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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에서 사대주의자 김부식은 연개소문에 대하여 ‘임금을 시해하여 정권을 포탈한 잔악무도하고 포악한 역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또 거의 대부분의 사료는 중국 측 자료다. 즉 고구려 측 사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후세에 그를 다룬 기록은 연개소문에게 무척 부정적이었다. 하지만 이맥의 『태백일사』「고구려본기」를 보면 연개소문은 본래 우리의 고유한 신교 문화의 상무尙武 정신을 크게 떨친 희대의 대영걸임을 알 수 있다.
태백일사를 지은 이맥李陌(1455~1528)은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행촌 이암의 현손玄孫이다. 자는 정부井夫, 호는 일십당(一十堂)이다. 1474년(성종 5)에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학문에만 힘쓰다가 1498년(연산군 4) 44세 때 비로소 식년시에 급제하였다.
성균관 전적 등 여러 관직을 거쳐 사헌부 장령에 이르렀는데, 장숙용張淑容(장녹수)이 연산군의 총애를 믿고 분에 넘치게 재물을 탐하고 사치를 일삼자 여러 차례 탄핵 상소를 올리다가 50세(1504)에 충청도 괴산에 유배되었다.
이때의 귀양살이에 대해 이맥은 '근신해야 할 처지였기에 아주 무료한 나날을 보냈다'고 하였다. 이맥은 그 먼 곳으로 집안에서 간직하던 책 상자를 가지고 갔다. 그 상자에 담긴, 조상 대대로 내려오던 역사책과 귀양살이 하기 이전에 노인들이 전한 역사 이야기를 기록한 문서를 살피며 2년의 세월을 보냈다.
1506년 중종반정 이후 사간원의 으뜸 벼슬인 대사간(大司諫)에 임명되었으나, 이의를 제기한 대신들 때문에 우여곡절 끝에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에 머물렀다. 성품이 강직한 탓에 조정에 적이 많았던 까닭이다. 1517년(중종 12)에 연산군의 후사를 세우려 할 때에도 이맥은 "연산은 종묘에 죄를 얻었으니 속적屬籍이 마땅히 끊어져야 한다"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66세 때인 1520년, 이맥은 실록을 기록하는 찬수관(撰修官)이 되었다. 찬수관이라는 직책은 이맥에게 일생의 과업을 완수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였다. 지난 세조, 예종, 성종 때 전국에서 대대적으로 수거하여 궁궐 깊이 감춰두었던 상고 역사서를 마음껏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맥은 그 금서(禁書)들을 통해서 알게 된 사실史實과 예전 귀양 시절에 정리해 둔 글을 합쳐 한 권의 책으로 묶고, '정사正史에서 빠진 태백의 역사'라는 뜻으로『태백일사(太白逸史) 』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러나 중국을 사대하는 조선의 악습과, 성리학에 위배되는 학설을 조금도 용납하지 않는 세태 때문에 책을 세상에 내놓지 못하고, 7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집안에 비장 하였다.(여기에서 태백은 큰 밝음이란 뜻, 태백의 역사란 '동방 한민족의 대광명의 역사'를 말한다.)
이맥은 9천 년 한민족사의 왜곡 날조된 국통맥을 확고히 바로 세운 불멸의 공덕을 세웠다. 그는 신교 문화의 원전인『천부경』과 『삼일신고』에 정통한 역사학자이다. 그의 호 일십당一十堂은 『천부경』의 "일적십거一積十鉅(하나가 생장 운동을 하여 열까지 열린다)"에서 따 온 것으로, 그가 우주의 본체인 일(一太極)과 십(十無極)의 정신에 관통하였음을 나타낸다. 『태백일사』를 지은 이맥은 한민족의 신교(神敎) 삼신 문화와 원형 역사관의 화신인 것이다.
외래종교에 물들면 자신들의 뿌리를 부정한다.
머릿속에 역사관이라는 것은 불교사관, 유교사관, 이것이 이조 오백년을 내려오면서 결국은 우리 역사를 일본에게 다 내주고 노예민족으로 전락을 했던 것이다. 그 중심에 근대 역사의 문을 연 동학 혁명 농민군들의 절규가 있다.
일본인들은 1922년 12월 달에 ‘조선사편수회’ 즉,‘조선사편찬위원회’를 만들어서 1938년까지 본문만 35권이 되는『조선사(朝鮮史)』를 일본인들이 만든다.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한 대표적인 인물 이병도는 今西龍(이마니시류)의 수서관보로 들어가서, 우리 민족의 역사를 왜곡하는 데 일등 공로자가 된다. 이병도의 화려한 약력을 보면, 1925년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찬위원을 지냈고, 34년 진단학회(震 檀學會) 창립에 참여, 광복 후 서울대학교 교수가 되었고,
1952년 서울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54년 서울대학교 대학원장, 학술원 회원이 되었다. 이듬해 국사편찬위원, 56년 진단학회 이 사장, 60년 교육부장관 역임 등. 역사 날조에 앞장섰던 사람이 서울대학교 교수를 거쳐 교육부장관까지 했으니 우리 역사가 해방 후에도 바로잡힐 리가 없다. 그리고 그 밑에서 역사를 배운 후학들은 도대체 어떤 역사를 배웠겠는가? 과거 친일파들을 청산하지 못한 우리는 이 식민사관의 ‘왜독倭毒’에서 아직도 전혀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금 내몽골에 있는 하가점 유적지에서 단군조선 시대 유물이 나오니까 부정할 수 없어서 역사 교과서에“기원 전 2333년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하였다.”고 단 한 줄을 넣어준 것이다. 그렇지만 아직도 남의 얘기 하듯이 ‘단군왕검이 조선을 세웠다고 한다.’고 기술한 교과서가 있다.
얼마 전 수원에서 중고교 교사들이 학생들을 가르치려고 조그만 역사 학습서를 만들었는데, 거기에‘고조선의 문화는 사실이고 이러이러한 역사과정을 거쳤다.’고 썼다.
그러자 대한민국 정부를 대변하는 동북아재단 학자들이 교육부에 압력을 넣어서‘단군의 조선은 신화다! 당장 그것을 지워라!’라고 한 것이다. 이게 대한민국 정부, 관변사학자, 아카데미 사학자들의 공식 입장이다. 고조선은 신화다! 대한민국의 역사는 기껏해야 한 2,200년이라는 것이다.
이 문제의 배경을 보면, 일본 제국주의 역사학자들 가운데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가‘야, 너희 조선의 역사는 중국 진수의 삼국지 동이열전을 보면 기록이 있잖으냐. 저 백제가 있던 마한 땅에는 조그만 동네국가가 쉰 네 개 있었고, 가야 땅에는 열두 개, 또 신라 진한 땅에 열두 개, 그렇게 해서 약 80개의 작은 국가들이 오밀조밀하게 모여서 살았다. 그러니까 서기 4세기 후반까지 너희들은 나라가 없었다. 그러니 대한민국 국가 건설의 출발점은 1,600년밖에 안 된다.’는 것이다.
일본 역사는 2,600년으로 잡아 늘였는데 그들에게 역사 문화를 전수해 준 한국의 역사가 어떻게 2,000년도 안되는가! 지금은 일부 극복이 되어 있지만 식민문화 유산이 아직 우리 한민족의 가슴 속에 그대로 살아 있다. 그래서 한국인이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모르고 있다. 이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춘추전국(春秋戰國)을 통일한 진(秦 : BCE 221 전국통일 ~ BCE 207 멸망)나라가 15년 만에 망하고 난 후, 한 고조 유방(劉邦)과 초패왕 항우(項羽)가 6년 동안 아주 피가 터지도록 싸운다. 결국 유방이 천하를 통일하고 한(漢 : 전한 BCE 206~CE 8)제국을 열게 되는데, 그 7대 임금이 무제(武帝 : BCE 141~ BCE 87)다.
오늘의 역사학자들은 북쪽의 흉노를 굴복시킨 한 무제가 자신감을 얻어 동북방의 고조선을 쳐들어왔다, 그리하여 준왕(準王)을 몰아내고 고조선을 멸망시킨 후, 그 자리에 식민지 한사군을 설치했다고 한다. 마치 준왕이 고조선의 마지막 왕인 것처럼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역사의 진실은 무엇인가?
준왕은 고조선의 서쪽 날개였던 번조선(番朝鮮)의 부단군이었을 뿐이다. 또한 진조선(辰朝鮮)의 마지막 제왕인 고열가(古列加) 단군이 장수들의 거듭된 화란 속에 퇴위하여 고조선 본조시대가 마감(BCE 238년)된 것은, 찬적 위만(衛滿)이 번조선을 점거하여 스스로 왕위에 오르기(BCE 194년) 44년 전에 일어난 사건이다.
식민주의 사관에 물든 역사학계에서 우리 민족 최초의 국가라고 주장하고 있는 위만조선(衛滿朝鮮: BC 194년~ BC 108년) 의 실체는 과연 무엇인가?
위만(재위 BCE 194~BCE 180)은 본래 중국 한족 출신으로 한나라를 세운 유방의 죽마고우였던 노관의 부하다. 중원을 평정한 한 고조는 여태후와 더불어 개국공신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였다. 이 때 연나라 왕 노관은 흉노로 달아나고, 위만은 조선인으로 변장한 뒤 부하 1천 명과 함께 왕검성에 와서 번조선의 준왕에게 거짓 투항을 했다. 이에 준왕은 덕으로써 그를 받아주고 서쪽 변경을 지키는 수비대 책임자로 임명까지 했다. 그러나 그 곳에서 한족 망명 집단을 이끌고 몰래 세력을 기른 위만은 이듬해 준왕을 배반하고 왕검성을 쳤다. 그리고 나라 이름은 그대로 둔 채 스스로 왕이 되었다(BCE 194).
