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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제자(11) - 가나나인 시몬 / 행 1:6-11
이스라엘 성지순례의 여정 가운데, 유대의 ‘마사다’라는 곳에 들른 적이 있습니다. 마사다는 영화와 소설로도 소개되기도 했습니다. AD 70년에 로마제국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되었을 때, 960여명의 유대인들이 이곳에서 3년 동안을 로마 군대와 대항하여 싸웠습니다. 유대인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결사 항전한 사람들이 바로 열심당원들입니다. 로마의 군인들은 도저히 이 마사다를 정복시킬 수가 없게 되자, 옆으로 길게 토성을 쌓아서 공격했습니다.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고 결국 함락의 징후가 보이자, 열심당원들은 로마 군사들, 곧 이방인들에 의하여 죽음을 당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서, 무려 1,000여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집단 자살을 했습니다. 서로가 자기를 죽일 사람을 제비를 뽑아 정하고, 하룻밤 사이에 모두가 다 목숨을 끊고 말았습니다. 로마 군인들이 마사다에 올라왔을 때는, 이미 다 죽어 있었습니다. 지독한 사람입니다. 이 마사다는 이스라엘 민족의 정신적 기둥이 되었고, 징집된 이스라엘 군인들이 서약하는 곳이, 바로 이곳 마사다입니다. 지금도 이스라엘 청소년들이 이곳을 순례하며, 애국심을 불태우고 있습니다. 여기서 끝까지 항전하다가 죽어간 사람들이, 바로 열심당원들입니다. 오늘의 주인공, 가나나인 시몬이 바로 이 열심당원 출신입니다.
오늘 우리가 만나볼 제자는 시몬입니다. 시몬은 야곱의 둘째 아들 ‘시므온’을 헬라어로 음역한 것입니다. 뜻은 ‘들으심’으로, ‘하나님께서 들으신다, 하나님께서 응답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당시 시몬이란 이름은 너무 흔했습니다. 열두 제자 중에 한 명 더 있었습니다. 베드로의 본명이 시몬이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은 늘 베드로라고만 부르시지 않았고, 어떨 땐 ‘시몬’이라고, 어떨 땐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고, 어떨 땐 ‘시몬 베드로’라고 부르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시몬은, 시몬 베드로와 구분하기 위해서, 시몬이란 이름 앞에 뭘 붙였습니다. 막 3:16-19절 ‘이 열둘을 세우셨으니, 시몬에게는 베드로란 이름을 더하셨고, 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또 안드레와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및 다대오와 가나나인 시몬이며, 또 가룟 유다니 이는 예수를 판 자더라.’ 시몬 앞에다 가나나인을 붙였습니다. 마태 역시 시몬을 가나나인으로 표기했습니다. 마 10:4절 ‘가나나인 시몬 및 가룟 유다 곧 예수를 판 자라.’ 가나나는 동네 이름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지어주신 별명도 아닙니다. ‘가나나인’에 각주가 붙어 있는데, 난외주에 보면, ‘아람어에서 온 말로 열심당원이란 뜻이다’가 있습니다. 예전 개역한글에서는 ‘가나안인’이라고 했는데, 개역개정에서 ‘가나나인’으로 번역했습니다. 라이프 성경사전에 의하면, ‘가나나인’은 신약 당시 로마 제국의 치하에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무장 독립 단원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가나나인 시몬을, 새번역에서는 ‘열혈당원 시몬’으로, 공동번역에서는 ‘혁명당원 시몬’으로 번역했습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셀롯이라는 시몬’이라고 표기했습니다. 눅 6:15절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셀롯이라는 시몬과’ ‘셀롯’의 뜻은 ‘열심당원’입니다. 영어로 광신도를 뜻하는 단어 중 하나인 ‘Zealot’ 역시 이 열심당에서 나온 단어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은, 여러 분파가 있었습니다. 바리새파, 사두개파가 쌍벽을 이루었고, 그 외 엣세네파와, 소수였지만 강력한 열심당이 있었습니다. 바리새파는 율법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종교적으로 근본주의자들이었습니다. 정치에는 무관심했습니다. 