ㅁ 四樂軒公(伯琛) 遺稿[사락헌공(백침) 유고]
사락헌공 휘 백침(1732~1797)의 자는 일여(一汝), 호는 사락헌(四樂軒)이다. 그는 이취어초(以取漁樵), 기여시주(寄與詩酒), 안분무욕(安分無辱), 경전급식(耕田給食) 등 네 가지를 누릴 수 있기에 서재의 액호를 아호로 삼았다고 한다. 安貧樂道(안빈낙도)한 모습이 아호 속에 묻어 있는듯하다. (지장록 p. 319, 1153)
■ 梅軒(命慶) 次韻 (매헌 운에 차운함)
「靜舍秋泉裏春生老査邊幾經勢寒節摠是太古春蒼苔古奇物相對立溪邊種來問幾日獨秀見天眞梅中之絶妙化翁偏與妙知皆至妙公何獨知妙」
〈해설〉고요한 집 가을 샘 물속에 봄이 오래된 등컬가에 생기네. 세한의 절서를 지나서 모두가 태공의 봄이네. 푸른 이끼의 고기(古奇)한 물건과 상대하여 냇가에 서있구나. 묻노라 심은 지 몇 날인고 홀로 빼어나 천진스러움을 보이네. 매화 중의 절묘함은 조화옹이 편벽되게 묘한 것을 주었네. 지극히 묘한 것은 모두가 묘한 건 아니고 공만이 어찌 혼자서만 묘한 줄을 알리오.
ㅁ 陽川公(道及) 遺作[양천공(도급) 유작]
양천공 휘 도급(道及․1754~1821)은 존재공(存齋公)의 둘째 아들로 자는 시민(時敏), 호는 양천 또는 성와(聖窩)이다. 공의 다음 글은 운암공파 농아와공(聾啞窩公)의 장남 휘 영면(榮勉․1779~1851)에게 준 것이다. 영면의 자는 내학(乃學), 호는 호은(湖隱)이다. (지장록 p. 1121)
「古人有言曰文以會友學文本非爲會友也而其勢必至於會友何哉將以輔其仁也然則士之得仁友而交豈非大幸哉族侄乃學甫計其年則雖非友我者而語其仁則奚啻益我者哉惟其益於我者而我得與同交則此非所謂擇仁而交者歟旣得與仁者交而又將與仁者別則其情豈不忡忡然哉噫古人未嘗輕許人仁我謂乃學甫爲仁友何哉其爲人也端鴉沉靜可愛而不可惡也可愛者其非仁歟能因其可愛之性而以爲爲仁之方則乃學之學其果學仁者歟愚故於往也贈之以言而益勉其爲仁榮勉其惟勉之哉」
〈해설〉고인의 말씀에 글로써 벗을 모은다고 한다. 글을 배우려 만난 벗은 본래 만났던 벗이 아니었거늘 만나는데 이른 것은 무엇 때문인가. 벗의 만남은 장차 인(仁)을 돕는 것이다. 그러니 선비가 어진 벗을 사귀는 것이 어찌 큰 다행이 아니겠는가. 조카 내학 보는 나이로 보면 나의 벗은 아니나 그어짐으로 말한다면 어찌 나보다 못하겠는가. 오직 그가 내게 도움이 된다면 내가 사귀는 것이 이른바 어진 이를 가리어 사귀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미 어진 이를 사귀다가 장차 헤어진다면 어찌 근심과 걱정이 되지 않으랴.
아! 옛사람이 사람을 사귐에 경솔(輕率)하게 일찍 정(情)을 주지 말라 했는데 내가 내학보(乃學甫)에게 어진 벗이라 했으니 무엇 때문일까. 그 사람됨이 단아(端雅)하고 침정(沈靜)하여 가히 사랑은 할 수 있으되 미워할 수 는 없다.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그어짐이 아니겠는가. 그는 그 성품으로 인하여 사랑하지 않을 수 없으니 과연 내학을 배우는 것은 어짐을 배우는 것이리라. 내가 지난 번 갔을 때 이 말을 해서 그어짐에 힘쓰게 하였으니 영면(榮勉)을 더욱 힘쓸지어다.
ㅁ 竹塢公(道僩) 遺稿[죽오공(도한) 유고]
자는 슬혜(瑟兮), 호는 죽오(竹塢․1763~1832)이다. 공은 아버지 동산공(東山公) 휘 백신(伯紳)과 어머니 장흥 임씨(任氏)의 아들로 1763년(영조 39)에 관산 방촌에서 태어났다. 존재공의 학문을 계승하고자 학업에 정진했다. 그러나 죽오공 또한 존재공처럼 3벽의 한계를 넘지 못하고 출사를 접고 임천(林泉)에서 학문에 몰두했다. 그래서 동사촬요(東史撮要)․고사예축사(苦四禮祝辭)․상변통사(上變通史)의 저술을 남겼다.
