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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기장이 비유
(롬 9:19)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
(롬 9:20)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롬 9: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어리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롬 9:22)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롬 9:23)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 하리요
(롬 9:24)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롬 9:25) 호세아의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하지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롬 9:26)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그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 9:27)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받으리니
(롬 9:28)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고 속히 시행하시리라 하셨느니라
(롬 9:29)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 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세상을 사는 사람들이 종종 내뱉는 말들이 있는데 그것은 “세상은 참 공평치 않다”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맞는 말입니다. 가수 신신애씨가 불러 유행한 적이 있는 <세상은 요지경>이란 노래 아시나요? “세상은 요지경~ 요지경속이다~ 잘난 사람은 잘난 대로 살고, 못난 사람은 못난 대로 산~다”라는 내용으로 시작되지요.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의 모습은 천차만별입니다. 어떤 사람은 부모를 잘만나 금수저를 물고 세상 보란 듯이 떵떵거리며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가난한 집안에서 흙수저를 물고 태어나 지지리도 못 살고 평생을 기도 제대로 펴지 못한 채 평생을 고통과 신음으로 지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누구인들 불행하게 태어나고 싶었겠습니까? 그런데 나의 마음과는 전혀 상관없이 되는 경우가 너무나 많은 것이 현실입니다.
왜 이런 것입니까? 사람이 불공평하게 만든 것까요? 아니면 창조주 하나님이 세상을 불공평하게 만드신 것일까요? 성경은 하나님이 세상을 차별 있게 지으셨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세상은 불공평하다고 불평하는 그들을 향하여 20절에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고 하십니다. 여기서 ‘반문하다’라는 말은 따지고 시비를 걸 듯 덤벼드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 우리들에게 “야! 임마! 입닥쳐! 내 마음이야! 내 뜻대로 잘될 놈과 못될 놈을 정하여 만드는데 네가 무엇인데 따지고 들어!”이렇게 버럭 화를 내시는 하나님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이대로 이해를 하게 되면 내게 주어진 인생을 아무소리 하지 않고 묵묵히 받아들이고 그러려니 하고 살라는 말인가요? 만일 이것이 옳은 것이라고 하면 기독교의 신앙도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운명론>과 다를 바 없습니다. 내게 주어진 굴레를 내 스스로 벗어날 수 없어 “이것은 내게 주어진 운명인걸! 어쩌겠어?”하고 모든 것을 체념(諦念)하고 살아가는 것이 운명론에 빠진 사람들의 모습이라고 하면 이런 모습은 참 허무하게 보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는 운명론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찾아내고 그 뜻 가운데 희망을 갖고 세상을 열심히 살아가는 진취적인 인생관이 담겨 있어야 합니다. 21절에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분명 토기장이가 자기 마음대로 종지 그릇도 만들고 커다란 항아리도 만들며 청자같이 값비싼 자기는 물론 값싼 질그릇도 만듭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근본은 흙이라는 재료로 이뤄졌다는 말입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이 세상의 시선으로 겉모양만 보면 천한 사람 귀한 사람들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으로는 그 근본이 같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중국의 양사언이란 분의 시중에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이로다.”라고 한 것처럼 세상에서의 빈부귀천(貧富貴賤)이 별 의미가 없습니다. 문제는 어떤 형태의 그릇인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무엇이 담겨 있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딤후 2:20)에서는 그릇의 재료가 다른 것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라고 하였습니다. 금과 은 그리고 나무 흙은 근본이 다릅니다. 