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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에스겔 18:1-18
제목 : 내 인생은 나의 것
일시 : 2019년 8월 7일
1.
내가 삐딱한 걸까? 왜 나는 하나님이 규탄해 마지않는 저 속담에 솔깃한 걸까? 금수저, 흙수저라는 말이 등장할 만큼, 부모가 누구냐에 따라서, 내가 달리 어찌할 수 없는 선천적인 것 의해 이미 삶이 결정되어 버린 세상이 아니던가. 뿐인가. 보육원과 회복센터에서 본 아이들의 서러운 삶은 또 어떻고. 그냥 간단하다. 부모 잘못 만나 더러운 세상 살고 있다. 문제아는 없고 문제부모만 있다는 말을 그 아이들 만나면서 재삼재사 확인한다.
나의 성서 읽기 방식이랄까 원칙이라고 해도 될 텐데, 양쪽 입장 모두에 내 자신을 밀어 넣는 것이다. 나는 곧 출간될 「모든 사람을 위한 성경묵상법(성서유니온선교회 출판부)의 7장, “묵상과 적용: 묵상은 했는데 적용이 안 돼요”의 7절 ‘다차원적 읽기와 교차적용’에서 우리의 성경 읽기와 적용에 관한 새롭지 않은, 그러나 새로운 제안을 하였다. 다차원적 읽기란 오늘 본문으로 말하자면, 하나님과 에스겔도 되어 보고, 저 속담을 말하는 사람도 되어 보는 것이다. 교차적용이란 반대로 적용하자는 말이다.
이 본문의 경우 하나님과 에스겔의 입장도 되어 보지만, 저 속담을 입에 수시로 달고 다니는 사람의 심정도 이해해 보려고 무던 애를 쓴다. 그런 과정을 거쳐서 최종적으로 성서의 판단, 곧 부모의 죄가 아닌 자기 죄로 죽고, 자기 의로 산다는 명제를 진심으로 수용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성경은 에스겔서와 다른 목소리를 갖고 있기에 상호 충돌하면서도 상호 보완하는 변증법적 시각으로 성경을 읽게 된다.
‘아버지가 신포도를 먹으면 아들의 이가 시다’는 말이 속담이 되어 버린 사회와 사람들. 왜 그렇게 되었을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사회적이고 다른 하나는 종교적이다. 사회적으로 그들은 바벨론 포로들이다. 아마도 에스겔 또래의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그 당시 30대 초반은 지금의 그것과 같지 않다. 어찌되었던 그들은 기성 세대가 국제 정세를 잘못 읽고, 또는 알면서도 허망을 쫓아 멍청한 결정을 하는 바람에 이곳 바벨론 땅에 끌려와서 노역을 하며 지내고 있다. 그들 스스로 물었다. 왜 우리가 이곳에 있는가? 부모 잘못이다! 조상 탓이다!
종교적으로 저 속담은 일리 있다. 성경에서 축복과 저주를 기록한 모세 오경을 읽을 때 의아한 대목이 하나 있다. 이걸로 내게 물은 이들도 여럿이다. 왜 부모 죄를 삼사 대 후손에게까지 지우지요?(출 20:5, 34:7, 민 14:18, 신 5:9) 이건 우리만 궁금한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포로들에게는 실존적이고 인생 전부를 걸고 따지는 물음이었으리라. 저 성경을 익히 알고 있고, 자신은 포로살이하는 처지이다.
그러니 저 말씀에 입각해서 보면, 지금 우리는 부모 세대의 죄에 대한 심판을 받아 이 모양 이 꼴로 살고 있다는, 한편으로는 치받는 분노로 부들부들 떨며 저 속담을 말했을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체념하여 고개를 푹 숙이며 땅이 꺼져라 한숨 쉬며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저 말을 되뇌었을 것이다. “부모 잘못 만나 내 인생 이리 쫑난 거야.”
2.
