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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정/KBS 아나운서: 일제 강점기 대표적인 친일경찰이자 고문으로 악명 높은 노덕술을 기억하십니까? 해방후 노덕술은 어떻게 됐을까요? 수도경찰청 수사국장 그는 여전히 경찰 고위직을 맡으며 득세했습니다. 그런데 노덕술 뿐만이 아닙니다. ---------1946년 국립경찰 조직도----------
치안감--—1명--—100%
청장-------8명------63%
국장-----10명------80%
총경-----30명------83%
경감----130명-----75%
경위----969명-----83%---------------------식민경찰 출신자--------------
보시는 것처럼 최고위직의 치안감 청장 국장 총경 경감 경위까지 이 주요 요직을 친일경찰들이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민족의 고혈을 짜내던 친일경찰은 어떻게 해방 후에도 버젓이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걸까요? 돌아온 친일경찰로 해방 후 남한은 팽팽한 긴장감에 휩쌓이는데요. 그리고 그때 미군정을 통째로 뒤흔든 사건이 일어납니다.
해방 1년후 1946년 10월의 대구, 앙상한 몰골을 한 사람들이 거리로 몰려나왔다.
부민(시민): 배고파 죽겠습니다!
학생: 쌀 좀 주이소! 쌀!
그들은 기아(饑餓) 시위대였다.
부민: 나는 사흘을 굶어서 일할 기운도 없소 (1946년 영남일보).
여자어른: 집안 식구들이 늘어져 누운걸 보고 왔는데 그 동안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겠소 (1946년 영남일보).
이때 경찰이 이들을 막아선다. 1946년 10월 가을의 일이었다.
최원정: 역사저널 255번째 그날입니다. 1946년 10월이면 해방의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일텐데 지금 대구의 모습 보니까 생지옥이네요.
이시원/배우: 죽는 것 중에서 제일 고통스러운 죽음이 아사라고 하더라구요. 자기 자신을 갉아먹는 거잖아요. 그런 고통 속에서 배 고파서 나왔는데 살려고 나왔는데 거기에 총이 웬 말이에요.
박상영/작가: 저도 거의 20년 동안 대구에서 태어났고 살았는데 이런 얘기는 처음 듣는 얘기거든요.
최원정: 부모님한테, 아니면 할아버지 할머니한테 이런 얘기 뭇들어 보셨어요?
박상영: 저는 오늘 얘기를 들으면서 충격을 받았는데 사실은 그렇게 멀지 않은 과거 일이라는 거라서~ 한번 쯤은 들어보았을 법 한데 정말로 처음 듣는 얘기입니다.
다니엘 린데만/방송인: 한국 사람들이 잘 모르는데~
이시원: 그리고 저희같이 국사와 현대사 공부할 때 이 부분을 안배웠어요. 그래서 저도 이 대구 사건은 처음 듣거든요.
박태균/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 교수: 사실은 너무나 중요한 사건입니다. 이 사건 자체가 미군정(1945~1948)이 한국을 통치했던 3년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라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일 수가 있거든요. 사실 이 사건은 대구에서 전국으로 퍼지면서 300만명 정도가 참여를 해요.
최원정: 해방 후 일어났던 최초의 민중봉기죠.
박태균: 네, 그렇게 볼 수 있죠.
최원정: 미군정을 뒤흔든 이 사건은 왜 어떻게 벌어졌는지, 그리고 돌아온 친일경찰들과는 어떤 관계인지 1946년 가을 대구로 가 보겠습니다 (1946년 10월 그날의 대구모형지도). 자, 여기가 대구역이고, 한번 아는 대로 읊어보세요.
이시원: 대구의전도 있는데~ (박상영 작가는) 살았던 지역이 기억나세요?
박상영: 이 근처는 아니었고, 우리 집은 저~쪽으로 살았는데~ 이쪽은 사실 대표적으로 지금으로 따지자면 대구역과 백화점이 연결되어 있어요. 이쪽으로는 다 소위 말하는 시내거든요. 여러분, 시내라는 개념을 아시나요. 서울 출신분들은 모르시죠?
박태균: 아뇨, 알죠.
박상영: 서울에 올라와서 제일 놀랐던게 아이들이 시내라는걸 잘 모르는거예요. 왜냐면 서울은 시내가 여러 개 잖아요. 그러나 대구 같은 경우는 하나 밖에 없는데 그게 바로 여기 동성로-중앙로 여기 거든요. (1946년부터 오늘날까지 대구의 번화가는 동성로-중앙로).
최원정: 그러면 이제 10월 1일이라고 하셨나요? 대구 사건에 어떤 일이 벌어진 거죠?
박태균: 10월1일 오전에 대구부청(시청) 앞에 부녀자들이 모입니다. 부청이라면 지금의 시청이죠. 그 당시는 대구부였으니까요. 모여서 아까 화면에 처음에 나왔던 것처럼 쌀을 달라는 거죠. 배가 고프다. 쌀을 달라. 제일 배고픈 때가 추수하기 직전이거든요. 제일 식량이 모자랄 때에요. 시간이 좀 지나서 대구역 앞에 노동자들이 모여서 시위를 하고 있었습니다.
최원정: 노동자들이 자세히 보시면 머리띠를 두르고 있어요.
박태균: 요 시기가 46년 9월부터 폭동들이 일어나기 시작했어요 (미군정과 대립하며 격렬한 시위를 벌였던 조선공산당). 시위가 일어나기 시작했는데 노동자들이나 농민들을 조직했던 조선공산당 쪽에서 총파업을 하고 격렬한 시위를 벌이고, 그 사건이 9월달에 일어나게 되고요. 그 이후 10월에 대구에서 퍼져 나가게 됩니다.
이시원: 처음 대구 부청에서 시위가 났을 때는 대부분 가정주부들 이라고 해야 되나요, 그 당시에? 그럼 일반 시민들이었네요.
박태균: 그 당시 기록을 보면, 일반 시민들이 나왔다 라고 얘기를 하고 있구요. 문제는 발포가 일어난 거예요. 그 과정에서 사상자가 발생합니다. 다음날 또 대구의전 학생들이 일어납니다. 이건 우리가 참을 수가 없다. 이걸 우리가 어떻게 참느냐 해 가지고 시신 1구를 시작으로 해가지고 대구경찰서 앞에 가서 시위를 하게 되구요.
