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숲, 그곳은 신의 안식처이며 인간의 이상향을 담은 시공
이학주(강원대학교 교양교육원, 한국문화스토리텔링연구원)
<신이 기거하는 장소>
우리 주변에는 참 많은 숲, 나무, 당(堂)집이 있습니다. 바쁜 일상이다 보니, 우리는 그냥 지나치기 일쑤입니다. 더군다나 매일 보는 숲이고, 나무이고, 당집이니, 궁금증이 별로 없기도 합니다. ‘그래 저기 숲이 있어, 그래 저기 나무가 있어, 그래 저기 사당이 있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스쳐 지나가는 공간으로 인식하지요.
그런데 주변의 나무, 숲, 당집을 자세히 봐 보십시오. 그곳에 참 많은 사연이 있답니다. 나무 하나하나마다 모두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고요. 숲에는 멋진 사연이 담겨 있고요. 당집에는 더 멋진 신(神)이 기거하지요.
어디 그뿐인가요. 우리가 일상으로 접하는 바위, 산, 물, 전각에도 우리를 보호해 주는 신이 있어요. 어떤 이는 관심이 없이 지나쳐도, 또 어떤 이는 간절한 기원을 담아 두 손을 모읍니다. 보는 사람의 눈과 마음이 다른 탓입니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일방적인 식견을 가지는 경우가 많아요. 외곬이 되는 나쁜 선례입니다. 왜 우리는 다양성을 보고 인정하라고 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편견과 고집은 사물과 사회를 양편으로만 가르기를 일삼는 나쁜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아군이 아니면 적이라는 생각은 참 잘못된 발상이지요.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 나와 다른 4차원의 생각을 하는 사람까지 우리는 가슴에 품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곳에서 진정한 아름다운 마음이 싹트고, 아름다운 사회가 구현됩니다. 다양성을 인정하면, 각자의 재능을 발휘하면서 이 세상을 더 아름답고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듭니다.
숲, 나무, 바위, 산, 물, 전각, 당집, 신당 등등의 장소를 다시 봐주세요. 미리 결정하지 말고, 오래도록 자세히 봐주세요. 그곳에는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참 예쁜 모습이 있을 겁니다. 바로 그 장소에는 우리를 사랑하고 잘살게 해주는 신이 기거하고 있거든요. 우리 모두의 아름답고 선한 마음을 담고 있어요.
<신은 왜 사람 가까이 있을까요, 신은 사람의 낙원>
이 세상에 태어나 살면서 매일매일 즐거운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우리는 즐겁고 행복한 삶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어렵고 힘들고 그래서 고통스러운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생로병사의 인생사를 터득한 사람도 터득할 때까지는 고통이 있었습니다. 성공한 세상 사람 누구를 만나도 다 고통의 과정을 말합니다. 그 고통을 이겨내야 즐겁고 행복한 순간을 맞이합니다. 즐겁고 행복한 일은 계속 주어지지 않고 순간입니다. 그때 그 순간인 찰나(刹那)라고 하지요. 왜냐고요. 사람은 한 가지 일을 성취하면 또 다른 일을 찾아가거든요. 과거에 머물면 이미 자신의 영혼은 병든 상태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찰나를 만들어주려고 신은 탄생했습니다. 신(神)은 한자어입니다. 우리 고유어는 ‘곰’이라 했지요. 요즘 우리가 쓰는 ‘고맙습니다.’의 어원입니다. ‘고맙습니다.’는 어떤 소원을 이뤄주신 신께 드리는 경건한 예배(禮拜)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왜 우리 선조들은 ‘고맙습니다.’라고 인사를 했을까요. 바로 우리에게 소원을 이뤄주고, 이어서 새로운 희망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말 ‘곰’에 해당하는 한자어 신도 같은 뜻입니다. 