『삼국유사』에서 말한 위만조선은 바로 우리 민족의 서쪽 영토였던 번조선의 한 모퉁이를 잠깐 강탈하여 지배했던 위만정권에 불과하다. 그런데 현 역사학계에서는 자기에게 은혜를 베풀어 준 준왕을 잡아먹은 위만 같은 배은망덕한 자가 고조선의 정통을 계승하였다는 것이다.『사기』에도 분명히 위만을 연나라 사람[燕人]이라고 기록했을 뿐 아니라, 안정복의『동사강목』에서는‘위만은 나라를 찬탈한 도적’이라 했고, 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용은‘위만은 한 명의 강도에 불과하다[乃一强盜]’고 하였다. 이처럼 위만은 중국 한족의 인물로서, 한마디로 은혜를 원수로 갚은 배은망덕한 떠돌이 도적인 것이다.
위만정권은 손자 우거왕 때에 이르러 밖으로는 한 무제의 침입과 안으로는 지도층의 분열로 인해 결국 망하게 된다.(BCE 194~BCE 108). 한 무제는 그 여세를 몰아 고조선의 뒤를 이은 북부여로 쳐들어온다. 그런데 당시 북부여의 4대 고우루(高于婁) 단군은 워낙 심성이 유약하여 제대로 맞서 싸워보지도 못하고 도중에 병사하고 만다. 그리하여 우리 조선 민족이 다 넘어가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이하는데, 이를 지켜보고 있던 고조선 47대 고열가 단군의 후손 고두막한(高豆莫汗)이 마침내 군사를 일으켜 한 무제의 군대를 물리치고 나라를 구한다.
중국 한 무제가 고두막한을 죽이려고 덤벼들었다가 참패를 당했다. 그 시대를 살았던 사마천의 기록을 보더라도, 결코 한나라가 승리한 전쟁이 아닌 패전인 것이다.
사마천(BCE 145년~ BCE 86년)은 그 전쟁의 목격자였음에도 “이로써 드디어 조선을 정벌하고 사군(四郡)으로 삼았다”라고만 적고, 사군의 개별적 이름도 적지 않았다.
사마천은 왜 한사군의 이름도 적어 놓지 않은 것일까? 한사군의 이름은 고조선과 한나라의 전쟁이 끝난 200여년 후에 반고(班固)가 편찬한 <한서(漢書)> ‘무제(武帝) 본기’에 처음 등장한다. 낙랑·임둔·현도·진번이란 명칭이 이때 나타나는 것이다. 전쟁의 목격자 사마천이 적지 않았던 이름을 200여년 후의 반고는 어떻게 적을 수 있었을까?
반고는 흉노 정벌에 나섰던 두헌(竇憲)을 따라 종군했던 데서 알 수 있듯이 중화(中華)사관이 강한 인물이었다. 이처럼 사마천의 <사기史記>와 반고의 <한서漢書>와 같은 고대 역사서가 의문투성이로 기록하고 있는 한사군을 한반도 내에 있었다고 확고하게 각인시킨 세력은 물론 일제 식민사학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 국사 교과서에서는 한반도 내에 낙랑, 임둔, 진번, 현도의 한사군이 있었다고 일제에 의해 조작된 역사를 그대로 가르쳤고 한국인은 이것을 어린 시절부터 외우고 다녔다. 한국사의 시작을 식민지로 만들려는 의도였다. 이를 한국 주류 사학계가 현재까지 정설로 떠받들자 중국은 ‘이게 웬 떡이냐’하고 동북공정에 그대로 차용해 ‘한강 이북은 중국사의 영토였다’고 주장하고 있는 상황이다.
한 무제가 패퇴한 대사건, 이것은 중국 역사상 최대의 수치였다. 중국 5천년 역사에서 당태종이 안시성에 와서 양만춘 장군한테 화살을 맞아 눈 빠진 것보다 더 부끄러운 사건이다. 그래서 중국의 역사가들과 국내 사대주의자들이 이 북부여 역사를 완전히 뿌리 뽑아 버린 것이다. 이로 인해 우리민족 역사의 맥, 사통의 허리가 잘려버렸다. 그래서 국통 맥이 연결이 안 된다. 지금 역사학자들은 이를 알지 못하고 부여의 역사를 중국의 사료에 맞추어 꿰매고 있다. 그러니 너덜너덜하다.
이렇게 꿰매면 이런 작품이 나오고, 저렇게 꿰매면 저런 작품이 나오고, 전부 애꾸눈이처럼 찌그러져 버렸다. 그 결과가 예전에 방영했던 주몽이야기다. 이 드라마에서는 고주몽이 해모수의 아들로 나온다. 그게 다 중국 측 사료를 보고 만들어서 그렇다. 해모수와 주몽은 무려 120여년 이상 차이가 난다. 해모수는 북부여의 초대 단군이고 주몽은 6대 마지막 단군 고무서의 사위인데, 어떻게 주몽이 해모수의 아들이란 말인가!
「북부여기」상에 해모수 단군서부터 역대 단군들이 나오는데, 5대 단군 고두막한이 바로 동명성왕이다. 고두막한은 기원전 108년, 졸본(卒本)에서 나라 이름을 ‘북부여’에서 동방의 대광명이라는 뜻의 ‘동명(東明 : 동명부여, 또는 졸본부여)’이라 바꾸고 동명왕으로 즉위한다. 그리고 기원전 87년에는 북부여를 계승하여 조선 역사 부활의 푯대를 다시 세우니, 이분이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동명성왕(東明聖王)이다. 그런데 이 역사가 다 말살되어 지금 고주몽이 동명왕으로 왜곡되어 알려져 있다.
왕위에서 밀려난 해부루(解夫婁)가 국상 아란불과 함께 우수리강 지역의 가섭원(迦葉原) 땅에다 나라를 세우는데, 동쪽에 있는 부여라는 뜻으로 동부여(東夫餘)로 금와와 대소로 왕통이 이어졌다.
해부루는 북부여 4대 단군의 동생이다. 그리하여 고두막한이 북부여의 5대 고두막 단군이 되는데, 그때부터 북부여의 후기시대[後北夫餘]라고 한다. 북부여는 시조 해모수(解慕漱) 단군으로부터 6대 만인 고무서(高無胥) 단군 때에 막을 내린다. 그러면 세상에서 동명왕으로 잘못 알고 있는 고주몽은 어떤 인물인가? 그분은 고구려의 창업 시조다.
원래 북부여의 마지막 단군인 6대 고무서 단군은 딸만 셋이었다. 그 둘째딸이 소서노(召西弩)인데, 고주몽과 혼인을 시켜 사위로 삼아 주몽으로 하여금 북부여를 계승토록 한다. 그리하여 고주몽이 북부여의 7대 단군이 되었다.
그 후 기원전 37년에 나라 이름을 고구려(高句麗)로 변경하여 고구려 700년 역사의 창업 시조가 된 것이다. 이것이 고조선이 멸망한 후 열국시대로 들어서는 과정이다. 북부여는 단군조선과 고구려를 이어주는 잃어버린 열국시대의 역사의 맥을 이어주는 고리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부여사를 잘 알아야 한다.
북부여의 역사를 통해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가 모두 같은 뿌리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태백일사』에는 백제의 시조 온조가 고주몽 성제의 친아들이라는 놀라운 내용이 있다. 고구려 고주몽성제 시절, 첫째 부인 예씨부인에게서 낳은 동부여에 있던 첫째 아들 유리가 고구려 2세 유리왕이다.
고주몽의 둘째 부인인 소서노召西弩에게서 낳은 비류와 온조 두 아들의 미래가 불리해지자 어머니 소서노는 비류(沸流)와 온조(溫祚)를 데리고 따로 왕국을 세웠다(BCE 42). 그곳이 패대浿帶 지역, 옛 대방帶方 땅, 난하 유역이다. 그때 고주몽이 소서노에게 ‘어하라(於瑕羅)’라는 왕의 호칭을 내려 주었다.
이후 소서노가 죽자 큰아들 비류沸流가 계승하게 되고, 온조溫祚는 인천 미추홀, 지금의 문학산 쪽으로 내려왔다(BCE 19)지만 그 땅이 습해서 다시 하남 위례성으로 와서 백제를 세우면서 500년 한성백제 시대를 열게 된다.
이렇게 한성백제 시대가 계속되다가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으로 475년에 지금의 충남 공주인 웅진熊津으로 내려와 웅진백제 시대를 이어 나가게 되었다.
백제의 시조 온조는 본래 고주몽의 아들이다. 그런데 사대주의자였던 김부식은『삼국사기』에서 온조와 고주몽은 전혀 관계가 없다고 왜곡해 놓았다. 또 대상大商 연타발의 딸 소서노가 우태와 결혼해서 두 아들 비류와 온조를 낳았다고 왜곡해 놓았다.
고구려의 고주몽과 고주몽의 아들 백제의 시조인 온조를 단절시킨 것이다. 하지만『태백일사』에서는 백제 역사의 원형을 체계적으로 잡아 주고 있다. 학계에서는 백제가 한반도에만 국한되지 않고 중국 지역까지 강역을 넓혔다는 ‘대륙 백제’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그런데 이 ‘대륙 백제’를 뒷받침하는 기록이『태백일사』에 있다.
遼西地(요서지)에 有百濟所領曰遼西晉平(유백제소령왈요서진평)이오 江南(강남)에 有越州(유월주)하니
其屬縣(기속현)은 一曰山陰(일왈산음)이오 二曰山越(이왈산월)이오 三曰左越(삼왈좌월)이다.
