에서 볼 수 있듯이, 형상은 일방적으로 규정하고 질료는 어디까지나 규정받는 수직적이고 종속적인 관계는 아니다. "이러한 형상영역은 어쨌든 벌써 결코 원리영역은 아니다. 그것은 구체자를 완전무결하게 흡수한 것이다." 이는 곧 범주적 원리는 구체자를 규정할 뿐만 아니라 또한 구체자에 의하여 규정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원리와 구체자와의 근원적인 상호관계>는 <오직 피차간에 성립할 뿐(Nur mit einander bestehen)이다. 그렇지 않는 원리는 형상이 범한 오류를 그대로 답습하게 될 것이다. 즉 그것은 진정한 범주적 원리일 수 없는 것이다. "형상주의의 원리 위에 구축되는 범주론은 처음부터 질료에 대하여 옳게 대처할 수 없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범주론은 질료를 그 자체 형식이 없고 규정이 없는 것이라고 자기에게서 배제한다."
형상은 철저히 동음이의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이것은 질료가 형상을 향하는 데서 운동이 일어난다고 보는 점에서 비롯된다. 형상과 질료는 성층에서 절대적 상호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 관계를 맺고 있다. 이것들은 각각 어느 층과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형상이 되기도 하고 질료가 되기도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최고의 보편성에 대하여 자립적 형상원리를 인정하고, 특수적 형상들 (예를들면 생물의 종에 해당되는 형상) 만이 그에게 실체적으로 운동하는 힘들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바로 그럼으로써 이것들이 내용적으로 실사사례들과 구별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실사적인 것의 질료성이 형성하는 차이는 결코 내용적 차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형상은 역시 개별물과는 다른 어떤 것이 아니면 안되기 때문에 동어이의의 난점이 생긴다."
존재방식은 기준으로 하더라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존재방식의 분리 역시 동음이의의 오류를 범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피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존재방식으로 전가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곧 형상 자체를 나중에 다시 건너 놓을 수 없을 만큼 처음부터 구체자로 부터 분리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초기 플라톤의 분리설은 벌써 동어이의의 결과이고, 그리고 이것은 또 벌써 동의어반복적으로 자기자신의 원리로 만들어진 사물의 형상의 결과이다."
질료의 측면에서 형상을 설명하더라도 형식주의적인 관점에서 형상은 범주적 원리가 될 수 없다. 순수질료는 어떻게 변화가 가능한가. 변화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형상적인 계기가 있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순수질료는 그야말로 순수한 질료 즉 형상적 원리가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는 질료이다. "부조화는 처음부터 분명하다. 아리스토텔레스도 벌써, 보편적인 <제1질료> (즉 절대적으로 무형상의)가 직접 개별사물의 질료라는 명제를 인정할 수 없었다. …그러나 형태형성이 없는 질료가 순전히 자기자신에서 분화되어야 한다는 것을 어떻게 생각할 수 있겠는가. 질료는 거기에 반드시 규정성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그 자신 독자적인 종류의 규정하는 원리를 포함하고 있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질료는 그 자체 바로 규정이 없고 원리가 없는 것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전제에 따르면 형상만이 규정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질료는 어떤 것으로 부터 <수반되는> 것인가. 수반되는 것의 규정은 어디로 부터 나오는가. 그것은 형상일 것이다. 형상은 규정하고 결정하는 원리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질료가 수반되는 것이라 하더라도 형상의 규정을 받게 되므로 위로 부터의 한계답월에 놓이게 된다. 여기에서 모든 형상이 어느 질료에서나 실현되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질료가 동일한 형상에 의하여 규정되는 것도 아니다. 즉 톱의 형상은 철의 질료에서 실현되지만, 목재가 책상으로 분화 혹은 변화되기 위해서는, 그것은 책상의 형상에 의하여 규정되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 형상은 자기 편에서 분화된 질료의 특수한 종류를 미리 정해 준다. 이는 곧 분화의 종류가 형상의 본질규정 아래 함께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범주적 원리와 구체자간의 상호관계를 형상과 질료의 관계로 간단히 처리해 버리는 범주적 형식주의는 목적론적 선입견과 가치론적 선입견과 함께 쉽게 드러나지 않는 <잠복된 선입견>의 대표적인 예에 해당된다. 한 마디로 말하여 규정하는 데에만 익숙해 있고 규정되는 데에는 낯설은 원리는 참된 원리 즉 범주적 원리가 아니다. 그것은 원리적인 성격을 갖추고 있으되 원리 그 자체는 아니다. "왜냐하면 구체자에는 어쨌든 형태형성의 기체가 있고, 이것을 포함하지 않는 범주체계는 분명코 구체자에 대하여 충분한 것이 못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나오는 방법적 요구는, 이 기체계기들은 형식을 붙여 주는 결정성이 그것들에 관련시켜지는 범주들의 전체성분 속에 어떤 경우에라도 포함시켜져야 한다는 데 귀착한다."
Ⅳ
범주는 무엇보다도 보편성을 원리성격으로 가져야 한다. 이것이 존재하는 바의 원리로서 범주가 갖추어야 할 첫째 요건이다. 그러나 원리성격이 오직 보편성으로만 규정되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보편성 이외에 형상성, 법칙성, 실체성 그리고 이법성 등이 있다. 이들 역시 구체자를 규정하는 원리의 성질이다. 이들은 한결같이 본질성을 원리성격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보편성과 구별된다.
보편성과 본질성, 이 양자의 궁극적인 차이점은 어디에 있는가. 한마디로 말하여 구체자와의 상관관계에 있다 하겠다. 발생론적으로 보편성은 어디까지나 구체성에 그 기원을 두고 있으며, 구체자의 성질로 부터 분석되어 나오는 원리성격이다.
따라서 여기에는 구체성을 보증하는 질료성, 즉 차원 혹은 기체계기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본질성은 이와 다르다. 이것은 구태여 구체성에 연루되어 있을 필요가 없다. 본질 그 자체가 구체자를 배경으로 하여 존립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구체자가 본질에 적을 두고 있다. 구체자는 본질의 실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질성은 구체성의 존재유무와 상관없이 존재할 수 있는 바의 것이다.
이로 부터 원리로서 범주가 갖추어야 할 두 번째 요건인 결정성이 달라진다. 즉 구체자를 규정하는 결정방식이 달라진다. 원리로서 보편적 존재는 구체자를 일방적으로 규정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철저히 질료성에 기초해 있기 때문이다. 보편성을 그대로 구체자에 적용함으로써 이에 따라 세계를 인식하거나 해석하는 잘못을 범하지 않는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본질적 존재에 있어서나 가능한 일이다. 보편적 존재는 구체자의 질료성을 보증함으로써 구체자의 활동여지를 남겨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원리로서의 역할을 서슴없이 해내는 것이다. 원리로서의 범주는 바로 이런 존재를 말한다.
범주에 관한 존재론적 천명은 원리의 보편성에 있다.

첫댓글 저가 한 하늘을 올라가서
맛있게 먹고 입고 쓰고
나가 된후
그후 다음 단계를 찾기까지 방황 아닌 빈 여백의 공간이 있고 다음 하늘을 찾는 시기가 길어질때 왜 그럴까?하였는데
오늘 너무 맛있는 양식을 먹고 소화도 시키고
앞으로의 하늘을 찾을때의 양식을 귀히 받았습니다!
지기님
고맙고 감사드립니다!
태풍 피해는 없으시리라 믿습니다
평안이소서~()
예
좋은 소식 감사합니다.
생각보다 약한 태풍이라 지금은 소강상태입니다.
매일매일 높아가는 하늘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