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장 1-34절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7장은 내용상으로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눠질 수 있다. 먼저 1절부터 25절까지는 서원에 관한 내용이고, 26절부터 34절까지는 구별해서 드리는 예물에 대한 내용이다. 서원에 관한 내용은 세부적으로 사람의 서원(2-8절)과 가축에 대한 서원(9-13절), 집에 대한 서원(14-15절), 그리고 땅에 대한 서원(16-25절)이며, 예물에 대한 내용은 처음 난 가축(26-27절)과 무르기 금지(28-29절), 그리고 십일조(30-34절)에 대한 규례를 다루고 있다.
2-8.『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만일 어떤 사람이 사람의 값을 여호와께 드리기로 분명히 서원하였으면 너는 그 값을 정할지니 네가 정한 값은 스무 살로부터 예순 살까지는 남자면 성소의 세겔로 은 오십 세겔로 하고 여자면 그 값을 삼십 세겔로 하며 다섯 살로부터 스무 살까지는 남자면 그 값을 이십 세겔로 하고 여자면 열 세겔로 하며 일 개월로부터 다섯 살까지는 남자면 그 값을 은 다섯 세겔로 하고 여자면 그 값을 은 삼 세겔로 하며 예순 살 이상은 남자면 그 값을 십오 세겔로 하고 여자는 열 세겔로 하라 그러나 서원자가 가난하여 네가 정한 값을 감당하지 못하겠으면 그를 제사장 앞으로 데리고 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 값을 정하되 그 서원자의 형편대로 값을 정할지니라』
서원은 사람이 하나님께 무엇을 하겠다고 자원하여 맹세하는 것을 가리킨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몸을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서원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성전이나 성막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하겠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당시 성소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레위인들에게만 허락되었다. 따라서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겠다고 서원한 사람은 성소에서 일하는 대신 자신의 노동력의 가치를 돈으로 계산하여 성소에 지불해야만 했다. 그 값은 남녀노소에 따라 차등 적용되었고, 가장 생산적인 노동을 할 수 있는 젊은 남성이 가장 높은 금액을 드려야만 했다.
당시 남자 성인 노동자의 한 달 월급이 은 한 세겔이었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서원에 따른 비용은 결코 만만치 않은 액수였다. 서원한 사람이 너무 가난해서 정한 값을 내지 못할 경우, 제사장은 서약한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따라서 그에게 값을 정하여 주었다. 가난한 사람들을 열외 시키기 보다는 그들의 형편에 맞춰 서원에 대한 값을 지불케 했다.
(일개월~다섯살 미만) 남자 은 5세겔로 하고 여자면 그 값을 은 3세겔, (다섯~스무살 미만) 남자면 20세겔, 여자면 10세겔로, (이십~예순살 미만)남자면 은 50세겔, 여자면 그 값을 30세겔, (예순살 이상)남자면 그 값을 15세겔로 하고 여자는 10세겔로 하라는 것이다. 나이에 따라서 남자는 5, 20, 50, 15로 조정되었으며, 여자는 3, 10, 30, 10 로 조정되었다. 성경에서 남자와 여자에 대해서, 남자는 그리스도, 여자는 하나님을 떠난 자를 상징한다. 숫자에 대한 의미가 있다. 남자에 대한 숫자로서, 5는 율법(모세오경)을 상징한다. 2는 분리를 의미한다. 15는 십과 5의 합성어로서 10은 복음, 5는 율법을 의미한다. 율법 속에서 복음을 발견하는 것이다. 여자에 대한 숫자로서 삼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상징한다. 10은 전체를 대표하는 의미를 갖는다.
9-13.『사람이 서원하는 예물로 여호와께 드리는 것이 가축이면 여호와께 드릴 때는 다 거룩하니 그것을 변경하여 우열간 바꾸지 못할 것이요 혹 가축으로 가축을 바꾸면 둘 다 거룩할 것이며 부정하여 여호와께 예물로 드리지 못할 가축이면 그 가축을 제사장 앞으로 끌어갈 것이요 제사장은 우열간에 값을 정할지니 그 값이 제사장의 정한 대로 될 것이며 만일 그가 그것을 무르려면 네가 정한 값에 그 오분의 일을 더할지니라』
가축에 대한 서원으로 한 번 바치기로 한 짐승은 다른 것으로 바꿀 수 없었다, 만일 변경한 사실이 드러날 경우에는 두 짐승 모두 드려야만 했다. 하나님의 사역에 요청되는 자세는 신중함이다. 함부로 결정해서는 안된다. 아울러 일단 결정한 후에는 변개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아울러 만일 서원한 짐승이 제물로 사용할 수 없는 짐승이라면 제사장이 정해주는 값을 대신 치루면 되었다. 만일 부정한 짐승임에도 서원한 사람이 그 짐승을 가지기를 원하면 제사장이 정한 가격에 오분의 일을 더 하여 지불하기만 하면 소유가 가능했다. 진리와 비진리가 섞이면 안된다는 것을 말해주신다.