이 본문은 실제 상황을 반영한다. 어쩌면 에스겔 자신이 저 질문을 했을 법하고, 그런 물음을 갖고 찾아온 이들과 숱한 논쟁을 벌였을 것이다. 마냥 부정만 할 수 없어서 공감하다가도, 최종적인 자신의 책임마저 방기하고 자포자기한 그들에게 직구를 날리기도 했을 것이라는 정황을 이 본문에서 읽을 수 있다. 18장 전체에서 2절, 19절, 25절, 29절은 한때의 에스겔 자신, 지금의 에스겔 또래의 동료들의 질문이다. 에스겔에 대한, 아니 하나님에 대한 이들의 거친 질문이다. 그리고 에스겔과 하나님이 제출한 답변서이다.
줄거리를 요약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가설적 상황을 제시한다. 정의롭게 산 할아버지, 그 아버지의 삶과 정반대로 망나니처럼 산 아버지, 그 아버지를 보고 정신 똑 바로 차리고 정의롭게 산 아들, 충분히 있을 법한 3대 이야기이다.
한 사람의 일생을 소개하고 의롭든 악하든 자기 의와 자기 죄로 살고 죽는다는 판결이 내려진다. 아비가 선해도 아들도 선하지 않고, 아비가 악해도 아들이 꼭 악한 것은 아니다. 선한 아비에게서 악한 아들이 나오고, 악한 아비에게서 선한 아들이 나온다. 물론 선한 아비에 선한 아들, 악한 아들을 보아하니 악한 아비인 경우도 많지만. 그러니까 아들의 인생이 아비의 삶에 전적으로 좌지우지 당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3.
이 스토리에서 내가 주목한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한 사람의 인생에 있어서 판단 기준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위에서 말한 바, 자기 인생은 자기가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다. 앞의 것부터 보도록 하자. 3대에 대한 평가로 제출된 것은 약간 다르다. 1대인 아버지에게서는 가장 구체적이고 세세한 반면, 2대와 3대의 자손에게는 얼추 동일한 듯 보여도 한두 가지가 빠져 있다. 그것은 그리 신경 쓰지 말고, 현미경 보다는 망원경으로 보는 게 낫다.
총체적인 평가의 기준을 제의적이고 윤리적이고, 수직적인 하나님과의 관계, 수평적인 타인과의 관계로 대별할 수 있겠다. 제의적 또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한 마디로 정리하면 우상 숭배와 관련되고, 윤리적이고도 타인과의 관계는 폭력으로 규정할 수 있겠다. 이것은 에스겔서가 누차 말하였던 것이다.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혀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성전을 관찰한 성전의 실상이 바로 그것이다. 우상 숭배와 폭력.
이는, 한 사람이 의롭다고 한 대목에도 분명히 나온다. 5절을 보라. 의롭다는 것을 두 단어로 설명한다. ‘법과 의’(새번역) ‘정의와 공의’(개역개정), ‘공정과 정의’(가톨릭성경) ‘just and right’(NIV) ‘lawful and right’(KJV) ‘justice and righteousness’(NASV) 더 헷갈린다. 내가 성경을 읽을 때 너무 아쉽고 한숨이 나오는 것은 저 단어의 중요성에 비해 적합한 우리말 번역을 못해냈다는 것이고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일관되게 번역을 안 했다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가장 좋은 번역은 가톨릭성경이다. 새번역이 ‘법’이라고 한 것은 히브리어로 ‘미슈파트’인데, 공정함, 공평함이다. 재판과 관련된 법정 용어이다. 그래서 KJV는 ‘lawful’이라고 한 것이다. 재판의 기본이자 생명은 무엇인가? 절차적 공정함이고, 실체적 공평함이다. 돈 있고 없고, 지위의 고하 여부를 막론하고 절차도 공정하고 공평해야 하며, 판결도 신분과 권력 유무와 상관 없이 동일해야 한다. 그래야 정의로운 판결이고 사회가 된다. 그러니 가톨릭 성경처럼 ‘공정’으로 번역해야 맞다.
새번역이 ‘의’라고 번역한 히브리어는 ‘체다카’이다. 이것은 정의이다. 관계적 정의이고, 앞의 것이 거칠게 구분하자면, 절차와 형식에 관한 것이라면, 이것은 실체와 내용에 관한 것이다. 공정함/미슈파트가 불편부당함이라면, 정의로움/체다카는 약자에 대한 편듦이자 편애다. 처음부터 출발점이 달랐던 원초적 상황(존 롤즈는 모두가 공평한 출발점을 가정하고 정의를 설명하려고 하지만, 그것은 애당초 글러먹었다. 사회는 애초에 부당한 상황을 기정사실로 전제로 하고 토론을 시작해야 한다.)에서 구조적으로 제도적으로 체계적으로 배제되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배려이고 그들의 권리를 옹호함이다.
