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종대왕의 무덤인 영릉을 둘러보고 내려오는 길에서 옆으로 나있는 작은 돌들이 깔린 솔향 가득한
오솔길을 올라 산등성이 하나를 넘으면 효종대왕과 만나게 된다. 정확히는 효종대왕과 그의 비인
인선왕후가 묻혀있는 곳이다. 효종대왕과 세종대왕의 능의 경계지점에서 700여m를 걸으면 만날수있는데
그 긴 산길을 걷는 동안 사람이라곤 하나도 만날 수 없었다.

효종대왕의 영릉으로 가기전 갈림길 벤치에 잠깐 앉아 가을향기를 맡고 있었는데, 언제 왔는지 기척도 없이
능역의 울타리 기둥에 청개구리 한마리가 살포시 앉아 있었다. 잠시 청개구리와 무언의 대화를 나누었다.
500여년을 이곳에서 대를 이어 두분의 왕의 묘를 지키는 신령스런 영물이라고 말한다.

숲속의 한적한 길을 혼자 걷는다. 들리는 것이라곤 딱딱딱 소리를 내며 나무에 구멍을 뚫고 있는
딱따구리와 급히 어디론가 갈길을 서두르는 다람쥐, 울창한 능역을 호위하는 수림뿐이다.
본시 능의 나무는 모두 왕가의 소유였기에 함부로 베거나 훼손할 수 없다.
그래서 이렇게 완벽한 청정하고 아름다운 숲이 지금까지 우리에게 전해진 것이다.


호젓한 숲속길을 홀로 걸으면서 선조와의 조우를 기대해 본다.
그것도 만인지상이었던 절대권력을 가진 군주의 무덤을 가는 길이니.
세계문화유산이자 우리의 소중한 보물같은 전설이 숨쉬는 그곳으로.
걷는 내내 사극 추노에서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이야기도 생각해보고 역사속에서의 그의 일대기를
떠올려본다. 청에 볼모로 잡혀가서 국내로 돌아와 다시 북벌을 추진했던 왕. 그의 인생길도 파란만장했구나.
700m에 이르는 길을 산책하듯 가벼운 발걸음으로 걸으니 10여분도 못가 효종의 능침이 보인다.

드디어 만나게 된 효종대왕의 영릉. 세종대왕의 영릉보다 다소 소박한 규모이다.
홍살문에서 바로 정자각이 보이고 비교적 낮은 언덕에 왕릉이 보인다.
홍살문을 지나자마자 바로 이어지는 참도. 높은 신도는 고인이 된 왕과 왕비의 혼령만이 걸을 수 있는 길이다.
민초들은 신성한 능역에서 오른쪽의 길로 출입해야한다. 조선의 17대 왕이었던 효종,
임진왜란이 끝나고 정유재란과 병자호란 등 한창 주변 강대국들의 침략으로 정신없던 시대,
황폐하고 힘들던 때의 왕이었으니 정치면에서나 경제면에서나 참 난국의 군주였다.

홍살문을 지나 어도를 따라 영릉에 한발짝 가까이 다가선다.
능역에는 손자와 함께 나들이 온 한 가족이 조용한 영릉의 고요함을 깨운다.

홍살문을 지나면 능역의 경계를 알려주는 금천교가 있다.
어구라 불리는데, 금천교는 임금의 혼령이 머무는 신성한 지역임을 알려주는 것이다.
이 금천교는 1930년대까지는 남아있다가 그 이후에 훼손되어 흔적없이 버려져있다
비로소 2008년에야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참도를 따라 바로 왕의 능앞에 있는 정자각으로 올라갈 수 없다. 오른쪽으로 돌아가서 들어가야 한다.
최고의 권위를 지닌 왕의 사후 보금자리이기에 그만큼 최우의 예우와 함께 신성시는 기본이었다.
정자각 오른쪽에는 조선의 모든 왕릉의 그것처럼 왕의 비문을 새긴 비각이 자리한다.
아래에서도 뚜렷하게 두기의 무덤이 위아래로 나란히 있음을 알 수 있다.

참도를 걷다가 바라본 홍살문의 모습. 물론 왕이라지만 이런 거대한 능역을 조성하는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노역과 수많은 자재들이 들었을지는 상상에 맡긴다.

정자각에서 잠시 효종부부의 넋을 기리는 향을 피워주고 살짝 눈감아 경의를 표한후에
효종대왕과 인선왕후의 능을 보기위해 잔디밭 사이로 난 길을 따라 걷는다.

조금 오르니 인선왕후와 효종대왕의 능으로 오르는 잔디밭길이 보인다.
봉긋하게 호빵처럼 솟아오른 능의 봉분과 그 주위를 둘러싼 석물들이 보인다.
앞뒤로 나란히 있으니 죽어서는 함께 하지 못한듯한 느낌이 든다. 옆에 나란히 있었으면 더 다정해 보일텐데.