요서 땅에 백제의 영지가 있었는데 곧 요서, 진평이고, 강남에는 월주가 있었으니 여기에 소속된 현은 첫째 산음, 둘째 산월, 셋째 좌월이다.『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 中
[삼국사기]<백제본기> 고이왕 13년(246년) 조에는 “위魏나라의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毌丘儉이 낙랑태수樂浪太守 유무劉茂, 삭방태수朔方太守 왕준王遵과 더불어 고구려를 정벌하였는데 (백제) 왕은 (낙랑이) 비어있는 틈을 타서 좌장左將 진충眞忠을 파견하여 낙랑의 변경을 습격하고 그곳 주민을 빼앗았다”고 하였고, 분서왕 7년(304년) 조에도 “몰래 군사를 보내어 낙랑(군)의 서부 현을 공격하여 빼앗았다”는 기록이 보인다.
백제는 이미 고이왕 이전부터 요서 지역에 진출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낙랑군이 비어 있는 틈을 타서 그 서부 현을 칠 수 있었던 것이다.
『송서宋書』 원가元嘉 27년(451년) 조에, ‘서하西河(산서성 하동도 임분현) 태수에 백제가 풍야부馮野夫를 멋대로 임명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은 중국 사람들이 감정을 가지고 기록을 한 것이다. 자기나라 땅이었는데 백제에서 제후를 멋대로 임명했다고 한 것인데, 백제가 그 땅을 점령하여 옛 땅을 복원을 했으니까 그런 기록을 했다.
요서뿐만 아니라 나머지 지역에 분봉지分封地가 있었고, 부용국附庸國을 거느렸다. ‘반파탁, 다라, 전라, 사라, 지미마련, 강시문, 하침라’ 같은 부용국, 제후국인데 지금 우리가 알 수도 없는 이름이다.
24세 동성왕(479~501)과 25세 무령왕(501~523) 때에는 이 담로와 같은, 거점據點 성城이 발달했는데, 이런 것이 중국 역사 기록에 있다. 「양직공도」에는, 이 담로는 중국의 군현郡縣과 같다고 하고, 국가를 통치하는 큰 성은 고마固麻라 한다고 했다. ‘읍邑을 담로라 하는데 중국의 군현과 같다’는 말은『양서梁書』「백제전」에도 나온다. 그러니까 동성왕과 무령왕 때, 5세기 중엽에서 6세기 중반까지 왕후를 임명할 지방행정 군현 조직이 대륙 백제 땅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 구체적인 호칭이 바로 담로다.
백제의 22담로가 있었는데 여기 광양태수, 오서군, 진평군, 청하태수, 서하태수, 성양태수, 광릉태수가 있던 곳에 담로가 있었다. 저 아래 광서성에도 담로가 있었다. 그런데 담로는 오키나와 유구국에도 있고, 대만과 필리핀에도 있고, 인도네시아까지 그 여러 나라에 있었다. 그런데 홍콩에서 수백 킬로를 가보면 거기 광서성에 백제역, 백제 마을, 백제 행정구역이 지금 그대로 다 있다는 것이다. KBS에서 얼마 전에 이것을 취재해서 보여준 적이 있다.
일본에는 담로도, 인도네시아 같은 데는 담수항, 저 위에 담수장, 저 말레이시아, 필리핀 같은 데도 담로문화가 있었다. 이 백제는 동아시아에서 국제무역을 한 해양 대제국이었다. 그런데 지금 광서성 옆 광동성 같은 데에서는 ‘아빠담로’라는 말을 쓴다. 우리말하고 똑 같다.
대륙백제의 역사를 기록한 중국의 사서들
중국의『남제서』「백제전」을 보면 ‘매라왕, 벽중왕, 불중후, 면중후’ 같은 왕과 제후, 즉 백제의 천자가 임명한 왕후王侯의 이름이 나와 있다.『구당서舊唐書』나『신당서新唐書』에 ‘백제왕은 동서 두 성에서 거주하고 있다’는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열전列傳」‘최치원’에 보면, 당나라에서 상관上官에게 올린 그 글에 ‘고구려, 백제는 강성할 때 백만 대군을 가지고 남쪽으로는 저 오월을 침략하고, 북쪽으로는 유주幽州, 연燕나라, 제齊나라, 노魯나라를 소란케 해서 중국의 큰 좀이 되었다’고 했다. 최고운도 사대주의 정신이 있었다.
백제의 전체적인 역사과정에서 보면, 백제가 245년에서 580년대까지 한 340년 정도 ‘대륙 백제 시대’가 있었고, 이 시기에 중국 동쪽에 있었던 배달국, 단군조선 때의 영토를 복원했다.
대륙 백제는 어떻게 운영되었는가?
백제의 영토 확장에 따라 식민지 접경 지역 국가들과 충돌이 불가피하게 되었는데, 당시 백제가 얼마나 막강했는지 보여주는 기록이 여러 문헌에 등장한다. <북제서北齊書> 후주기後主記에는 571년 "백제의 왕 여창餘昌(27세 위덕왕)을 사지절使持節(황제의 신임을 표시하는 부절을 가졌다는 뜻), 도독都督(군사책임자), 동청주 자사東靑州刺史(행정책임자)로 삼았다.<以百濟王餘昌爲使持節都督東靑州刺史>.“라고 하여 산동반도山東半島가 백제 소유였음을 드러냈다.
단명한 왕조들이 흥망을 거듭하던 중국의 위진 남북조 시대(220~589)에 한족漢族 정권은 중국 남부에서 남조를 형성하였으나 그 세력은 허약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들은 백제의 힘을 빌어 북방을 수복해 보려는 생각뿐이었다. 따라서 백제와 화친하면서 중국 동부 해안 지역을 관장하는 백제의 관리와 장수들에게 중국 관직을 제수한 것이다. 백제 또한 그러한 관직이 필요했다. 왜냐하면 중국 관직은 현지 한족과 토착인을 지배할 수 있는 명분을 주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남제서南齊書], [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백제와 중국의 관계를 보여주는 기록들이 있다. 백제 동성왕東城王 때인 488년과 490년에, 후위後魏의 기병 수십만 명이 백제가 통치하는 대륙의 영토를 침략했다가 크게 패하고 돌아갔고(十年, 魏遣兵來伐爲我所敗,([삼국사기]<백제본기>), 수훈을 세운 백제 장군들이 광양태수, 대방태수, 광릉태수, 청하태수, 낙랑태수, 성양태수, 조선태수 등의 관직을 제수 받았다([南齊書]<百濟傳>)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백제는 한반도 남부, 호남을 차지했던 백제다. 하지만 백제는 단군조선 당시 중국 동부 지역의 위로부터 아래까지(번조선 땅)를 거의 다 지배했다.
실제 한반도보다 훨씬 큰 ‘대륙 백제’가 중국의 오른쪽, 동부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온조의 아버지인 고주몽의 역사 통치 정신이 다물주의多勿主義이기 때문에, 단군조선의 영역을 다시 복원한다는 강건한 역사 정신이 백제 왕들에게 그대로 지속된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근원은, 뿌리는 해모수가 세운 북부여다’라는 역사 정신으로 26세 성왕 때 나라 이름을 남부여로 바꾼 것이다.
백제의 전체적인 역사 과정에서 보면 245년~ 580년대까지 약 350년 동안 산동성의 제나라, 노나라, 강남에 있는 월주(산음, 산월, 좌월)를 모두 회복한 ‘대륙 백제 시대’가 있었고, 이 시기에 중국 동쪽에 있었던 배달국, 단군조선 때의 영토를 복원했다. 백제를 떠올리면 가장 친숙한 단어가 ‘22담로’다. 그런데 백제를 통치하는 제도인 ‘22담로’가 대륙과 일본을 포함해서 동아시아 전체를 통치했던 대륙 백제를 넘어선 해양 대제국을 건설했다
백제의 ‘담로檐魯’가 무엇인지 알 때 대륙 백제, 옛 대백제의 역사 정신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6세기 중국 양梁나라 때 제작된 사신도使臣圖인 「양직공도梁職貢圖」에는 ‘읍을 담로檐魯라 하였는데 이는 중국의 군현과 같으며 22담로가 있었다’. 백제가 ‘반파, 탁, 다라, 전라, 사라, 지미, 마련, 상기문, 하침라’ 등의 부용국附庸國, 즉 제후국을 거느렸었다.
백제 24대 동성왕과 25대 무령왕 때에는 이 담로와 같은 거점 성城이 발달했는데 이 내용이 중국 역사 기록에 있다. 즉 동성왕과 무령왕 때, 5세기 중엽에서 6세기 중엽까지 ‘중국 땅에 왕, 제후, 귀족을 임명한 국가 통치 지방행정 군현 조직이 22개 있었다’는 것이다. 그 구체적인 호칭이 바로 담로다. 그래서 일본에는 담로도, 인도네시아에는 담수항, 말레이시아와 필리핀에도 담로문화가 있었다. 백제는 국제무역으로 동아시아를 제패한 해양대제국이었던 것이다.
해양대제국이었던 백제의 실제 영토를 담로제를 통해서 살펴보면 중국의 동부와 중부 일부 지역, 남부 지역, 그리고 동아시아 전체를 통관하는 대국이었다. 삼신문화, 삼한문화 통치 방식으로 보면, 중국에는 한반도보다 몇 배나 더 큰 대륙 백제에 우현왕을 두어 통치하고, 일본에는 야마토 정권 당시 나라 지역에 좌현왕을 보내 통치했다.
이 담로제의 기원은 6세 달문 단군 때 구월산 상춘에서 당대의 대국, 소국, 읍락의 모든 제후들이 모여서 삼신상제님께 천제를 올린 기록이 있다. 그때 폐백을 바친 자는 대국이 2곳, 소국이 20곳, 읍락이 3,624곳이었다. 크고 작은 나라 22개국이 와서 문화 종주국인 단군조선에 조공을 바치고 삼신상제님께 천제를 같이 올렸다.
단군조선에서 백제 22담로의 기원을 찾을 수 있다. 대백제국은 역사 광복, 문화 복원 다물주의의 강력한 의지를 단군조선에서 가져온 것이다. ‘백제, 신라는 매년 두 번씩 단군조에 천제를 올렸다’는 기록이 조선 시대의 역사서에도 있다.(『승정원일기』 74책, 영조 47년 10월 7일 기사 참조).