어떤가? 한 사람의 인생을 판결하는 기준이 우리랑 달라도 너무 다르지 않는가? 돌려 말하지 말자. 우리는 너무 천박하다. 그 사람이 살고 있는 집과 타고 다니는 차, 일하는 회사와 연봉으로 한 사람의 인생을 평가하는 우리는 쌍스럽기 짝이 없다. 6종 스펙이니 7종, 8종 스펙이니 하는 것으로 젊은 친구들의 인생과 심지어 미래마저 결정해 버리는 이 야만적 사회의 일원으로서 이런 성경이 있어 눈물나게 고맙고, 이런 성경이 시대에 뒤처졌다는 것에, 이런 시대에 어울리지 않아서 감사하고 감사하다. 내 아무리 돼지우리를 뒹굴어도 내 영혼과 마음마저 함부로 굴리지 않고 싶다. 설사 그리될지라도 저 고매한 이상마저 돼지우리에 밀어넣고 싶지는 않다.
종교적으로도 마찬가지다. 한 사람의 신앙을 판단하는 잣대는 뭔가? 주일 출석? 헌금과 십일조? 교회 봉사? 사실, 나는 목사로서, 작은 신앙 공동체의 대표로서 저것들을 중요시 여긴다. 신앙 좋다면서 저런 것을 안 지킨다면, 공허하다. 작은 사회를 유지하고 발전하기 위한 합의된 규칙이기에 무조건 따라야 한다고 본다. 그럼에도 에스겔서는 저런 것들로 신앙을 측정하지 않는다. 그 유명한 미가서 6장 4-6절처럼, 사람을 사랑하고, 정의를 행하고, 겸손하게 하나님을 믿는 것,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는 공정한 삶, 공의로운 삶을 사는 것이고. 경제적인 약자를 짓밟지 않고 오히려 도와주고, 돈놀이 하지 않고 돈으로 사람을 사랑하는 그것이다. 이것 없이는 우리는 신앙을 말할 수 없다. 저것 없이도 신앙 좋다는 소리를 듣도록 시스템을 강고하게 구축한 교회, 그런 것을 욕망하는 신자 개개인들. 참으로 부끄럽고 부끄럽다.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하나님과의 영원한 언약(겔 16:63)을 맺는다고 했으니, 내가 그런 삶을 살지 못하였음을 부끄러워하고 부끄럽다.
4.
여기서 주목할 두 번째는 자기 인생은 자기 책임이라는 것이다. 아버지가 의롭다고 그 아들이 수혜를 받지 못하며, 아버지가 악하다고 아들이 벌을 받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는 아버지의 의로움으로 살고, 아들은 자기의 의로움으로 복을 받는다. 최춘선할아버지의 외침처럼, 우리 모두는 ‘각자 각자’인 거다. 너는 너, 나는 나.
한편 동의가 된다. 아버지가 의롭다고 자식도 의로운 것은 아니다. 아버지의 삶과 정반대의 길을 걷는 이도 부지기수다. 어떻게 저런 아버지에게서 저런 골 때리는 아이가 나왔을꼬? 반대로 어떻게 저런 망나니에게서 저리도 늠름한 아들이 나왔을까? 인생사 모를 일이다. 그래서 인생이고 그래서 살만한가?
그러나 곧바로 수긍하기 어렵다. 미심쩍다. 부모의 영향이, 환경의 중요성을 너무 가볍게 본 것은 아닐지. 물론 결론이야 부모와 환경이 최종 결정권자는 아니라는 것이지만, 그래도 그것들이 차지하는 비중을 축소한 것은 아닐까, 그런 의구심이 내내 사라지지 않는다.