신(神)은 시(示)와 신(申)의 합성어입니다. 이때 신은 펼 신(伸)의 다른 표현으로 볼 수 있습니다. 곧 우리의 잠재력을 펼쳐 보이는 의미이지요. 원래 인간은 하나의 육체에 하나의 정신이 깃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엄청난 힘을 가진 정신이 하나 더 깃들면 ‘신이 내리다.’, ‘신이 지피다.’라고 합니다. 이를 일러 ‘신명(神明) 또는 신바람’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사람은 원래의 능력에 신의 능력까지 겸비한 힘을 발휘합니다. 원래 사람이 가지고 있는 잠재력의 발휘는 이렇게 발생합니다. ‘신이 지피다.’는 자신의 잠재력이 발휘되는 순간입니다. 참 멋진 경지입니다. 사람은 태어나서 자신의 능력을 모두 발휘하지 못하고 죽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잠재력인 신바람을 발휘하려고 이 세상에 태어납니다. 세상을 아름답게 가꿀 또 한 명 힘의 원천이 탄생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부모는 모두 아기의 탄생을 기도하고 기뻐하며, 축하(祝賀)합니다. 부모가 그렇게 멋진 사람을 세상에 태어나게 했거든요. 축하(祝賀)라는 말도 신이 하례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를 자세히 보면, 신은 사람의 탄생, 아이의 양육, 살아가는 존속, 생명을 가져가는 죽음까지 관장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일생을 가만히 보면 모두 자신의 의지로 살아갑니다. 곧 우리의 일생은 우리가 가꾸어 간다는 뜻입니다. 태어나고, 자라고, 살고, 죽는 일이 모두 자신의 힘이지요. 자신의 몸속에 있는 잠재력을 더 발휘하지 못할 때 죽음이 옵니다. 힘이 빠져서요.
그러고 보면 자신을 펴고, 움츠러들게 하는 모든 근원은 자신에게 있다고 봅니다. 결국 자신의 의지가 곧 신이라 할 수 있지요. 자신의 의지를 펴고, 소원을 펼 수 있게 해준 신께 우리는 ‘고맙습니다.’라는 인사를 합니다. 알고 보면, 결국 ‘고맙습니다.’라는 말은 내게 하는 인사입니다.
이처럼 신은 내가 힘내야 깃들고, 내 힘이 빠지면 사라집니다.
<당숲에 기거한 신이 추구하는 일>
신의 주체인 사람은 지금보다 나은 미래를 만들어갑니다. 소위 말하는 이상향이지요. 다른 말로 낙원, 유토피아라고도 합니다. 매일 행복한 느낌을 받을 수 있는 시공이 낙원이고 극락이고 천당입니다. 이곳에는 아픈 사람이 없고 가난한 사람이 없고 남으로부터 핍박받고 고통당하는 일이 없는 그런 안녕한 시공이고 풍요로운 시공입니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모두 안녕하고 풍요롭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시공을 만들기가 쉽지 않지요. 우리가 가진 잠재력을 드러내기도 전에 외부의 방해가 있습니다. 내가 못 하니 남 잘되는 모습 보기 싫은 사람들 때문입니다. 세상에 만연한 악(惡)의 뿌리이지요. 악은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려 하지 않고, 남의 능력을 빼앗으려고만 합니다. 선악의 대결이 주어집니다. 이런 사람은 죽어 악신(惡神)이 됩니다. 우리가 바라는 선신(善神)을 피해 사람들의 착한 재능 발휘를 막습니다. 그래서 몸이 아픈 병이 오고, 희망을 꺾고, 온갖 악행으로 사회를 어지럽힙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선신의 힘을 상징으로 드러냈습니다. 사직단(社稷壇), 서낭당[성황당(城隍堂)], 산신당(山神堂), 제천단(祭天壇), 여단(癘壇), 용왕당, 수전대(水殿臺), 장승, 솟대, 돌탑, 칠성단, 기자단(祈子壇), 산사(山祠), 기우단(祈雨壇), 성주단지, 삼신단지, 조앙단지, 터줏가리 등이 그런 상징의 표상입니다. 참 많지요. 여기에 자연적인 바위, 나무, 부적 등을 보태면 훨씬 더 많습니다. 또 부처님을 모신 사찰, 예수님을 모신 교회, 천주님을 모신 성당, 공자님과 여러 유가의 성인을 모신 사당 등도 그런 표상입니다.
