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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편 1절-6절: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도다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 그 때에 분을 발하며 진노하사 저희를 놀래어 이르시기를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구약시대의 사람들과 아담 타락 후에는 오실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고, 예수님이 오신 후에는 오신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는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사죄 칭의 새생명으로 구원을 해 주시는데, 인간은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지어졌지만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도 하나님의 본질에 비하면 인간은 이질이다. 이 이질은 나쁘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과 다르다는 의미의 말이다. 하나님은 본질인 반면에 인간의 타락 이전의 영은 피조 된 영이기 때문에 그 상태로는 하나님이 계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상태의 영이다. 그 다음에 인간은 범죄 함으로 말미암아 죄에 오염된 이질적인 영이 되었다. 이 영은 하나님의 본질에 비해 이질이라.
타락 된 인간은 세상 끝까지 이질적인 타락으로 나가는 사람이 있고, 타락이 되었지만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 사람이 있다. 아직까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타락 후 계속 이질로 나가고 있는 거다. 타락 후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들은 그 영이 하나님의 본질을 입은 것이고, 말씀을 좇아 살아가면서 점차적으로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으로 닮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이것은 하나님의 본질로 닮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이 있는데, 성경을 보니 여기서 또 한 무리가 있으니 예수를 믿기는 믿는데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들과 똑같은 소원 목적으로 나가는 타락된 사람들이 있더라. 예수님을 안 믿으면서 타락된 이질로 나가는 사람들이 있고, 기본구원을 얻은 사람인데 안 믿는 사람들이 가진 소원 목적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
예수를 믿는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살아야 하는데, 하나님을 좇아 살려면 자기의 사는 소원 목적이 어느 주격으로 나가야 하느냐?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의 정신과 사상으로 살아야 하는 건지, 예수님의 뜻을 따라 이룰구원 목적으로 살아야 하는 건지? 예수 믿는 사람이 안 믿는 사람들의 소원 목적을 따라 산다면 그 사람은 세상을 주격으로 하고 사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 세상의 소원 목적을 따라 살면 이거는 세상 속화된 교인이고 넓은 길로 가는 것이고,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은 좁은 길 생명 길로 가는 참 진리의 성도다.
예수를 안 믿는 사람들은 당연히 넓은 길로 가는 거고, 예수를 믿고 영은 중생이 됐는데도 하는 짓이 예수를 안 믿는 사람들의 성질과 성격과 소원 목적으로 나가고 있다면 이 사람도 넓은 길로 나가는 거다. 그러니 심판 때 이들은 같이 심판을 받는다. ‘지옥에 가느냐, 천국에 가느냐’ 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매인 거고, 기본구원을 얻고 좁은 길로 나가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본질로 닮아져 나가지만 예수를 믿으면서도 세상 넓은 길로 나가게 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성품을 닮지를 못한다.
2절: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그러니까 이들은 여호와도 알고 그 기름 받은 자도 안다. ‘기름 받은 자’라는 것은 성령 하나님의 신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이걸 아는 것을 보니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이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다. 예수님 당시로는 성경을 가지고 가르치는 사람들이다.
기름부음을 받는 자는 구약성경에 보면 왕이요, 제사장이요, 선지자가 기름부음을 받았다. 문자적으로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신이 같이 하고 있다. 성령님이 같이 하고 있다. 특별한 직이다’ 하는 의미들이 붙어있다. 하나님께서 선택을 하여 불러 세우는 자에게 기름을 붓는다. 곧 성령의 임하심을 의미하기도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메시아로서 왕, 선지자, 제사장의 삼직을 다 겸하였다. 그런데 이 군왕들과 관원들은 이 예수님께 대적을 했다. 예수님 당시에 그랬다. 구약시대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신실한 종들을 핍박을 했고, 예수님 이후에는 사도들을 핍박을 했다.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받지 않고 대적을 했다. 선지자나 예수님이나 사도들을 죽인다는 것은 영적인 면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육을 위해서 살겠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생명에 대한 도전이요, 하나님에 대한 도전이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역자들을 죽이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도전이다.