다니엘: 총 몇 명 정도가 모였나요? 대구역 앞에서 (10.1) 5천명 정도 모였다고 하던데~
박태균: 이튿날 (10.2) 시위를 할 때는 규모가 훨씬 커집니다 (1만5천명). 이제는 만명이 넘어가는~ 본격적으로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하니까 경찰들도 더 강하게 진압해야 되겠다 라고 하면서 많은 피해가 발생하죠. (당시 대구발포 현장사진). (시민들을 향한 경찰들의 총격사진).
유동훈/하나고등학교 교사: 여기 이 상황은 총격이 벌써 이루어졌어요. 시위하던 사람들이 쓰러져 있고 막 도망가는 모습이 보이고요.
이시원: 다들 머리 숙이고 있죠.
유동훈: 고개를 숙이고 있고 몇 분은 쓰러져 있고~
다니엘: 지금 이 사진 모르고 보면 전쟁상황 같애요.
이시원: 이 사람들은 맨 손으로 나왔을텐데~ 거기다 쫄쫄 굶고 배고파서 움직일 힘도 없었을텐데~ 이런 사람들한테 총알이라니 정말 이해할 수가 없어요.
다니엘: 당시 미국 기자가 한 명 있었는데요. 마크 데인 이라는 사람인데 1946년의 한국의 가을상황을 묘사했거든요. (해방과 미군정, 마크 데인 1988-한국 경찰들은 그날 밤 살기등등했습니다. 사방에다 총을 갈겨댔다. 그날 밤새 총성이 들렸고 학교와 공장에서는 항의 집회가 계속되었다). 엄혹한 분위기가 확실히 느껴지는 것 같애요.
유동훈: 실제로 대구의 자체 경찰력으로는 상황진정이 안되어서 미군의 장갑차가 대구시내로 들어와서 진압을 하게 되고 계엄령이 선포되고~
최원정: 일제 강점기 내내 우리 백성들이 풍족했었던 때가 있었습니까. 혹시 이때 유독 흉년이 들었거나 그랬나요?
박태균: 그 당시에 계셨던 어르신들 얘기를 들어보면은 1945년에 그렇게 흉년이 아니었다고 그래요. 그런데 문제는 아무리 풍년이라도 나한테 쌀이 와야 되는 거잖아요. 이건 당시 미군정의 통치시기였기 때문에 그러면 미군정이 어떤 방식으로 쌀에 대한 정책을 펼쳤는지 그걸 보면 저희가 쉽게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을 합니다.
최원정: 그래서 미군정이 식량정책을 이광용 아나운서가 정리해 드린다고 합니다. 나와 주세요~
-------------Hi, I’m Mr.Lee--------(미군정의 식량정책 총정리---남는 쌀을 팔읍시다)-------지금 부터 미군정의 쌀 정책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여러분, 극악무도한 일제 치하에서 쌀을 강제로 공출 당하여 얼마나 힘들고 또 분노 하셨습니까? 1945년 9월 식량정책이 확 바뀝니다. 우리 미군정이 시작하는 획기적인 시스템, 남는 쌀을 팔읍시다. 이제 쌀, 자유롭게 사고 파세요. 디스 이즈 아메리칸 스타일~~
다니엘: 자본주의 시장이네요.
이광용: 댓츠 롸잇! 이제 이 땅 코리아에도 새로운 세상이 열립니다. 이츠 어 뉴 월드~
낙엽이 우수수 떨어질 때, 여러분, 날도 추워지는데 잡곡 몽땅 사놓고 폭리 취하는 사람들~ 안돼! 여러분, 이제 쌀 절대로 사고팔지 말고 절약하세요, 절약, 아시겠습니까! 아시겠느냐구요?
다니엘: 왜 갑자기 절약이야?
최원정: 딱 두달 전만 해도 자유롭게 사고 팔라고 그랬으면서요~
이광용: 안들려요, 안들려요.
-----------셀프 특수효과로 벌써 겨울!~1946년 1월 Happy New Year Everyone! 쌀 걱정은 노~노~ 우리 미군정이 다 해결해 드립니다. 돈 워리! 돈 워리! 어떤 걸 원하십니까? 못 먹어서 잔뜩 굶주린 표정, 아니면 든든하게 먹고 배가 불러서 원만한 표정, 뭘 원하세요?
이시원: 당연히 원만한 표정이죠.
이광용: 원하십니까? 대답이 시원찮아.
이시원: 쌀을 원합니다.
이광용: 원하십니까? 우리 한국 사람들의 원만한 생활을 위해서 미군정이 정책을 확 제대로 바꾸었습니다. 어떻게 바꿨냐 여러분, 이제부터 썰 공출을 시작합니다.
이시원: 또 왔다 갔다 몇 번을 바꾸는 거예요?
최원정: 공출은 일종의 수탈정책인데~
이광용: 아니, 좋은 제도는 언제든지 다시 할 수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일제시대에 해봐서 느낌 알잖아요 걱정 마세요. 잘 모아서 잘 배급해 드릴게요. 돈 워리~돈 워리~ 바이~바이~
다니엘: I don’t like you.
최원정: 오, 다니엘의 한마디~, 미스터 리, 좀 마음에 안드네요.
다니엘: 아니, 어떻게 하라는 거예요?
박상영: 저희도 이렇게 헷갈리는데, 당시의 국민들은 이 정책에 얼마나 정신이 없었겠어요,
이시원: 상사 중에 가장 싫은 상사중의 하나가 이거 하라고 했다가 저거 하라고 했다가, 오, 이거 아닌 거 같은데 저거 하라고 했다가~왔다 갔다 하는 상사가 제일 싫어하는 상사 1위로 뽑혔거든요.
최원정: 혹시 제작진이 좀 그런가요?
이시원: 아니, 그런 건 아니고요.
최원정: 아메리칸 스타일(자유시장) 이었다가 갑자기 재패니즈 스타일(공출) 하고 있어요.