로마사람들이 자신들에게 직접적인 해를 끼치지 않는 한 싸우려고 들지 않았습니다. 사두개파는 성전을 지키는 제사장 계급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종교적으로 자유주의자들이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친로마적인 성향이었습니다. 로마에 붙어서 기득권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엣세네파는 일종의 금욕주의자들이었습니다. 경건을 추구했고, 절제된 삶을 살았습니다. 사회적으로 격리되어, 광야에서 공동체 생활을 하였습니다. 세례요한을 엣세네파의 출신으로 보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열심당에 대해서는, 좀 더 자세히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가나나인 시몬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열심당에 대해서 모르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열심당의 기원은 이렇습니다. 알렉산더가 후계자 없이 갑작스럽게 죽고 난 후, 헬라제국은 4개로 나뉘어졌고, 그 중 하나가 셀레우코스입니다. 기원전 175년부터 사망한 164년까지, 셀레우코스 제국을 다스린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가, 성전에 제우스 신상을 세우고, 돼지로 제사를 드리는 등, 유대인들을 극도로 자극하였습니다. 이런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에게 반기를 든 사람 중에, 늙은 제사장 맛다디아가 있었고, 그에게는 다섯 아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유대의 종교적, 정치적인 독립을 쟁취하려고 했습니다. 유다 마카베오가 지도자가 되어, 전쟁에서 승리한 결과로, 유대인들은 100년 동안 독립국인 하스몬 왕조를 세우게 됩니다. 하스몬 왕조는 유대교의 분열 속에, 심각한 왕위 다툼까지 이어지다가, 왕위를 위해 외세인 로마 제국을 부르는 극단적인 선택으로, 멸망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나라 역사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외세를 끌어들이면 결국 망합니다. 로마제국시대는 준평화 상태를 유지했으나, 헤롯이 죽자, 갈릴리 태생의 유다가 궁궐을 습격하고, 병기고를 부수어, 자기를 따르는 자들과 무장 유혈폭동을 일으켰습니다. 유대 총독으로 새로 임명된 퀴리노가, 주민세를 걷기 위해 인구조사를 하겠다고 하자, 갈릴리 유다는 하나님만이 홀로 왕이시라고 주장하면서, 납세 거부와 독립운동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봉기는 실패했고, 그 결과 갈릴리의 수도 세포리스에서, 2천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십자가에 달려 처형되었습니다. 세포리스는 나사렛에서 불과 8km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입니다.
열심당원 중에 유명한 사람은 바라바입니다. 그는 민란을 일으키고. 암살을 시도하는 민족투사로 열심당원이었습니다. 빌라도는 열심당원 바라바와, 예수님을 세우고는, 둘 중 한 명을 살려주겠다며 선택권을 줬습니다. 그때 군중들은 예수님이 아닌 바라바를 선택했습니다. 이걸 단순히 종교지도자들의 선동 때문으로만 볼 수 없습니다. 군중들이 자신들을 구원해줄 사람으로, 바라바를 선택했다고 봐야 합니다. 바라바가 폭력을 통해서라도, 로마로부터 자신들을 구원해 줄 것을 기대했습니다. 반면 예수님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니, 이스라엘에 저항의지를 약화시켰습니다. 석방된 바라바의 영향력은, 점차 확대되었습니다. 로마가 황제를 신으로 선포하고, 유대인들을 심하게 박해할 때, 이스라엘의 저항도 거세졌습니다. 그렇게 해서 유대독립전쟁이 일어났는데, 열심당원들이 그 전쟁을 주도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최후의 항전지인 마사다 요새가 함락됨으로, 전쟁에서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70년 티투스 장군이 성전을 완전히 파괴하였고, 성전의 기물도 전리품으로 가져갔습니다. 로마가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할 때, 성전의 벽 하나를 남겼 두었는데, 그 벽을 무너뜨릴 힘이 없어서가 아니었습니다. 후대 사람들에게, 로마에 대항한 민족의 최후를 전시하여 경고를 삼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벽이 오늘날까지 있는 통곡의 벽입니다.