이맥의『태백일사(太白逸史)』「고구려본기」를 보면 연개소문은 본래 우리의 고유한 신교 문화의 상무尙武 정신을 크게 떨친 희대의 대영걸임을 알 수 있다. 603년 영양제 홍무 14년 5월 10일에 태어난 그는 아홉 살에 조의선인(皁衣仙人)이 되었다.
모습이 거대하고 위엄이 있으며 의기가 호방하고 초일한 자세가 있었고, 몸에는 다섯 개의 큰 칼을 차고 있었다. 병사들과 함께 섶에 나란히 누워 자고, 손수 표주박으로 물을 떠 마셨다고 한다. 또한 당대 최고의 병법가이기도 하였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조선상고사』에서 당태종의 24장 중 제1 명장인 이정이 연개소문에게 병법을 배웠다고 전하고 있다.
그렇다면 연개소문이 영류제榮留帝를 시해한 패륜아라는 굴레를 씌운 진실은 무엇이었을까?
이는 세계관의 충돌에서 비롯되었다. 고구려 27세 영류제는 즉위 후 당과 친선 외교를 고수하였다. 물론 수나라와 대전을 겪은 뒤이기에 전략적으로 친선을 도모할 필요는 인정할 수 있지만, 당에게 고구려의 봉역도封域圖(강역도)를 바친 일(628년)이나, 당의 고구려 침입 때 당의 후방을 견제해 줄 수 있는 세력인 돌궐 주력군이 당에 의해 격파되고, 힐리가칸이 사로잡혔을 때 수수방관한 부분은 굴욕적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631년 대수對隋 전승기념탑인 경관京觀을 당의 요청에 의해 헐어 버렸기 때문에, 강력한 상무 정신을 가진 연개소문 같은 대당 강경파들의 격렬한 반발을 사기에 충분하였다. 그러던 중 642년 정월 영류제는 막리지인 연개소문에게 장성長城을 쌓는 역사를 감독하게 했다.
고구려의 막리지莫離支는 군사와 정치를 총리總理하는 비상시국 최고 관직이다. 이런 위치에 있는 이를 한직으로 보냄으로써 대당 강경 세력을 무력화하려 했다. 이에 때를 보던 연개소문 일파는 정변을 일으켰다. 이는 당에 대한 굴욕적인 외교로 일관한 영류제와 그 세력에 대한 연개소문과 대당 강경파의 혁명이었다.
즉 연개소문이 고구려의 독자적인 천하관을 지닌 정치 세력이었다면, 영류제는 당 제국에 복속됨으로써 생존을 도모하는 정치 세력이었다. 또한 연개소문은 정변 당시 임금을 시해하지 않았다. 변고를 전해 들은 영류제는 몰래 달아나 송양松壤에서 군사를 모으려고 했다. 송양은 현재 평안도 강동군 대박산으로 구을단군의 능이 있는 곳이며 고주몽 성제가 다물도多勿都로 삼은 곳이다. 하지만 영류제는 자신의 의도에 응하는 이가 없자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여 자결하였다.
정변 후 연개소문은 보장제寶臧帝를 제위에 모셨다. 그는 모든 법을 공정무사한 대도로 집행함으로써, 자신을 성취하고 완성하여 스스로 자신의 주인이 되고(성기자유成己自由), 만물의 이치를 깨쳐 차별이 없는(개물평등開物平等) 나라를 만들었으며, 조의선인들에게 계율을 지키게 하였다. 또한 무조건적인 강경책을 펴지는 않았다. 당의 국교인 도교 수입을 자청하여 독자적인 천하관을 유지하면서도 전술의 유연성을 택하는 정치가의 면모도 보여주었다.
대막리지 연개소문은 보장제 개화 4년에 벌어진 국운을 건 당태종과의 전쟁을 총지휘하였고, 안시성 혈투를 지원하였으며, 조의들을 지휘하면 신출귀몰하게 전략을 구사하여 마침내 승리를 이끌어 냈다. 세계 최강대국 당이 전 국력을 기울여 쳐들어온 전쟁을 당당하게 승리로 이끌어 고구려를 구해 낸 용장이자 영웅인 것이다.
太白逸史(태백일사) 高句麗國本紀(고구려국본기)
莫離支가 率數百騎하고 巡駐灤坡하야
詳問情形이오 遣命摠攻四擊할새
延壽等은 與靺鞨로 夾攻하고 楊萬春은 登城督戰하니
士氣益奮하야 無不一當百矣라
世民이 憤不自勝하야 敢出决戰이나
楊萬春이 乃呼聲張弓하야
世民이 出陣이라가 矢浮半空하니 遂爲所中하야 左目沒焉이라
世民이 窮無所措하야 從間逃遁할새
命世勣道宗하야 將步騎數萬하야
爲殿하니 遼澤泥淖하야 軍馬難行이라
命無忌하야 將萬人하야 剪草塡道하고 水深處는 以車爲梁하고
世民이 自繫薪於馬鞘하야 以助役하니라
冬十月에 至蒲吾渠하야 駐馬하고 督塡道하며
諸軍이 渡渤錯水할새 暴風雪이 占濕하야 士卒이 多死者어늘 使燃火於道하야 以待之라.
막리지(연개소문)가 기마병 수백을 거느리고 순시하다가 난하灤河 언덕에서 멈추고 전황을 자세히 물은 뒤에, 사방에서 총공격하라고 명하였다. 연수 등이 말갈 군사와 함께 양쪽에서 협공하고, 양만춘이 성에 올라 싸움을 독려하니 사기가 더욱 높아져서, 하나가 백을 당하는 용맹을 보이지 않는 자가 없었다.
당태종 이세민이 스스로 울분을 참지 못하고 감히 나서서 결판을 내려 하였다. 이때 양만춘이 소리를 지르며 활시위를 팽팽하게 당겼다. 이세민이 진을 나서다가, 공중을 가르며 날아온 화살에 적중되어 왼쪽 눈이 빠져 버렸다. 이세민이 어찌 할 바를 모르고 군사들 틈에 끼어 달아나며, 이세적과 도종에게 명하여 보병·기병 수만 명을 거느리고 후군으로 따르게 하였다.
요택에 이르자 진창 때문에 군마의 행군이 어려워 장손무기에게 명하여 1만 명을 거느리고 풀을 베어서 길을 메우고
물이 깊은 곳은 수레로 다리를 만들게 하였다. 당태종 이세민 자신도 스스로 말채찍으로 땔나무를 묶어 일을 도왔다.
겨울 10월에, 포오거(蒲吾渠)에 이르러 말을 쉬게 하고 길 메우는 일을 독려하였다. 모든 군사가 발착수(渤錯水)를 건널 때에 거센 눈보라가 몰아쳐 군사들을 적시니 죽는 자가 많았다. 이에 길에 불을 피우게 하고 기다렸다.
時에 莫離支淵蓋蘇文이 乘勝長驅하야 追之甚急하니
鄒定國은 自赤峰으로 至河間縣하고
楊萬春은 直向新城하야 軍勢大振하니
唐奴多棄甲兵而走하야 方渡易水라
時에 莫離支가 命延壽하야 改築桶道城하니 今高麗鎭也라
又分遣諸軍하야 一軍은 守遼東城하니 今昌黎也오
一軍은 跟隨世民하고
一軍은 守上谷하니 今大同府也라.
於是에 世民이 窮無所措하야 乃遣人乞降하니
莫離支가 率定國萬春等數萬騎하야 盛陳儀仗하고 鼓吹前導하야 入城長安하야
與世民으로 約하니 山西·河北·山東·江左가 悉屬於我라.
이때 막리지 연개소문이 싸움에 이긴 김에 계속 휘몰아쳐서 급히 이들을 뒤쫓았다. 추정국(鄒定國)은 적봉赤峰에서 하간현河間縣에 이르고, 양만춘은 곧바로 신성新城을 향하며 군세를 크게 떨쳤다. 많은 당나라 군사가 갑옷과 무기를 버리고 달아나, 바야흐로 역수易水를 건너려 하였다. 이때 막리지가 연수에게 명하여 용도성(桶道城)을 개축하게 하였는데, 용도성은 지금의 고려진이다. 또 전군을 나누어 보내되, 일군은 요동성을 지키게 하니 그곳은 지금의 창려昌黎이고, 일군은 이세민의 뒤를 바짝 쫓게 하고, 또 일군은 상곡上谷을 지키게 하니 상곡은 지금의 대동부大同府이다.
이에 당태종 이세민이 궁지에 몰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사람을 보내어 항복을 받아 달라고 애걸하였다. 막리지가 정국, 만춘 등의 기병 수만을 거느리고 성대하게 의장을 갖추어 북 치고 나팔 부는 군악대를 앞세우고 장안에 입성하였다. 당태종 이세민과 더불어 약정約定하여, 산서성·하북성·산동성·강좌江左가 모두 고구려에 속하게 되었다.
명나라 장편 희곡 <설인귀과해정동백포기(薛仁貴跨海征東白袍記)>에서는 연개소문은 당태종을 ‘소진왕’으로 낮춰 부른 뒤 “너의 강산이 아무리 넓다 해도 400개 주에 불과하다. 내가 단지 일개부대로도 너의 땅을 피바다로 만들 수 있다. 내 앞에 투항한다면 내 친히 전쟁에 나가지 않겠다. 네가 응답하지 않는다면 당나라를 방목장으로 만들어버리겠다.” 라고 호령한다.
연개소문이 당태종을 쫓는 장면은 이 희곡의 절정을 이루는 백미인데, 당태종이 진흙구덩이에 빠져 곤궁에 처하는 장면이 연출된다.