박태균: 계속 일정한 량을 공출을 당했었기 때문에 자유시장이 되니까 사람들이 굉장히 좋았던 거지요. 내가 팔고 싶을 때 팔 수 있고 내가 사고 싶을 때 살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시장기능이 제대로 작동을 할려면 공급이 충분해야 돼요. 사실 공급이 모자라는 상황에서 갑자기 자유시장을 풀어 준거예요. 그러면 가격이 올라가잖아요. 그런데 이 가격을 더 올리기 위해서는 있는 쌀도 돈 있는 사람들이 확 끌어 모아서 풀지 않고 가격이 최고로 올라가는 때까지 매점매석을 하는 거죠.
최원정: 모리배(謀利輩) 라는 단어가 이때 생겨난 거예요?
유동훈: 그렇죠. 이익을 도모하는 무리를~ 상당히 폭력배 느낌이잖아요. 그러니까 안좋은 뜻이죠. 큰 창고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이제 머리가 잘 돌아가는 거지요. 공동체의 이익보다는 내가 먼저 치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을 하는 것이니까 큰 창고를 가지고 쌀을 계속 사들여가지고 잘 보관하고 있다가 시장에 풀지를 않는 거죠.
이시원: 그 당시 쌀값이 대충 어느 정도 뛰었어요?
유동훈: 쌀 한 말이 보통 8킬로 정도 되었는데 1946년 1월에 쌀값이 38원 정도 됐구요. 그런데 그 다음달 2월초쯤 되면 그게 134원이 됩니다. 4배 이상 올라요. 1년이 지나면 이게 거의 1000원에 육박합니다. 30배 폭등,
이시원: 요즘 쌀 10킬로에 약 3만원 정도 하는데 갑자기~ 쌀 10킬로가 90만원이 된 거잖아요.
최원정: 엄청나네요~
이시원: 거기서 또 소름돋는게 그 당시에는 탈곡기술도 별로 발달하지가 않았는데 이 쌀 10킬로가 10킬로가 아니었을 것 아네요. 돌반 쌀반 진짜 이랬을 거같은데~ 먹고 살 수 있었겠어요?
박상영: 전 너무 힘들죠. 저 같은 경우는 거의 연명이 불가능한 정도가 아니었을까~
박태균: 미군정 쪽에서 안되겠다. 이러다가 정말 큰 일 나겠다 해가지고 다시 수집을 하기 시작합니다. 한국사람들 입장에서는 해방이 돼서 난 이제 굉장히 잘 먹고 싶은데 어, 이게 일제 강점기에 있었던 정책이 또 다시 시작되네요 라는 느낌을 받게되는 바로 그 싯점이 45년에서 46년으로 .넘어가는 싯점이라고 볼 수 있어요.
박상영: 진짜 걷어가는 주체만 달라졌지~ 하는 행동은 똑 같은 거니까~ 그 일반백성, 시민들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화가 났겠어요?
박태균: 이걸 내놓으라고 해서 사람들이 그냥 내놓지는 않죠. 당시 자료에 의하면 미군정의 공출목표량이 기본적으로 550만석이었는데 실제로 수집한 양은 12.4% 밖에 안되었다는 거예요.
최원정: 당시 사과로 유명한 청송지역 있잖아요. 청송지역에서는 200명이 집단 아사했다는 그런 얘기가 있더라구요. 지금 여기 있는 분들 곱하기 네 배는 되는데 너무 끔찍하지 않아요 (1946.6.3.대구시보, 청송군에 아사(餓死) 200여명, 2,000여명은 사경에서 방황),
박태균: 그 당시 미군정의 문서를 보면, 각기병 같은 병들이 지역 마다 생겨요. 영양결핍이죠.
최원정: 지금 얘기 들어보니까 자본주의 시장도입 실패, 공출도 실패, 지금 미군정의 정책시행 다 실패네요.
이시원: 그 당시에 쌀만 문제가 아니었다고 해요. 그래서 제가 그 당시 유행했던 유행어를 갖고 와 봤는데요. 한번 맞춰보세요. 1번 가져와라 면사무소? 두번째가 하루 종일 정거장?? 세번째가 깜깜절벽 전기회사???
최원정: 가져와라 면사무소는 너나 가라 하와이~ 이런 느낌?
박상영: 면사무소에서 뭔가를 가져갔으니까 가져오라는 걸까요?
이시원: 가져와라 면사무소는, 뭘 가져와라 요구하는 건 많고 일은 해결이 안되는 면사무소, 그리고, 하루 종일 정거장은, 시간이 되면 버스가 와서 우리가 이용을 해야 되는데 하루 종일 정거장에 앉아서 버스를 기다려야 하는 거예요. 그리고, 깜깜 절벽 전기회사는 불리 나갔다 들어왔다 제대로 전기공급이 안되었다는 거죠.
박상영: 한 마디로 나라가 개판이었다는 거죠.
최원정: 총체적 난국이네~
이시원: 뭐 하나 제대로 되는 거 없이, 굉장히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고 해요.
박태균: 정부가 생기면 돈이 있어야 운영을 하잖아요. 정부가 돈을 마련하는데 제일 중요한 건 국민들로부터 세금을 거둬야 됩니다. 그런데 해방 직후에 사람들이 외국에서 막 귀환을 하니까 주소지가 일정치 않은 거에요. 누가 어디에 사는지를 몰라요. 고지서를 발부할 데가 없잖아요. 거기다가 일본 기술자들이 가버리니까 공장이 안돌아가니 일자리가 없어요. 소득이 있어야 세금을 내죠. 정부 자체가 돈이 없는데, 본토에다가 우리 지금 미군정으로 한국을 통치해야 되는데 돈 좀 달라~
유동훈: 미국정부에다~
박태균: 네, 그런데 미국으로서는 한국보다 더 급한 나라들이 많아요. 그래서 여기 줄 돈이 없는 거에요. 너네가 알아서 해결을 해라고 하니까 미군정 쪽에서 일본의 공공재산 뿐만 아니라 일본인 소유 사유재산 까지 다 압수해 버린 거예요. 이걸로 돈을 마련해서 쓰겠다. 그런데, 문제는 그걸 살 사람이 없는 거예요. 돈 있는 사람이 있어야 이걸 사죠. 그래서 경제가 전반적으로 돌아가지를 않는 상황이죠.
박상영: 자본주의를 시행할례야 시행할 수가 없겠네요.