3절: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버리자.’ 누가 그러느냐? 군왕들과 관원들이. 그들의 말투를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들을 자유하지 못하도록 옭아맨 것처럼 들린다.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또 고통에서 평안으로, 진리로 영원히 자유함을 누릴 수 있도록 소원하는 분이고, 그 일을 하는 분인데 이들이 하는 말이 무슨 뜻이냐?
우리가 세상을 보면 사람들이 짐승을 죽이려고 짐승을 잡아서 결박을 하는 경우가 있다. 결박을 한다는 것은 죽이려는 것이다. 왜 죽이려는 거냐? 사람을 해치니까 죽이는 거다. 그런 경우가 있고, 또 하나는 아무 데고 똥오줌을 싸는 짐승을 한 장소에 가둬놓기도 한다. 어릴 때 보면 동네사람들이 개들을 키울 때 풀어놓고 길러서 하도 길바닥에 방뇨를 하니까 시청에서 갈고리와 몽둥이를 가지고 나와서 길거리에 다니는 개들을 때려잡았다.
사람을 결박을 하는 일도 있는데, 사람을 살려내려고 결박을 하는 경우가 있다. 다시 말하면 참 사람, 참 자유자로 만들려고 진리말씀으로 결박을 하는 결박성이 있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강대국의 속국으로 만들어서 그 속국에 묶여서 살게 하는 결박이 있다. 이런 경우는 붙잡혀 가게 해서 죄를 깨닫게 하려는 결박이다. 기독자인 경우에 하나님의 말씀의 제재도 있다. 이건 사람을 만들려고 하는 결박이다. 일반적으로도 사람이 미쳐서 날뛰고 돌아다니면 그 사람을 쇠줄로 묶어서 가둬놓기도 하는데, 이럴 때는 그 사람을 묶어놓아야 그 자기에게도 좋은 거다.
인간이 하나님께 죄를 지어서 속국이 되었다면 그 죄를 깨닫고 회개하기 전에는 속국에서 자유가 없다. 하나님께서 어떤 세력으로부터 풀어놓게 하기 전에는 못 풀려난다. 그런데 이 이치를 모르고, 그것을 인정치 않고 속국에서 자유를 얻고자 인간의 수단 방법을 쓰면 쓸수록 고통만 더 가중이 된다. 그리고 그 환경을 통한 영적 깨달음도 없게 된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가서 70년이나 지났는데, 생각을 해 봐라. 어린아이가 70살이 되도록 포로로 있었다면 기가 막힐 일이다. 한 번 포로가 되면 헤어 나오기가 쉽지 않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명심해야 한다. 그런데 거기에서 다니엘이나 에스겔이나 스룹바벨이나 에스더나 느헤미야 학개 스가랴 이런 사람들이 나타나서 믿음생활을 잘하니까 70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오게 한다.
그 후로 또 보면 말라기 선지자 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고 죄를 짓고 돌아가니 400여 년 동안 선지자가 없었다. 영적 암흑시대다. 그렇게 죽 내려오다가 강대국 로마에 잡아먹힌 상태가 예수님이 오시기까지 계속되었다. 예수님이 메시아로 오셔서 복음을 전하실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메시아를 영접하고 죄를 회개하고 말씀을 따라 살아야 만이 로마의 속국에서 해방이 되는 것인데 그들은 하나님 앞에 바로 서는 것은 모른 채 로마에서 해방되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우리 한국도 36년 동안 일본의 압제 하에 있었는데, 성경의 이치로 생각을 해보면 36년 동안 핍박을 받을 때 신앙심을 잘 키워놔야 되겠는데 그건 없이 그냥 나가서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니 일본군의 총탄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 어쨌든 해방이 되었는데, 조선 사람의 힘만 가지고 해방이 된 거냐? 아니다. 예수님을 믿는 미국에서 B29 비행기를 가지고 히로시마에 원자탄을 떨어뜨려서 일본이 무조건 손을 들게 되어서 해방이 된 것이다.
