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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당의 北關宦遊記, 北征錄 연구
Ⅰ. 緖 論
Ⅱ. 北征錄 연구
1. 함경도 병영과 北評事
2. 北路의 망명객
3. 弓馬之鄕의 妓女馳馬
4. 崇武의 땅, 함경도
Ⅲ. 結 論
Ⅰ. 緖 論
16, 7세기 조선은 임진왜란(壬辰倭亂), 정묘호란(丁卯胡亂), 병자호란(丙子胡亂) 등의 전란으로 외세에 대해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은 여러 차례 국제 정세의 소용돌이 속에서 직접적인 무력의 피해국이 되면서 17세기 후반 들어 정신적 혼란기를 거쳐 자강의식(自强意識)이 높아졌으며, 자력으로 국방체제를 갖추려는 노력을 하였다. 17세기 후반 이후 조선은 직접적인 외세의 침입을 받지는 않았지만 1636년 청(靑)의 건국과 더불어 더 이상 중국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였으므로 조선으로서는 청과 접하고 있는 북쪽 변두리인 함경도 지역에 대해 관심이 고조될 수밖에 없었다.
함경도는 지리적으로 조선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마천령(摩天嶺)을 기준으로 남북으로 구분된다. 북쪽을 북관(北關), 남쪽을 남관(南關)이라 하였는데 지형, 산업, 풍속 등에 큰 차이가 있어 조선에서는 두 지역을 확연히 구분하여 인식하고 있었다. 북관은 일찍부터 상업이 발달했던 남관과 달리 매우 낙후된 지역으로 구분되었다. 함경도는 지리적으로 매우 낙후된 변방임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는 지리적 특성에 힘입어 전통적으로 좋은 말이 많이 생산되어 ‘궁마지향(弓馬之鄕)’으로 불리기도 하였으며, 국경지역의 잦은 무력 충돌로 인하여 무가 숭상되는 ‘상무지지(尙武之地)’의 고장으로 불리었다. 또 비록 험준한 변방이었지만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출생지였던 함경도인지라 풍패지향(豐沛之鄕)의 자부심이 높았던 곳이기도 하다.
조선은 건국 초기를 거쳐 도읍이 한양으로 옮겨지고 북쪽 변방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다가 청나라의 흥기와 더불어 명나라의 쇠퇴와 같은 급변하는 국제정세의 변화 속에서 함경도에 대한 인식을 달리하게 되었다. 1664년 함경도에는 다시 병마평사가 파견되었는데, 병마평사는 절도사를 보좌하는 임무 외에도 관북지역의 문교를 담당하므로, 반드시 문재(文才)를 인정받는 인물을 선발한 것도 다른 변방지역에 비해 함경도가 중요한 지역으로 자리매김 되었다는 반증일 것이다. 흔히 함경도 병마평사(兵馬評事)는 함경도사나 북평사(北評事)로 불리었다.
서계 박세당(西溪 朴世堂: 1629~1703)은 비교적 늦은 나이인 32세 때 증광시(增廣試)에 장원하여 성균관 전적(典籍)을 시작으로 예조와 병조 좌랑, 정언, 지평, 병조 정랑을 거쳐 강도(江都)와 해서(海西)의 어사(御使)로 다녀온 뒤 부수찬(副修撰)이 되어 문예관(問禮官)으로 의주(義州)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38세가 되던 1666년(현종7) 8월 함경도 병마평사(兵馬評事)가 되어 10월 경성(鏡城)에 부임하여 이듬해 1667년(현종8) 4월에 수찬(修撰)이 되어 돌아왔다. 이때 지은 한시(漢詩) 44제(題) 51수(首)를 묶어 「북정록(北征錄)」이라 하였다. 이후 서계는 제수된 대부분의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수락산 자락인 석천동(石泉洞)에 은거하게 된다.
「북정록」에는 당시 서계가 함경도 병마평사로 가면서 직무와 새로운 환경, 풍습에 대한 호기심을 볼 수 있고, 그에 아울러 부임하는 함경도 지역에 대한 애정이 드러나는 것을 알 수 있다. 본 연구는 아직까지 「북정록」 51首의 한시를 중심으로 한 연구결과가 한 편도 없음을 인식하고, 그 안타까움을 조금이나마 덜어보고자 하는 욕심에서 시작되었다. 이에 「북정록」을 기저로 서계의 시 세계 일부를 파악하고자 한다.
Ⅱ. 北征錄 연구
1. 함경도 병영과 북평사(北評事)
병마평사(兵馬評事)는 조선시대 양계(兩界) 지방에 설치한 종6품의 무관직이었으나 보통은 문사(文士)를 파견하여 무신 수령과 절제사, 만호 등 무신을 견제하고 무신 수령이나 군사지휘관을 규찰하는 데 목적이 있었던 관직이다. 병마평사는 보통 평사라고 약칭하여 함경도와 강원도 일부지역을 아우르는 동계(東界)와 평안도를 일컫는 서계(西界)에만 두었다. 1455년(세조1) 처음으로 함경도에 병마평사를 두었으며 1462년에는 평안도에도 병마평사를 두었으나 1623년(광해군15)에 폐지되고, 함경도 병마평사는 1637년(인조15)에 폐지되었다가 1664년(현종5)에 다시 설치하였다.
함경도 병마평사가 다시 설치되고 2년 뒤인 1666년 서계가 부임하게 되는데 서계에게 북평사의 부임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서계는 매우 짧은 기간 관직에 있었는데, 실제 이때 6개월간 함경도에 평사로 나간 것을 끝으로 실질적인 벼슬을 하지 않게 된다. 「북정록」에는 당시의 심정이 절제되고 정제된 가운데에서도 오롯이 나타나 있으며, 서계의 시세계를 엿볼 수 있다.
雨蕭蕭 비는 부슬부슬
煙漠漠 연기는 자욱하네.
坐困郵館陋 앉기도 괴로운 우관의 누추함이여!
行愁關路惡 여행하는 시름, 관로가 험하도다.
白山靑海三千里 백두산과 청해 삼천 리
不怕雨來怕雪作 비는 두렵지 않으나 눈 내릴까 두렵네.
<풍전역에서 비에 막히다[豐田驛阻雨]>는 고시체인 3, 5, 7언을 본떠 쓴 시로 앞으로의 여정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예고편이라 할 수 있다. 서계는 1666년(현종7) 겨울에 북평사로 가게 되었다. 양주에서 출발하여 막 북로로 들어서는데 예사롭지 않는 풍경과 날씨에 걱정이 앞선다. 더 북쪽에 있는 함경도의 임소에 가야하는 나그네로서는 막막할 수밖에 없다. 부슬부슬 내리는 비가 금방이라도 눈으로 이어지는 추운 날씨가 될까 걱정이다. 며칠간의 여독으로 한껏 고립되고 고단한 심사인데, 우중충한 날씨가 북로를 향하는 마음에 큰 무게로 실린다. 서계는 노곤한 마음을 잊으려는 듯 절구도 율시도 아닌 고시체의 형식에 장난스럽게 자수의 변화까지 주며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다.
風吹邊夢飛靑海 바람 불어 변방 꿈 청해에 날리고
月引鄕心墮白山 달 당겨 고향 가고픈 마음 백두산에 떨어지네.
惆悵龍沙久戍客 서글퍼라, 용사에 오랫동안 수자리 살던 나그네
幾人能保少年顏 몇이나 소년 얼굴을 지켰던고.