“조상님이여, 나 이세민을 가엽게 봐주소서. 내가 조정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말을 타고 진흙구덩이에 빠지니 만민을 통치하는 조정도 아무 소용이 없구나! 말을 아무리 때려도 진흙구덩이에서 빠져나갈 수가 없으니, 내 황제인 것도 아무 소용이 없구나. 흙을 잡아 향으로 삼아 기도드리니 용의 신이여 내 말을 들으소서. 내 너무나 상심하여 두 눈에 눈물이 흐르니 나 당나라 왕 이세민을 구해주소서! 누가 나를 구해준다면, 내 당의 강산 절반을 주겠다. 만약 나를 믿지 못한다면 너를 황제를 시켜주고 내가 신하가 되겠노라.”
여기에 나타난 당태종은 ‘천자’의 이미지는 간데없고 무능하고 겁에 질린 황제의 모습이다.
북경 민족대학 황유복 교수는 북경 동북쪽의 황량대에서 ‘고려포보(高麗鋪堡)라 새긴 비석을 발견하였다. 이는 연개소문의 중원지역 공략설과 깊은 관련이 있다. 그가 발견한 황량대를 연결하면 고구려군이 활동하던 것은 북경 일대로 추정된다. 당시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본다면 연개소문이 만리장성을 넘어, 중국 깊숙이 지금의 북경까지 쳐들어갔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강소성 염성시 건호현에는 몽롱탑(蒙朧塔)의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당태종 사후 고구려와 당 사이의 전쟁은 계속되었다. 당은 수시로 고구려를 침입하여 고구려가 항시적인 전시 상태를 유지하게 하면서 국력을 서서히 소진시키는 전략을 구사하였다.
고구려의 국운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였건만, 연개소문은 657년 10월 7일 형제간의 우애를 강조하며 세상을 떠났다. 묘는 운산의 구봉산에 있었다. 이후 660년 7월 백제가 당군 13만과 신라군 5만으로 구성된 나당 연합군에 의해 멸망당하면서 정세는 급변하였다.
서쪽과 남쪽에서 동시에서 공격을 받게 된 고구려는 662년 정월 평양 인근의 사수蛇水 유역에서 당의 장수 방효태龐孝泰와 그 아들 열세 명을 포함한 당군 전원을 몰살시키기도 하였다. 백제가 망하고 고립된 상황에서도 당의 대군을 맞아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싸워 이겨 냈다.
그러나 연개소문의 공백은 국력 통합의 구심점이 공백을 맞이했다는 것을 의미했고, 이는 그의 아들과 동생의 권력 투쟁으로 변했다. 큰아들 남생은 동생들과 분쟁을 벌이다가 적국인 당에 항복했고,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淵淨土는 신라에 항복하였다. 당과 신라의 연합군은 668년 평양성을 공격했으며 내분으로 인해 마침내 평양성이 함락되었다.
이러한 역사 과정의 결과 연개소문에 대한 기록은 그를 저주하고 두려워한 당唐의 기록만 남게 되었고, 우리는 지금까지도 당의 시각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연개소문은 나라가 망하느냐, 아니면 살아남느냐 하는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고구려를 지켜낸 지도자였다. 이런 그를 단재 신채호는 우리 4천 년 역사에서 첫째로 꼽을 수 있는 영웅으로 평가하고 있다.
최근에 발굴된 상경성의 제2궁전지의 전면이 19칸인 사실(당나라 장안성의 함원전은 11칸)과 1980년 발견된 정효공주의 묘지명에서 그 아버지인 문왕을 ‘황상皇上’이라 부른 것이다. 왕비의 묘비명에서 황후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다.
고려 역시 출발은 천자국이었다. 태조 왕건은 천수天授, 광종은 광덕光德, 준풍峻豊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였다. 수도 개성을 황도皇都라 일컫고 원구단을 설치하여 천제天祭를 올렸다.
※ 甲午三十四年이라 十月에 東明國高豆莫汗이 使人來告하야 曰我是天帝子라 將欲都之하노니 王其避之하라한대 帝難之러시니 是月에 帝憂患成疾而崩하시고 皇弟解夫婁가 立하시니라.
재위 34년 갑오(단기 2247, BCE 87)년 10월에 동명국(東明國) 고두막한이 사람을 보내어 고하기를, “나는 천제의 아들[天帝子]이로다. 장차 여기에 도읍하고자 하나니, 임금은 이곳을 떠나도록 하시오” 하니, 임금께서 난감하여 괴로워하셨다. 이 달에 고우루단군께서 근심과 걱정으로 병을 얻어 붕어하셨다. 아우 해부루解夫婁가 즉위하였다. (「북부여기 上」)
중국과 일본이 왜곡한 우리 역사의 결론은 ‘한반도 북쪽은 중국의 식민지로, 남쪽은 일본의 식민지 역사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이게 우리 대한민국의 교과서 내용이다.
‘한국의 역사는 청동기 역사로 봐도 기껏해야 한 2,700년, 3천년을 넘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일본 식민사학자들이 주장하는 틀을 전혀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일본은 ‘일본이 가야에 임나일본부라는 식민지 통치본부를 세워놓고 한반도 남부의 신라, 가야, 백제를 다스렸다.’고 조작했다. 지금 국내에서는 어느정도 극복되었다고 하지만, 역사학자들이 쓴 책이나 논문에서는 극복되지 않고 있다. 일본 역사교과서 또한 임나일본부 역사가 사실인 것처럼 왜곡해 가르치고 있다.
『태백일사太白逸史』<고구려국본기>에 의하면 ‘본래 일본의 구주(九州, 큐우슈우)라는 땅은 저 북쪽에 있는 신라, 가야, 백제, 고구려 사람들이 와서 문화를 가르쳐 주고 개척한 곳이다. 구주(九州)는 본래 왜인이 대대로 살던 곳이 아니다(본비왜인세거지本非倭人世居地라).’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대마도는 두 개의 섬으로 이뤄져 있는데 그 이름이 본래 임나(任那)다. 그것을 삼가라(三加羅)로 나눠서 고구려, 백제, 신라가 통치했다.”고 했다.
단군조선은 삼신문화(三神文化)를 국가 통치 제도로 뿌리내려, 나라를 삼한(三韓)으로 나누어 다스렸다. 곧 한반도를 마한馬韓, 압록강의 북쪽을 진한辰韓, 그리고 요하 서쪽, 지금의 산동성이 있는 쪽을 번한番韓이라 하였다. 이게 삼한관경제(三韓管境制)다. 삼한三韓으로 나라의 국가 영토 경계를 나누어가지고 다스렸다는 것이다. 이 삼한三韓의 삼경 균형이 무너지는 날 고조선이 패망을 당한다는 것이다. 이게 고려사 김위제전(金謂磾傳)에도 나오고, 조선왕조 때 이익의 성호사설(星湖僿說)에도 이 내용이 있다. 이 삼한(三韓)체제는 22대 색불루(BC 1285~ BC 1238) 단군 때부터 서서히 동요가 일기 시작했다.
색불루 단군이 쿠데타로 권좌에 올라 도읍을 송화강 아사달에서 백악산 아사달로 옮기게 되면서 차츰 삼조선(三朝鮮) 체제로 들어간 것이다. 그러다 진조선(진한)의 44대 구물(BC 425~ BC 397) 단군 때에, 병권을 막조선(마한)과 번조선(번한)에 완전히 나눠줌으로써, 삼조선三朝鮮이 각각 독립된 국가로 운영되면서 삼한관경 체제가 완전히 무너졌다. 이 때 국호를 대부여로 바꾸었는데, 이는 한양조선의 고종황제가 국운을 살리기 위해서, 최후의 탈출구로 나라 이름을 대한제국으로 바꾼 것과 상황이 매우 흡사하다.
그러다가 47대 고열가 단군에 이르러 나라의 정사(政史)가 혼란에 빠지자, 임금이 왕위에서 스스로 물러나버렸다. 그래서 오가(五加)가 연정을 하게 되는데, 그것이 6년 동안 이어졌다. 그런데 고열가 단군이 물러나기 1년 전인 BCE(기원전) 239년에, 해모수가 웅심산을 중심으로 북부여를 열었다. 그리고 이후 오가(五加)의 공화정을 접수하고 고조선의 국통을 계승하게 된다.
삼국유사에서 단군왕검이 1908세를 살았다고 한 기록은 무슨 뜻인가?
삼국유사에서 단군왕검이 1908세를 살았다고 한 기록은 무슨 뜻인가?
단군왕검이 나라를 삼한三韓으로 다스리면서 21세 소태(BC 1337~ BC 1286)단군 때, 쿠테타가 일어나 1048년 동안 나라의 수도를 유지했던 송화강 아사달에서 백악산 아사달로 수도를 옮기게 되는데, 44세 구물(BC 425~ BC 397) 단군 때는 수도를 장당경 아사달 시대로 옮겨가면서 나라 이름을 대부여大夫餘로 바꾼 것이다.
삼국유사에 보면 단군왕검이 1908세를 살았다고 하는데, 그 이야기의 진실은 수도 송화강 아사달 1048년 시대와 백악산 아사달 860년 시대를 합하면 이게 1908년이다. 단군조선은 44대 구물(BC 425~ BC 397) 단군의 대부여(大夫餘) 이후 마지막 47세 고열가(BC 295~ BC 238)단군까지가 188년이다. 그리고 대부여大夫餘는 BC 232년 해모수의 북부여北夫餘로 계승되고, 북부여는 다시 고구려(BC 58년)와 대진국(발해,AD 668년)으로 국통 맥이 이어진다.
유럽을 뒤흔든 흉노족은 선우를 ‘탱리고도(撑犂孤塗) 선우’라고도 불렀는데, 탱리(撑犂)는 ‘하늘’을 뜻하는 흉노어 ‘텡그리tengri’의 음역이고, ‘고도(孤塗)’는 아들을 의미한다. 곧 탱리고도는 하늘의 아들, 즉 천자(天子)다. 동이족의 천자사상과 일치한다.