열심당을 간단하게 정리해 보면 이렇습니다. 열심당은 극단적인 애국주의자들입니다. 무엇보다 철저한 반로마주의자들입니다. 당연히 로마에 세금을 내는 것도 거부했고, 로마인들에게 극단적인 테러도 자행했고, 친로마적인 유대인들을 공격하기도 했습니다. 열심당원 중에는, 단검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다가, 로마 사람을 만나거나, 로마에 빌붙어 살아가는 부역자들을 만나면, 찌르고 도망치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성향의 시몬이, 어떻게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는지 신기합니다. 그가 어떻게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는지, 그 과정은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부르심 받는 장면이 기록된 제자는, 베드로 안드레 형제, 야고보 요한 형제, 빌립, 바돌로매, 마태 정도입니다. 나머지는 어떤 과정을 통해, 제자로 부르심을 받게 되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도 확실한 것은 이것입니다. 막 3:13절 ‘또 산에 오르사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열둘 다 예수님이 원해서 부르신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시몬도 예수님이 원해서 제자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시몬을 부르실 때, 그가 열심당원이라는 것을 모르셨을 리가 없습니다. 마치 마태를 부르실 때, 그가 세리라는 것을 알고도 부르셨듯이 말입니다. 막 2:14절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예수님이 제자를 부르실 때, 시차가 있었습니다. 마태가 부르심을 받은 후에, 시몬이 부르심을 받은 거 같아 보입니다. 시몬도 예수님에 대해서는 들어서 어느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들어가니, 세리 마태가 있는 것입니다. 그는 친로마 국가에 반역이 되는 일에 동조하거나 가담한 사람, 부역자(附逆者) 아닌가요? 대다수의 국민이 인정하는 매국노 아닌가요? 그런 사람이, 자기보다 먼저 부르심을 받아서 제자가 되어 있습니다. 시몬은 순간 숨이 멎을 거 같았을 것입니다. 이런 쓰레기 같은 사람과, 한 순간도 같이 있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의견 충돌이라도 생기는 날이면, 자기도 모르게 칼에 손이 갈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되돌아가야 하나, 수도 없이 고민을 했습니다. 시몬이 열심당원을 탈퇴하고, 제자로 들어갔을 거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당원들이 눈치를 줬을 것입니다. ‘예수는 우리가 기대하는 메시야와는 거리가 멀다’고 조언했습니다. 시몬도 처음에는 예수님이 그렇게 보였을 것입니다. 긴가 민가 하는 마음이 들 때도 없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열둘 안에 자기와 비슷한 성향을 가진 사람이 있었습니다. 가룟 유다였습니다. 학자에 따라, 가룟유다를 열심당원으로 보기도 합니다. 열심당원이 아니라도, 그런 성향을 가진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같이 어울렸을 것입니다. 마가복음의 배열 순서를 따르면, 시몬이 열한 번째, 가룟유다가 열두 번째 제자입니다. 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둘은 성향이 비슷했지만, 선택은 달리했습니다. 시몬은 짝이었지만, 가룟유다에게 동조하지 않았습니다. 시몬은 예수님을 끝까지 따랐고, 가룟유다는 중도에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시몬은 예수님을 만나서 변화됐지만, 가룟유다는 예수님을 변화시키려고 하다가 안 되니, 예수님을 종교지도자들에게 팔아버렸습니다. 사람이 자기 과거를 극복하는 것이 참 어렵습니다. 하루아침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치열한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겨야 가능합니다. 사람이 자기 과거를 극복하는 것이 힘든 것은, 자기가 송두리째 부정당하는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지식을 부정해야 하고, 자기의 경험을 부정해야 합니다. 자기의 인생관을 부정해야 하고, 자기의 국가관을 부정해야 합니다. 이게 어디 쉽겠습니까? 자기 안에 혁명이 일어나지 않고서야 불가능합니다. 열심당원은 로마를 전복시켜, 이스라엘을 독립시키고 싶어합니다. 무장투쟁도 서슴지 않고, 혁명도 마다하지 않는 민족주의자들입니다. 그런 열심당원 시몬이 예수님을 끝까지 따랐다는 것은, 자기 가치관에 혁명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도, 자기 가치관이 그대로인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신기한 사람입니다. 그럴 수 없는데, 그렇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안 믿거나, 믿는 시늉만 내거나입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의 나의 주인은 나였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순간, 나의 주인이 나에서 예수님으로 바뀝니다. 주인이 바뀌는 것이 혁명입니다. 자기 안의 주인이 바뀌면, 모든 게 바뀔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기적은 자신의 변화입니다. 내가 예수 믿는 것이, 기적입니다. 내가 예수 믿고 변화된 것이 기적입니다. 