막상 북쪽 변두리에 와보니 왈가왈부 떠들어 대는 유생이 부끄럽다. 남들은 대장부라고 하지만 대장부라면 한 번쯤은 전쟁터에서 공도 세워 봐야할 한다는 의미이다. 함경도가 가지는 지역적 특색으로 인해 사대부로 태어나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던 무인에 대한 경외가 은연중에 드러나는 부분이다. 이곳에서 수자리 사는 많은 장정들은 백발이 되어 고향에 두고 온 아내를 걱정하는 처지임을 알 수 있다. 처음 수자리 올 때는 돌아갈 기약이 있었으나 막상 기약한 날에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을 표현하고 있다. ‘빈방에서 홀로 홍안을 거두고 늙어가는 아내’를 통해 함경도의 실정을 표현하고 있다. <경성에서[鏡城]>에서 병사들의 기막힌 상황이 안타까움으로 극대화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서계는 북평사로서 국경 부근의 변방을 감독하게 되는데, 새로운 곳에 도착할 때마다 제시(題詩)하였다. 그 시들의 경로를 보면 곡구역, 귀문관, 경성, 부령, 무산, 방원진, 종성, 훈융진, 무이진, 서수라, 무수령까지인데 모두 국경 부근의 지명으로 아주 험난한 곳임을 알 수 있다. 서계가 북평사로 함경도에 있었던 기간은 1666년 겨울부터 1667년 봄까지였는데, 조선왕조실록 현종7년 11월 23일의 기사를 보면 함경도에 대한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장령 김징이 아뢰기를,
“함경도의 굶주린 백성들은 이미 가을부터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지고 있으니, 구휼하는 대책을 조금도 늦추어서는 안 됩니다. 금년 전세(田稅)를 모두 탕감해 준다면 백성들이 실질적인 혜택을 받을 것입니다.”
하니, 좌의정 홍명하가 아뢰기를,
“북로가 비록 흉년이 들었다고는 하나 여러 고을에서 재해를 입은 것이 경중의 차이가 없지 않을 터이니, 일률적으로 모두 탕감해 주는 것은 부당할 듯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안변(安邊)⋅덕원(德源)⋅문천(文川)⋅고원(高原)⋅홍원(洪原)⋅이성(利城)⋅경성(鏡城)⋅부령(富寧)⋅경흥(慶興) 등 아홉 고을이 더욱 심하게 재해를 입었다 하니, 전세를 전부 탕감해 주도록 하라.”하였다.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흉년이든 조선의 상황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특히 평야가 적고 토양이 좋지 않았던 북로의 흉년은 다른 지역에 비해 월등히 많은 피해를 준 것을 알 수 있다. 경성(鏡城)과 부령(富寧)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함경도의 북방은 흉년과 더불어 군사들에게 줄 군복까지 부족한 상황이다. 1666년(현종 7) 8월의 기사에 의하면 감사(監司) 민정중(閔鼎重, 1628~1692)의 계청에 따라 평안 병영에 비축된 면포 15동(同)을 함경도로 수송하여 굶주리고 추위에 떠는 군사를 구휼하라고 명하였다.
蕭條窮塞外 쓸쓸하고 궁벽한 변방 밖
亦自有風煙 자못 풍연은 있더라.
河柳紅梢細 강가 버들 붉은 가지 가늘고
巖松翠蓋圓 바위 위 소나무 푸른 일산 둥글더라.
雲生當面石 구름은 눈 앞 돌에서 생기고
馬渡斷腸泉 말은 단장천 건너더라.
何況寒霜重 더군다나 찬서리 짙게 내려
嚴威正折綿 혹독하고 엄한 추위, 솜도 꺾음이랴.
<변방으로 가던 길에 부령을 지나면서[行邊過富寧]>의 두 번째 시이다. 어느 곳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빼어난 경치지만 부령의 추위는 솜옷마저 꺾을 정도로 무색하다. 변방에서의 고단한 생활을 절경과 대비되는 찬서리를 통해 드러내고 있다. 「북정록」의 시는 함경도 병마평사의 직무에 따라 계속 변방으로 자리를 이동하고 있다.
공간의 이동에 따라 서계의 시선도 옮겨진다. 서계가 본 함경도의 생활은 수자리 사는 장정과 병영을 관할하는 무인들의 노고에 있음을 알게 되고, 그 수고로움은 곧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에 사무치게 된다는 것도 알게 된다. 두만강(豆滿江) 사이로 중국과 접해 있는 국경 요충지인 무산을 가기 위해 그 길목에서 쓴 <무산(茂山)으로 가는 중에[茂山路中]>를 보면,
邊地風霜苦 변방은 바람과 서리가 몹시 모질고
山行谿谷深 산길 가는 계곡 깊더라.
直煙孤戍暮직연(直煙)에 외로운 수자리 저물고
橫日半峯陰 기우는 해 반쯤 봉우리에 그늘졌네.
爲客泫雙淚 나그네 두 눈에서 눈물 글썽거리고
思鄕折寸心 고향 생각, 촌심이 꺾이네.
從軍本少樂 종군은 본디 거움 적은데
況乃聽笳吟 하물며 풀피리 들음이랴.
깊은 변방일수록 수자리의 외로움은 더해간다. 이방객이야 한 번 쯤 다녀갈 만한 승경이지만 기약 없이 병영을 지켜야 하는 병졸들에게 함경도는 하릴없이 곧게 올라가는 봉수대(烽燧臺) 연기만 봐도 눈물이 난다. 더하여 서글픈 풀피리 소리라도 들릴라치면 명령에 죽고 살아야 한다는 군인의 기상(氣象)은 한순간에 꺾일 수밖에 없다. 무산에서 직무를 마치고 회령으로 가는 도중에 쓴 <회령으로 가는 길에[會寧路中]>에서도 서계는 종군하는 병사와 같은 심정으로 잠시나마 고향을 떠나온 자신의 심사를 읊는다. 변방에서의 외로운 심사는 갈잎소리와 술잔이 더 격하게 요동치게 한다.
從軍古塞下 종군은 옛 변방 아래에서
倚劍望燕臺 장검에 기대어 연대(燕臺)를 바라보네.
漢壘連雲盡 한루(漢壘)는 구름에 이어져 다했는데
胡山隔水回 호산(胡山) 사이 물 돌아오네.
刷風旗脚展 바람에 쓸리는 깃발 펼쳐지고
刺月戟枝開 달 찌르는 창가지 열려 있네.
不斷思鄕淚 고향 생각 끝없는 눈물
迎笳落酒杯 갈잎피리 들으며 술잔 놓네.
북쪽 변방을 시찰하다 보니 국경을 두고 숱한 전쟁을 했던 지난 역사가 눈에 선하다. 1구부터 4구까지는 웅장한 자연과 그 속에 숨겨진 무인(武人)의 역사를 반추하고 있다. 춘추시대 제후국이면서 전국시대 칠웅(七雄) 가운데 하나였던 연(燕, 기원전1046~222)나라는 인재를 모으기 위해 연대(燕臺)를 세워 조선의 강역까지 위세를 떨쳤고, 중국 역사상 가장 강대했던 한(漢, 기원전 206~220)나라는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보루를 구축하였으나 이마저 역사 저편에 묻혀 잠잠하다. 시간과 함께 스러져 북쪽의 자연이 되어버린 무인의 역사를 시간으로 되살리고 있는 것이다.
<회령으로 가는 길에>에서의 함경도 변방은 북쪽 국경이지만 혼란과 전쟁의 시기를 거쳐 지금은 잠정적이나마 평화가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국경의 특성상 항상 방어와 침략이 수시로 이루어지는 점은 묵과할 수는 없다. 5구와 6구의 “바람에 쓸리는 깃발 펼쳐지고, 달 찌르는 창가지 열려 있네”를 통해 여전히 이곳은 전쟁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곳임을 드러낸다. 즉 국경이 있는 함경도가 준전시체제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유가 된다. 여전히 위용을 드러내는 군대의 깃발은 펄럭이고 하늘을 찌를 듯 갈라진 창끝은 함경도가 다른 지역과 엄연히 구분되는 표지이기도 하다.
계속하여 방원진(防垣鎭), 종성(鍾城), 훈융진(訓戎鎭) 북쪽으로의 북평사 직무는 함경도의 현실을 직시하고, 지명마다 제시(題詩)하여 함경도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고 있다. <서수라(西水羅)>의 1, 2구를 보면, “오면서 흰 풀 누런 모래땅 지나, 가면서 하늘 끝 바다 다한 머리에 이르렀네[來經白草黃沙地 行到天窮海盡頭]”라고 하여 저 사막과 맞닿은 북쪽 서수라의 특색을 잘 보여주고 있다. <무수령[無愁嶺]>에서는 함경도의 험한 지형을 두고 도리어 농담조의 가벼운 심사를 표현하고 있다.