흉노는 천지와 일월을 숭배하고, 나아가 조상을 숭배하며, 1년에 세 번 큰 제사를 지냈다. 선우는 매일 해와 달에게 절하고 자신이 거처하는 게르(천막집)의 문도 항상 동쪽을 향해 배치하였다. 동쪽을 중시하는 동이족의 관습과 일치한다. 세계사에서 수수께끼로 남아있었던 흉노의 기원에 대해서 유일무이하게 밝혀주는 사서가 바로『 단군세기 』다.
甲辰六年(갑진육년)이라 命列陽褥薩索靖(명열양욕살삭정)하사 遷于弱水(천우약수)하시고 終身棘置(종신극치)러시니 後(후)에 赦之(사지)하사 仍封其地(잉봉기지)하시니 是爲凶奴之祖(시위흉노지조)라.
재위 6년 갑진(단기 157, BCE 2177)년, 임금께서 열양列陽 욕살 삭정索靖을 약수弱水 지방에 유배시켜 종신토록 감옥에 가두셨다. 후에 용서하여 그 땅에 봉하시니, 흉노凶奴의 시조가 되었다.(「단군세기」3세 오사구 단군)
丙辰五年(병진오년)이라 凶奴(흉노)가 入貢(입공)하니라.
재위 5년 병진(단기 1429, BCE 905)년, 흉노匈奴가 공물을 바쳤다. (「단군세기」30세 내휴단군)
戊寅(무인)에 匈奴(흉노)가 遣使番韓(견사번한)하야 求見天王(구현천왕)하고 稱臣貢物而去(칭신공물이거)하니라.
무인(단기 1691, BCE 643)년 흉노가 번한에(52세 엄루왕 때) 사신을 보내어 천왕을 뵙기를 구하고, 스스로 신하라 칭하고 공물을 바치고 돌아갔다. (『태백일사』「삼한관경본기」)
묵특선우는 흉노 제국을 삼신문화의 고향인 단군조선(고조선)과 같이 셋으로 나누어다스렸다. 즉 자신은 중앙을 통치하고 동쪽은 좌현왕이, 서쪽은 우현왕이 통치하게 했던 것이다. 좌현왕은 우현왕보다 우대되었는데 보통 선우의 아들을 좌현왕으로 삼았다. 좌현왕을 좌도기왕左屠耆王이라고도 하였는데, 항상 선우의 태자를 좌현왕으로 임명하였고, 선우의 유고有故 시 그 자리를 계승하였다. 흉노의 좌우현왕 제도는 사마천의『사기』「흉노열전」에 언급되어 있다.『사기』「흉노열전」에는 “좌우현왕, 좌우곡리왕, 좌우대장, 좌우대도위, 좌우대당호, 좌우골도후를 두었다. 흉노에서는 ‘현賢’을 일러 ‘도기屠耆’라 하기 때문에 항상 태자를 좌도기왕으로 삼았다[置左右賢王, 左右谷蠡王,左右大將, 左右大都尉, 左右大當戶, 左右骨都侯. 匈奴謂賢曰‘屠耆’, 故常以太子爲左屠耆王.]”라고 하였다.
흉노는 그 수가 계속 늘어나 진나라 때 와서는 이미 오르도스와 몽골고원, 천산산맥 일대를 주름잡고 있었다. 한나라 초기 묵특선우冒頓單于(BCE 209~BCE 174) 때 서쪽의 월지와 동쪽의 동호東胡(번조선)를 격파하고 아시아 최초로 유목 대제국을 세웠다. 그후 내분으로 남·북흉노로 분열하게 된다. 이 중 북흉노는 사라진 듯 했지만 4세기 중반에 갑자기 ‘훈Hun’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의 무대에 모습을 드러냈다.
훈족은 370년경 흑해 북부에 나타남으로써 처음으로 유럽에 그 존재를 알렸다. 이들은 볼가 강을 건너 남러시아 초원지대에 거주하던 알란족을 공격했고, 이어 알란족과 함께 동고트족과 서고트족을 공격하여 유럽 대륙에 민족이동의 대물결을 야기하였다. 공포에 질려 도주한 게르만족이 밀물처럼 로마 국경 안으로 몰려들자 이를 제어하지 못한 서로마 제국은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훈족의 이동으로 서쪽에서 새 역사의 물결이 일고 있었을 때 흉노의 또 다른 이동이 동쪽에도 있었다. 때는 한 무제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 무제가 흉노를 공략할 때 흉노 좌현왕의 아들이 자기 어머니와 함께 한나라의 포로가 된 것이다. 왕자는 궁궐의 말을 돌보는 일을 맡았는데, 품위 있는 거동과 성실함이 한 무제의 눈에 띄어 무제의 측근이 되었다. 이 흉노 왕자의 이름이 김일제金日磾다.
뒤에 무제는 망하라莽何羅의 반란을 막은 공을 치하하여 그를 ‘투후秺侯’로 봉하였다. 투후는 ‘오르도스의 제후’라는 뜻이다. 김일제의 후손인 성星은 문무왕의 비문에 나오는 15대조 성한왕星漢王으로 추정한다. 김일제의 후손 중에서 왕후(전한 11세 원제元帝의 비 효원왕후)도 배출되었다. 전한을 무너뜨리고 신新을 건국한 왕망王莽은 김일제의 현손玄孫이라 한다. 외척인 김일제 가문은 왕망이 정권을 잡으면서 최고의 권세를 누렸다.
그러나 왕망이 몰락하자 위험한 처지에 몰렸다. 정확한 경로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 후에 이들은 한반도로 망명한 것으로 보인다. 문무왕비 비문과 중국 서안西安에서 발견된 당나라 시대의 묘비명에 김일제가 신라 김씨 왕가의 조상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모든 상황을 종합해 볼 때, 1세기 초 한나라에서 망명한 김일제의 후손이 신라와 가야에 들어와서 왕권을 잡은 것으로 추정된다.
유라시아를 아우러는 대제국 몽고는 원래 몽고蒙古라는 이름은 중국 사람들이 몽골을 비하하기 위해 ‘우매할 몽(蒙)’과 ‘옛 고(古)’를 사용한 데서 비롯되었다. 당나라 때 처음 몽와, 몽골이라는 명칭이 나타난다. 현재 몽고의 공식 국가명칭이 몽골리아(MONGOLIA)이고 민족이나 민족어를 지칭할 때 몽골(MONGOL)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몽골(Mongol)은 원래 ‘용감한’이란 뜻을 지닌 부족어였으나, 칭기즈칸 이후부터 오늘날까지 전체 몽골인과 몽골어를 지칭하는 표현이 되었다. 몽골의 기원에 대해『단군세기』에서는 이렇게 전한다.
甲申元年(갑신원년)이라. 封皇弟烏斯達(봉황제오사달)하사 爲蒙古里汗(위몽고리한)하시니 或曰今蒙古族(혹왈금몽고족)이 爲其後云(위기후운)이라
오사구단군의 재위 원년은 갑신(환기 5061, 신시개천 1761, 단기 197, BCE 2137)년이다. 임금께서 아우 오사달烏斯達을 몽고리한蒙古里汗으로 봉하셨다. 혹자는 지금의 몽골족이 그 후손이라 말한다.「( 단군세기)」
乙酉二年(을유이년)이라 藍國君今達(남국군금달)이 與靑邱君(여청구군)과 句麗君(구려군)으로 會于周愷(회우주개)하고 合蒙古里之兵(합몽고리지병)하야 所到(소도)에 破殷城O(파은성책)하고 深入奧地(심입오지)하니라
재위 2년 을유(단기 1098, BCE 1236)년, 남국 왕 금달今達이 청구국왕, 구려국 왕과 더불어 주개周愷에서 만나 몽고리의 군대와 합세하여 이르는 곳마다 은나라 성책을 부수고 오지奧地로 깊숙이 들어갔다. (「단군세기」23세 솔나단군)
흉노, 선비, 거란, 돌궐, 몽골은 본래 동북아 초원에 살던 다양한 유목족 가운데 일부였으나 인근 부족들을 통합하면서 각 시대별 초원 제국의 호칭이 되었다. 몽골은 흉노의 일부, 선비·돌궐·거란의 일부로 내려오다가 13세기에 마침내 유목 민족을 통일하여 몽골 제국[元]을 건설하였다. 최근 몽골 지역 답사 내용을 보면 몽골 문화가 동방 단군조선의 신교(神敎) 문화와 같은 뿌리임을 실감하게 한다.
백색 숭상, 천제天祭 문화, 고수레·돌장승·깃털 장식·씨름·샤먼 의식 등의 풍속, 청동기·빗살무늬 토기 등의 유적 유물, 몽골 반점, 용모, 언어, 설화, 신앙 등이 우리 한민족과 혈통적 친연성과 문화적 동질성을 공유한 동일문화권이다. 예를 들어 몽골의 뿌리 깊은 민간 신앙인 ‘오보’는 우리의 서낭당과 같고, 오보 제祭는 소도 제천 풍속과 같다.
몽골인은 산을 신성시하여 산에 제를 지냈는데 칭기즈칸도 부르칸칼둔 산에 피신하였을 때 매일 그 산에 제를 올리고 기도를 하였다고 한다. 몽골인들은 또 술을 마시기 전에 손가락으로 술을 세 번 튕기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는 고조선의 고수레와 유래가 같은 것이다. 돌탑 주위를 탑돌이 하면서 세 바퀴 돌고 소원을 빌면 이뤄진다는 믿음도 있었는데, 이 또한 우리의 3수 신앙과 비슷하다.