14-25.『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 집을 성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려하면 제사장이 그 우열간에 값을 정할지니 그 값은 제사장이 정한 대로 될 것이며 만일 그 사람이 자기 집을 무르려면 네가 값을 정한 돈에 그 오분의 일을 더할지니 그리하면 자기 소유가 되리라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 기업된 밭 얼마를 성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려하면 마지기 수대로 네가 값을 정하되 보리 한 호멜지기에는 은 오십 세겔로 계산할지며 만일 그가 그 밭을 희년부터 성별하여 드렸으면 그 값을 네가 정한 대로 할 것이요 만일 그 밭을 희년 후에 성별하여 드렸으면 제사장이 다음 희년까지 남은 연수를 따라 그 값을 계산하고 정한 값에서 그 값에 상당하게 감할 것이며 만일 밭을 성별하여 드린 자가 그것을 무르려면 네가 값을 정한 돈에 그 오분의 일을 더할지니 그리하면 그것이 자기 소유가 될 것이요 만일 그가 그 밭을 무르지 아니하려거나 타인에게 팔았으면 다시는 무르지 못하고 희년이 되어서 그 밭이 돌아오게 될 때에는 여호와께 바친 성물이 되어 영영히 드린 땅과 같이 제사장의 기업이 될 것이며 만일 사람에게 샀고 자기 기업이 아닌 밭을 여호와께 성별하여 드렸으면 너는 값을 정하고 제사장은 그를 위하여 희년까지 계산하고 그는 네가 값을 정한 돈을 그 날에 여호와께 드려 성물로 삼을지며 그가 판 밭은 희년에 그 판 사람 곧 그 땅의 원주인에게로 되돌아갈지니라 또 네가 정한 모든 값은 성소의 세겔로 하되 이십 게라를 한 세겔로 할지니라』
집에 대한 서원, 땅에 대한 서원 또한 이와 유사한 맥락의 내용을 담고 있다. 자신의 집을, 자신의 밭을 성별해서 하나님께 드렸으나 이후 되물리려 할 때, 그에 따른 세부규례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기쁨으로 자원하여 드릴 때에 다양한 방법으로 섬길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셨다. 14절부터 25절은 땅과 집을 하나님께 드리는 사례가 나온다. 사람이 헌신의 표현으로 자기 집을 성소에 바칠 경우 제사장은 그것을 처분하여 성소의 재정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다만 이때 드릴 수 있는 집은 성 안에 있어서, 매매를 통해 영구히 소유권이전이 가능한 집이어야 했다. 이렇게 하나님께 집을 드리기로 했어도 다시 되찾고자 할 때에는 그 집의 값에 오분의 일을 더하여 제사장에게 주어야 했다. 오분의 일은 10의 둘로서, 앞의 십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 뒤의 십은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는 자의 십자가의 죽음을 상징한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드리는 것이다.
기업된 밭이란 이스라엘 각 지파대로 하나님께 선물로 나누어 받은 땅을 의미한다. “마지기”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표현하자면 씨뿌림이다. 27장 16절”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 기업된 밭 얼마를 성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려하면 마지기 수대로 네가 값을 정하되 보리 한 호멜지기에는 은 오십 세겔로 계산할지며” 히브리어 성경을 보면,
וְאִ֣ם׀ מִשְּׂדֵ֣ה אֲחֻזָּתֹ֗ו יַקְדִּ֥ישׁ אִישׁ֙ לַֽיהוָ֔ה וְהָיָ֥ה עֶרְכְּךָ֖ לְפִ֣י זַרְעֹ֑ו זֶ֚רַע חֹ֣מֶר שְׂעֹרִ֔ים בַּחֲמִשִּׁ֖ים שֶׁ֥קֶל כָּֽסֶף
웨임(만일) 미쉐데(밭) 아후자토(그의 기업) 야크디스(헌물로 드리다) 이쉬(어떤 사람) 야훼 웨하야(~될 것이) 에르커카(네가 값을 정하여) 레피(~에 따라) 자로(씨) 제라(씨) 호메르 쉐로림(보리) 바하미쉼(50) 세겔, 카세프(은)
마지기 수대로 라고 번역된 것의 히브리어는 “레피 자로 제라”로서 “그것을 위한 씨뿌림의 씨”에 따라서 이다. 자로와 제라 모두 기본형은 제라(씨)이다. 씨를 강조하는 것이다. 씨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표면적으로는 단순히 면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씨를 뿌리는 정도를 보고 값을 매기라는 것입니다. 보리 한 호멜지기는 약 220리터 정도의 부피이며 고대 근동에서 이 정도 양의 평균값은 한 세겔이었다. 그러므로 보리 한 호멜지기를 파종할 수 있는 땅이면 일년에 일 세겔씩, 희년까지 사용한다고 봤을 때 은 오십세겔로 계산하라는 뜻이다. 또한 희년이 지난 몇년 후에 밭의 값을 매길 경우에는 오십 세겔에서 일 년에 일 세겔씩 지난 횃수 만큼 값을 빼서 책정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 서원한 밭의 값을 책정하는데는 몇가지 이유가 있었다. 사람이 하나님께 밭을 드린다고 해서 제사장이 그 밭을 직접 관리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서원 후에도 드렸던 사람이 계속 그 밭을 경작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면 거기서 수익금이 나올텐 데 거기서 책정된 밭 값은 성소에 내고 그 차익은 자신이 가질 수 있었다.