此路當年誰鑿開 이 길 당시 누가 뚫어 열었더냐.
懸崖危磴屢盤回 매달린 낭떠러지 위태로운 비탈 거듭 서려 도네.
一身關塞三千里 이 한 몸 관문 변두리 삼천 리 와서
強道無愁愁自來 억지로 근심을 없다지만 시름은 저절로 오네.
입으로는 걱정 말라지만 마음으로는 이미 걱정이 많다. 굽이굽이 서린 낭떠러지가 비경이지만 경치를 구경할 틈도 없이 마음은 이미 스스로 통제할 수 없을 만치 아슬아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명이면서 시제인 무수령(無愁嶺)은 제목 그대로 근심이 없어야 쉬이 넘을 수 있는 고개이다. 역설한다면 산세가 너무 험하여 근심으로 조금으로 흔들리면 넘지 못할 고개라는 것이다.
서계는 변방으로 오기 전에는 변방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1663년에는 강도(江都)에, 1664년에는 해서(海西)에 잠깐 어사로 다녀오기는 했지만, 강역(疆域)을 끼고 있는 변방에서 평화시에 어떻게 유사시를 대비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였다. <변방을 다니며[行邊]>를 보면,
邊頭今不用營平 변방에서는 이제 병영의 평범함 쓰지 않으니
廟略從容運上兵 조정의 책략 조용하게 상병술을 운행하더라.
誰向君王道消息 누가 군왕 향하여 소식 말하랴.
六州都護坐空城 여섯 고을 도호부사 빈 성에 앉았더라.
군대의 경영에 한 차원 높은 책략을 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 2구에서 보이는 표현은 지난날에는 눈앞에 닥친 싸움을 통해 전쟁을 하고 군대를 유지했었는데, 지금은 지혜를 써서 군대를 운영하는 상병술(上兵術)에서 한 단계 발전된 군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침략에 대한 방어적 전투가 아닌 보다 굳건히 국경을 강화하여 감히 외세가 넘볼 수 없게 수비하고 있다는 것과 상통한다. 서계에게 국경은 막강한 군사력과 거기에 기반이 되는 병사와 사령부가 혼연일치가 되어 있는 곳임을 위 3, 4구의 빈 성을 지키는 도호부사들의 모습에서 볼 수 있다.
서계는 1667년 늦봄 마침내 북평사의 직무를 마치고 홍문관 수찬이 되어 돌아오게 된다. 비록 힘겨웠던 함경도의 순행이었지만 내직에서의 직무와는 판이하게 다른 외직에서 오는 보람과 감회는 남달랐던 것 같다. 내직으로 돌아온 서계의 시선은 아직도 북평사에 머물러 있음을 알 수 있다. <계주와 옥당에서 마주하여 숙직하는데, 계주가 북쪽에서 지은 시에 차운해 주기를 바랐다. 나와 계주는 선후로 모두 북막에서 보좌관으로 있었다[與季周對直玉堂 季周要余次其在北時所作韻 余與季周 先後俱佐北幕者]>라는 긴 제목에서 그 모습을 엿볼 수 있다.
玄朔春回草木光 북방에서 봄에 돌아오니 초목에 빛이 나고
籌閑盡日臥東堂 산가지 한가하게 종일토록 동당에서 뒹굽니다.
心懸魏闕重霄遠 마음이 위궐에 달려 있으니 거듭된 하늘이 멀고
氣壓秦城萬里長 사기는 진성 만 리 긴 국경을 제압합니다.
何意共君還豹直 어떤 의미일까요, 군과 함께 돌아와 표직하고
有時同我說龍荒 때때로 저와 함께 용황을 논함이.
毛錐不刺西山虎 모추자는 서산의 범 찌르지 못하니
遙愧翩翩馬上郞 멀리서 나는 듯, 말 위 낭관 부끄럽습니다.
폐지되었던 북평사가 1664년(현종5년)에 다시 설치되고 그해 6월 처음 임명된 사람은 서계의 처숙부였던 남이성(南二星, 1625~1683)이었다. 그러나 남이성은 곧 병으로 체직하고 그해 윤 6월 이단하가 임명되어 8월 부임하여 직무를 다하고, 11월에 조정으로 돌아왔다.
무슨 이유였던지 휴일에 함께 홍문관에서 숙직을 하던 계주 이단하(季周 李端夏, 1625∼1689)가 막 북쪽에서 돌아온 서계에게 시 한 편을 요구하고 서계는 기꺼이 함경도를 환유(宦遊)하면서 느꼈던 감회를 7언 율시로 풀어 놓는다. 1, 2구에서는 지금은 잠시나마 평화로운 시절임을 계절과 조응하여 드러내고 있으며, 3, 4구는 눈으로 확인한 함경도의 군대와 무인들의 충성심은 항상 임금이 계신 곳으로 향해 있으면서, 사기가 충천하여 적을 제압하고 있음을 상기시키고 있다. 5, 6구는 현재 홍문관에 있는 서계 자신과 이단하는 북평사라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어 때때로 북방민족인 중국의 변두리 지역, 즉 함경도와 접경지대 국경과 접한 청나라에 대하여 종종 깊이 있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표현을 하고 있다. 6, 7구를 통해서는 붓대[毛錐子]나 잡고 있는 자신은 으르렁대는 범 한 마리 잡을 수 없으며 무기를 들고 직접 국경을 지키는 군인이나 전쟁에서 전두지휘(前頭指揮)도 하지 못하는 일개 문관에 불과하다고 자책하고 있다.
앞의 시를 이어 <또 시 한 수는 계주가 화답하기를 요청했고 아울러 희천에게 올려 차운을 구하다[又有一首 旣要季周和 幷呈希天求次]>는 시가 있다. 희천 여성제(希天 呂聖齊, 1625∼1691)는 “여성제⋅이유상⋅홍처후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여성제(呂聖齊)를 북평사(北評事)로, 이유상(李有相)을 이조 좌랑으로, 홍처후(洪處厚)를 병조 참의로 삼았다”라는 현종 6년(1665년) 9월 7일 기사를 통해 여성제도 이단하와 마찬가지로 서계에 앞서 북평사가 되었던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이단하가 자신에게 차운을 요구했듯이 서계도 자신이 7언 율시를 지어 여성제에게 올려 차운시를 요구하고 있다.
玉堂金馬神仙地 옥당과 금마는 신선 사는 곳이고
白草黃沙戎虜州 백초와 황사는 융노 사는 고을입니다.
佩劍書生非骨相 칼 찬 서생 골상이 아니고
揮毫學士是風流 붓대 휘두르는 학사 풍류입니다.
殊恩重荷慙鷄舌 특수한 은혜로 중임 받아 계설이 참담하고
壯志無成愧虎頭 장한 뜻 이룸 없으니 범의 두상이 부끄럽습니다.
先後從軍同鎖直 앞뒤로 종군하여 쇄직을 함께 했으니
瓊琚催報木瓜投 구슬로 보답해주시길 재촉하며 모과를 던집니다.
여유가 있는 시이다. 7, 8구의 “구슬로 보답해주시기를 재촉하면서 모과를 던집니다[瓊琚催報木瓜投]”라는 구절은 유학자의 모습이라기보다는 어린 동년배에게 장난을 치는 듯하여 웃음이 절로 난다. 풀어보면, “내 시는 보잘것없는 모과와 같지만 당신께서 차운시를 보내 주실 때에는 옥 같은 좋은 시를 보내주십시오”인데, 시경의 “저 사람이 나에게 모과를 던지거든/ 나는 구슬로 답하리라[投荷而木瓜 我報而瓊琚]”라는 구절이 상황과 맞아 떨어지면서 유쾌하게 변개된 것이다. 서계는 이 시에서도 앞선 시에서처럼 문관인 자신은 무관에 비해 참 하잘것없이 부끄러운 존재임을 피력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마지막 구에서 보여주는 여유로움은 무관이 아닌 문관으로서의 자부심도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다고 보인다.