몽골에서 사용하는 말 중에는 달구(달구지), 말루(마루), 정지(부엌), 인두(인두), 오루가(올가미) 등 우리말과 같은 것이 있다. 또 왼쪽과 오른쪽을 우리말과 같이 왼쪽, 오른(바른)쪽이라 한다. 그리고 고구려의 5부족인 소노부消奴部·계루부桂婁部·절노부絶奴部·관노부灌奴部·순노부順奴部가 몽골에서는 동·서·남·북·중앙을 지칭하는 말이라 한다.
그 밖에 몽골 아이들의 놀이 가운데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굴렁쇠 놀이가 있고, 속담에 “처녀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 서리가 내린다”라는 말도 있다. 문지방을 밟는 것을 금하는 것 역시 우리 풍속과 동일하며 오방신장五方神將의 관념까지 같다. 12세기 몽고초원은 부족간에 다툼이 끊이지 않았다. 1206년 테무친(칭기즈칸)은 마침내 초원의 패자로 등극하였고 부족간의 싸움도 막을 내렸다. 1211년 금나라 원정을 시작하여 화친을 맺었고, 1218년 몽골제국의 첫 분권 왕조인 오고타이 한국을 세운다.
1220년에는 서역의 호라즘 제국과 여진족의 금나라를 멸망시킨다. 1225년 이란, 이라크, 아르메니아, 러시아 지역까지 정복한 후 돌아와서 네 아들들에게 사한국四汗國으로 분할 통치하도록 하였다. 1227년 서하西夏 원정 도중 칭기즈칸은 질병으로 사망하였다. 하지만 그의 아들들이 뒤를 이어 1234년에 금을 멸망시킨다. 1235년에 칭기즈칸의 손자인 바투가 유럽을 원정하였고, 1258년에는 바그다드를 정복하여 아바스 왕조를 멸망시켰으며, 1259년에는 서아시아를 침공하여 일한국을 건설한다.
1259년에는 고려를 점령하여 속국으로 만든다. 1271년 드디어 쿠빌라이가 역사상 가장 큰 제국인 원 나라를 건설하였고, 1279년엔 남송南宋을 멸망시킨다. 칭기즈칸 시대에 정복한 땅은 알렉산더 대왕, 나폴레옹, 히틀러가 차지한 땅을 합친 것보다 더 넓었다. 칭기즈칸이야말로 세계 역사 최초로 지구촌경영의 마인드를 가진 인물이었다.
중국 수·당의 뿌리, 선비족을『후한서』에는 선비와 오환을 모두 동호東胡(번조선)의 후예라 하였다. 이를 볼 때 선비는 단군조선(고조선)에 속한 족속 가운데 하나였다. 선비족의 발상지를『위서魏書』에서 대선비산大鮮卑山으로 꼽았는데, 이 대선비산이라는 산 이름에서 선비족이라는 족명이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북흉노가 1세기말 멀리 중앙아시아 초원으로 떠나 버리자 흉노의 본거지이던 몽골 고원은 일시적으로 공백지대가 되었다. 그리하여 흉노의 지배를 받았던 여러 유목 집단이 초원을 차지하기 위해 각축전을 벌였고, 결국 선비족鮮卑族이 패권을 잡고 북방 지역을 통일하였다.
선비족의 기원은 고조선에 속한 동북 지방이었다. 중원에서 위진魏晉 제국이 붕괴하여 혼란에 빠지자 선비족이 그 틈을 이용하여 대거 남하하였는데 이로써 5호胡 16국國 시대가 열린다. 5호 16국의 분열을 통일한 수나라와 그를 무너뜨린 당나라 역시 그 기원이 선비족에 있다.
己未四十年(기미사십년)이라 封皇弟代心(봉황제대심)하사 爲南鮮卑大人(위남선비대인)하시니라.
재위 40년 기미(단기 712, BCE 1622)년에 아우 대심代心을 남선비국南鮮卑國의 대인으로 봉하셨다.「( 단군세기」16세 위나단군)
甲寅三年(갑인삼년)이라 鮮卑山酋長們古(선비산존장문고)가 入貢(입공)하니라.
재위 3년 갑인(단기 1487, BCE 847)년에 선비산鮮卑山 추장 문고們古가 공물을 바쳤다.「( 단군세기」32세 추밀단군)
돌궐의 후예 터키는 <단군세기>에 돌궐계인 ‘강거康居’에 대한 기록도 나온다. 3세 가륵 단군이 지백특支伯特에서 강거의 반란을 토벌하였다는 것이다. 지백특은 티베트를 가리키는데, 18세 동엄 단군 때 지백특 사람이 공물을 바치러 왔다는 기록이 있다. 단군조선의 활동 영역이 티베트 인근까지 미쳤음을 알 수 있다.
동양 고대사와 서양 중세사에 큰 영향을 미친 민족인 ‘투르크Turk’족이 바로 돌궐突厥족이다. 투르크족은 6세기 중반에 서쪽으로 카스피해에서, 동쪽으로 몽골과 만주에 이르는 광대한 유라시아 초원에 강력한 제국을 세웠다.
오늘날 터키Turkey라는 나라 이름도 바로 이 투르크에서 비롯되었다. 돌궐족은 원래 몽골족 국가인 유연柔然에 예속되어 있었다. 이 돌궐족이 553년에 유연을 멸망시키고 돌궐 국가를 세웠다.
이후 돌궐의 후예들은 북방의 초원을 떠나 차츰 서진하여 이란 지역에 가즈나 왕조(975~1187)를 세우고, 11세기에는 동로마 제국으로 침투하여 셀주크 투르크 제국을 세워(1037)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를 지배하였다. 13세기의 마지막 해, 1299년에는 오스만 투르크 왕조를 세우고 14세기 말에는 발칸 반도까지 장악하였다.
거란이 세운 요遼나라의 정사인『요사遼史』「세표世表」에 거란이 생겨난 유래에 대해 상세히 전한다.
“흉노 모돈(묵돌)에게 패한 동호東胡는 선비산에서 보전하고 있었는데 선비씨라 하였다. 그 후 모용씨의 연이 선비를 파하자 그 부部를 나누어 우문·고막해·거란이라 하였다. 거란의 이름이 이에 비로소 생겨났다[後爲冒頓可汗所襲, 保鮮卑山以居, 號鮮卑氏. 旣而慕容燕破之, 析其部曰宇文, 曰庫莫奚, 曰契丹.]”라고 하였다.
동호는 BCE 2백 년경, 한 고조 유방을 굴복시킨 흉노의 대영웅 묵돌선우(묵특선우)에게 멸망당하여 오환산과 선비에서 숨어 보전하며 오환·선비족이 되었다. 이 선비족에서 거란이 나왔다. 고막해·거란족은 후세에 몽골족의 주축이 되었다.
거란 부족의 시조에 대해『요사遼史』「지리지地理誌」영주永州 조에서는 “전설에 따르면, 한 신인神人이 흰 말을 타고 마우산으로부터 토하(노합하)를 따라 동쪽으로 갔고, 한 천녀天女는 푸른 소가 끄는 달구지를 타고 평지송림으로부터 황하潢河(황수=서요하)를 따라 내려왔다. 목엽산木葉山에 이르러 두 강이 합류하니 서로 만나 배필이 되어 여덟명의 자식을 낳았다. 그 뒤로 족속이 점차 번성해져 팔부로 나뉘었다[相傳有神人乘白馬, 自馬盂山浮土河而東, 有天女駕靑牛車由平地松林泛潢河而下. 至木葉山, 二水合流, 相遇爲配偶, 生八子. 其後族屬漸盛,分爲八部.]”라고 하였다. 이로써 보면 거란족이 단군조선의 제후국인 옛 고리국稾離國 일대를 근거로 하여 일어났음을 알 수 있다.
이 고리국稾離國은 북부여 시조 해모수와 후북부여(졸본부여)를 세운 동명왕 고두막한이 태어난 고향이기도 하다. 그리고 대진(大震,발해) 때 오경五京의 하나인 서경압록부가 있던 바로 그 자리에 요나라의 도읍인 상경임황부(지금의 요하 상류 임황)가 자리 잡았는데, 이곳은 바로 옛 고리국의 중심부였다. 거란 역시 분명히 단군조선의 한 갈래다.
☞ 훈족의 출현으로 유라시아 대륙의 서부에서 민족 대이동이 일어난 것과 거의 같은시기에 대륙의 동부에서는 또 다른 북방 민족에 의해 그에 못지않게 커다란 민족 이동이 발생하였다. 흉노와 선비족이 일으킨 이동의 파도는 유럽에 서로마 제국의 멸망을 가져오고, 중국에 북방 민족이 중원을 장악한 5호16국 시대를 열었다. 또 한반도 남부와 일본에 기마민족의 정권을 성립시켰다.
한마디로 말해 동북아의 중심이었던 단군조선의 문화적 자양분을 흡수하며 동북아의 북방에서 뻗어 나간 유목민의 대이동이 유라시아 대륙의 역사를 크게 바꾸어 놓았던 것이다.
금나라를 세운 여진족은『태백일사』「고려국본기」에서는 여진 사신의 말을 인용하여 여진의 선조가 고려 출신임을 밝혀주고 있다. 금 나라의 정사인『금사金史』「세기世紀」를 보면 “금나라 시조의 이름은 함보函普인데, 처음에 고려에서 왔다[金之始祖諱函普,初從高麗來.]”라고 하였다.
또『고려사』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금준 : 세상에서 전하기를, 옛날 평주의 승려 금준이 도망하여 여진으로 들어가 아지고촌에 살았는데 이 사람이 금나라의 선조라 한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평주중 금행金幸의 아들 극수克守가 당초에 여진으로 들어가서 여진 여자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아 고을古乙이라 불렀는데, 금나라 시조 아골타가 그 후손이다’라고 한다[今俊: 世傳, 昔有平州僧今俊, 遁入女眞, 居阿之古村, 是爲金之先. 或曰‘平州僧金幸之子克守, 初入女眞, 娶女眞女, 生子曰古乙. 金祖阿骨打, 乃其後也.’]”는 기록이 있다.