그 후에 한국전쟁이 일어났는데 세계적으로 보면 한국은 굉장히 작은 나라다. 미국에 비하면 한 점에 불과하다. 그나마도 분단이 돼 버렸다. 이때도 미국을 비롯해서 여러 나라가 우리나라를 도와줘서 공산주의자들에게 거의 다 점령이 되었다가 지금의 분단국이 된 것이다. 그런데 6. 25를 겪지 않고 하나님의 어떤 섭리성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자꾸 파라다이스 같은 꿈을 가지고 이상만 찾고 있다.
인간이 자유로 살겠다고 선악과를 따먹고 죄의 노예, 죄의 종이 돼버렸는데,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이것을 보실 때는 인간은 자유가 없어진 셈이다.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에 인간은 자유가 없어졌고 사망에게 삼켜지고 있으면서도, 죽는 것을 날마다 눈앞에서 보면서도 그렇게 사는 것이 죄의 노예, 죄의 속박으로 보이지를 않고 참 자유처럼 느끼고 있다. 인간이 왜 죽는 거냐? 성경대로 말하면 죄 때문에 죽는 거다. 인간은 죄 때문에 죽는 것이니 사람이 죽는 것을 보면 죄를 회개해야 하는데도 그러지도 않고 하나님께 돌아오지도 않는다.
교인의 경우 교회 밖의 이방사람들이 자유하는 것처럼 보여진다. 왜 그러냐? 안 믿는 사람들은 주일날 제 마음대로 놀러도 가고 물건도 사고 하니 그렇다. 그런가 하면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에 얽매인 것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세상의 마음을 품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도 자기가 교회에 다니는 것이 상당히 짐스럽다. 그러니 제 마음대로 주일날 놀러가고 하는 거다. 이처럼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자유를 느껴보자고 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 놀이 프로그램이 많이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까 밖에 나가서 놀 것을 교회 안에서 논다 그 말이다.
우리가 자유에 대해 생각을 해보면 자유를 가진 후에 그 자유로 인해서 손해는 없고 만족과 기쁨과 행복이 와야 그 자유가 참 가치가 있는 거다. 이를테면 내 자유로 술 먹고 담배를 피운다고 할 때 술 먹고 담배 피우는 것으로 인해서 있던 병도 저절로 낫고, 목숨도 오래 가고, 숨이 넘어가려고 할 때 담배를 피우면 목숨이 더 길어진다거나 한다면 그 자유는 가치가 있는 거다. 그런데 자기 자유대로 실컷 먹고 마시고 피워놓고는 그걸로 인해서 병이 왔다면 그게 무슨 자유냐?
자유란다면 자타에게 유익이 와야 한다. 학생이 학교에 다니면서 학교의 규율을 지키려고 하니 상당히 얽매인 것으로 느껴진다. 그래서 학생이 학교로 안 가고 학교규율을 어기고 다른 데로 가버리는 것을 자유라고 생각을 하고 다른 데로 가버렸다면 자유롭게 산 학생의 결과가 어떻게 될까? 자기가 자유한 그 결과가 자기에게 손해가 온다면 그것을 어떻게 자유라고 할 수 있겠느냐? 이렇게 되면 자기 자유로 인해서 자기가 얽매여져 버린다. 자기가 속박이 돼버린다. 구속이 돼버린다.
우리가 본문을 살펴보면 이들은 하나님을 아는 자들임이 분명한데,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영원히 잘되라고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을 주신 것이다. 이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은, 즉 하나님의 말씀은 첫째는 자기의 생각 마음이 사망에서 이탈되게 만든다. 즉 사는 쪽으로 유도를 해낸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기 때문에 인간을 자꾸 자유로 만들어 주려고 한다. 그런데 이걸 못 깨달으면 자기의 생각과 마음이 속박이 돼버린다. 속박이 돼버리면 종이 돼버린다.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버리자 하도다.’ 자기들을 영원히 잘되라고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을 주었는데 어찌하여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지 말자.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말자. 우리의 힘대로 우리의 뜻대로 하자’ 하며 대적을 하고 나올까? 글자대로 보면 자기들을 누가 줄로 꽁꽁 묶어놓은 것 같으나 그게 아니다.