다음의 <평사 홍주국이 나와 교대하여 북막에 가면서 시를 구하기에 보내 작별하다[洪評事柱國 代余赴北幕 求詩贈別]>는 북평사로서 마지막 술회가 되는 시이면서 「북정록」에 실린 마지막 시이다. 서계가 늦봄에 소명(召命)을 받아 북평사의 임무를 마쳤으며, 그 후임으로 홍주국(洪柱國, 1623~1680)이 대신하여 북평사로 제수된 것이 그해 가을이었다. 오지와 같은 함경도로 떠나는 후임자 홍주국을 위해 쓴 짧은 시로, 북평사로 가는 일을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당부이다. 자신도 처음에 북평사로 가야된다고 했을 때는 남과 북의 거리가 너무 아득하여 정신마저 아찔했지만, 가을에 떠나 봄이 되니 곧 돌아오게 되더라는 것이다. 그곳에는 함경도만의 독특한 지역적 정서를 담은 출새곡을 들을 수 있는 색다른 즐거움도 있으니 너무 낙담하지 말기를 바란다며 위로하고 있다. 남들은 지레짐작으로 수주(愁州)라는 지명만으로 또는 중형(重刑)을 받은 유배객이 많다는 이유만으로 종성(鍾城)의 부임을 걱정하는데 그곳에 다녀온 나는 종성에 가지 않았어도 똑같이 늙었을 것이라는 위로를 하고 있다. 오히려 그곳은 흰머리가 부끄럽지 않을 북평사로서 뿌듯한 곳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南來北去路悠悠 남북으로 오가는 길 아득하였지만
來得春風去得秋 봄바람으로 올 수 있는 건 가을에 떠나서입니다.
行聽燕姬歌出塞 다니면 연희 출새가 들리는
鬢凋寧待到愁州 귀밑머리 시들기를 수주에서 기다렸다오.
2. 北路의 망명객
강세작(康世爵, 1600~1683)8)은 명나라 형주(荊州) 사람이다. 증조 강우(康佑)는 몽고(蒙古)에서 전사(戰死)하였고, 조부 강임(康霖)은 임진왜란 때 구원 장수 양호(楊鎬)를 따라 조선의 구원병으로 오다가 평산(平山)에서 죽었다. 강세작은 18세 때, 청주 통판(靑州通判)이었던 아버지 강국태(康國泰)가 요동으로 귀양 가게 되자 함께 따라갔다. 그후 부자는 유정(劉綎)의 표하(票下)에 배속되었는데, 유정의 군오(軍伍)가 흐트러지면서 유정은 분신자살하고 강국태는 유시(流矢)에 맞아 죽게 되자 강세작은 청나라의 군대를 피해 유리(遊離)하다가 함경도로 들어온다. 강세작은 압록강을 건너 조선으로 들어왔지만 정착하지 못하고 관서 지방을 두루 돌아다녔고, 철령(鐵嶺)을 넘어 북쪽으로 가서 함흥(咸興)과 단천(端川)에 살다가 경원(慶源)과 종성(鍾城)을 거쳐 다시 북쪽 회령(會寧)에 이르러 거처를 정하자 관에서 땅을 나눠주고 농사를 짓게 하였다고 한다. 서계가 강세작을 만난 곳은 정착지 회령이었다.
서계가 만난 강세작은 중국의 지난 역사를 통해 지금의 현실을 인식하고 돌아갈 나라가 없는 망명객으로서의 자신의 처지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다.
“나는 명나라가 망하고 주씨(朱氏)가 부흥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아오. 한나라는 400년 만에 망하였는데, 비록 소열제(昭烈帝) 같은 어진 군주도 부흥시키지 못하였으며, 당(唐)나라와 송(宋)나라는 모두 300년 만에 망하였소. 명나라는 홍무(洪武)로부터 숭정(崇禎)까지가 역시 300년이니, 하늘의 대운(大運)을 뉘라서 어길 수 있겠소. 오랑캐가 끝내 천하를 차지할 것이오. 오랑캐는 바야흐로 강성하고 중국 사람들은 극도로 곤궁하고 피폐하여 부자 형제가 목숨을 부지하기에 급급한 실정이니, 영웅호걸이 있더라도 오랑캐를 막지 못할 것이오. 그러나 5, 7십 년 정도나 100년 정도 기다리면 오랑캐의 세력이 조금 쇠퇴하고 중국 사람들도 다소 안정을 찾을 것이오. 그렇게 되면 오래도록 수치를 겪은 나머지 분발하여 일어나 오랑캐를 몰아내기를 원(元)나라가 망할 때처럼 할 것이오. 이것은 과거에 이미 나타난 사실이니,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이오.” 하였다.
서계에게 강세작의 현실인식은 자연스럽게 쇠퇴한 명나라와 흥성한 청나라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할 필요를 느끼게 해 주었다. 친명배청(親明背淸) 의식이 팽배했던 시기였으나 점차 국제정세의 흐름을 파악하고 조선의 자주적 입장을 굳혀 나가야 함을 간접적이나마 강세작의 이야기를 통해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서계는 강세작을 소재로 3제(題) 5수(首)의 시를 「북정록」에 남겼다. 그 첫 시는 <강세작에게 주다[贈康生世爵]>로 7언 절구로 된 3수이다. 소서(小序)에 강세작은 회남(淮南) 사람으로 난리를 피해 동쪽으로 와서 회령(會寧)에서 생활을 하였다고 부연하고 있다. 첫 수에서는 강세작의 현실과 회한을 드러낸다. 난리를 피해 조선으로 숨어든 지 벌써 40여년이 된 강세작은 조선옷을 걸치고 한 많은 세월을 살며 이제 더 이상 중국으로 돌아가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流落年多不憶歸 떠돌았던 해 많았기에 돌아갈 날 생각지 않고
餘生慣着異鄕衣 남은 생 습관처럼 타향 옷 걸쳤더라.
千愁萬恨從誰說 천만 시름과 한, 누구에게 말하리.
故國如今事事非 고국은 이제 일마다 그르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안타까움을 절절하게 묘사한다. 두 번째 수에서의 강세작은 회령에서 서쪽으로 보이는 옛 명나라가 멀게만 느껴진다. 거리로야 지난날과 같겠지만 그곳에 세월이 묻어나니 더 이상 옛날의 거리가 아님을 알게 된다. 그러나 2구를 통해 보면 잠시 나뭇가지에 깃드는 철새[羈禽]를 통해 자신도 이곳에서 잠시 머물다가 때가 되면 떠날 수 있는 곳이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갈팡질팡 하루에 몇 번이고 마음은 고향으로 달리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40년을 객지에 떠돌면서, 40번의 봄을 맞이하면서 늘 꿈꾸던 고향은 꿈에서나마 가보지만 오히려 그곳에는 내가 보고 싶은 것은 아무것도 없음이 안타까운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路遠西歸意已迷 길이 아득하니 서쪽으로 돌아가려는 뜻 이미 희미한데
羈禽得木且安棲 철새는 나뭇가지 얻어 잠시 편안케 깃드네.
春來幾度淮南夢 봄이 되면 몇 번이나 회남 꿈을 꾸었던가.
白板扉空野草齊 대문은 비었고 들풀만 가지런하더라.
세 번째 수에서는 옛 고향에 대한 좋은 기억들을 풀어내면서 한스러움을 넋두리처럼 뱉어내고 있다. 강세작은 초(楚)나라 사람으로 대대로 무장(武將)의 집안이었다. 3대가 비록 전장에서 죽음을 맞이했지만 모두 장수로서 그 소임을 다한 명장의 자손으로 강세작은 고향에서는 풍족한 생활을 했음을 알 수 있다. 1, 2구에 보이는 강회(江淮)와 오초(吳楚)는 같은 지역을 달리 표현하는 말들로 강세작의 고향이었던 것이다. 좋은 음악과 아름다운 비단옷을 걸치고 버들 흐드러지는 누대가 있는 곳에서 노닐던 옛날은 없고, 이제 풍속도 다른 곳에서 몸 하나 보존하기 어려운 강세작은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을 친구들의 소식이 사뭇 궁금하기도 하다.