능침에서 바라본 인선왕후의 묘역의 석물들.
석양과 석호, 석마 등이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드러낸채 오늘도 신성한 무덤의 수호신으로의 역할을
다해내고 있다. 조선의 17대 군주인 효종. 그는 광해군을 몰아내고 서인을 등에 업은채 왕권을 거머쥔
인조의 둘째 아들로 세상에 모습을 보였다. 청나라에게 무참하게 무너지고 군신의 예를 맺은 병자호란을
겪은 후 형이자 세자였던 소현과 함께 머나먼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가 8년의 세월을 보살펴줄이
하나없는 이국땅에서 버텼다. 그는 오랑캐라고 여겼던 적국 청나라에서 씻을 수 없는
수치와 굴욕을 당했는데, 형인 소현세자가 고국에 돌아온지 두달만에 급사( 역시 독살설)하자
이를 대신하여 봉림대군에서 왕위에 오른 후에는 숙적 청나라를 정벌하기 위한 일단의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그의 거대한 북벌계획도 실행에 옮기기도 전에 41세라는 이른나이에 승하해 꿈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조선의 왕들에게서 흔히 볼수있는 독살이 아닐런지.
당시는 정치판이 대신들의 일언일행으로 좌지우지 되었으니까.


인선왕후의 능에는 곡장이 없다.
뒤에 있는 효종대왕의 능에 곡장이 있으니 하나의 곡장에 두분이 포근히 이불을 두르고 잠든듯하다.
효종이 먼저 승하하고 뒤이어 왕후도 세상을 등지니 이곳에 조선 최초의 동원상하릉을 만들었다.
효종의 능의 양식과 비슷하지만 난간석 아래 받침돌이 감싸고 있는것이 다른점이다.
왠지 왕비의 능이라고 생각하니 여성적인 모습으로 보이는것 같기도 하다.

효종대왕의 능의 모습. 왜 왕릉을 지키고 있는 키큰 소나무들은 일정한 방향으로 휘어져있을까.
능의 앞에는 여느 왕릉처럼 높은 봉우리에 자리잡지 않고 야트막한 잔디위에 자리한다.
인선왕후의 무덤과는 일직선이 아니라 살짝 틀어져 있는데, 풍수적인 영향으로 그런 각도를 보이는것같다.
원래 효종의 무덤은 조선왕조의 최대의 왕릉군인 구리 동구릉의 태조 이성계의 무덤인 건원릉 서쪽에
있었는데, 능의 병풍석에 틈이 생긴다하여 당대 최대의 길지라 하는 세종대왕의 영릉 근처로 이장해왔다.


효종대왕의 능에 있는 석물들은 다른 왕릉의 그것들보다 다소 강인하고 크게 만들었다. 비록 오랫동안
재위하지는 않았지만 청에 대한 굳건한 기개와 북벌의지를 다졌던 웅대한 야망을 가졌던 왕의 모습을
표현했던듯하다. 그 당시 그의 뜻대로 북벌이 이루어졌다면 과연 조선의 운명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효종대왕의 능앞에서 바라본 인선왕후의 능침의 모습. 넓고 고요한 울창한 숲으로 둘러쌓인 영릉에는
조선 중기 정세의 변혁기를 살다간 왕과 왕비가 서로 앞뒤로 누운채 시원하게 뚫린 가을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하늘에서 그들도 후대의 사람들에게 타국에 굴하지 말고 웅대하고 강건한 기개를 품고 살아갈것을 주문했다.

효종대왕과 인선왕후의 조우를 끝내고 아래로 내려와 조용히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다.
말없이 인자한 웃음만을 머금은 채 손짓을 한다.
한마리 학이 숲속 어디선가 날아와 한바퀴 돌다가 이내 먼하늘로 사라져간다.

효종대왕의 영릉을 구경하고 내려오는 길. 역시나 찾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인지 조용하다.
아니 조금은 쓸쓸하고 썰렁한 느낌도 난다. 옆동산의 널직한 터에 자리한 세종대왕의 영릉이
소풍을 나온 아이들과 단체관람객들로 떠들석한 분위기인것과는 사뭇 다르다.

조선왕조의 다른 능의 재실들이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으로 많이 소실되고 황폐되었던것과는
달리 이곳 효종대왕의 재실은 원형이 고스란히 남아있을 정도로 보존상태가 양호해 역사적인 가치가
상당하다고 한다. 멀리서 보면 재실이라기 보다는 고관대작의 양반댁같은 모습이다.

영릉으로 들어가는 입구.
세종대왕의 영릉앞에는 매점과 화장실, 넓은 주차장이 있지만 이곳에는 다소 좁은 주차장과 능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문이 있다. 세종대왕의 영릉으로 돌아가는 길은 조금 언덕이 있는데, 10여분 정도 걸린다.
효종의 영릉에서 관람을 시작해 세종의 영릉을 거쳐 나오는 코스를 걷는다면 2시간 정도는 잡아야겠다.
곳곳에 새소리 가득한 솔향 가득한 숲속 벤치가 있으니 잠시 쉬어가면서 가을의 정취를 느껴보자.
첫댓글 역사 공부 잘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즐거운 일요일 보내세요~~~
해리슨포들님 글은 추가 자료를 검색할 필요 없이 글 하나로 모든 자료가 통달되기에 항상 좋은거 같아요.
감사합니다. 10월도 어느덧 중순으로 가고있네요~ 즐건 한주 보내시구요! 한우도 해야하는데 그쪽은 맛을 잘 몰라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