박태균: 그런데 미군정을 운영할려면 직원들한테 월급을 주어야 돼요. 돈을 찍어내는 거죠.
박상영: 그러면 인플레이션이 일어나는데~
최원정: 일본도 빠져 나가면서 돈을 엄청 찍어냈었다는데~ 미군정도 또 그런 거예요?
다니엘: 확실히 우선 순위의 중요성을 알고 있는 것 같애요. 제가 요즘 동독에 대한 잡지를 보고 있는데 거기서 무슨 얘기가 나오느냐 하면 동독은 어쨌거나 소련에게 중요한 구역이었잖아요. 뒤에서 지원을 빨리 했죠. 물, 식량, 인프라, 트램이나 지하철은 빨리 운행하기 시작했습니다. 베를린은 완전 파괴된 상태였는데도 이걸 빨리 운행하기 시작했거든요. 그만큼 우선 순위였고 돈을 많이 투자했던 것 같은데~여기는 미국에게 완전 정반대 상황이니까
이시원: 불행이 겹치고 겹치고 겹친 것 같애요. 해방이 왔다고 해서 새 세상이 아니라 우리가 맞아야 할 모든 문제점이 한꺼번에 맞닥드린 거예요. 들으면 들을수록~ 또 이 당시에 설상가상으로 콜레라도 엄청 많았다고 그러더라구요.
박태균: 콜레라가 1946년 여름에 돌아요. 대구 경북지역을 보면은 1946년 말까지 콜레라 환자가 약 2천5백명 정도 있었는데 그 중에서 1700명이 넘는 환자가 죽었다는 거예요.
박상영: 그러면 사망률이 엄청 높은데요~
유동훈: 1946년 7월 6일 영남일보, 천벌을 받아 마땅하다 병든 자식을 두고 젊은 부부가 도망 호열자(虎列刺)가 낳은 인생비극 이렇게 써 있잖아요. 호열자가 콜레라 아닙니까. 불과 5,6세에 지나지 않은 어린 자식이 복통으로 구토를 좀 하였다---병든 어린 자식을 버리고 돈 한푼 남겨두지 않고 어디론가 사라져버려---이미 손이 늦어 죽고 말았다 (1946년 7월 6일 영남일보).
최원정: 여섯살 짜리 아이가 콜레라 증상을 보이니까 젊은 부부가 다 도망간 거예요?
유동훈: 콜레라가 아니고 복통이었는데 그걸 콜레라로 오인해가지고 자기도 걸릴까봐 도망간 거죠.
다니엘: Do you hear the people sing, Singing a song of angry men (너는 듣고 있는가 민중의 노래), 기억나세요?
최원정: 레미제라블!
다니엘: 그 장면이 떠오르네요. 사람들이 막 노래를 부르는데 그쪽에서 안들어주는 거예요.
이시원: 레미제라블 하고 진짜 비슷한 상황이에요. 식량도 없고 병도 돌고 사람들의 목소리를 아무도 듣지 않는 상황이잖아요. 진짜 비슷하네요.
박상영: 저런 기사를 보면 이런 문제는 어떤 국가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탓으로 돌리고 있는 뉘앙스잖아요. 그러니까 사실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민중들은 얼마나 힘들고 죽을 노릇이었겠어요~
최원정: 이런 상황에서 시위가 일어난다는 건 당연한 일인 것 같애요. 대구 뿐만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확산이 된다면서요.
박태균: 그렇죠, 이게 처음에 대구에서 시작된 것이 경북지역으로 확산되고요. 그래서 전체적으로 경북의 22여개 군으로 확산이 되었구요. 12월까지는 수도권 쪽으로 확산이 됐다가 전국적으로 73군데의 시군에서 시위가 벌어집니다. 총 참여인원은 300만명 정도되고요. 그 당시 인구수를 감안을 하면 전체 인구의 15% 정도가 참여하는 굉장히 큰 시위였다 라고 할 수가 있죠.
박상영: 분노가 어마어마 했겠네요.
최원정: 미군정의 입장에서는 정말 깜짝 놀랐겠네요. 미군정을 그야말로 뒤흔든 사건이에요.
박태균: 저희한테 유명한 건 사실은 제주 4.3사건과 여순 사건이 유명한데 저는 그것보다 더 대규모의 그런 사건이었다고 생각이 듭니다.
이시원: 그런데 저희가 처음 시작할 때 친일경찰 얘기를 했잖아요.
최원정: 제가 아까 처음에 그걸로 시작했는데 진짜~
이시원: 친일경찰 얘기로 시작했는데 그것하고 대구사건하고 무슨 관련이 있는 거죠?
최원정: 대구사건의 근본적인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서 미군정이 대대적인 조사에 나섰는데 이때 또 아주 결정적인 증언이 나옵니다.
-----------------이광용: 증인 본인 소개부터 부탁드립니다.---------------------
증인: 나는 경무국의 수사국장이오.
이광용: 우리 증인 목소리를 왜 그렇게 깔고 그러십니까. 자, 그러면 본격적인 심문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말씀 하신대로 증인은 경찰입니다. 경찰로서 이번 대구 시위가 왜 일어났다고 생각하십니까?
증인: 대구 폭동은 공산주의자들의 책동에 의한 불행한 사건입니다.
이광용: 정말입니까? 그 외에 다른 이유는 없습니까?
증인: 그러나 그 원인은 우리 경찰 내부에도 있죠.
이광용: 아, 지금 아주 중요한 언급을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경찰이 대구사건과 관련이 있다는 말씀입니까?
증인: 내가 농촌을 돌아보니 경찰들이 무턱대고 농장을 찾아가서 농민들에게 쌀을 내놓으라고 강요한다고 했소. 말을 안들으면 수갑을 채워서 경찰서로 데려가서 몇날 며칠이고 음식도 주지 않고 가두어둔다고 했소. 민중을 보호해야 할 경찰이 말이 됩니까?
이광용: 괜찮으시겠습니까? 지금 내부 고발을 하시는건데,
증인: 신변보호도 필요 없소. 나 최능인 할말은 해야되겠소. ~~(커튼 뒤에서 앞으로 나서며)~~농민들을 괴롭히는 그들은 바로 일제 하수인이었던 친일경찰이오. 국립경찰은 친일파와 부패한 자들의 피난처가 되고 있소.