笙歌綺縠江淮土 음악과 비단이 있었던 회수 땅
花柳樓臺吳楚鄕 화류와 누대가 있는 오초 고향이라네.
棲泊一身安異俗 깃들어 머무는 몸 하나, 풍속을 달리하랴마는
四隣知舊隔存亡 사방 이웃 친구들은 살았는지 죽었는지.
서계는 망명 생활하는 강세작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가졌던 것 같다. <강세작전>에서는 강세작의 사람됨과 습관까지 그의 입을 통해 세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의롭지 않은 일은 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근심을 잊기 위해 술을 마실 수밖에 없는 망명객의 입장을 가감 없이 보여주고 있다. <강세작전>에 다음과 같은 기술이 있다.
세작은 위인이 악착하지는 않으나 평범한 사람은 아니다. 글을 대강 알고 성품이 술을 좋아한다. 오래도록 북쪽 지방을 떠도느라 토인(土人)들과 안면이 많은데, 이따금 향리(鄕里)의 친한 사람들 집에 들르면 매양 술을 달라 하고 흠뻑 취한 뒤에야 떠나갔다. 늘 말하기를, “나는 일평생 의롭지 않은 일은 하고자 하지 않기 때문에 남에게 바라는 바가 없다. 그러나 술만큼은 근심을 잊게 해 주기에 내가 늘 찾곤 하니, 나는 유독 술에 대해서만큼은 사양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재차 강생에게 주다[再贈康生]>에서 인생의 무상을 말하면서 그를 위로하는 표현을 하고 있는데, 서계는 강세작의 모습을 <강세작전>을 통해 보여주면서, 한 편으로는 율시로 강세작의 역경을 파노라마처럼 그려내고 있다. 끊임없이 반복하면서 강세작을 안타까워하면서도 모든 인생은 허무하므로 너무 슬픔에만 연연하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는 그림이다.
禍福一吹塵 화복은 한번 불어오는 티끌 같고
悲歡雙轉輪 슬픔과 기쁨은 도는 두 바퀴네.
誰知江北客 누가 알았으랴, 강북 나그네
老作海東人 늘그막에 해동 사람 될 줄을.
醉後塞花落 술 취한 뒤 변방의 꽃 지고
夢中淮草春 꿈속에서는 회수가의 풀 봄을 맞더라.
冤禽哭向夕 원금의 울음 저녁으로 향하니
憐汝蜀王身 네가 촉왕의 몸이었던 것을 가여워하노라.
강세작에게 주는 마지막 시는 앞의 7언 절구를 차운하여 지은 <강생에게 전운(前韻)을 써서 주다[贈康生用前韻]>이다. 느낌이나 정감이 앞의 7언 절구 3수를 아우르는 표현이 주를 이룬다. 망명 40여 년이 되었건만 하루도 고국을 잊어 본 적이 없다. 본인이야 항상 그곳을 꿈꾸겠지만, 타향에서 그를 만난 서계의 입장에서는 그와 함께 그의 고향만을 생각해봐야 위로가 되지 않음을 않다. 그를 위로하기 위해 취한 서계의 행동은 고사를 끌어 그가 세월의 무상을 느끼게 해 줄 수밖에 없는 것이다. 3구에서 든 요동학이 된 정령위의 고사가 그것이다. 지금이야 마음속에 항상 고향이 있어 언젠가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이미 옛날 내가 알던 사람들은 없고 나를 알아 줄 사람도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또 한 번 자신의 처지를 충분히 받아들이라는 충고이며 배려이다.
日日思歸何日歸 날마다 귀향을 생각하는데 어느 때나 돌아갈꼬.
天寒秪着古麻衣 추운 날씨인데 옛 삼옷만 걸쳤구려.
假令得作遼東鶴 요동학 되더라도
城郭人民盡已非 성곽이나 인민 모두 이미 아닐 것이리.
3. 弓馬之鄕의 妓女馳馬
「북정록」에는 함경도의 풍경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마음을 비우게 하는 절경과 문사(文士)의 마음을 흔드는 군대의 기상이 있다. 그것들과 더불어 독특한 문화로 보이는 기생이 등장하는데, 조선시대에 보이는 관기(官妓)의 모습뿐만 아니라 북쪽에 부임한 관리와 인연이 있는 기생들이 기명(妓名)과 함께 등장한다. 매우 흥미로운 모습이다.
<호주 채 상서가 돌봐주던 기생이 이제 늙었는데, 채 상서를 언급하면 으레 눈물을 흘린다. 감회가 있어 짓다[湖洲蔡尙書所眄妓 今老矣 語及蔡 輒流涕 感而有作]>에서는 기약 없이 떠나버린 임을 향한 그리움으로 애끓는 늙은 기생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호주(湖洲) 채유후(蔡裕後, 1599∼1660)는 1635년 수괄어사(搜括御史)가 되어 평안도 의주에 간 적이 있다. 당시 양계(兩界)에서 인연이 되었는지, 아니면 또 다른 곳에서의 인연이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들은 잠깐 스쳐가는 인연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시제(詩題)에 기둥서방이라는 의미가 내포된 ‘소면기(所眄妓)’를 넣어 늙은 기생을 표현한 것을 보면 채유후와 기생의 인연이 짧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어쩌면 유난히 술을 좋아했던 채유후에게 객지에서 기생과의 남다른 인연은 당연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시간은 흘러 서계가 북평사로 갔을 당시 채유후는 이미 고인이 되었고, 그를 기억하는 기생도 세월의 두께만큼 눈물이 쌓여 있었다. 서계는 시에서 늙은 기생을 앞에 두고 직접 말 하듯이 다독이는 듯한 표현을 하고 있다.
墓前松樹數圍長 묘 앞 소나무 몇 아람이나 자랐고
身後榮名一夢涼 죽은 뒤 영예스러운 이름 한 바탕 꿈같이 서늘하네.
詩酒風流猶未盡 시 짓고 술 마시던 풍류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白頭官妓泣中郞 흰머리 관기 중랑 생각에 눈물이네.
묘 앞의 소나무의 굵기가 몇 아람이나 된다는 것으로 채유후가 세상을 뜬 지 이미 한두 해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비록 늙은 기생이 관기(官妓)로 자유로운 몸은 아니지만 여러 해 전에 떠난 채유후에 대한 인연이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 있음을 알 수 있다. 늙은 기생이 기억하는 채유후는 3구에 드러나는데 그가 술만 좋아했던 인물이 아니라 문인으로서 체모(體貌)를 갖추고 풍류를 즐겼던 관리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범상한 문인 지방관과 관기의 정감이라 할 수 있겠다.
함경도 지역은 일찍부터 궁마지향(弓馬之鄕)으로 꼽히던 곳으로 기사(騎射)에 능숙하고 기한(飢寒)을 견디는 능력도 뛰어나다고 널리 알려져 있었다. 또한 “북마(北馬)”라는 말이 생산되고 있었는데 품질이 우수하였기 때문에 함경도는 “조선의 북기(北冀)”라 불리기도 하였다. 북관개시(北關開市)가 실시된 후 청나라 말도 많이 수입되고 있었다. 「북정록」에는 준마(駿馬)로 유명했던 함경도의 특성이 유감없이 드러나는데, 기마(騎馬)에 자연스러운 기생들의 모습이 포착된다. 본래 기녀치마(妓女馳馬)는 의주(義州) 기생들의 특기로 사신 행차가 이르면 으레 연회를 열어 객회(客懷)를 위로하였다.
自着金鞭鞚玉驄 스스로 금편 잡고 옥총 당기는
柳腰輕細不禁風 버들처럼 가볍고 가는 허리, 바람을 금하지 못하네.
凌波寶襪從抛地 능파 버선 따라서 땅으로 떨어지니
笑掩羅衫醉臉紅 웃으며 나삼(羅衫)으로 가린 뺨 취한 듯 붉네.