이처럼 로마서에서는 그릇을 만드는 토기장이의 비유를 들어 겉으로 보기에는 차별이 있는 것 같지만 근본에 있어서 깨지기 쉬운 연약성은 동일함을 말하고 있다면 디모데후서에서는 근본이 다른 것으로 변화됨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근본이 바뀔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근본이 같던 아니면 다르던지 하나님께 쓰임받는 것입니다. (딤후 2:21)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주인이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이 존귀한 자로 세움을 받게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보실 때 어떻게 생겼느냐? 무엇으로 이뤄졌느냐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중심에 무엇이 담겨 있느냐를 보십니다. 제가 알루미늄 캔에 담겨 있는 콜라를 처음으로 마시고 난 후 캔이 아깝다고 망설인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캔이 반짝거리고 예쁘게 보여도 콜라를 담아 옮기는 역할을 마치고 나면 캔은 여지없이 버려지는 것처럼 우리의 육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육체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담아두는 용기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그 분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면서 내 안에 담겨있는 예수님의 생명이 하나님 나라로 옮겨질 때까지 필요한 도구가 육체입니다. 내 안에 예수님의 생명이 영생의 나라로 옮겨지는 순간 내 육체는 아무런 쓸모가 없어 흙으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생명은 육체 안에 담겨 있으면서 자라도록 되어 있습니다. 육체가 깨어지면 더 이상의 진보도 없고 변화도 없습니다. 육체로 있을 때 성장한 그 모습대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갑니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더 이상의 변화도 없고 진보도 없습니다. 오직 이 세상에서 육체로 있을 때만 변화와 진보가 있습니다. 이 세상의 높고 낮음은 하늘에 비하면 별 의미가 없습니다. 하늘에서의 영광은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고전 15:41)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고 했습니다. 직경이 200억 광년이나 되는 우주에는 태양과 같이 스스로 빛을 내는 항성이 10의 22승 개나 있다고 합니다. 현재 발견된 이론에 의하면 태양의 50만 배의 밝기의 별이 있다고 합니다. 해의 지름은 지구의 109배에 달하고 부피는 130만 배에 이릅니다. 또한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하늘에서 주어진 영광은 어마어마하게 차이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그 영광대로 영원을 산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므로 우리가 육체로 있을 때가 중요한 때입니다. (엡 5:16)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고 했을까요? 여기서 ‘아끼라’는 헬라어는엑사고라조메노이(ejxagorazovmenoi)는 `구속하다'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으로 노예들을 속전을 주고 구해내는 것에 적용할 때 쓰는 단어였습니다. 즉 ‘시간을 속량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시간의 지배를 받고 살고 있습니다. 이 시간의 흐름에는 악한 영들이 영향을 미치고 있어 사람들은 악한 것에 그대로 노출하여 살고 있습니다. 그냥 시간의 흐름에 맡기며 사는 사람들을 운명론자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런 시간의 흐름에서 악에게 저항을 하고 싸워 이겨야 합니다. 어떻게 이기지요? 사람은 흙으로 지음을 받은 연약한 존재이기에 우리들의 힘으로는 도무지 이기지 못합니다. 내 안에 마귀를 이기신 예수님의 권세가 내 안에 있어 그 분의 권세를 이겨야 합니다. “세월을 아끼라”는 말씀은 내게 주어진 시간을 순간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어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22절에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에서 갖가지 다양한 사건들이 빗발치듯 우리들의 귓전을 두드립니다. 자연재해는 물론 별의 별 사건으로 사람들이 생명을 잃는 모습을 보고 듣고 합니다. 저는 어느 날 버스를 타고 흑석동의 고개를 오르게 되었습니다. 퇴근 시간이라 차가 밀려 천천히 올라가고 있었는데 친구 사이로 보이는 젊은이가 헤어지면서 반갑게 손을 흔들며 길을 건너다 갑작스럽게 달려드는 차에 치여 그 자리에서 즉사하는 모습을 본적이 있습니다. 또 한 번은 올림픽 대로를 따라 잠실 부근에 왔을 때 길가에 승용차를 세워놓고 남편은 차안에서 무엇을 찾는 듯 하였고 아내는 차문을 연채 지나가는 차들을 비켜 가라고 손짓을 하다 제 차를 뒤에서 좇아오다 급하게 추월하는 차량에 의하여 들이받아 차 문짝과 더불어 공중으로 붕 띄워지며 20여 미터 전방으로 나가떨어지면서 그 자리에서 죽은 사람도 보았습니다. 종말은 이처럼 어는 순간 급작스럽게 다가와 피할 길 없는 사건을 말합니다. 성경에서는 인생을 풀과 같다고 하였고 또한 안개와 같다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짧은 인생의 시간동안에 예수를 못 만나고 사는 것은 비극 중에 비극입니다. 이때를 놓치면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길이 없습니다. 그 진노의 때를 피할 수 있도록 수도 없이 초청하시고 오래 참으시며 관용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농담으로 받아들이거나 경멸하는 것은 악인 중의 악인이 될 것입니다.