이광용: 지금 들으셨습니까? 대구 사건은 그냥 배가 고파서 일어난 일이 아니었습니다. 친일경찰과 이 사건의 연관성을 철저히 조사해야겠습니다. 증인심문 여기서 마칩니다.
최원정: 야, 저 멋있는 경찰아닙니까?
이시원: 내부 고발하기가 쉽지가 않은데~
박상영: 저런 경찰이 있을까 싶을만큼~
최원정: 실제 인물이잖아요.
유동훈: 최능진 이란 분은 특이한 인물인데요 (최능진(1899~1951)-독립운동가, 경찰, 일제 강점기 안창호와 함께 독립운동, 해방후 평양 건국준비위원회에서 활약). 해방 이후에는 평양에서 건국 준비위원회 평남지부에서 치안국장을 했어요. 질서를 유지하는 역할을 하다가 이 분이 38선 이남에서 친일경찰들이 엄청나게 득세한다는 소식을 듣고 월남을 결심합니다. 월남을 해가지고 미군정의 경무국 수사국장으로 들어갑니다.
최원정: 이렇게 내부 고발을 하셨는데 무사하셨나요?
다니엘: 용감한 일인데~
유동훈: 이 증언을 이유로 해서 한 달 후에 자리에서 해임돼죠.
최원정: 이런 분은 잘 지켜드렸어야 됐는데~ 미군이 쌀 공출 제도를 도입하면서 쌀 걷는 일에 친일파, 친일경찰들을 기용했다는 얘기잖아요, 그럼 어떻게 된 거예요?
박태균: 왜냐하면 미군정 자체가 미군도 모자라구요. 관리도 모자랍니다. 그러니까 경찰들이 여러가지 역할을 하는데 그 중의 하나가 쌀을 수집하는 역할을 합니다. 당시에 구성을 보면 경위 이상의 경찰 중에 일본 총독부에 고용되었던 비율이 82% 돼요.
일동: 거의 그대로 들어온 거네요.
박태균: 사람들 입장에서는 저게 일제 강점기 때에도 나를 괴롭히던 순사가 우리가 나라를 되찾았는데 똑 같은 사람이 와서 또 와서 쌀을 뺏어가~ 이렇게 된 겁니다.
박상영: 그냥 옷만 바꿔 입고와 가지고 진짜 수탈해 가네요 (친일경찰-면서기-이장-지주: 일제강점기 수탈의 구조가 그대로!).
유동훈: 쌀을 수집하는 과정에서 벌금을 내게 하구요. 구류 잡아가두는 심지어 신체형까지 가했다고 합니다.
이시원: 그리고 또 친일경찰들이 나쁜 짓도 많이 했을 것 같애요.
유동훈: 역시 머리가 잘 돌아가는 경찰 같은 경우는 쌀을 모우는데 이걸 바로 보고하지 않고 자기들이 갖고 있다가 암시장에서 뭘 교환한다든가 여러가지 치부행위를 했다고 하구요. 경찰들이 가지고 있던 쌀의 양이 평균 3말 정도 되었다고 합니다.
박상영: 경찰들이 평균적으로 쌀을 집에서 3말이나 가지고 있다는 거에요.
유동훈: 24 킬로죠.
일동: 한 말이 8킬로 니까 세 말은 24킬로,
박상영: 사실 제가 소식가인데요. 제 기준으로 보면 거의 6개월에서 1년 까지로 먹고 살 수 있을 양이네요.
최원정: 박 작가가 6개월 먹을 수 있는 양이면 우리는 한 2~3년 먹겠네요.
박상영: 4인 가족을 책임질 수 있을만한 양인데~ 그걸 빼돌렸다고 밖에는 말이 안되는 거지요.
이시원: 시장에 쌀도 없어서 지금 가격이 오르고, 사람들이 굶어죽고 있는데~
다니엘: 인간 아네요. 시위 나가면 진짜 분노가 머리끝까지 올라왔을 것 같애요.
박태균: 경찰 중에는 아까 나왔던 최능진 국장 같은 경우도 있었고, 광복군 출신도 있었습니다. 문제는 이 분들이 경찰의 주류가 아니었다는 얘기예요. 아주 핵심경찰들은 독립 운동가를 탄압하는데 참여했던 분들이에요.
최원정: 다니엘 눈 빛이 이글 이글 그래요.
다니엘: 저는 계속 그 82% 라는 숫자가 머리 속에서 맴돌고 있어요. 이게 말도 안되는 비율이라고 생각해요.
최원정: 그런데 사실 이게 청산이 되어야 하잖아요. 어떻게 이렇게 친일경찰들이 활개를 치고 나다니게 되었는지요, 교수님?
박태균: 글쎄, 저도 왜 그랬을까요?
최원정: 제가 교수님, 뭐라고 나무라는 게 아니고 너무 화가 나서 그랬어요.
박태균: 그런데 지금 저기 계신 분이 그 당시 미군정 사령관이었던 하지 중장입니다. (존 하지 (1917~1963)-미군정 사령관, 당시 남한의 최고 통치권자, 제24군단 사령관으로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오키나와 전투 참전). 하지 중장은 제24군단 사령관이었는데요. 사실은 정부를 운영했던 군인이 아닙니다. 야전군 출신입니다. 군인들 중에도 군정을 하거나 민사업무를 하는 군인들은 훈련 따로 받습니다. 그런데 원래는 미국 자체가 한국에서 군정을 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한국에 올 사람들을 훈련을 시킨 적이 없어요. 그런데 이제 해방이 되고 한국 사람을 보니까 군정이 필요하겠다 라고 급하게 결정을 내리니까 한반도에서 제일 가까이 있었던 미24군단의 하지 사령관을 미군정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그대로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최원정: 가까이 있었던 이유만으로 그냥 발령 1순위였던 거예요?
박태균: 당시에 미국이 얼마나 급했는가를 보여주는 것 같애요. 소련은 이미 한반도에 진입을 했고 미군은 그 당시 아직 일본 본토에도 못들어갔어요. 그런 상황이니까 어떻게든 멈추어야 되는데 어떻게 해야되나? 군정 세우자 해서 급조해서 들어가는 겁니다. 전문적으로 통치할 수 있는 사람은 사실 사령관으로부터 밑에 까지 거의 없었습니다.