睿宗文孝大王四年秋(예종문효대왕사년추)에 撤九城(철구성)하야 還女眞舊地(환여진구지)하니라.
先是(선시)에 女眞(여진)이 使O弗史顯等(사요불사현등)하야 入朝奏曰(입조주왈) 昔(석)에 我太師盈歌(아태사영가)가 嘗言我祖宗(상언아조종)이 出自大邦(출자대방)하니 至于子孫(지우자손)하야 義當歸附(의당귀부)가 可也(가야)라 하더니 今太師烏雅束(금태사오아속)이 亦以大邦(역이대방)으로 爲父母之國(위부모지국)이러니 ......
예종 문효文孝대왕 4년(단기 3442, 1109) 가을에, 9성에서 철수하고 여진의 옛 땅을 돌려주었다. 이에 앞서 여진이 요불褭弗, 사현史顯 등을 보내 조정에 들어와 이렇게 상주하였다. “옛날에 저희 태사 영가盈歌께서 일찍이 말하기를, ‘우리 조종은 대국(고려)에서 출생하였으니 자손 대에 이르러서도 마땅히 귀부歸附함이 옳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태사 오아속烏雅束께서도 역시 대국(고려)을 부모의 나라로 삼고 있습니다. (「고려국본기」)
흉노, 선비, 돌궐 등의 북방 민족에게는 공통점이 있는데, 바로 신교 삼신문화의 천신天神사상이다. 흉노의 경우 선우는 천신의 아들로서 그 뜻을 지상에 펴는 제사장이며 대리자였다. 선우는 한나라 황제에게 보낸 문서에서 늘 자신을‘ 하늘이 세운 흉노 대선우’ 혹은‘ 천지가 낳고 일월이 세운 흉노 대선우’라칭하였다. 흉노인은 천신의 상을 만들어 받들었는데, 금으로 된 큰 신상을 모시고 하늘에 제사 지냈다는『한서』「흉노전」의 기록이 그것을 말해 준다. 또 흉노 사회에서는 주술과 의술을 겸한 무당이 있었다. 선비족이나 돌궐족도 이러한 흉노 사회의 특징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고구려가 망한 후 만주 지방의 말갈인은 고구려 복국 운동에 협력하였고, 대진(大震,발해)이 성립되자 다시 대진(발해)에 예속되었다. 흑룡강 하류 지역에 살던 흑수말갈은 당唐과 결탁하여 대진(발해) 세력을 배제하려 하다가, 마침내 대진 3세 무황제에게 토멸 당해 150여 년간 종족의 이름조차 없어지게 되었다.
10세기 초에 대진이 거란에게 망하자, 남북 만주와 연해주에 거주하던 조선족(대진 유민)과 퉁구스 만주족을 통틀어 여진女眞이라 부르게 되었다. 『금사金史』를 보면, 그 서두에 “여진과 발해는 본래 한가족이다. 다 같이 물길의 7부족에서 나왔다[女眞, 渤海本同一家. 蓋其初皆勿吉之七部也.]”라는 금나라 건국자[金太祖] 아골타阿骨打의 말이 실려 있다. 단군조선(고조선)·부여·고구려의 후손인 발해 사람과 여진 모두 뿌리가 같은 동족이다.
세계를 뒤흔든 기마민족은 3세기에서 6세기까지 세계 지도를 바꾼 주체 세력은 북방의 유목민들이었다. 13세기 지구촌 네트워크를 구축한 이들 역시 그들이었다. 이들은 BCE 2세기부터 세계적인 대제국을 잇따라 만들어 냈다. 지배층이 바뀌는 데 따라 제국의 이름은 흉노-선비-북위-돌궐-위구르-거란-금-몽골제국(중국에선 元)-청 등으로 바뀌었지만 몸통은 항상 여러 부족의 유목기마민족이었다. 유럽인들은 몽고군이 보여준 필사적인 결의, 허를 찌르는 기동력, 상대방을 무력화시키는 전술 등에 대해 ‘황색공포(Yellow Peril)’라고 표현하며 아직도 무의식중에 기억하고 있다.
『환단고기』에서는 이들 북방 민족의 기원이 배달과 단군조선(고조선)에서 출발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결국 우리 한민족이 움직일 때마다 세계사의 향방이 결정적으로 바뀌었다. 훈족의 이동은 로마를 멸망시켰고, 몽고인들은 세계를 단일경제권으로 만들었다. 이 당시 몽고인들이 통일화폐로 사용한 지폐는 아프리카에서도 발견되었을 정도다.
칭기즈칸과 그 후손들이 대제국을 건설했을 때도 타민족을 제외한 실제 몽고기병은 4∼10만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이 인원으로 1∼2억 정도의 유라시아 대륙을 정복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역사가들조차 ‘기적’이라고 부르고 있다. 1995년 워싱턴 포스트 지는 지난 1천년간 인류사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로 칭기즈칸을 꼽았다.
우리 민족의 유전학적 기원은 북방계와 남방계로 구성되어 있다. 문화적으로도 동動적인 북방 유목문화와 정靜적인 남방의 농경문화의 요소가 결합되었다. 그러나 광활한 대륙을 잃어버리고 한반도로 쫓겨들어오면서, 국가와 제도라는 편안한 울타리에 안주하면서부터 우리는 북방 문화와 정신을 잃어버렸다.
묘청의 서경천도 운동이 좌절되자 우리의 북방 이야기는 전설 속으로 사그라들었다. 고려 후기와 조선 시대는 스스로 주인임을 포기하고 대국大國의 신하임을 자랑스러워했다. 이후 있었던 북진北進과 북벌北伐은 담론 차원에 그쳐버렸고 전 국가적인 정책으로 수렴되지 못했다.
급기야 주변국들에게 역사를 빼앗겨 버렸고 또한 우리 스스로도 힘써 역사를 찾지 못했다. 역사와 문화를 잃어버린 민족, 나라는 있으되 정신은 없는 국민들은 시대의 주인이 되기는커녕 자기 삶의 주인도 될 수 없다.
새 역사를 개척하는 성웅(聖雄)으로 거듭나야
한문화의 중심에 신교가 있고 신교에서는 문(文)과 무(武)를 겸비한 인간상을 추구한다. 문과 무는 일체양용一體兩用으로 작용할 때 서로가 빛을 발하는 법이다. 유목문화의 동적이고 역동적인 에너지와 농경문화의 정적이고 섬세한 기운이 합쳐져야 조직이 건강해진다. 이제 우리는 우리 속에 잠들어 있는 북방 DNA를 다시 일깨워야 한다. 지난 2002년 월드컵 때 우리는 붉은 악마를 통해서 우리 민족의 역동성과 신바람을 확인하였다. 때는 바야흐로 디지털 노마드Nomad의 시대다. 안주하면 죽고 변화하면 사는 시대다.
지금까지 제도와 틀에 갇혀 온 정적인 정신으로는 온갖 정보들이 조화를 지어내고 시시각각 역사가 뒤집어지는 디지털 시대를 선도해나갈 수 없다. 창의와 혁신, 그리고 개척 정신으로 무장한 노마드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 더 이상 수성守成에 만족해서는 안된다. 우리에게는 대륙을 휘달리며 수많은 나라를 정복한 동방의 알렉산더 광개토태왕이 있고, 대당 사대주의의 역사를 혁명하고 서토西土를 정복했던 연개소문과 같은 영웅이 있었다.
☞ 한민족의 원류의 하나는 역시 알타이, 천산, 몽골 고원을 무대로 역사를 펼친 북방계 민족이다. 한민족의 원류가 북방계 민족이라는 사실을 강력히 뒷받침하는 증거는,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천손민족’이라는 의식, 천신 즉 삼신상제를 숭배하는 종교문화, 난생설화, 가야 유물에서 나타나는 동복銅O및 마갑馬甲과 같은 북방 유목민 유물, 고구려 벽화에서 생생하게 나타나는 기마전사로서의 성격, 그리고 순장제와 형사취수제兄死娶嫂制(형이 죽으면 형수를 아내로 맞이하는 풍습) 같은 관습 등이다. (환단고기 역주본 해제 329쪽)
이제 우리 사회의 낡은 관행과 묵은 정신을『환단고기』가 전해주는 우리의 원형문화로 말끔히 씻어내야 한다. 신교가 추구하는 진선미의 인간은 성웅 겸비의 영걸을 말한다. 이제 우리는 새 역사를 개척하는 삼랑三郞으로 거듭나야 한다. 역사광복과 오만년 새로운 역사를 쓰는 역사혁명의 대장정에 다함께 ~ ~

첫댓글 일제의 대륙침략에 따라 중경(重慶)으로 후퇴한 장개석(蔣介石) 총통은 함께 피난 온 상해 임시정부의 김구 주석 일행을 위로하기 위해 만찬에 초대했었다고 한다. 이때 장 총통은 자기 고향이 옛 백제 땅(대륙백제)이었다는 사실을 밝히면서 우의를 다졌다고 한다. 장 총통은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는 동지적 입장에서 이런 역사인식을 말했다고 할 수 있다.
장개석의 고향은 양자강(揚子江) 남쪽 절강성(浙江省)이므로 옛 백제는 양자강 이남지역까지 지배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서량지나 임혜상 같은 양심있는 중국사학자들은 중국역사의 상고사는 한민족의 역사라고 말한다. 가시마 노보루같은 일인학자는 한(漢)족은 기껏해야 한(韓)을 흉내내어 이름 붙인 것이라 말했다.
중국의 식자층은 양자강 유역이 동이족의 지역이었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았다. 장개석 또한 이 사실을 너무 잘알고 있었기 때문에 임시정부의 이시영 전,부통령에게 "역사는 제대로 알고 독립운동하시는가 " 하고 물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