1982년 교통사고롤 죽게 되어 지옥을 보고 기적적으로 살아난 카라멜로 브레니스라는 분의 간증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으나, 결코 회개하기 원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 장소에서 수많은 목사, 전도자, 신자, 선교사들도 보았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자비를 구하면서 지옥의 형벌을 면하게 해달라고 애걸하였지만 주님의 답변은 회개할 수 있는 기회는 오직 이 땅에 있을 때 가능하다고 하셨다고 하였습니다.
믿음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적극적인 간섭으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23절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라고 말입니다. ‘긍휼의 그릇’이라고 했습니다. 내 영혼에 하나님의 긍휼이 임하면 내가 철저한 죄인이라는 사실이 깨닫게 됩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 드린바와 같이 ‘긍휼히 여기다’는 말씀은 헬라어로 ‘엘레에오’(ejleevw)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는데요. 이 뜻은 ‘다른 사람의 불행을 보고 외치는 동정의 절규’를 말합니다.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동정의 절규를 하실까요? 나의 형편과 모양을 보니 절대로 구원받아 하나님의 나라를 들어갈 수 없어요. 저 모습대로 살면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피할 길이 없어 보이는 겁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은 지옥을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를 먼저 세우시고 그 나라에 속한 생명을 모으시는 과정에서 하나님을 대적하여 타락한 천사인 마귀가 등장하였고 그 마귀의 속살거림에 속아서 마귀의 형상이 들어나는 사람이 생겨났습니다. 이들은 도무지 천국에 갈 수 없는 영적 존재들입니다. 저들은 마귀가 머물며 영원토록 고통받는 지옥으로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어떻게 헤어나오지요? 사람의 힘으로는 도무지 불가능한 것입니다.
춘천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춘성대교를 건너게 되었습니다. 제 앞에 봉고 차 한 대가 속도를 내고 달리고 있었는데 급커브 길에서 조수석 문이 열리면서 운전자 옆자리에 앉았던 사람이 원심력을 이기지 못하고 다리에서 훅하며 떨어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때 제 입에서 “아~~~악!”하는 절규가 터져 나왔습니다. 예수님이 사람을 보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절규가 이런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을 예수님은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를 보듬어주시고 위로하여 주시기를 원하여 낮고 낮은 천한 사람의 몸으로 오셨습니다. 만왕의 왕이요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예수님이 마리아의 몸을 빌려 보잘 것 없는 한 점으로 잉태하셨고 태어나서도 외양간의 말구유에 뉘이셨습니다. 섬김의 모범을 보이시며 긍휼이 무엇인가를 우리들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몸으로 오셔서 마귀의 일을 멸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분이 내 안에 계셔야 죄에 대하여, 또한 마귀의 계략에 대하여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마귀와의 전쟁에서 이기도록 우리를 초청하셨습니다. 마귀와의 전쟁에서 이길 때 우리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자라도록 되어 있습니다. 내 것을 버리고 예수님의 것으로 채울 때 우리는 ‘영광의 풍성함’으로 채워질 수 있습니다.
여러분 <타잔>이라는 영화를 보신 적이 있나요? “아~~~아~~~”하는 괴성을 지르면 이 줄을 잡고 저 쪽 나무의 줄을 잡으면서 정글을 누비고 있는 모습 말입니다. 저쪽으로 진행하기 위해서는 이쪽에 잡았던 줄을 반듯이 놓아야 합니다. 이 줄을 놓지 않으면 절대로 앞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신앙도 마찬가집니다. 세상의 것을 놓지 않고 하늘의 것을 잡을 수 없습니다. 마귀의 책략은 세상 줄을 놓지 말고 하늘의 것도 붙잡으라고 속살거립니다. 우리는 거짓 복음에 너무 길들여 있었습니다. 예수를 믿어 세상의 것과 하늘의 것을 함께 누리자고 말입니다. 우리나라고 속담에 “도랑 치고 가재 잡고” “뽕도 따고 임도 보고” 라는 것이 있는 것처럼 일거양득(一擧兩得)을 보려고 합니다. 이것은 세상의 논리입니다. 땅의 것과 하늘의 것을 동시에 거머쥘 수는 없습니다. (막 10: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이라고 하셨습니다. “나와 복음을 위하여”세상에 속한 것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믿음을 너무 가볍게 생각해 왔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사심은 사실입니다. 그것을 지식적으로 아멘하여 받아들이는 것으로 모든 구원이 완성된다는 것으로 이해를 해 온 것이지요. 그러나 믿음은 내가 가지고 있는 땅의 것을 버리고 하늘의 것으로 채우는 것을 말합니다. 그릇에 채워있는 것을 비워야 하늘의 것으로 채울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세상에 속한 모든 것을 가득 채우고 하늘의 것도 채우겠다고요? 어림없는 말입니다. 내게 있는 것을 버려야 하늘의 것으로 채울 수 있습니다. 하늘의 것으로 가득 채우는 것을 ‘영광의 풍성함’이라는 것입니다.