그만큼 자기 변화가 힘들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변화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 정도로 변화가 힘듭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으면 변화됩니다. 예수님이 변화시키지 못할 사람은 없습니다. 진짜로 예수님을 만나면, 누구나 변화됩니다. 열심당원 시몬이 변화됐다면 말 다했습니다. 민족의 투사 시몬이, 복음의 투사 시몬이 되었습니다. 과격한 민족주의자 시몬이, 복음의 전령사 시몬이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1장에, 시몬을 떠올려볼 수 있는 말씀이 있습니다. 행 1:6절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이 질문은 누가 했는지 모릅니다. 열둘 중에 누가 했을 거 같긴 합니다. 다만 학자들은, 이 질문을 한 사람이 시몬이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내용으로 볼 때, 열심당원이라야 할 수 있는 질문이어서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이제 곧 승천을 앞두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자기들 앞에 있는 예수님이, 보고도 믿겨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에 대한 기대는 최고치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겠다,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는 것은, 시간문제로 보였습니다. 예수님이 맘만 먹으면, 언제라도 이스라엘이 회복될 거 같아 보였습니다. 그러면 자기들도 한 자리씩 할 수 있게 생겼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다소 맥이 빠졌습니다. 행 1:7절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그건 하나님 아버지의 경륜에 속한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알 바 아니요.” 너희들은 몰라도 된다는 것입니다. 대신 더 급하고 중요한 일이 있다고 합니다. 8절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그것은 우선 성령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권능을 받고, 예수 증인이 돼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나라 회복에 대해 물었는데, 하나님 나라에 대해 대답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3년이 넘도록 예수님을 따라다녔는데, 하나님 나라 가치관이 희미했습니다. 여전히 이스라엘 나라 회복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를 말해도, 이스라엘 나라밖에 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성지순례도 그냥 가면 별 볼 거 없습니다. 터만 보고 오고, 유적지나 유물만 보고 옵니다. 가기 전 열심히 공부하여, 충분히 알고 가야 합니다. 아는 만큼 보고 옵니다. 현지에서 좋은 가이드를 만나서, 잘 들을 수 있습니다. 들을 때는 이해가 되는 거 같습니다. 하지만 집에 돌아오면, 남는 게 별로 없습니다. 미리 공부하여 알고 가면, 보면서 느끼고, 들으면서 느끼고, 입체적인 지식이 됩니다.
우리는 말씀을 반복하여 듣습니다. 귀로 들으면서 들어야 하고, 눈으로 읽으면서 들어야 하고, 머리로 연구하면서 들어야 하고, 뇌로 암송하면서 들어야 하고, 가슴으로 묵상하면서 들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말씀이 입체적으로 들립니다. 성경의 단면만 볼 때, 편협한 신앙을 갖게 됩니다. 성경은 많이 아는데, 세상을 이상하게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말씀의 신학자 칼 바르트는, “한 손에는 성경을 다른 한 손에는 신문을” 이라고 외쳤습니다. 설교자가 그래야 하고, 또한 그리스도인이 그래야 합니다. 성경만 읽어서는 안 되고, 뉴스(세상)를 봐야 합니다. 성경만 알아서는 안 되고, 세상 돌아가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발을 딛고 사는 곳이 세상 아닙니까? 우리가 소금과 빛으로 살아야 할 곳이 세상입니다. 우리가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란 빛의 열매를 맺어야 할 곳이 세상입니다. 그런데 세상을 모른다? 그런데 세상에 눈을 감고 세상 돌아가는 것에 귀를 막는다? 그건 바람직한 그리스도인의 자세가 아닙니다.
시몬이 마태를 만나기 전에는, 세리는 사람도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과격한 민족주의자의 눈에는 그렇게 비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세리는 매국노로 처단의 대상이었습니다. 세리는 민족의 원수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까지 세리였던 마태와, 제자 공동체 안에서 함께 지냈습니다. 처음에는 눈도 마주치지 않을 정도로 어색했지만, 점차 이해의 폭이 넓어져 그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물론 마태도 변화되었지만, 시몬의 변화된 눈이 없었다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명심해야 합니다. 내가 변해야 세상이 변합니다. 내 눈이 달라져야, 세상이 달라져 보입니다. 시몬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세리를 보는 눈이 달라졌다면, 로마를 보는 눈도 달라졌을 게 분명합니다. 여전히 세리가 부럽거나, 로마가 존경스럽지는 않지만, 예전과는 다른 시각으로 보입니다.