<기생이 말을 달리다가 떨어뜨린 신발, 재미로 짓다[妓馳馬墮履戲作]>에서 기생은 잘 치장된 말과 등장한다. 1구의 표현대로 기생은 자신이 직접[自] 채찍을 잡고 재갈 물린 좋은 말을 타고 있는데, 그 모습이 어찌나 가녀린지 바람에 이리저리 쓸리는 버드나무 같다고 하였다. 이방인에게 말 탄 기생의 모습은 독특한 볼거리였던 것 같다. 넋 놓고 바라보던 이방인은 문득 기생이 말에서 내리는 모습에 정신을 가다듬고 그녀가 신발을 떨어뜨렸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말에서 내린 기생은 낯선 시선과 마주치는데, 말을 당기며 당당했던 모습과 사뭇 다른 부끄러움으로 홍조를 띤다.
북쪽 변방 사람들은 궁마(弓馬)를 일삼기 때문에 대대로 말을 귀중하게 여기고, 함경도에서 나는 말을 진상한다는 기록이 있다. 일상에 유용하게 쓰이는 말이기에 더욱 귀중할 수밖에 없는데, 그 쓰임이 다른 지역에 비해 남녀의 구분이 덜 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냥하고 저물녘에 돌아가는 것을 보며[觀獵暮歸]>의 2수를 통해 함경도의 풍속을 엿볼 수 있는데, 기록에서 보이듯이 숭무(崇武)와 궁마(弓馬)의 기상을 엿볼 수 있다.
角聲吹破馬頭雲 뿔피리 부는 소리 말머리 구름 엉기고
罷獵歸時日向曛 사냥 마치고 돌아오니 해가 저물어 가네.
一簇旌旗隨陣入 한 떼의 깃발 군대를 따라드니
路人遙認李將軍 길 가던 사람 멀리서도 이 장군임을 알더라.
暮角城頭且莫催 저물녘 성 위 뿔피리! 잠시만 재촉하지 말기를
林間駐蓋好傳杯 숲속에서 수레를 멈추고 술잔을 전하네.
燕姬上馬能馳逐 연희가 말 위에서 달려가고 있으니
一隊紅粧從獵回 한 무리 홍장 사냥 따라 돌아오네.
첫 번째 수에서 사냥은 사냥을 통해 기예를 익히며 전쟁에 대비하는 일상적인 함경도 국경부근의 모습이다. 사냥을 마치고 돌아오는 긴 뿔피리 소리에 무심했던 사람들의 멈춘다. 4구를 통해 선봉에 있는 당당한 장군과는 신뢰가 이루어져 있으며 그로인해 국경 부근이 평화로울 수 있음을 인식하고 있다. 함경도의 병영은 일반적인 제식(制式) 훈련에서 벗어나 실전을 방불한 훈련을 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시이다.
두 번째 수에서는 훈련을 하는 중에 잠시 휴식을 취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훈련은 늦은 시각까지 계속되고 있는 상황임을 1, 2구를 통해 알 수 있다. 성문을 닫는 시각을 알리고 있지만 아직도 대오(隊伍)는 흩어지지 않고 사냥의 마지막 과정으로 숲에서 잠시 술잔을 기울이고 있다. 흥미로운 부분은 3, 4구인데 단장을 한 여인네들이 사냥의 무리에 속해 있는 것이다. 3구의 연희(燕姬)는 연경의 미녀인데 여기서는 변방지역의 여인이라는 의미로 볼 수 있고, 4구의 홍장(紅粧)은 잘 단장한 기녀를 나타낸다. 두 표현 모두 무인들의 사냥, 즉 무예를 겨루는 연습에 따라 나선 기생을 대칭하여 쓴 것이다. 무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말에 탄 기녀가 아닌 홀로 말을 달리는 모습이 이채롭다. 비록 함경도는 지역적으로 변방의 국경지대지만 외세의 침입과 무관한 시기에는 매우 색다른 평화가 깃듦을 알 수 있다.
「북정록」에서 기생은 말을 타기도 하고 군대의 사냥에 따라나서기도 하는 등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일상적인 기녀의 한과 서러움의 정감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작품도 있다. <여선은 이 평사 계주가 사랑하였고, 초향은 여 평사 희천이 사랑하였던 기생이다. 각각 한 수씩 지어 주다[妓麗仙 李評事季周所憐 楚香 呂評事希天所憐 各爲一首以贈]>는 기생들이 북평사와 인연이 깊었음을 보여준다. 1664년 6월 22일 북평사를 다시 설치하고 남이성을 제수하였으나 남이성이 병으로 사직하고, 윤 6월 24일 이단하(李端夏, 1625~1689)가 실질적으로는 첫 함경도 평사가 되었다. 이단하는 북평사로서 체직된 일에 대해서 현달(顯達)하기도 하였는데, 특히 지난 선대의 북평사에 대한 관심이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1665년 기록에 의하면 이단하의 노력에 의해 임진왜란 당시 북로에서 의병을 일으켜 역적을 쳤던 정문부(鄭文孚, 1565∼1624)의 공로가 인정되고 관직이 추증되었다고 한다. 당시 왕성하게 북평사 임무를 수행했던 이단하가 만난 기생이 첫 번째 수에 보이는 ‘여선’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過關文字遣誰傳 관문 지난 문자 누구에게 전달하리.
只說虛無不說緣 허무함만을 말하고 인연을 말하지 않았구려.
莫向流沙候紫氣 유사를 향해 자기를 기다리지 말라.
浮生那得更千年 뜬 인생 어떻게 다시 천년을 살 수 있겠는가.
아마도 여선이 이단하에게 보내는 편지를 쓴 모양이다. 아무리 편지를 쓴들 한 번 스쳐간 님이 돌아올 리 만무하다. 3구는 중국에 접해있는 이곳은 사막의 먼지로 번다하지만 지고지순하게 기다리는 여선에게 이단하가 다시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기대[候紫氣]를 단념하게 하는 부분이라 할 것이다. 부평초 같은 인생인데 그 옛날 행복했던 때와 같은 천년은 또 있을 수 있겠는가라는 반문으로 이단하에 대한 사무침에 철퇴(鐵槌)를 놓는다.
두 번째 수는 1665년에 북평사였던 여성제(呂聖齊, 1625~1691)를 알고 지냈던 기생과의 대면에서 준 시이다. 기생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만남과 이별은 필시 정해진 일이라 치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별은 늘 서럽고 아픈 모습으로 남아 있다. 기약 없는 이별과 아련함의 정한은 그들의 숙명이라 할 것이다.
岳陽樓上暮雲開 악양루에 저물녘 구름 열리니
鶴馭飄然更不廻 학어 표연히 다시 오지 돌아오지 않는구려.
欲識人間離恨苦 인간사 이별의 한 괴로움 알고자
淚痕秋染洞庭苔 눈물 흔적 가을 동정호에 이끼로 물들이네.
풍광 좋은 동정호의 악양루에 빗대어 쓴 시이다. 중국의 악양루가 본래 군사적 목적에 의해 지어진 누각임을 인식하고 지금 있는 이 누각도 그와 비슷한 군사적 목적에 의해서 지어진 건물임을 짐작할 수 있다. 여성제와 초향이 이별한 곳은 동해가 보이는 경치 좋은 누대가 아니었을까 싶다. 신선처럼 표연히 날아가 버린 여성제에 대한 그리움이 물씬 풍기는 초향의 마음이 담겨있다.
이처럼 「북정록」에는 실제 기생의 이름이 등장하며 그들과 인연이 있었던 북평사들이 언급되고 있어 작품을 감상함에 무척 사실감이 느껴진다. 또 한편으로는 함경도 지역에서 이름이 자자했던 기생이 있어 호기심으로 만나보니 그녀는 이미 늙어 버렸다. 무척 애석해하는 <종성의 기생 계향은 북으로 와서 들은 이름인데 그녀는 이미 늙어 애석하다. 이 시를 지어주다[鍾城妓桂香 北來聞名者 惜其已老 贈此]>도 있다. 함경도에 대한 또 다른 풍경이 기생의 세월과 함께 마무리 되고 있다.
