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장 8-14절
제가 월요일마다 한국기독교연구소라는 곳에서 일을 합니다. 김준우 목사님께서 소장님으로 계시는데 번역하고 교정하시는 일을 빼고는 나머지 모든 일을 제가 합니다. 초창기 6-7년 저희 교회 창립자셨던 홍정수 목사님께서 소장을 맡아
일하셨었고 미국으로 가신 이후에는 지금까지 김준우 소장님께서 일하고 계십니다. 1990년대 초부터 미국
중심으로 역사적 예수 연구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가 진행되어 지난 20여 년 동안 이것에 대한 결과물로
책이 100여권이 나왔는데 소장님께서 연구소를 운영해 오시면서 이것에 대한 연구결과물 거의 다를 번역해
내셨습니다. 최근에는 퀴어 신학에 대한 관심이 확장되셔서 이와 관련된 서적들에 푹 빠져 계셔요. 그 연세에 대단한 열정이십니다.
그런데 참 신기한건요.
이분이 학자시다보니 셈이 흐리세요. 책을 내면 돈받고 팔아야되는데 그냥 막주세요. 저희 교회 행사한다고 하니까 70여권의 책을 기증해 주셨지요. 예수살기 행사한다고 하면 2백권씩
3백권씩 보내셔요. 나누어 주라구요. 얼마 전에
정동 카톨릭 회관에서 동성애와 관련된 행사를 한다고 하니까 이와 관련된 책을 무료로 나누어 주셨어요. 책 한권 내는데 번역비부터 적지 않은 비용이 듭니다. 그런데 책 나오면 여기 저기 다 퍼주세요. 목사님은 누군가라도 이
책을 읽고 기독교를 제대로 알고 사셨으면 하는 바램이 있는거예요. 최근에는 연구소 30주년 기념이라고 후원자 약 400명 중에 약 200명에게 3권씩 공짜로 책을 선물로 보내주셨어요. 찍을때 찍더라도 창고에 쌓여 있으면 뭐하냐며 창고 대 방출을 하셨어요. 어느
책하나 막만든 책들 하나도 없어요. 그 책 제대로 읽으면 세계관이 뒤집어지는 책들이예요.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요. 이렇게 하면 산술적으로보면 망해야 돼요. 제가 8년동안 일하면서 올해 책을 젤 많이 퍼주셨어요. 그런데 올해 최고액을 결산했어요. 올해부터 동성애 관련 책을 더
내시게 되었는데 동성애 관련책은 동성애에 반대하는 사람들 시각을 트여주기 위해서라기 보다는(그런 측면도
있겠지만) 동성애 자녀를 두었거나 동성애자들이 가지고 있을 죄책감, 죄의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라는 측면에서 더 적극적으로 내시는데 그 책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굵직 굵직한 후원자들이 더 생겼어요. 계속해서
주는데 더 생겨요. 없어져야하는데 망해야 하는데 문닫아야 하는데 더 풍성해져요.
더 중요한게 있어요. 퍼준건
연초부터예요. 후원금이 늘어난 건 중반 이후 부터예요. 늘어나니까
퍼준게 아니라는 거예요. 이제는 살만하고 넉넉해지고 그래서 이제는 퍼줘도 되겠구나 싶어서 퍼준게 아니라는
거예요. 정말 신기해요. “제가 목사님을 보면 가치를 팔고
가치를 퍼주시는 것 같아요” 계속 퍼주는데 고갈되지 않아요. 올 한해 연구소를 운영하면서 얻은 삶의 교훈은 좋은 건, 의미있는 건, 사람의 가슴을 뛰게 하는 건 나누면 나눌수록 그 자체에
파워가 있다는 겁니다. 주면 없어지죠. 고갈되죠. 그래서 망하는게 평범한 상식이예요. 그런 일상을 뒤집는 역설적인
삶안에 삶의 신비가 있을때가 있습니다.
하비콕스의 <시장이
된 신>이라는 책을 보면 현대 자본주의는 <몸집을 키우지 않으면 죽는다>는 월가의 정신을 그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거대해지고 몸집을 키우고 성장해야 잘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먹고 끊임없이 채우고 벌고 키우고 성장하고 늘 발전시켜나간다는 겁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실제로
그렇게 살아가요.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현대인들의 대부분의 병은 잘 먹어서 생긴 병들이라는 겁니다. 현대인들은 결핵 이런 거 잘 안걸립니다. 고혈압, 당뇨, 심혈관계 질환 대체적으로 많이 먹고 기름진 것들 많이 먹고 안움직이고 그래서 생기는 병들이라는 겁니다. 그것도 나이를 가리지 않아요. 옛날에는 어른들만 그런 병에 걸렸기에 성인병이라 했지만 요즘은 아이들도 고혈압, 당뇨 이런 병들에 걸리다 보면 현대인의 병이라 이름이 바뀌었어요. 7-8살짜리도 당뇨병에 걸려요. 엄마가 일찍 떠나셨어요. 아빠하고 아들이 사는데 요리를 못하니까 매일 밤 치킨이나 인스턴트 식품 배달시켜 먹는거예요. 달달한데다가 기름진 음식을 거의 매일같이 먹으니까 최소 40-50대에
생겨야하는 당뇨병이 7-8살자리 아이에게 생겨요. 그러면
이런 병을 줄일 수 있는 건 적게 먹고 많이 움직이는 거죠.