서원했던 밭을 다시 무를 때에도 책정된 밭 값에 오분의 일을 더하여 되찾을 수 있었다. 이때 희년이 오기전에 이런 일들이 이뤄져야 했는데 여기서 시기를 놓쳐 희년이 지나게 되면 영원히 하나님의 성물이 되었다. 그런데 간혹 하나님께 드린 밭을 타인에게 파는 경우가 있었다. 착오에 의한 매매도 있었지만 악의를 갖고 매수자에게 봉헌된 밭임을 속이고 팔았을 가능성도 있었다. 이렇듯 소유권에 혼란을 일으키는 매매가 발생할 때 그 밭은 영원히 하나님의 성물이 되었다.
마지기 수대로 라고 번역된 것의 히브리어는 “레피 자로 제라”로서 “그것을 위한 씨뿌림의 씨”에 따라서 이다. 자로와 제라 모두 기본형은 제라(씨)이다. 씨를 강조하는 것이다. 씨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희년은 부활을 상징한다. 따라서 희년이 될 때까지는 세상에 나그네로 살지만,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부활에 이른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만일 다른 사람에게 밭을 사서 그것을 하나님께 드리기로 서원했다면 희년까지 계산해서 값을 산정 한 뒤에 하나님께 그 돈을 드려야 했다. 중요한 것은 그 밭은 영구히 성소의 것이 될 수는 없었다. 희년이 되면 다시 원래 주인에게 돌아가야 했다. 희년을 의미하는 부활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26-27.『오직 가축 중의 처음 난 것은 여호와께 드릴 첫 것이라 소나 양은 여호와의 것이니 누구든지 그것으로는 성별하여 드리지 못할 것이며 만일 부정한 짐승이면 네가 정한 값에 그 오분의 일을 더하여 무를 것이요 만일 무르지 아니하려면 네가 정한 값대로 팔지니라』
성물에 관한 규례가 26절부터 34절까지 기록되어 있다. 모든 가축의 처음 태어난 것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것이다. 원래 하나님의 것이기에 그것을 서원의 예물로 드릴 수 없었다. 심지어 낙타나 나귀처럼 부정한 가축의 첫 새끼도 하나님께 바쳐야 했다. 부정한 짐승 자체는 예물로 드릴 수 없었기 때문에 짐승의 새끼의 가치에 오분의 일을 더 하여 그에 상당하는 값을 성소에 드려야 했다. 이는 부정한 짐승이기에 드리는 일종의 보상금이었다. 또한 배상할 형편이 안되면 부정한 짐승을 팔아서 그 돈을 성소에 드려야 했다. 팔 때에는 이윤을 남겨 파는 것이 아니라 제사장이 정해준 정가 대로 팔아야 했으며, 제 사장이 가격을 정해 주었다는 사실을 볼 때에 그 판 돈을 성소에 드려야 했음을 알 수 있다.