영광의 그릇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유대인들 뿐 아니라 이방인인 우리에게 까지 그 대열에 들어섰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24절에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그 분의 생명을 받아들일 그릇을 찾고 계십니다. 먼저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을 보내셔서 그들이 예수님을 소중하게 받아들이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판단에 따라 예수님은 전혀 보배롭지 않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 분을 배척(排斥)하고 결국은 예수님을 중한 죄인으로 몰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였습니다. 저들의 반항으로 이제는 이방인인 우리에게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들려져서 그 분의 생명을 담는 그릇으로 초청을 받았습니다.
이방인인 우리는 예수님을 내 안에 모셔 들이는데 유대인들의 실수를 또 다시 범(犯)하면 안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전혀 보배롭지 않게 다가오십니다. 그런 까닭에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영접하는 기회를 잃고 있습니다. 바울사도는 호세아의 예를 들어 구원을 이루는 사람들의 자세가 어떠하여야 될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롬 9:25~26) “호세아의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하지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그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함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제사장의 아들로 태어났고 이름의 뜻은 ‘구원’입니다. 그런 그에게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너는 가서 창녀와 결혼하여 음란한 자녀를 낳아라. 이 백성이 나를 떠나 더러운 창녀짓을 하고 있다.”라고 하셨습니다. 제사장은 거룩한 직임을 담당하여야 되므로 창녀와 결혼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명령은 전혀 이율배반적(二律背反的)인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호세아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고멜이라는 여자와 결혼을 했습니다. 고멜은 두 명의 아들과 한명의 딸을 두었습니다. 그럼에도 호세아의 아내는 남편을 버리고 가출하여 매춘행위를 또 행하는 것입니다. 그런 아내를 되찾아 오기 위해서 호세아는 은 15세겔이나 되는 적지 않은 돈과 당시 자가용에 해당하는 나귀에, 350리터가 되는 보리를 가득 싣고 길을 떠납니다. 350킬로그램이나 되는 것이니, 무척이나 무거운 무게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아내를 또 다시 데려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세입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받아들이는 것은 땅의 것을 포기하고 하늘의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늘의 것을 받아들이려면 내 것을 포기해야 되는데 복음이 바로 그런 것이란 말입니다. 내게 닥친 환경이 이해가 안 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리고 도무지 용납 못할 사람을 받아들여야 할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가 지니고 있는 이성으로 이해치 못하는 배후에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랑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어떻게 내게 이럴 수 있어 하는 경우가 여러분에게 종종 있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여기에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반드시 있을거야”라고 외치면서 받아들여 보십시오! 거기서 하나님의 복된 소식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해치 못하는 부분도 하나님의 선하심이 담겨 있다고 인정하라는 것은 어쩌면 하나님을 짓궂다고 여길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요구하시는 것은 자기 부인을 하지 못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복음으로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인정하지 못한 이유도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롬 9:27~28)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받으리니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고 속히 시행하시리라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남은 자’는 이방인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해졌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저들에 의하여 거부되면서 우리에게 복음이 전해졌다는 것입니다. (롬 9:29)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 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우리에게 남겨 주신 씨는 예수님의 생명입니다. 그 생명이 내 안에 자라나기 위해서 우리들이 끊임없이 행하여야 되는 것은 자기 부인과 더불어 회개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자리 잡아야 되는 곳에 세상의 것이 계속 들어옵니다. 매일 보고 듣고 말하고 하는 순간에 내 마음에는 나도 알지 못하는 죄악이 들어오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비워내지 않으면 예수님의 생명이 자랄 수 없습니다. 보았던 것, 들었던 것, 그리고 생각하고 말하였던 것들이 죄라고 깨닫는 것을 낱낱이 예수님의 거룩한 피 앞에 고백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이 회개를 통하여 저와 여러분은 생명의 충성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