예수 잘 믿는 비결이 있습니다. 그건 예수 안경을 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안경을 낄 때, 예수님의 눈으로 타인을 세상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 안경을 벗는 순간, 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내 맘대로 판단하게 됩니다. 시몬은 열심당원입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만나, 예수의 열심당원이 되었습니다. 바울도 비슷했습니다. 열심하면 둘째 가라면 서러운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하나님의 마음으로 이런 편지를 썼습니다. 롬 12:11절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이 말씀을 듣고도, 우리 안에 아무런 느낌이 없습니까? 그렇다면 큰일입니다. 코로나가 게으름을 정당화 시켜줬습니다. 적당히 예수를 믿는 것을, 용납하게 만들었습니다. 집에서 영상으로 참여하는 것을, 정식 예배로 인정되었습니다. 위드 코로나로, 사실상 코로나가 종식됐지만, 여전히 믿음의 고삐가 풀려 있고, 신앙의 나사가 조여지지 않은 느낌입니다. 코로나 이전으로의 회복은 어려울 전망입니다.
누구나 알 듯, 성경의 마지막 책이 요한계시록입니다. 요한이 밧모섬에 유배를 당했을 때, 묵시를 기록한 말씀입니다. 요한계시록이 22장까지 있는데, 1-3장 말씀은 상대적으로 친숙합니다. 소아시아 일곱교회에 보내는 편지 형식이라서, 설교로도 많이 접했기 때문입니다. 일곱교회 중에는, 칭찬받는 교회도 있었고, 책망 받는 교회도 있었습니다. 서머나교회나, 빌라델비아교회처럼 책망 없이 칭찬만 받는 교회도 있었는가 하면, 칭찬 한 마디 없이 책망만 받은 교회도 있었습니다. 계 3:19절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라오디게아교회입니다. 라오디게아교회가 받은 책망의 핵심은, 열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열심이 부족한 그들을 향해, 주님이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했습니다. 비록 라오디게아교회가 미지근한 교회였지만. 예수님은 그 교회조차 사랑하셨습니다. 주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열심 없는 교회를, 마냥 그대로 두고 볼 수는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그 교회를 책망하여 징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그럼 우리교회는 라오디게아교회가 들었던 책망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우리 중에는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는 말씀에 해당되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지금까지 시몬에 대하여 살펴본 바로는, 성경 어디에도 시몬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 6절의 물음 역시, 성서학자들이 시몬이었을 것으로 추측하는 것입니다.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1세기 이후, 제자들에 대해 기록된 역사적인 문서에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열두제자에 대한 기록이 있는 초대교회 문서를 보면, 시몬을 묘사할 때 ‘물고기’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제자마다 다른 그림과 상징들이 있는데, 시몬의 그림 옆에는 성경 위에 물고기 그림을 그려놓고 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초대교회에서 ‘물고기’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의 신분을 가리킬 때 사용되던 그림입니다. 또는 복음을 전하는 일이나 사람 낚는 어부를 묘사할 때도, 이 표현이 상징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역사학자들이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시몬이 오순절 사건 이후에 어떤 제자들보다, 복음 전하는 일을 열심히 하였다는 것입니다. 성령을 체험하고 난 후에, 어떤 제자보다도 많이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했다는 증거입니다.