이들 당집에는 각각의 신이 깃들어 있고, 그들의 역할도 다릅니다. 가령, 성황은 지역이나 마을에 들어오는 악신의 침범을 방어하고요. 여역신은 돌림병을 막고요. 장승이나 솟대는 마을 입구에서 악귀의 침입을 막아주고요. 솟대는 새들이 자유롭게 날 듯 이상세계까지도 사람에게 전해 주고요. 돌탑은 소원성취를 이뤄주고요. 산신은 조상신의 표상으로 개인과 마을 공동의 안녕과 풍요를 주고요. 기우단은 비를 내려 곡식의 풍요를 주지요. 삼신은 아이의 점지와 양육을 도와주고요. 이렇게 상징적인 당집은 모두 그런 역할을 하는 기능을 부여했습니다.
이런 당집의 옆에는 대부분 신목(神木) 또는 신수(神樹)라 일컫는 나무가 있고, 그 나무를 중심으로 당집을 둘러싼 숲이 있습니다. 물론 모든 당집마다 당숲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행여 당숲은 없더라도 당나무 하나는 있지요. 당나무는 서낭당 등 당집을 대신하는 나무입니다. 이들 나무는 사람과 신을 이어주는 매개물(媒介物)입니다. 시내에 다니다 보면 대나무에 흰 천과 붉은 천이 매달린 깃대를 꽂아둔 집을 볼 수 있을 거예요. 이 집은 무당이 있는 집의 표상입니다. 당연히 대나무는 신목이고요. 붉고 흰 천은 상서로운 기운을 가진 천입니다. 좋은 운수를 가져다주는 색깔입니다. 아주 대표적인 신수의 상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당나무나 당숲은 함부로 건들지 못합니다. 사람의 이상을 실현하는 표징인 당숲을 파괴하는 행위를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선신이 깃든 공간을 악신이 침범하지 못하게 하려는 뜻이지요. 누구든 자신의 집을 파괴하면 싫어하잖아요. 당숲은 당집을 보호하는 울타리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어요.
당숲에 한 번이라고 들어가 본 사람은 평소에 느끼지 못하던 기운이 몸에 서리는 경험을 했을 겁니다. 이런 느낌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명의 솟음’이라 볼 수 있습니다. 신바람이 깃드는 순간입니다. 이를 받을 수 있으면 우리의 몸속 깊숙이 있는 잠재력을 밖으로 끄집어낼 수 있고요. 받아들이지 못하면 당숲을 빨리 빠져나오려고 합니다. 대관령 국사 서낭당에 갔을 때 많은 사람이 그런 느낌을 말했습니다. 아직 몸속의 큰 힘을 끌어낼 준비가 안 된 상태이기에 부담을 느끼는 순간입니다. 능력을 발휘할 시공을 제공했는데, 평소와는 다른 환경이라 몸이 당황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의 이상향이 대관령 국사 서낭당에 있는지 알 수 있지요. 대관령 서낭당의 범일국사 신이 신목을 타고 강릉 남대천에 내려와 강릉사람들과 어울려 단오제를 즐기는 장면을 보십시오. 상하와 귀천이 없는 이상세계를 단오제 내내 남대천에서 펼치는 순간이거든요. 강릉사람들은 그런 평등한 평화를 단오제를 통해 기원하고 있습니다. 세계 최대의 축제가 된 원형입니다. 우리 선조들이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불러낸 바탕입니다. 사람이 곧 하늘이고, 사람의 근본은 누구나 선량하고, 평등하다는 생각 참 좋아요. 악신이 감히 한국인의 영역에 들어올 수 없는 진정 아름다운 생각입니다.