28-29.『어떤 사람이 자기 소유 중에서 오직 여호와께 온전히 바친 모든 것은 사람이든지 가축이든지 기업의 밭이든지 팔지도 못하고 무르지도 못하나니 바친 것은 다 여호와께 지극히 거룩함이며 온전히 바쳐진 그 사람은 다시 무르지 못하나니 반드시 죽일지니라』
여기에서 온전히 바친 것이라는 의미의 히브리어 헤렘은 두 가지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첫째는 하나님께 바쳐진 드려진, 헌신됨의 의미이고, 둘째는 저주받은, 파괴된, 죽음이 예정됨이라는 뜻이다. 28절의 경우는 하나님의 일을 위해 특별히 바쳐진 예물이라는 의미로 예를 들면 성막을 위해 특별히 드려진 예물을 의미한다. 그 예물의 경우, 절대 무를 수 없었다. 헤렘이 지닌 두 번째 뜻으로서 죄로 인해 죽음이 예정된 대상과 관련이 있다. 그에 해당되는 사람은 그 어떤 속전으로도 용서를 받지 못하는, 진멸의 대상이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가나안의 원주민들이다. 신명기 20장 16절부터 18절에서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이 민족들의 성읍에서는 호흡 있는 자를 하나도 살리지 말지니 곧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을 네가 진멸하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명령하신 대로 하라 이는 그들이 그 신들에게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을 너희에게 가르쳐 본받게 하여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게 할까 함이니라』가나안 족속들이 헤렘 곧 진멸의 대상이 된 이유는 그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의 신을 섬기는 일을 가르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짓 신을 숭배하는 죄악을 저지르게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가나안 원주민을 향한 헤렘의 명령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적으로 오염되는 것을 막는 예방의 성격을 띠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30-34.『그리고 그 땅의 십분의 일 곧 그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열매는 그 십분의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의 성물이라 또 만일 어떤 사람이 그의 십일조를 무르려면 그것에 오분의 일을 더할 것이요 모든 소나 양의 십일조는 목자의 지팡이 아래로 통과하는 것의 열 번째의 것마다 여호와의 성물이 되리라 그 우열을 가리거나 바꾸거나 하지 말라 바꾸면 둘 다 거룩하리니 무르지 못하리라 이것은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이니라』
십일조에 관한 규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밭이나 나무에서 나온 모든 소산물의 십분의 일은 하나님께 바쳐야만 했다. 아울러 소나 양의 십일조 역시 하나님께 드려야 했다. 십일조에 대해서.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므로 반드시 내야 한다는 말을 하고, 이것을 잘 내면 하나님이 더 큰 복으로 갚아준다』라고 한다. 또 어떤 교회에서는 십일조는 구약에서 정한 율법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기 때문에 십일조를 내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것을 믿지 않는 것이다 라고 말한다. 누구의 말이 맞는 것일까? 깊이 있게 살펴보지 않으면 안된다.
신약성경에는 십일조에 대해서 설명한 내용이 마태복음에서 23장 23절에서 유일하게 있다. 이 성경 구절을 가지고 예수님이 십일조에 대해서 말씀하셨기 때문에『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았어야 된다』고 말했으므로 십일조를 내야 된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이 있는 것이다. 이 성경구절을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이다. 십일조를 언제부터 내게 되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십일조를 내야 한다고 말하는 교회는『십일조는 율법에서 정해져서 내야되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분의 일을 드렸으므로 현대에 사는 우리도 십분의 일을 내야한다』라고 십일조의 기원을 말하기도 한다. 그리고 야곱이 자기 형 에서의 손길을 피해서 도망가다가 광야에서 돌 베게를 베고 자다가 거기서 하나님을 만나고 깨어나서『하나님이 여기 계신데 알지못했다』라고 하면서 서원 기도를 하는데, 내가 아무 일 없이 평안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하나님이 해 주시면, 하나님께 내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겠다고 그렇게 서원을 했다. 그래서 율법 이전에 이렇게 십일조를 드리겠다고 약속을 했으므로 십일조를 바쳐야 한다 라고 말하는 교회들도 있다.
또 레위지파는 기업을 받지 않았는데, 그래서 하나님이 하나님께 바친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지파에게 주었으므로, 사람들이 이것을 근거로 해서 십일조를 내야한다고 말하기도 한다.『오늘날 목사들이 레위지파와 같은 일을 하고 있다』라는 설명이다.『십일조를 내야 한다』라고 주장하는 목사들은 목사들이 레위지파, 제사장과 같은 역할을 한다 라는 것이다. 그리고 특별히 하나님께 바친 것으로 생활을 해야 된다고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러나 십일조를 내지 말아야 한다는 입장에서는 모든 성도가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특별히 목사만 제사장의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을 하기도 하고, 성경에서는 멜기세덱에게 바친 것이라든가 야곱의 서원이라든가, 레위지파의 경우에 있어서 십일조에 대한 말은 구약에서 레위지파가 기업을 받지 않았으므로 그와 관련하여, 오늘날 십일조를 어떻게 바쳐라 라고 하나님이 말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렇게 말을 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나님이 십일조를 내라고 하는 것은 율법 안에서 내라고 말한 것이며, 하나님이 받으신 것 가운데 레위지파는 특별히 다른 일을 해서는 안되고 성막에 관한 일들을 해야만 하니까 하나님이 받은 것 중에서 일부를 주는 것이다. 레위지파에게 주기 위해서 받은 것이 아니고, 받은 것 중에서 일부를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율법에 의한 십일조 외에 아브라함이나 야곱이 십일조를 낸 것은 스스로 서원해서 낸 것인데, 하나님이 십일조를 내라고 명령했던 것은 아니다. 이렇게 십일조를 낸 것에 대해서 하나님이 보상해 주시겠다고 말하지 않았다. 율법에 의한 십일조는『하나님이 이렇게 잘 내면 보상을 해 주겠노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의도와 뜻을 알지 못하면 안된다.