나의 이런 의문은 위기청소년 아이들과 만남 때문이다. 그 아이들과 책을 읽고 글 쓰고 토론하는데, 이따금 토론 주제로 올라오는 것은 부모 잘못인가, 자기 잘못인가, 이다. 사실, 나는 아이들이 대부분, 아니 전부가 부모 잘못이라고 말할 줄 알았다. 그렇지 않는가. 건강한 가정은 저리 가라이고, 정상적인 가정이 드물다. 문제아가 안 되는 것이 외려 이상할 정도다. 그런 아이들이니 응당 부모 잘못이라고 말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나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반반? 40 vs. 60? 부모가 40%, 자기 잘못이 60% 정도이다. 물론 엄밀한 데이터는 아니다. 내가 만난 수십 명의 아이들과의 대화에서 얻은 얼추 비과학적이지만, 그 아이들의 생각이다.
아이들과 토론하던 중, 한 아이가 내게 물었다.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신중하게 잘 말해야겠구나, 생각하면서 솔직하게 말했다. 너희나 어린 아이에게 부모는 신이다. 절대자다. 아이의 입장이나 의지로 부모의 생각을 절대 꺾을 수 없는 약자이다. 불가항력이다. 예외가 없을 수 없지만, 그건 말 그대로 예외일 뿐, 일반화할 수 없다. 때문에, 10대는 부모의 영향이 압도적이고, 절대적이다. 그러니 너희는 너희 잘못 보다는 부모의 잘못에 의해 잘못된 길에 들어선 것이지.
그러나 20대가 되면서부터는 오롯이 너희 책임이고 너희 선택이고 너희 결정이다. 그때는 부모 탓도, 환경 탓도, 친구 탓도 할 수 없고, 해서도 안 된다. 그때 잘 살기 위해서, 잘 선택하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훈련을 하고 연습을 해야 해. 과거는 과거이고, 지금은 지금이니 지금 살면 나중은 달라질 거야. 너희 생각을 바꾸어주는 책도 많이 읽고, 여기서 좋은 경험을 많이 하고, 무엇보다도 간단한 습관이라도 바꾸어보렴. 핸드폰 사용도 줄이고, 너무 늦게 자지 말고.
5.
처음에는 의아했다. 부모 탓해야 하는 게 아닌가? 더 놀라운 것은 이 아이들이 부모에게 죄책감 또는 효도하지 못했다는 것에 대해 늘 미안해하고, 죄스러워한다는 점이다. 너무 성급한 결론일는지 모르지만, 그나마 괜찮은 집 아이들은 더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지 못한 부모 원망하고, 열악한 환경의 아이들은 부모에게 잘하지 못해서 미안해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도 했다.
이런 생각하다 본문을 다시 들여다보니 엉뚱하지만 내 딴에는 참신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이 속담을 입에 담은 자들은 예루살렘에서 잘 나가던 집 자식들이 아닐까, 그런 생각 말이다. 근거가 그다지 없는 내 생각이라고 치부하다가도, 멸망하기 전, 1차와 2차 포로로 끌려 온 이들이 대개 사회 지도층이고 엘리트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저것이 터무니없는 생각만은 아니라 여겨진다. 1차에는 다니엘이, 2차에는 여호야긴과 함께 에스겔도 끌려왔으니까 말이다.
온실에서 자라서 이런 거친 들판에서 생존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고, 애굽의 고기 가마를 그리워하던 출애굽 1세대처럼 흘러간 ‘왕년에’ 타령을 주구장천 불러 젖혔을 것이다. 그러니 여기서 사는 법을 배우기보다는 결코 돌아갈 수 없는 곳, 이미 흘러도 한참 흘러지나간 옛 시절 그리워하며 소맷자락을 눈물로 적시는구나. 가엽다. 그런데 가련하다.
6.
한 아이가 떠오른다. 내가 희망의 인문학 모임을 처음 한 날 만났던 아이다. 바로 내 오른쪽에 앉았던 아이다. 거무스름한 피부에 중간키이고, 덩치도 빵빵한 녀석이다. 굵은 팔뚝에는 이름 모를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나중에 물어보니, “삶을 원하거든 죽음을 준비하라.”는 뜻의 글자란다. 찾아보니, 라틴어다. “Si vis vitam, para mortem.”(시 비스 비탐, 파라 모르템) 삶이란 참 요상하다. 죽음을 생각하며 오늘을 사는 자는 진지하고 감사한데, 죽음을 망각하고 영원히 살 것처럼, 살고자 하는 자는 감사도 행복도 없다.