공이 남긴 함흥위씨파보서(咸興魏氏派譜序)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관북에서는 1689년 기사보(己巳譜)부터 1940년 경진보(庚辰譜)까지 6번의 족보를 발행했으나 남종의 글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공의 파보서는 그만큼 희귀한 기록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서문에 어느 때의 파보라는 시제가 없다. 공의 생졸년을 따져보면 1824년에 발행된 관북 갑신보(甲申譜)가 틀림없다. 공의 연치 61세의 글로 보인다. (유고집)
■ 咸興魏氏派譜序 (함흥위씨파보서)
「夫族之有譜尙矣追其一本之義而明其宗支之分雖百世之遠使不至於路人者譜也程子所謂收宗族厚風俗莫如譜者亶其然乎維我十二代祖四昆季第三生員公與其次孫頓氏八居於咸興其長孫瑞氏仍留於長興長興之城中南面及谷城之石谷皆其一派也南北雖遠宗支雖分而其本則一父母所生也自其一父母視之則寧有南北之遠宗支之分乎其合而焉譜道理當然而咸宗鋟譜時南宗力弱不能赴則南北之宗分而爲二而宗支之親便爲他族也此豈收宗族厚風俗之誼哉宗人得祚甫爲是慨然與其宗人道晊甫相議合南北二宗爲之一譜出物繡梓以壽其傳其志豈不嘉且尙哉雖然譜役旣重而物力甚綿則二譜不可盡其詳也是以南譜則皆記其生卒墓位而咸譜則只記其官爵閥閱以明其南北一統之義而誌其派族之盛此不無傷哉之嘆也後之覽者其或諒哉否」
〈해설〉대체로 동족끼리 족보를 갖추고 지나온 지도 오래전부터 이었으니 그 동일한 근본에서 온 의(義)를 쫓아서 그 종손과 지손으로 구분됨을 밝히게 되고 백세(百世)의 먼 후대까지도 길가는 사람같이 여겨버리는데 이르지 않게 하는 것은 곧 족보(族譜)다.
송나라 정자(程子) 북송 정이(程頥)가 종족(宗族)을 모이고 풍속(風俗)을 후하게 하는 데는 보(譜)만 같음이 없다고 하였으니 진실로 옳은 말이라 하겠다.
우리의 십이 대조는 4형제분이셨는데 세 번째 생원공이 그 차손 돈씨(頓氏)와 더불어 함흥(咸興)으로 들어가서 살았고 그 장손 서씨(瑞氏)는 장흥(長興)에서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장흥성(城)안과 지금의 용산면인 남면(南面) 및 곡성(谷城) 석곡에 살고 있는 일가들은 모두가 일파다. 남과 북이 비록 멀고 종손과 지손이 비록 나누어지기는 했으나 그 근본만은 동일한 부모(父母)에게서 출생하였다.
그 동일한 부모로부터 보자면 어찌 남과 북이 멀며 종손과 지손의 구분을 할 수가 있겠는가? 합쳐서 족보를 하는 것이 도리(道理)상으로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함흥 일가들이 족보를 인쇄 할 때 남쪽일가들이 힘이 약하여 같이 못하였으므로 남과 북의 종친들이 분리되었고, 종손 지손의 친족이 문득 다른 종족처럼 된 것이다. 이것이 어찌 종족(宗族)을 모이고 풍속을 후하게 하는 정의가 있다고 하겠는가?
종인(宗人) 득조(得祚)씨는 이 점을 개탄하며 그의 종인 도질(道晊)씨와 함께 상의하여 남과 북의 두 종친들을 합쳐 오래 전(傳)해 질 수 있는 동일한 족보를 만들고자 하여 자금을 거출하여 출판하려 하였으니 그 뜻이 어찌 가상(嘉尙)하지 않겠는가? 비록 그러하기는 하지만 남쪽의 사정이 족보 일이 중함에도 불구하고 물력(物力)이 너무 약하고 보니 두 가지로 족보를 하게 되었고 그 상세함을 다하지 못하였다.
또 하나 아쉬운 것은 남쪽 족보에는 그 생졸(生卒)과 묘(墓)의 위치를 모두 다 기록해 두었지만 함흥 측 족보에는 단지 그 관작(官爵)과 벌열(閥閱)만 기록되어 있으며 이것으로 그 남과 북이 일통(一統)의 의(義)를 밝히고 그 파족(派族)의 성함을 기록하였으니 이는 서글픈 일이 아니라 할 수 없으며 한탄스러운 일이다. 후일 이 책을 보는 사람들이 그 혹을 양해를 해 줄 수 있을까 싶다.
(144-086일차 연재에서 계속)
첫댓글 (144-085일차 연재)
(장흥위씨 천년세고선집, 圓山 위정철 저)
85일차에도 '선조님들의 유작'이 밴드에 게재됩니다.
[본문내용- 선조님들의 유작]/ 무곡
조선시대 후기를 살다가신 선조님들의 유고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천년세고 연재를 시작한지 시대적으로는 거의 천년을 넘어온 것 같습니다. "세월은 유수같다"는 말이 실감나는 계절입니다./ 무곡
개인적으로는 죽오공의 호인 '도한'의 '한'자가 천년세고선집에 나오는 한자 중 제일 어려은 글자가 아닌가 합니다. 어지간한 옥편에도 없고
인터넷 옥편에서도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천년세고선집에도 한글 토씨는 달려있지 않습니다./ 무곡
죽오공의 함흥위씨파보서가 특이합니다. 함흥위씨로 표기했네요./ 벽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