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비가
헤르타 쾨니히 부인께 헌정함
이들은 헌데 누구인가, 말을 해다오, 이 유랑의 무리, 이들 외려
우리 자신보다 조금은 더 덧없는 자들, 좀체 만족이란 모르는 웬 의지가
누군가의, 그 누군가의 마음에 들어볼 양으로 일찍부터
절박하게 쥐어짜는 이들은? 만족은 고사하고 쥐어짜고
뒤틀다 휘어 감고 뒤흔들다
던졌다간 도로 받는구나. 기름이라도 바른 듯,
한층 더 매끈거리는 허공중에서 이들 떨어져 내리누나.
닳아 헤어진, 연신 뛰어 오르느라
가뜩이나 얄팍해진 양탄자 위로, 이 길 잃은
우주 안 양탄자 위로.
흡사 도회 변두리의 하늘이 거기 땅바닥에 상처라도 입힌 듯
반창고처럼 붙어있는.
거기 겨우 착지하는가 했더니,
곧추 일어서, 막 보여준 것은, ‘여기-서있음’의
첫 대문자..., 어느새 또 이 억세기 짝이 없는 장사들을
끊임없이 되돌아오는 그 손아귀, 장난삼아, 다시 굴려본다,
장사이던 아우구스트 대왕이 식탁 가에서
주석접시 하나 굴려보듯.
아아, 그리고 이 중심을 에워싸고
구경의 장미꽃,
활짝 피더니 꽃잎들 우수수 떨어지누나. 이
절굿공이, 이 암술을 에워싸고, 바로 제게서 피어나는
꽃가루에 수정되어, 다시금 무료함의 헛열매
맺도록 수태한, 자신의 따분함을 아예 의식조차 못하는
이 암술을 에워싸고, - 살짝 거짓 미소를 머금는
권태의 그 얇디얇은 피막 아래 반짝이면서.
저기, 저 시들은 주름투성이 역사,
폭삭 늙어, 지금은 겨우 북이나 두드릴 뿐인데,
제 억세디 억센 살가죽 속에 쭈그러져 들어간 형국이, 영락없이 이전엔
두 사내가 들어있던 듯, 그러다 한 사내는
일찌감치 묘지에 가 누워있고, 그자만이 살아남은 듯,
귀도 먹은데다 때때로 약간
정신도 오락가락, 홀로 남은 제 살가죽 속에.
헌데 젊디젊은 저 사나이, 마치 어느 목덜미와 수녀 사이에
아들인 양, 탄탄하고 옹골찬 게
근육과 순박함으로 충만하구나.
오 너희,
아직 자그마했던 웬 고통이
어느 오랜 회복기 중에
언젠가 장난감으로 얻었거니...
너, 퍽하고 부딪히며,
오직 열매들만 알고 있는 그 소리와 함께, 설익은 채
하루에도 수백 번씩 떨어져 내리누나, 함께 지어 오른 곡예동작의
그 나무에서(그 나무, 물살보다 빠르게, 불과 몇 분 동안에 봄, 여름 가을을 맞는데)-
떨어져 무덤가에 내리꽂히누나.
어쩌다, 반쯤 쉬는 틈에, 너의 얼굴엔 사랑 어린
표정이 막 떠오르려 한다, 건너편 여간해선 다정할 줄 모르는
너의 어머니를 향하여, 하지만 너의 몸뚱이가
말끔히 문대어 마멸시키는, 쑥스러워 미처 지어보지도 못한
그 얼굴 그 위에서 길을 잃는다...그러면 또 다시
사내는 뛰어오르라고 손뼉을 친다. 하면 웬 통증인지 끊임없이
뛰고 있는 너의 심장 언저리에서 미처 한번 뚜렷이 느껴지기도 전에
발바닥의 불타는 아픔이 그 통증을,
그 원인을 앞지르며, 재빨리 눈으로 내몰린
삭신의 눈물 두어 방울과 함께 온다.
그럼에도 맹목으로 띤,
저 미소......
천사여! 오오 받아라, 꺾어라 저 자잘한 꽃을 피우는 약초를.