少日風流地젊은 날 풍류 있던 곳
昔年歌舞身 옛날 노래하고 춤추던 몸이었더라.
月明偏惜夜 명월은 유난히 밤을 애석하게 여겼고
花發獨傷春 꽃 피면 홀로 봄을 상심하였더라.
按曲多忘舊 누르는 곡조마다 잊혀진 옛날이 많고
藏衣不着新 단장한 옷 새 옷이 아니라.
時從酒席散 때로 술자리에서 흩어지면
泣對鏡中人 울면서 거울 속의 사람을 대하더라.
4. 崇武의 땅, 함경도
함경도는 평안도와 함께 양계(兩界)라 불리며 지리적으로 조선 북쪽의 국경지대에 있다. 지리적 조건으로 인해 무력 충돌이 불가피한 상황에 있는 곳으로 항상 준전시체제(準戰時體制)를 갖추고 있다. 백성은 외세의 침략이나 전쟁에 노출되다 보니 자연스럽게 전쟁에 익숙해질 수밖에 없었고, 군대는 무기를 갖추고 사열을 하며 항상 전쟁에 대비하여 무장한 상태를 유지하였다. 조정에서 파견된 북평사인 문사에게 비친 함경도는 고단하고 힘겨운 곳이었지만, 반면 숭무(崇武) 정신이 충천하여 유학에 정통한 문관(文官)이라면 한 번쯤 자신을 뒤돌아보게 하는 곳이었다.
아직 함경도에 들어서기도 전이지만, 북쪽으로 가는 강원도 초입에서 전쟁의 흔적을 보고, 더 험할 것으로 짐작되는 북쪽의 함경도의 실상을 짐작해 본다. 다음 시는 <김화 전장터를 지나며 짓다[過金化戰場作]>이다.
海松岡下鬪聲稀 해송강 아래 싸움 소리 희미한데
辮髮三千半不歸 변발한 삼천 명 중 절반은 돌아가지 못했더라.
勝敗悠悠何足賴 승패가 유유한데 무슨 힘이 될까마는
漢南猶未解重圍 한남에서는 오히려 겹겹의 포위 풀지 못하네.
書生不習兵家勢 서생은 병가의 형세를 익히지 못했는데
軍覆當年事可哀 군대가 전복된 당년에는 일이 매우 서글펐네.
扼腕健兒休籍口 분발하는 건장한 아이야, 자구하지 말라.
殺身今有幾人來 살신한 사람 지금은 몇이나 있을꼬.
병자호란의 치열했던 상황을 읊은 시이다. 병자호란(1636년) 당시 치열했던 김화 전쟁터의 모습에서 지금의 나를 돌아보게 하는 작품이다. 1, 2구는 이 작품을 짓게 되는 동기가 되는 김화 전쟁터의 모습이다. 김화에서의 전쟁은 해송강의 넓고 깊은 계곡에서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으며, 청나라에서 파견한 군대 3천 명 중에서 1,500명이 돌아가지 못한 치열한 싸움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북쪽에서 내려오는 청나라 군대를 치열하게 김화에서 막아냈지만 결국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여 항복하고 말았다는 안타까움을 3, 4구에 풀어내고 있다. 5, 6구에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서계 자신인 나는 일개 서생으로 당시의 군대 일에 대해서 잘 알지는 못하지만 병자년에 있었던 난은 매우 위태롭고 치욕적이었음을 상기하고 있다. 사실 서계도 병자년 당시 어렸지만 8세가 되던 해 청병(淸兵)을 피해 남으로 피난을 갔던 개인적인 기억도 새록새록 떠올랐을 것이다. 7, 8구에서는 세월이 흘러 전쟁이 없는 평화로움을 표현하고 있다. 전쟁을 모르는 건장한 사람들이 옆에서 팔을 휘두르며 큰 소리치고 있는 모습을 보고, 경계할 것을 당부하면서 질책하고 있다. 지금 다시 병자년 때와 같이 급박한 상황이라면 과연 몇이나 앞에 나서 몸을 던져 싸울 수 있을까 싶은 것이다.
다음 시는 강원도를 거쳐 드디어 함경도에 이르러 객관에 짐을 풀고 읊은 <고산관의 벽에서 차운하다[高山館 次壁間韻]>이다.
襯佩弓刀穩據鞍 궁도 깊이 차고 안온하게 안장에 의지하여
丈夫羞作俗儒酸 대장부로 신산한 속유인 것 부끄럽구나.
五更看斗鄕心遠 새벽에 북두성 보니, 먼 고향 가고 싶은 마음
十月飛霜邊夢寒 10월에 내리는 서리, 변방 꿈도 쓸쓸하네.
異域自應催白首 이역에서 절로 백발 될 터인데
空閨誰復斂紅顏 빈 규방 누가 다시 홍안 거둘꼬.
近聞漢士無乘障 요즘은 한나라 병사 성 오르는 일 없다하니
且喜三陲日日安 잠깐이나마 세 모퉁이 날마다 편안함이 기쁘네.
<고산관의 벽에서 차운하다>은 임지에 들어서면서 객관에서 한시름 놓는 모습이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험한 길을 따라 드디어 도착한 곳이건만 함경도의 낯선 풍경에 자신의 직무도 잊은 채 고향 생각이 든다.
고산관은 함경도 안변도호부(安邊都護府)에 있는 객관으로 함경도에 부임하는 관리들이 잠시 머물던 곳이다. 그곳에서 그들은 새로 시작된 직무에 대한 의기를 드러내는 심정을 읊어 벽에 써 놓았다. 서계도 그들에 동조하여 문사로서의 자신을 성찰하고 앞으로 자신이 할 직무에 대한 호기로움을 읊어 그들의 생각에 부치고 있다.
병자호란과 청의 건국으로 혼란했던 국제정세는 잠시 잠잠해졌다. 그러나 실제 전쟁이 없다고 해도 함경도와 같은 국경은 항상 준전시체제에 있음을 알 수 있다. 7, 8구의 표현을 빌면 최근에는 청병(淸兵)의 침입이 없기에 조선의 군사들도 성을 오르지 않아도 될 만큼 평화로워서 안도하는 모습이며, 한편으로는 이러한 평화가 계속되리라는 보장이 없이 잠깐이나마 전쟁에서 벗어난 병사들의 기쁨을 알 수 있다.
함경도는 산세가 빼어나고 아름답지만 나그네는 물론이거니와 백성들도 험준한 산길을 이용하는 것이 쉽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북정록」의 수록된 시 대부분이 함경도의 정경과 병영의 모습인데, 어느 시에서도 평지나 평야를 나타내는 표현을 찾기는 어렵다. 다음에 보이는 시는 <귀문관을 지나며[過鬼門關]>이다.
본래 귀문관(鬼門關)은 중국 광서성(廣西省) 북류현(北流縣)에 있는 변방으로, 중원에서 흠주(欽州)ㆍ염주(廉州)ㆍ뇌주(雷州)ㆍ경주(瓊州)와 교지(交趾)로 통행하는 길목인데 산세가 험준하고 장려(瘴癘)와 같은 풍토병이 있어 살아서 돌아오는 사람이 드문 곳이다. 아마도 함경도의 험준한 지형과 산세가 중국의 귀문관을 연상케 한 모양이다. 실제로도 함경도의 경성(鏡城) 운위원(雲委院)을 귀문관이라 하였다.
<귀문관을 지나며>는 3수로 되어 있다. 첫 번째 수의 1, 2구에서는 “층층 얼음 위태로운 돌 말도 다니기 어려운, 언덕길 높으나 낮으나 험하기는 일반이더라”라고 하여, 함경도의 지형이 험준하여 중국의 귀문관을 떠올리는 인상을 준다. 지형이 높고 낮음의 차이만 있을 뿐 험하기는 매일반이라는 표현에서 함경도의 지형을 짐작해 볼만하다. 이렇게 험한 변방에는 군대가 있고 병사가 있기 마련이다. 1663년도 기록을 보면, “조정에서는 평안도⋅함경도의 무사 중 재주 있는 자를 병조에 알려 뽑아 쓰게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험준한 지역에서 실전에 대비한 훈련을 하였던 무사들이 많았으리라는 짐작이다. 그러나 아무리 뛰어난 기량이 있다하더라도 실제 전투가 없다면 자신을 드러낼 충분한 기회가 없게 되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조정에서는 군대의 사기를 진작시키고자 하나의 방편으로 평안도와 함경도의 그들에게 충분히 재주를 뽐낼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戍兵何日定樓煩 수자리 병사 언제나 수루 번거로움 안정시킬꼬.