아이들과 죽이 맞았다. 영화 “프리덤 라이터스”를 보고 자서전을 쓰겠단다. 내 바라던 바다. 정말이지 피눈물 나는 이야기들뿐이다. 어떤 때는 뒤통수를 한 대 세게 후려갈기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조용히 안아주고 싶었고, 속으로 눈물을 훌쩍 거렸다. 그 어린 나이에 이런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니. 어이없고 아팠다. 이 아이들은 얼마나 아팠고 외로웠을까.
각기 나름의 키워드가 있었다. 자신의 삶을 글로 쓰면서 자기도 몰랐던, 자기 인생을 꿰는 단어를 찾았던 것이다. 이 아이는 ‘엄마’이었다. 자신도 어렴풋이 알았겠지만, 어릴 적 엄마가 떠났다는, 그래서 자기를 버렸다는 인식을 이때에 확고하게 가지게 되었다. 어머니가 너무 그리웠고, 보고 싶고, 원망스러웠다. 그 어머니를 떠나가게 한 아버지와 할아버지, 할머니마저 미웠다.
이 아이는 평상시 회복센터의 소장님 부인을 다른 아이들은 ‘어머니’라고 부르는데, 유독 이 아이만은 ‘엄마’라고 불렀다. 그것도 한 번 ‘엄마’라고 부르지 않는다. 적어도 서너 번이다. ‘엄마, 엄마, 엄마, 엄마.’ 눈 뜨고 일어나자마자 다가와서 안고, 졸졸 따라 다닌다. 입에서는 ‘엄마’ 소리가 끊어지지 않은 채 말이다.
6개월을 잘 지내고 자진해서 6개월을 더 지내겠다고 신청한 아이인데, 퇴소를 1달도 채 남기지 않은 시점에 이탈했다. 전국을 떠돌면서 갖은 고생, 생고생을 한다. 전화를 해서, 내가 이렇게 된 것은 엄마가 없어서 그렇다고 고래고래 소리, 소리를 지른다. 악다구니다.
그 소식을 듣자 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자서전 쓰기를 통해 자기를 발견하고, 상처를 치유하고, 미래로 나아가기를 바라고 바랐는데. 과거에 발목 잡혀서, 과거의 힘에 사로 잡혀서 현재와 현실을 살아내지 못하고, 원망과 탓하기로 더 나락으로 떨어지다니. 그 속에 쌓은 것이 얼마나 많았으면 그럴까 싶다가도 그렇게 풀면 더 많이 나쁜 것이 쌓이는데 걱정만 밀려든다. 안쓰럽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고.
7.
돌고 돌아 4절을 읽을 차례다. 서론이자 결론이다. 하나님께서 저 속담이 그릇된 것임을 주장하는 근거 구절이다. “모든 영혼은 나의 것이다.” 아버지나 아들이나 다 하나님의 것이라는 이 말을 구체적으로 예증한 것이 저 3대 이야기이다. 하나님의 소유와 책임을 보다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과 일대일 관계를 맺는다는 말로 보면 될 듯 싶다. 키르케고르가 말한 대로, 모두가 단독자로 하나님 앞에 선다.
물론, 에스겔이 오늘날의 개인주의를 알 리 없다. 그런 맥락과 전혀 상관 없다. 개인주의(individualism)라고 했을 때의 개인의 영어는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것(in + divide)이라는 의미이다. 물리학에서 원자(atom)라고 말한 것의 사회학적, 인간학적 맥락에서 대응하는 것이 바로 개인인 것이다. 한 인간의 정체성을 공동체 안에서, 타인과의 관계에서 이해하던 그 시대의 사람인 에스겔이 저런 뜻으로 개인을 말했을 턱이 없다.
그렇다고 ‘개인’이 없는 것은 아니다.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살고 그것이 인간의 원초적 상황이고, 존재론적 현실이기는 하지만, 타인과 엄연히 구별되는 고유성을 지니고 있음 또한 인간의 본질이다. 너와 다른 내가 너와 관계를 맺고 사는 거다. 그러니 너 없이 나 없지만, 나 없이 너 없다는 말도 맞다. 개인을 지우고, 개성을 말살한 공동체와 집단은 전체주의에 다름 아니다.