유동훈: 한가지 기억나는 게 있는데 하지 중장 밑에 한 대위가 학부에서 교육학을 했거든요. 네가 교육부 장관 맡아라 이렇게 된 거거든요. 이 정도로 전문가가~ 대학 정도만 나와서 한 나라의 교육정책을 총괄한다는 게 없잖아요.
이시원: 무슨 과 나오셨어요?
박상영: 불문과
이시원: 그러면 외교부 장관 해라~
박상영: 진짜 군대에서 보직할 때 그런 식이죠. 미대 나왔으니까 환경미화 하는 식으로 진짜 그야말로 주먹 구구식이죠.
박태균: 근데 저는 왜 공병대에 보냈죠~ 사학과를 나왔는데~ 삽질했거든요.
최원정: 유물발굴하라고~
박태균: 현대사 했다고 했거든요. 그런데 거기다 보내가지고
이시원: 이렇게 전문가도 없고 한국을 아는 사람도 없으면 도대체 한국은 어떻게 되는 거예요?
박상영: 하지가 1945년 9월 8일 인천항에 들어올 때 굉장히 가슴 아픈 일이 일어나게 되는데요.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 박상영의 상영회에서 제가 알려드리겠습니다. 제가 지은 이름은 아니고요.
----------------박상영의 상영회----------------------
박상영: 네, 박상영의 상영회입니다. 1945년 9월 8일 존 하지가 이끄는 미제24군단이 인천항에 상륙합니다. 우리 독립을 도와 줄거라 믿은 사람들이 인천항에 바글바글하게 모여들기 시작했는데요. 배가 가까이 오면 올수록 사람들이 점점 더 많이 운집하기 시작하고 저지선을 뚫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 합니다. 그리고 배가 기어이 항구에 도착해서 사람들은 얼마나 기쁜 마음으로 맞이를 했겠어요. 새 시대가 온다. 새롭게 우리를 구원해줄 사람이 온다 라는 그런 기쁨에 젖어 있을 때 총성이 울려퍼집니다. 경찰이 발포한 총에 의해서 두 명의 사람이 죽는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납니다. 총을 쏜 사람은 일제 강점기의 경찰들이었습니다. 이때 하지는 경찰들에게 무슨 말을 했을까요? 일반시민을 쏴 죽인 경찰들에게~
다니엘: 왜 쐈느냐고? 환영하러 나왔는데~
박상영: 문책을 하거나 그렇게 해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하지는 이 사람들에게 치안유지에 힘쓴 것에 대해서 감사의 뜻을 전했다고 합니다.
다니엘: 무슨 치안이길래, 사람들이 환영하러 나왔는데, 자기 적이 아닌데~?
이시원: 뭔가 오해가 있었나요? 환영인파가 아니라 암살이랄지, 통역이 잘못 되었나요?
박태균: 미군정이 들어오기 전에 모든 정보를 일본총독부에서 받았거든요. 미군정 쪽에서는 한국 들어가면 거기 공산주의들이 많고 빨갱이 많다고 그런다 라고 하는데 환영인파가 나왔다고 하는데 저게 지금 뭔지 모르는 거죠. 아무튼 질서유지가 필요하구나 이런 방식으로 판단했던 것 같애요.
이시원: 그분들은 진짜 억울 했을 것 같애요. 기뻐서 나왔는데~
유동훈: 저지선을 넘었다는 이유로 지금 총을 쏘았다는 거죠?
박상영: 사실은 미군은 첫발부터 그렇게 한국민들과의 그런 시작을 잘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고요. 지금까지 박상영의 상영회였습니다.
최원정: 박상영의 상영회 별점 몇 개 주시겠습니까?
다니엘: (박상영에게) 앞으로 안할 것 같애요.
박태균: 하지 사령관이 들어온 이유가 기본적으로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하는 거잖아요. 9월 9일날에 항복조인식을 합니다. 이 상황에서 딱 한번 하지 사령관이 발표를 하는 것이 일본인 관리들을 당분간 계속 그 자리에 두겠다 라는 발표를 합니다. 사실 한국 사람으로서는 너무나 의아한 일이죠. 해방이 됐고 미군이 들어왔는데 일본 관리들을 그대로 둔다 그게 주는 충격 또한 굉장히 컸어요.
박상영: 진짜 황당했겠어요.
최원정: 미군정이랑 미군들이 한국에 대한 역사인식 감수성이 떨어지는 것 같애요. 그렇게 밖에 안느껴지는데요.
박상영: 그냥 무시하지 않고서 정서를 짐작해 볼 수 있잖아요. 그것에 대해서 한번이라도 고려를 했으면 이런 선택을 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다니엘: 분명히 미국도 미군정도 본토에서 비판을 받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 그래서 뭘 조금 준비했어요. 이건 1945년 9월 11일 The New York Times에 실린건데요.
최원정: 그 신문 깨끗한데 어디서 구했어요?
다니엘: 저는 타임 머신을 타고 갔다 왔습니다.
다니엘: 여기 보시면 1면에서 한국상황을 묘사하는 기사가 나와 있습니다. Koreans March in Protest Against Keeping Japanese. Officials in Washington Amazed at Army Action – State Department Disclaims Army Part in Move –MacArthur Bars Disorder (한국인들 항의 집회 열려, 일본인 관리유임정책에 반발). 이건 지금 한국에서 미군정이 계속 친일경찰을 두겠다는 것에 대한 어떤 반대시위 한다는 기사를 담고 있는데요.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여기 뒷면에 보시면 Liberation in Korea (한국의 해방) 조선의 해방이라 쓰였죠. 그 동안 대한민국이 굉장히 많은 수탈을 당했는데 계속 그런 기사내용을 보면 비판적이에요. But how could we expect the orders to be cheerfully obeyed when transmitted by men whose very presence in Korea is an insult to all Koreans? (한국에 남이 있는 것이 모든 한국인들에게 모욕감을 주는 이들(일본인)로 어떻게 제대로 정책을 시행할 수 있는가) 이렇게 잘못됐다는 거에요. Are we to be “soft” with the colonial riffraff of Japan and hard with the people we have come to set free? (우리는 식민 쓰레기들에는 무르고 우리가 해방시키려는 사람들에게는 억압적이어야 하는가. 뉴욕 타임즈, 1945.9.11.).