신약시대는『십일조를 내지 않아도 된다』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도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그것은 결과론적으로 그렇게 된 것이며, 하나님의 뜻이 성취가 되었기 때문에 안 내는 것이다. 율법은 장차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라고 했다. 율법에 있는 모든 행사가 장차 오는 그림자 라는 것이다. 제사도 십일조도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이다. 장차 오는 좋은 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모든 인간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시고, 인간들을 죄 가운데서 구원해 주시는 것이다. 현재를 사는 사람에게는 2000여년 전에 오신 좋은 일인 것이다.
그림자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 마태복음 23장 23절에서 예수님이『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라고 하셨다. 예수님이 바리새인, 서기관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과거시제로 말을 하고 있는 것을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한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아주 작은 소득이 있는 것을 정성스럽게 십일조로 드리는 것을 말한다. 그렇게 정성스럽게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참 좋다 라는 것이다. 그렇게 십일조를 드렸는데, 정작 율법에서 정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다고 지적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율법에 의해서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잘 한 일인데, 율법 속에 담겨진 의와 인과 신은 버렸다고 지적을 하는 것이다.
율법은 행하면서 율법이 나타내고자 하는 좋은 일을 봐야하는데, 율법이 말해주는 장차 오는 좋은 일은 버렸다는 말이다. 그런 것을 버렸으니까 이제 앞으로는 율법도 잘 지키고, 의와 인과 신도 버리지 말아라 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을 잘 지켰으나 의와 인과 신은 버렸는데, 결국 십일조를 낼 때 의와 인과 신도 버리지 말았어야 되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앞으로 이렇게 살아라 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교회사람들이『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한다』라는 마태복음 23장 23절의 구절을 통해서 구약시대에도 했으니까 신약시대에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말씀은『앞으로 잘 해라』라고 한 것이 아니라, 바리새인들의 행위를 지적하는『과거의 시제』라는 것을 반드시 이해해야 된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율법 속에 있는 의와 인과 신에 대해서 잘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의는 심판을 의미한다. 율법 안에 있는 심판을 버렸다는 말이다. 율법은 죄를 깨닫기 위해서 준 것인데, 그것이 바로 심판이다.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죄가 있어서 심판받아야 한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모두 심판받아야 되는데, 이스라엘이 십일조를 하면서 스스로 의롭다 라고 생각한 것이다. 십일조를 하면서도 심판받아야 하는 것을 다 잊어버렸다 라는 것을 예수님이 지적하는 것이다. 인은 인애, 긍휼을 말하는데, 하나님이 자기 처소를 지키지 아니한 범죄한 천사들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를 멸하시지 않고 떠나서 이 세상에서 스스로 선을 이루어 보도록 기회와 긍휼을 주신 것이다. 율법과 관련해서는 하나님이 없는 자들, 하나님을 떠난 자들을 애굽으로 부터 건져내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기 위해서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율법을 주셨다. 하나님을 떠나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존재인데, 긍휼을 베풀어서 하나님을 떠난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기 위해서 율법을 주신 것이다. 신은 믿음이다.
율법 안에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구원하신다는 믿음이 있다. 사도바울이 율법은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이라는 표현을 했다.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율법을 주신 그 율법 속에는 인간들이 심판받을 수 밖에 없는 존재들인데, 하나님을 떠나서 세상에 와서 스스로 의를 이루어 보겠다고 하는 인간들에게 하나님이 긍휼을 베풀어서 해볼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이요, 그러나『율법으로는 의를 이룰 수 없는, 즉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들이지만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해 주시겠다는 약속과 믿음이 그 율법 안에 있다』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교회사람들은 십일조 안에 어디에 그런 것이 있는가 반문할지도 모른다. 십일조를 내는 것에 있어서,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의와 인과 신이 있다 라고 설명을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