화병 하나 장만하여 지켜 보존하라! 우리에겐 여전히 열리지 않은
저 환희들 가운데 그것을 세워둬라, 곱다란 유골단지 속에
꽂아 꽃문양으로 휘둥글린 명문을 새겨 찬미하라,
곡예사의 미소라고.
다음으로 너, 사랑스런 소녀여,
너, 더 없이 매혹적인 황홀감들이
소리 없이 뛰어 넘어버렸던 존재여. 어쩌면
너의 장식 술들이 너로 하여 행복할거나-,
아니, 그 어린
딴딴한 앞가슴 위로 초록색 빤짝이 비단이
한껏 호사하며 아쉬울 것 하나 없을거나.
너,
평형을 이루느라 흔들리는 모든 저울 위에 매번 달리
얹혀 지는 무심한 장터 과일이여,
뭇 눈길 속에 어깨들 사이에 드러난 채.
어디가, 오오 어디가 그곳이던가 - 나 마음속에 지니는데-
아직 그들이 오래도록 실현 해낼 수 없던 곳, 서로에게서
떨어지곤 하던 곳, 서로 겅중거리며 덤벼들기나 할 뿐, 제대로
짝짓기도 못하는 짐승들처럼-
무게 여전히 무거운 곳,
서툴게 헛도는 그들의
작대기에 끝에서 접시들이 여전히 비틀비틀
춤을 추는 곳은......
홀연 이 고달픈 ‘어디에도 아닌 곳’에서, 홀연
그 말할 수 없는 장소, 순수한 과소過少가
영문도 모르게 돌변하는 장소가-, 훌쩍
저 공허한 과잉 속으로 뛰어드는데.
여러 자릿수의 계산이
숫자 없이 나뉘어 꼭 맞아 떨어지는 곳이 아닌가.
광장들, 오오 파리의 광장이여, 끝없이 이어지는 쇼의 무대여,
모자 디자이너, 마담 라모르는
안식없는 대지의 행로들을, 그 끝 간데없는 리본 끈들을
말기도 감기도 하면서 새로이 리본들을
고안해 내는데, 주름 장식이며, 조화造花들, 모자 장식, 모조 과일 따위-, 모조리
가짜로 염색된 채로-싸구려
운명의 겨울모자들을 장식할 것들이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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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여, 행여 우리 모르는 어느 광장이 있었으면, 그리고 거기,
형용할 길 없는 양탄자 위에서라면, 사랑하는 이들은 보여 주리, 여기에선 저들이
결코 할 줄 아는 경지엔 이르지 못하는, 저들의 대담한,
심장 고동의 드높은 형상들을,
저들의 열락의 탑들을, 저들의
오랫동안, 바닥도 한 번 없던 곳에서, 다만 저희끼리 서로
기대어 버티던 사다리들을, 푸들푸들 진저리치며, - 실현 해내보이리,
빙 둘러 에워싼 구경꾼들 앞에서, 그 무수한 숨죽인 망자들 앞에서.
그러면 그들은 마지막 남은, 내내 아껴두었던,
내내 숨겨두었던. 우리는 아지 못하는, 영원토록
통용되는 그 행운의 동정을 던져주려나, 이제는 진정된
양탄자 위
마침내 진심으로 미소 짓는 그 한 쌍 앞에다?
* 릴케가 피카소의 이 그림<곡예사 가족>을 보고 이 글을 썼다고 하네요...
첫댓글 선미샘, 긴 글 워딩하느라 애쓰셨겠어요. 감사드려요.
잘 읽을께요.
"좀체 만족이란 모르는 웬 의지가
누군가의, 그 누군가의 마음에 들어볼 양으로 일찍부터
절박하게 쥐어짜는 이들은? " 누구일까요.
제 1비가의 도입부를 역시 제일 좋아하지만
비가의 중심축인 제 5비가의 형상성이
<곡예사 가족> 덕이군요.
사는 동안 가슴에 가장 먼저 감기는 게 비가 일 것 같습니다. 그것도 이렇게 긴 비가 연주를 들으면 공중이 양탄자인 곡예사의 슬픈 미소를 바라보면 전율로 소름이 돋아납니다. 소녀의 얼굴에 맹목의 표정이 막 살아나려 할 때 절정의 웃음이 활짝 피어날 때 우리들의 안녕은 어디에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