인간은 타락된 주관성밖에 없고, 자랑스럽게 내세울 것도 없으면서 왜 하나님을 향해서 대적을 할까? 온 세상이 전쟁이 일어나고, 흉년이 들고, 염병이 퍼지고, 사람들이 날마다 죽는다면 그 때는 하나님의 향해서 살려달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뭔가 좀 커지고, 편안해지고, 배가 부르면 자기 분수를 모르고 자기 망할 교만이 나오게 되더라. 인간이 참 간사하다. 배가 고플 때는, 어려울 때는 하나님을 찾지만 배가 조금만 부르면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기 시작한다.
4절: 우리 인간들은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 알아야 한다. 인간출생의 목적이 뭔지, 나그네 생활 동안 재세기간의 목적이 뭔지, 왜 자기에게 환경을 자꾸 바꿔놓은 건지, 또 자기에게 왜 성경을 주었는지 등을 알지도 못하는 하루살이 같은 인생이 자기의 분수도 모르고 창조주 하나님께 대적을 하니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보실 때 얼마나 기가 막혀서 웃으시겠느냐?
일반 자연은총도 하나님께서 안 주시면 인간은 못 사는 거다. 땅의 물이 하늘로 올라가서 비가 되어 내려오는 것은 하나님께서 과학적으로 만들어 놓은 법칙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법칙들을 사람들에게 쓰는데, 특별히 당신의 백성을 위해서 그 법칙을 만드신 것이다. 그러니까 세상이 없어질 때까지 이 세상이 그 법칙대로 되어가는 것을 보면 아직까지 하나님께서 참으시고 당신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래서 일반은총을 거두어 가지 않고 인간들에게 일반은총의 은혜를 베풀고 계시는 거다. 도둑도 밥을 먹는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 되기를 기다리면서 밥을 먹이고 있는 거다. 감옥에서도 밥을 주는 것은 사람이 되라고 밥을 주는 거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눈에 보이는 죄를 지으면 일반법이 와서 잡아가도록 하셨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신앙정신 사상적으로 죄를 짓게 되면, 하나님의 법대로 살려고 하지를 않고 생각 마음이 늘 세상으로 돌아다니면, 예수 믿는 사람이 사람 되기를 포기하면 그 다음에는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병원에 가둬버린다. 이 외에도 하나님께서 사람을 가두는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다. 또한 육신의 몸에 병은 안 들었지만 생각과 마음이 무엇에 꽂혀서 자유롭지 못하게 가두어져 있으면 하나님께서는 외부적인 어떤 존재나 환경을 들고 와서 그걸 깨기 시작한다. 사람을 살리려니 직장을 깬다든지 해서 정신을 바싹 차리게 만든다. 우리의 머리통 속의 생각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것에 푹 빠져 있으면 안 된다. 항상 하나님의 말씀 쪽에 붙어있어야 한다.
하루살이 같은 인간 자기는 분수를 알아야 한다. 남자는 남자의 분수, 여자는 여자로서의 분수가 있는 거다. 또 직분에 있어서의 자기 분수와 위치가 있는 거다. 자기의 직위를 생각을 하고 교만하면 안 된다. 직이 높을수록 교만해서는 안 된다. 어떤 직에 있으면 그 직에 합당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을 해야 한다. 직위가 낮은데도 그 이상의 직위를 행사하려고 하면 큰일 난다.
교회에 직분자가 많은데, 전도사라고 하면 전도를 많이 해야 한다. 그런데 신학교에 다니는 사람에게 의례히 부르기 좋게 전도사라고 부른다. 전도사라고 하면 어느 정도 수양을 닦고 교회에서 전도사라는 직을 행할 때 합당하게 사례도 나가는 거다. 전도사라고 하면 하나님의 집에서 주는 직분이니 충성스럽게 그 직을 준행해야 한다.
그리고 교회에 오래 다니면 의례히 집사직을 준다. 사실 집사라 하면 교회에서 봉사를 할 줄 알아야 한다. 남보다 수종을 많이 드는 거다. 이러면 영적 은혜를 받게 되는 거다. 그러면서 자기가 만들어진다. 그러니 교회의 직분자들은 자기의 위치를 잘 생각을 해야 한다. 성경에 보면 계명성이 하나님 위에 올라가려다가 교만해서 땅으로 찍혀버렸다 교회에서 교만하면 사정없이 내리꽂힌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