畫角紅旗下鬼門 화각과 홍기 귀문으로 내려가네.
且喜王師無薄戰 잠시나마 기쁘도다. 왕사가 다가온 전투가 없어서
塞垣猶是漢乾坤 변방 성은 오히려 한나라의 세월이로다.
앞의 시는 <귀문관을 지나며>의 두 번째 수이다. 한가로운 변방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군대이기에 여전히 수루(戍樓)는 번거롭겠지만 직접적인 전투가 없는 이곳은 평화로웠던 한나라와 같다. 변방이어서 항상 위태롭지만 지금은 잠깐이라도 여유로운 평화가 한없이 기쁜 세월인 것이다. 이 모두가 1, 2구에서 번거롭게 수루에서 임무를 다하는 함경도의 병사들 덕분임을 잊지 않겠다는 의미도 보인다.
殭骸藉藉平沙裏 강해가 쌓인 모래사장 속인데
冤魄啾啾積雪間 원통한 넋들이 쌓인 눈 사이에서 추추하더라.
無限古今征戰士 한없이 예나 지금이나 전쟁에 출정하는 무사들이
幾人生度鬼門關 몇 사람이나 살아서 귀문관을 건넜던고.
함경도가 여전히 전쟁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곳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표현은 여러 부분에서 찾을 수 있다. <방원진으로 가는 도중에[防垣路中]>에서는 “군복 입고 전마(戰馬) 타고, 허리에 월검(越劍) 매달고 연호(燕弧)를 찼네. 얼음 어는 날씨에도 파적(破敵)시 천 수이니, 눈 속의 바다 포위망 열렸고 술이 백 단지더라”고 하였다. <밤에 체조를 한 뒤 종성 사군 이지온에게 주다. 이 밤 수항루에 오르다[夜操後 贈鍾城李使君之馧 是夜登受降樓]>에서는 “매우 기쁩니다. 운중이 위상을 얻으매, 북호 기마병인들 백성의 경작을 교란시킬 수 있다고 걱정하겠습니까”라며 종성이 여전히 국제정세 속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에 있고, 그러한 고을을 위무(慰撫)하는 종성부사(鍾城府使) 이지온(李之馧) 역시 한나라 때의 위상(魏尙)과 같이 군사를 매우 잘 동독하고 있다고 치하하고 있다. <훈융진에서[訓戎鎭]>는 2수인데 첫 번째 수에서는 “청하여 묻노라, 방변(防邊)하는 여러 건장한 장수여! 어느 때나 큰 깃대 아래 오랑캐 머리 매달꼬”라고 하며 잘 준비된 군사들을 독려하였고, 두 번째 수에서는 “한나라 도호는 옛 변두리에 있고, 맑은 변방 봉화도 없으니 무사는 낮잠이라네”라고 표현하여 봉화도 올릴 필요 없이 한가롭고 평화로운 날들이 계속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무이진에서 차운하여[撫夷鎭次韻]>에서도 한나라의 장수 이광(李廣) 고사를 통해 무인의 기상을 고취시키고 있다.
Ⅲ. 結 論
지금까지 「북정록」에 수록된 시 44제 51수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좀더 면밀하게 살피지 못한 아쉬움은 있지만 성글게나마 북관의 병영을 보고, 미미하게나마 서계의 시세계 일부를 감상하였다는 위로를 삼고 싶다.
「북정록」은 서계의 북관환유기(北關宦遊記)라 할 수 있다. 북으로 들어가기 위해 백로주(白鷺洲)를 지나면서 감회가 있어서 지은 첫 시 <白鷺洲有感>부터 후임자 홍주국에게 건네준 <洪評事柱國 代與赴北幕 求詩贈別>까지를 살펴보면, 북평사의 공무와 함경도 일대를 유람하며 하루하루를 기록으로 남긴 듯한 인상을 준다. 서계가 이동한 공간은 백로주, 풍전역, 김화, 신안역, 고산관, 철령, 부령, 무산, 회령, 방원진, 종성, 동림, 강신사, 훈융진, 무이진, 서수라, 무수령, 부계사, 아산보이다. 모든 공간은 시제에 드러나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것은 곧 가는 곳마다 시 한 수씩 읊조려 함경도에 대한 인상을 산문을 대신한 기록으로 남겼다는 의미도 된다.
「북정록」은 서계가 1666년 겨울부터 1667년 봄까지 함경도를 순시하면서 엮은 시집이다. 북평사로 있었던 기간이 그리 긴 시간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함경도의 풍습과 병영생활에 대해 많은 시를 남기고 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함경도는 국경을 접하고 있어 청나라와의 예민한 관계에서 자주적 군사력을 기르고 항상 준전시체제를 갖추고 있는 모습을 알 수 있었다. 또, 준마의 생산이 많았던 함경도의 특성상 북쪽의 기생들이 묘한 조화를 이루는 이색적인 모습을 포착하는 시인의 안목도 재미있게 감상할 수 있었다. 한편으로는 명나라의 망명객인 강세작을 통해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대명대청관을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로 삼기도 하였다.
북평사로 부임하던 시기에 서계의 사적인 심정은 매우 복잡했을 것이다. 서계는 그동안 처가살이와 중형의 도움으로 살림을 꾸려오다가 북평사로 부임하던 해에 양덕방(陽德坊)에 새로 거처를 정하였으나 5월에 부인 의령 남씨를 곡(哭)하고 10월에 북평사로 가게 되었다. 처가와 매우 돈독했던 서계로서는 부인의 죽음이 쉽지 않았던 것 같다. 북평사로 있으면서 함경도에서 동지(冬至)를 맞아 시 2수를 짓게 되는데, <소지(小至)>와 <동지(冬至)>이다. 동지 전날 지은 <소지>의 3, 4구를 보면, “내일 아침이면 팥죽이 집집마다 있겠지만, 견딜 수 없구나. 집도 없는데 다시 집을 이별했구나”라고 하며 자신의 고독하고 외로운 심사를 읊조려 스산한 그의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더하여 <동지>의 3, 4구를 보면, “나그네 몸이 비록 집에 간들, 어느 누가 팥죽 한 그릇을 권하리오”라고 하여 더욱 애잔한 슬픔을 더하고 있다. 서계는 항상 고향집을 그리워했었는데 이제 그리우면서도 서러운 집이 되어 버린 것이다. 서계에게 의령 남씨의 죽음과 북평사의 직무는 매우 중요한 의미일 수 있겠다. 서계가 일찌감치 관직에서 물러나 석천동으로 거처를 정한 변수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조심스럽게 추측해 본다.
이상으로 「북정록」을 살펴보았는데, 「북정록」을 통해 함경도의 지리적 특성이나 풍습, 생활을 관찰하는 북평사를 보여주기 위해 서계의 개인적인 애상이나 즉물이입의 관점을 보이는 작품들은 의도적으로 배제하였다. 「북정록」에서 고찰하지 않은 작품들은 서계가 1688년에 연시례(延諡禮)를 위해 함경도에 다녀와서 엮은 「후북정록」을 다룰 때 깊이를 더하기로 기약하면서, 본고는 갈무리하고자 한다.
<참고 문헌>
조선왕조실록 한국고전번역원 번역본
이항복, 백사집(白沙集), 한국고전번역원 번역본
박세당, 西溪集 문집총간 134, 민족문화추진회
고승희, 「18, 19세기 함경도 지역의 유통로 발달과 상업활동, 역사학보, 역사학회, 1996.
장유승, 「수색 허적의 의고적 시세계」, 한국한시작가연구, 한국한시학회,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