<축제에서 벌어지는 난장, 당숲 그 신성시공>
당숲에서 느낀 경험은 우리가 신을 새롭게 대하는 계기가 됩니다. 당집과 당나무[신목]와 당숲은 무수한 사람들의 이상세계를 모아놓은 시공입니다. 그야말로 신성구역(神聖區域)이지요. 우리가 당숲에 가면 신성시공(神聖時空)에 들어간 순간입니다. 악신이 섞여 혼란을 주는 세속시공(世俗時空)과는 다른 차원입니다. 세속의 혼란이 신성구역에 가면 말끔히 씻겨집니다. 그 순간 우리는 정화(淨化)됩니다. 깨끗한 사람, 태어날 때 가졌던, 순수한 그 순간으로 돌아갑니다. 누구든 감히 당집에 가서 나쁜 생각을 가지지는 않습니다. 모두 정갈한 마음으로 신을 대합니다. 원래 우리의 이상향은 당집에 들어간 순간처럼 맑고 깨끗하였거든요. 세속의 악신들이 우리를 자꾸 꼬여 지저분한 생각을 가지게 한 겁니다.
우리는 그런 맑고 깨끗한 세상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어떤 사람은 악신의 꼬임에 빠져 나쁜 행위를 하면서도 자신의 행위가 나쁘다고 생각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그 때문에 세상은 병들어 갑니다. 그런 악한 사람이 선한 사람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세상을 바꾸어보고자 노력하는 행사가 축제입니다. 이 축제는 신이 당숲의 신목을 타고 세속으로 내려와 세속의 사람들과 어울려 노는 행사입니다. 강릉단오제를 보시면 충분히 이해할 겁니다. 신 곧 우리의 이상향이 내린 신목이라 얼마나 즐거우면 힘차게 흔들릴까요.
축제(祝祭)는 빌 축(祝)자에 제사 제(祭)자를 씁니다. 빌 축(祝)자는 신께 보여드리는 주문입니다. 축문(祝文)을 뜻하는 글자가 됩니다. 축문은 신께 안녕과 복락을 기원하는 글입니다. 제사 제(祭)자는 사람이 신과 만나는 의식입니다. 보통 제의(祭儀)라고 합니다. 만남에는 음식이 있어야 하니 제물을 차리고, 만나면 즐거워야 하니 음주가무(飮酒歌舞)를 합니다. 음주가무로 인해 축제를 진행하면 난장(亂場)이 발생합니다. 난장은 평소에는 행하지 않던 음주가무를 하면서 신명을 쏟아내는 순간입니다. 누구나 행하고 싶었던 이상세계(理想世界) 실현의 현장이지요. 난장에서는 잠재능력을 펼쳐 자신이 만들고자 했던 낙원이 펼쳐집니다. 이웃과 함께 배부르고 즐겁게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었거든요. 그 순간만큼은 고통도 번뇌도 모두 사라집니다.
축제의 현장은 당숲의 원리와 같습니다. 나무 하나하나가 모여 숲을 이룹니다. 사람 한 명한 명이 모여 마을을 이룹니다. 마을은 나라가 되고 세계가 되지요. 세계 사람 모두가 모여 축제를 진행하면 세계평화가 이루어집니다. 세상 사람 모두가 꿈꾸는 낙원이 만들어집니다. 세상 사람의 잠재능력이 모두 펼쳐지는 순입니다. 그래서 숲속의 어떤 나무도 중요합니다. 숲을 이루는 데는 소나무, 닥나무, 뽕나무, 가래나무, 꽃나무 등등 모두 필요합니다. 모든 나무가 소중합니다. 나무마다 가진 능력을 펼쳐 예쁜 숲을 이루지요.
생명이 탄생하고 길러지고 살고 죽는 순환을 주는 당숲, 우리의 잠재력을 펼쳐주는 당숲, 평화로운 우리의 이상을 실현해 주는 당숲, 당숲이 보여주는 공동체가 조화롭게 우리 동네에 이뤄졌으면 참 좋겠습니다.♥(문화통신, 2023, 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