열심당원은 변해도 열심당원입니다. 단지 그 열정의 방향이 달라졌을 뿐입니다. 기록에 의하면 그는 소아시아에서 전도를 했고, 그 다음에는 북아프리카로 가서, 이집트에서 특별히 전도를 많이 했다고 합니다. 그 다음에는 흑해 지역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나중에는 영국에 최초로 복음을 전한 사람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영국의 그리스도인들이 12명의 제자 중, 시몬에게 각별한 애정을 품고 있는 이유입니다. 영국에서 발걸음을 옮겨 시몬은 페르시아로 갑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복음을 반대하는 자들에게 잡혀, 톱으로 켜서 마지막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 가장 많은 변화를 경험한, 그렇게 표현하기보다는 가장 성숙한 사람으로 변모한 사람이 시몬 아닐까요? 무엇보다 분명하게 가지고 있었던 개인적 야망을, 하나님의 뜻 앞에서 복종시키는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자기 민족을 로마에서 해방시키고자 했던 정치적 야망을, 복음을 전하는 하늘나라의 열망으로 승화시킨 사람입니다. 만일 시몬이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고집했다면, 그는 예수님의 제자로 남아 있지 못했을 것입니다. 시몬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인가요?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면서,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내 속에 꿈틀대는 욕망을, 하나님의 열망으로 바꿀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께서 겟세마네에서 십자가를 앞에 두고, 하나님께 드렸던 기도를 기억해야 합니다. “아버지여, 할 수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그렇지요? 사람들이 자신의 소원을 가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제자가 되기를 소원한다면, 우리의 소원을 하나님이 원하시는지 물어야 합니다.
시몬을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또 하나의 교훈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르신 제자 중에 가장 극단에 서 있던 사람이, 세리 마태와 셀롯인 시몬이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이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을 끝까지 같이 했고, 부활하신 이후에도 여전히 주님의 제자로서, 초대교회에서 사도의 역할을 감당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가장 힘든 것이, 나와 이념이나 생각이 다른 사람과 함께하는 일입니다. 우리의 관계가 틀어지는 많은 부분은, 하나님의 뜻을 모르거나, 다른 하나님의 뜻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 뜻을 향해가는 방법, 곧 ‘이념이나 생각’이 다르기 때문일 때가 참 많습니다. 마치 이 땅의 많은 교회가 같은 하나님을 믿으면서, ‘교리’의 문제로 수많은 교파로 나누어진 것처럼 말입니다. 어느 날 주님이 제자들을 불러 놓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노니,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이 말씀을 하시는 상황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전혀 다른 이념을 가진 사람이, 서로 사랑해야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정치적 이념이 다른, 신념이 다른 사람을 같이 부르셔서, ‘하나님 나라’를 꿈꾸셨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아마도 본질적 하나님의 나라 앞에서 우리의 비본질적 생각을 내려놓고, 같이 가야 한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와 생각이 다르다고 가지 못하는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와 이념이 달라서 전파되지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너무나 다른 우리가 함께 만들어 가는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인가요? 교회에서 모든 것이 다 좋은데, “내가 싫어하는 그 사람 때문에”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다면, 주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실까요? 우리가 주님을 알고 제자가 된다는 것은, 얼마나 주님의 말씀에 충실하냐가 아닐까요? 중요한 것은 내가 가졌던 생각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 때문에 어떻게 변화되느냐는 것입니다. 사람이 진짜 변할 수 있습니까? 시몬은 이 질문에 답을 주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진짜로 만나기만 하면, 가나나인 시몬도, 셀롯인 시몬도, 열심당원 시몬도 변화될 수 있습니다. 세상에 변화되지 못할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시간이 걸릴 뿐입니다. 다만 중간에 스스로 포기할 뿐입니다. 말씀으로 변화받아 기나나인 시몬처럼 열정적으로 복음이 증인이 되어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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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와 생각이 다르다고 가지 못하는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와 이념이 달라서 전파되지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너무나 다른 우리가 함께 만들어 가는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주님을 알고 얼마나 주님의 말씀에 충실하냐에 달려있음을 알게 하옵소서. 중요한 것은 내가 가졌던 생각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 때문에 어떻게 변화되느냐에 달려 있음을 알게 하옵소서. 우리가 꿈꾸는 나라는 정의를 무시하는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를 실현하는 나라, 부강한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나라가 되게 하옵소서. 가나나인 시몬처럼 민족에 대한 열정이, 복음에 대한 열정으로까지 변화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을 진짜로 만나기만 하면, 가나나인 시몬도, 셀롯인 시몬도, 열심당원 시몬도 변화된 것처럼, 우리도 변화되어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이곳에 모인 모든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슴에 품고, 이 시대 속에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믿음의 일꾼들이 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