박상영: 알고 있네! 아네요. 심지어 미국 본토에서 나온 비판 신문 1면 보도였잖아요. 굉장한 중요한 사항으로 다루고 있고 이런 이해가 분명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왜 이런 행동을 했는지에 대해서 의문이 드네요. (의문: 미군정이 일본인 관리를 재기용한 이유?)
박태균: 지금 이 기사가 나오고 1주일 정도 지난 다음에 트루만 대통령이 45년 9월 8일날 한국의 독립에 대한 성명을 발표를 해요. 그러니까 한국을 우리가 언젠가는 자유롭고 독립된 나라로 만들어야 된다. 그런데 우리의 필요에 의해서 당분간은 임시적으로 일본인 관리들을 쓸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트루먼 대통령 성명 中. 1945.9.18.-일시적으로 유임된 일본인들은 오직 그들의 기술력 때문에 한국인과 우리의 고용인으로 활용되고 있을 뿐이다). 이 사람들이 통치를 해본 기술이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최원정: 그걸 대통령 입에서 그런 구체적인 얘기가 나온 거예요?
박태균: 이게 한국민들의 저항에 부딪히니까 돌려 보낸 거아네요 그럼 지금 기관들 자리가 다 비잖아요 여기에 누구를 시킬 거냐? 예전에 행정했던 사람들을 한번 불러보자 하다 보니까 일본 총독부 밑에서 일했던 사람들을 다시 기용하기 시작한 거죠.
박상영: 사실은 지금 와서 우리가 짐작을 해보더라도 한국 사람들의 정서 같은 것을 이해해 볼 수 있잖아요. 친일파에 대한 어떤 반감 같은 것을 충분히 고려했다면 이런 선택을 하지는 안했을 것이다.
박태균: 그런데 알고 있었어요.
박상영: 그러면 아예 무시했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이시원: 알고 있었다면 이것보다 더 중요한 무엇인가 이들한테 있었다는 건가요?
박태균: 무언가 더 중요한 게 있었겠죠. 지금 이렇게 한 자체가 한국인들이 미군정에 대한 평가를 나쁘게 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는데도 그런데 이 사람들을 써야 되는 거예요. 그러면 왜 이 사람들을 써야 됐을 것 같애요. 그 당시의 상황으로서?
다니엘: 제가 한번 그 당시 세계에 대한 Big Picture를 그려 보자면, 지금 일본을 이겼고 독일을 이겼잖아요. 그러면 그 두 나라가 관리했던 구역들을 어떻게든 관리해야 되잖아요, 무너졌으니까 (제2차 세계 대전승리-일본, 독일의 식민지였던 지역을 관리해야 하는 미국). To avoid chaos (혼란을 막아라). 여기서 혼란이 오면 안되는 거에요. 그러니까 35년 동안 관리했던 사람들 그냥 내둬야지 chaos가 일어나지 않는 거지요. 그게 미국의 우선순위였던 거 같애요. (다니엘 생각-35년 동안 조선을 관리한 친일파를 기용하는게 혼돈을 피하기 위한 길이라고 생각한 것 아닐까). 한국 사람들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했던 거지요.
박태균: 나중에 가면은요. 그걸 이해를 해요. 미국의 입장에서는 사실 더 급한 문제가 있었어요.
최원정: 그게 뭐냐 구요, 교수님?
박태균: 45년이 되니까 미국이 생각하는 세계의 그림이 바뀌기 시작하는 거예요. 45년이 지나고 또 다른 새로운 전체주의자들이 나타나는 거예요. 미국 사람들의 생각은 바로 소련입니다. 그런데 1945년 8월 15일 이후의 한반도 상황은 사회주의적 공산주의자들이 가장 대중적으로 인기가 많은 상황이었어요. 그러면 이걸 어떻게 막아야 되는가 사람은 충분하지 않아요. 그렇다면 공산주의자들을 또는 사회주의자들을 탄압했던 경험을 가진 사람들, 이 사람들에 대한 정보를 가진 사람들이 필요한 거에요 (사회주의자 정보통-사회주의자 탄압 경험자).
최원정: 그게 친일경찰이었다는 것이죠.
박상영: 결국에는 공산주의를 막기 위해서 미봉책으로 친일경찰을 밀어 넣은 거네요.
최원정: 공산주의자들을 잡고 고문하는 그런 기술은 그들이 최고잖아요.
박상영: 고문 기술자들을 영입한 거네요-노덕술 같은,
최원정: 미군정의 실제 속내가 어떤 것인지 내가 증거를 가지고 왔습니다. 미군정 내부의 사정을 알 수 있는 중요한 문서들인데요. 꺼내 보겠습니다. 이게 바로 버치 박스, 버치보고서라 하는 것, 이게 바로 박태균 교수님이 발굴한 귀한 자료들이라고 합니다.
이시원: 직접 발굴하신 거예요?
최원정: 발굴하신, 어디를 파셨어요? 어디 삽질하다가 발굴하신 거에요?
박태균: 하버드 대학에 있는 엔칭 도서관에서 얕게 파다가 발견을 해서 깊게 파기를 시작했어요. (버치 보고서-버치 중위가 정치 고문으로 한국에 머물며, 미군정 중요문서와 메모를 정리한 자료). 레너드 버치라는 사람이 좌우합작위원회를 중간에서 이끌고 주도하고, 그러니까 좌우합작위원회 회의가 버치라는 사람의 집에서 열렸어요 (레너드 버치-제24군단 및 하지의 정치 고문, 좌우합작위원회 조정 미소공동위원회 자문관 등 활동).
최원정: 버치가 한국에서 직위가 무엇이었어요?
박태균: 계급은 중위 밖에 안돼요. 오하이오에서 변호사를 하고 있다가, 1944년에 군정요원으로 들어갑니다. 군정이란 미국이 점령지를 통치를 할 때 거기에 필요한 전문요원들을 불러가지고 교육을 시키는 건데 이 분은 변호사니까 법전문가로 거기에 들어가게 된 거죠.