에스겔은 당대의 사람들에게 일대일로 하나님 앞에 서라고 외친다. 너는 너로 하나님 앞에 서라고. 아버지라는 후광이나 아버지라는 족쇄가 아닌, 아버지의 이름으로 규정된 ‘나’ 혹은 ‘아들’이 아닌 그냥 나로서의 나, 너로 환원되지도, 되어서도 안 되는 ‘나’로 자기 인생에 책임을 지라고 호소한다.
그리고 남 탓하지 말라고, 책임 전가하지 말라고 읍소한다. 남 탓하면 망한다고. 왜 망하는지 궁금하면, 어떻게 망하는지 궁금하면, 「하박국, 고통을 노래하다」의 10장, “‘탓’인가, ‘뜻’인가”를 읽어보기를 바란다. ‘탓’하면 망한다. ‘뜻’을 찾으면 산다. ‘탓하기’는 책임 전가이고, ‘뜻찾기’는 자기 인생에 대해 책임적 존재로 살겠다는 결단이다.
내 인생의 주인이 부모나 환경이 아니라, 내 인생의 주인은 나이고, 내 인생의 궁극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니, 그 선하신 하나님이 내 인생에 숨겨놓은 뜻을 찾고, 하나님의 명성에 걸맞은 삶을 살아 내보겠다는 다짐이다. 내 인생이 그리 싸구려가 아님을, 하나님이 사랑할 만한 값어치가 나가는 값비싼 존재라는 자각인 것이다. 내 인생은 나의 것, 너의 인생은 너의 것, 남 탓하지 말고 너 스스로 살아가라.
8.
나는 에스겔 14장 1-23절을 묵상하면서 “하나님에게는 손주가 없다”는 익히 알려진 문장을 인용한 바 있다. ‘노아, 다니엘, 욥’이 있어도, 그들만 구원 받고 그들로 인해 다른 사람들은 구원받지 못한다는 본문이다. 그런 걸출한 하나님의 사람, 신앙의 위인이 바로 내 곁에 있고, 심지어 그가 내 아버지일지라도 내가 의인이 아니면 그는 나랑 아무 상관 없다. 그는 그, 나는 나!
나는 종종 “남을 비판해서 내가 의로우면 비판하겠지만, 내가 의로운 것은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니 비판하는 이야기도 좋지만, 그대의 증언을 듣고 싶다, 증인된 그대의 삶의 이야기를 들려다오”라고 말하곤 한다. 한국교회의 위신을 깎아먹는 대형교회의 부정과 비리, 담임목사의 죄악에 대해 열변을 토하는 이가 적지 않다. 나도 그렇다. 속이 상한 게 아니라 화가 치민다.
그렇지만 하나님 앞에 서서, 너 뭐하다가 왔니? 라고 물으시면, 나는 저 나쁜 놈, 나쁜 목사랑 같지 않아요, 나는 저 목사처럼 표절하지 않았고, 세습하지 않았고, 재정 비리 저지르지 않았고, 성적 범죄를 저지르지도 않았어요, 라고 말할 건가? 아니면, 오히려 에스겔이 말한 대로, 가난한 자를 이리저리 도왔어요, 사회적 불의와 이렇게 저렇게 싸웠어요, 라고 말할 건가. 남 이야기하지 말고, 나 이야기하자.
9.
저 말로 끝내지 못하고 아비된 자로서, 자식을 키우는 자로서 자기 성찰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아비의 입에서 나올 말은, 내가 잘못하면 내 자식과 자식의 자녀까지도 개고생한다는, 잘못된 습관과 문화를 배우게 되니, 내가 잘 살아야 하고, 연대 책임 의식을 지녀야 한다.
허나, 아들의 말은 아비의 말과 달라야 한다. 내 인생은 나의 것, 내 죄로 벌을 받고, 내 의로 상을 받는 법이니, 나는 나로 당당하게 살 테다. 아비가 아들처럼 말하고, 아들이 아비의 말을 하면 폭망한다. 내 인생은 나의 것, 그러니 내가 책임지고 씩씩하게 살련다.
첫댓글 "탓하면 망하고 뜻을 찾으면 산다" 를 명심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9.08.07 16:19
아닙니다. 그리고 그 분은 기억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