단식원에 갔더니 한 열흘에 한번 정도 단식해 주래요. 그러면 사람몸이 훨씬 건강해진데요. 워낙에 사람들이 음식을 과잉섭취하다보니
영양도 과잉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하루 정도 단식을 하면 몸에 음식이 안들어오니 몸이 살기 위해서 몸에서
영양분을 섭취하기 시작하는데 한쪽으로 쏠려있는 영양분의 밸런스를 맞춰준다는 거예요. 우리가 먹고 살아가는
삶에 있어서 보통 하루에 두세끼 먹고 살아가잖아요. 그것의 보통치가 있지요. 그 보통치에서 더 먹는 것과 덜먹는 것과 비교해 봤을 때 덜 먹는 것이 인간의 몸을 훨씬 더 건강하게 한다는
겁니다. 조금 부족하다 생각될 대 숟가락을 놓는 거죠.
사람 관계도 마찬가진 거 같애요. 우리가 사랑이란
명분으로 내안에 기대와 뭔가의 생각이 많으면 많을수록 관계가 잘 안풀려요. 제가 지금까지 제 딸에게
제안한 것 중에 딸이 한 건 거의 없어요. 어디 어디 강연좀 가봐라,
좋은 캠프가 있는데 거기 가봐라. 어느 제안하나 시도 해 본게 없어요. 놀러가는 거 빼구요. 그런데 그냥
놔두니까 자기가 하고 싶은 것 가더라구요. 그리고 자기가 하고 싶어서 하니까 더 좋아하고 행복해 해요. 제가 요구하는게 없으면 없을수록 관계는 더 좋아요. 비우고 내려놓으며 뭔가를 많이 행하고 이루어서 누리는 것보다 더 생복할때가 있어요. 삶의 역설안에
감추어진 신비들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누가복음의 성탄이야기의 배경을 장식하는 인물들은 다들 하나같이 전혀 삶에서 주목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예요. 등장하는 인물들이 보면 마리아와 엘리사벳 여인들,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 시므온이라는 나이든 노인들, 안나라는 여자노인까지
누가 이런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줍니까? 여인도 그냥 여인이 아니라 애기 못낳는 여인들, 농부보다도 더 하찮은 계층에 속했던 목자들, 연세 많이 드신 노인들의 이야기까지. 정치판에서 누가 한마디 하면 다 난리치지만 생선가게에서
생선파는 아저씨 이야기, 떡볶이 순대파는 아줌마의 이야기 누가 관심가져요. 다 무시하고 말지. 제가 처음에 교회 인테리어 공사하러 왔을 때 작업복 입고 일하고
있으니까 무슨 말을 해도 귀뚱으로도 안들어요. 이곳에 드나드는 분들이 자꾸 누굴 찾아요. 목사를 찾아요. 제가 목사라고 하니까 정색하면서 대하는 태도가 달라져요. 평범한 노동자, 목자, 농민들, 나이든 어르신들 노인네 잔소리만한다고 하면서 귀뚱으로도 안들어요.
그런데요. 하찮고
시시하고 별볼일 없는 사람들안에서 예수 탄생의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하찮고 시시하고 별볼일 없다고 여기는
사람들 안에 진짜 삶의 이야기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잘나고 잘나가고 뭔가 있어보이고 화려하고
반듯반듯한 그런 곳에서 진짜를 찾아 다니지만 그래서 나에게 불편하고 눈에 거슬리고 그런 것들을 당연지사
무시하고 살아가지만 실상 하느님은 우리가 생각하고 기대하는 곳과는 전혀 다른 역설적인 방향과 방식으로 당신의 일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저희가 잘가는 음식점 중에 한곳이 능곡시장안에 갈비탕 집에예요. 언제 시간되면 꼭 가보셔요. 아주머니가 살아있어요. 일단 갈비탕이 깔끔하구요. 쌉니다.
갈비탕을 누런 내를 없애기 위해 별의 별 것 들을 다 넣는데요. 밥도 최고입니다. 저희와 함께 공사하셨던 분들이 여기 저기 다니다가 그곳 밥맛을 보더니 일 끝날 때까지 그곳에 정착하셨어요. 거기만 가요. 요즘도 가끔식 그곳에 가는데 아줌마가 진국이세요. 때때로 먹어보라고 그 즉석에서 반찬을 새롭게 만들어서 갖다주시기도 하시고 이런 저런 말동무 해주시고 고향에
간 그런 느낌이예요. 잘났다고 하는 그 수없이 많은 곳에서 우리는 사람냄새를 맡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시장이 점점 죽어 사람들도 많이 드나들지도 않는 재래시장 한구석, 더
이상 뭔가가 나올 것 같지 않은 시장 한 모퉁이에 여전히 사람냄새를 맡을 수 있는 작은 공간이 살아숨쉬고 있어요.
우리가 진심으로 원하는 진짜 삶은 어쩌면 우리가 진짜라고
착각하며 살아가는 그것들의 역설적인 방식안에 숨어있는지 모릅니다. 대강절 우리는 서정윤 시인의 홀로서기에
나오는 글귀처럼 <기다림은 만남을 목적으로 하지 않아도> 우리는
삶에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기다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기다리는 그 무엇이 때로는 우리가 매우 힘들어하고
춥고 배고프고 불편하고 싫어하는 방식을 통해 다가올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일상의 평범한 삶의 역설안에
담긴 구원의 신비를 향해 우리의 몸과 마음의 문이 활짝 열리는 대강절 이루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