최원정: 지금 말씀하신 버치 중위가 (사진 속) 이분이네요.
박태균: 그 당시 30대였고, (레너드 버치와 세 딸들).
최원정: 딸인가요?
박태균: 가족이 다 한국에 같이 있었어요. 부인도 왔고요. 와서 아들을 낳았어요.
이시원: 아들은 국적이 한국인가요?
박태균: 그 당시에는 한국땅이 아니고 미국 땅이었죠.
일동: 아! 그렇구나.
최원정: 이걸 몇 년도에 발굴하셨다구요?
박태균: 2017년에 발굴을 했구요.
이시원: 여기 아리랑 악보 있네요. ARIRANG-Korean folk-song “Arirang” 영어로 가사가 쓰여져 있고, 재미있는게, 번역이 아니라 영문식으로 Na-rul beu-ri-go ka si nun nim-un
박태균: YOU AND KOREA 라는 잡지가 그 당시 미군정하에 외국에서 한국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한국을 소개하는 잡지예요 (YOU AND KOREA (당신과 한국)-한국을 방문하는 외국인들에게 한국을 소개하는 잡지).
최원정: 소개해 주세요, 어떤 내용인지, 진짜~
박태균: 한국에 오면은 모기도 많고 파리도 많고 물을 반드시 끓여 먹어라 끓여 먹지 않으면 안된다.
다니엘: 저도 여기서 지금 자료 하나를 보는데~ 깜짝 놀랬습니다. 여기서 Police Collablration(경찰협력)이라고 쓰여 있거든요. 근데 우리 아까 초반에 얘기했던 Ro Duk Sul (노덕술) 이라는 이름이 여기에~
최원정: 미군정도 예의주시했던 인물이라는 증거죠.
박태균: 아까 우리 잠깐 등장했던 최능진 수사과장도 버치하고 계속 접촉을 해요. 많은 정보를 줍니다.
이시원: 이 자료에서 한 단어가 굉장히 인상에 강하게 남았는데 coup d’atat (쿠데타)라는 단어가 있거든요. 쿠데타를 염려를 했었나요?
박태균: 네, 이게요 사실 이 자료를 보면서 가장 중요한 자료라고 찾은 게 바로 요 자료입니다. 저도 의문이었던게 그거에요. 왜 그렇게 한국 사람들의 여론을 나쁘게 하는 친일경찰을 끝까지 미군정이 데리고 있었을까. 여기에 나오는 문장이 있습니다. As the Korean police force remained loyal, the Command was able to act swiftly and effectively stopped the attempted coup d’etat.(한국 경찰은 충성으로 남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령부가 안전했고 또 효율적으로 쿠데타 시도를 막을 수 있었다). 이 쿠데타가 뭐냐 하면은 저희가 신탁통치논쟁 얘기할 때 있었던 신탁통치반탁운동 할 때 파업을 얘기하는 겁니다 (쿠데타=신탁통치반대-반탁운동). 파업을 할 때 미군정이 마비가 되는 겁니다 (미군정을 마비시킨 반탁운동). (贊託賣國奴打倒 美蘇兩軍卽時徹退 Immediate Withdrwal of the US And Soviet Armies). 그러니까, 미군정 쪽에서 놀란거지요. 아, 이게 보통 힘이 아니구나. 미군정도 안굴러갈 수 있겠구나. 그런데, 경찰만 파업을 안했어요. (반탁운동-파업에 동참하지 않은 경찰). 여기 나와 있는게 remained loyal 입니다. (미군정이 믿을 수 있는 건 경찰 밖에 없다). 유일하게 내가 믿을 수 있는 건 경찰 밖에 없다.
박영상: 그들이야 말로 친일했던 경찰이야 권력에 신의를 받칠 줄 아는 그런 사람들이었던 거지요.
박태균: 저는 사실 이 문서를 보고 한편으로는 와 내가 이걸 발견했구나 하는 기쁨도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너무 씁쓸했어요 (“이걸 내가 발견했구나!” 기쁨도 잠시 씁쓸하게 다가온 해방한국의 현실). 이런 상황이 벌어졌구나!
박상영: 그야말로 우리 민족의 친일청산을 할 수 있었던 그런 계기와 그런 것들도 다 미국의 편의에 의해서 재편되면서 다 실패로 끝났던 거잖아요 (박상영 생각-한반도 내 친일청산의 기회가 미군정의 편의에 의해 실패로 끝난 것). 많은 사람들이 결국은 죽어 나가는 그런 사건의 도화선이 되었던 거구요.
최원정: 사실 청산되고 제거되어야 할 친일파들의 입장에서는 미군정 덕분에 심폐소생술 덕분에 살아난 거에요.
박태균: 버치 중위가 나중에 미군정 업무를 그만 두고 본국으로 돌아가서 여러가지 활동을 하면서 편지도 보내고 본인이 여러가지를 했는데 여기 뭐라고 했느냐 하면 사실은 미군정의 정책은 자기가 지나와서 보니까 실패한 것이었다. 결코 성공하지 못했다. 우리는 한국에다 제대로 된 민주주의를 심을려고 했지만 사실은 전혀 못했다는 거에요. 하지 행정부는 너무 순진했다. 우리가 이걸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너무 쉽게 생각했다.
유동훈: 버치뿐 아니고요. 한국 재건전문가로 온 리처드 로빈슨 이라는 사람은 이런 말을 합니다 (한국 재건전문가 및 미군정 역사관). 미군정이 조선에 대해서 취한 정책이 어떤 것이 있었나 했을 때 “DO NOTHING’ (아무 것도 없다) 라고 말하는 거지요.
다니엘: 로빈슨 이라는 사람은 미국이 공산주의를 막기 위해서 친일파들의 횡포를 어느 정도 눈감았을 때는 그걸 상부에 보고 했어요. 보고했는데 상부에서는 무슨 얘기를 했느냐 면은 이런 반응이었어요. 한국인들은 좀 가혹하게도 대할 필요가 있다 (리처드 로빈슨.1947-미군정 담당자들은 종종 한국인들에게는 어떤 잔인한 취급이 효과가 있다는 식으로 응수했다). 이런 반응이 나왔다고 하는데 이제 바로 미국의 배반이라고 표현하였다 (리처드 로빈슨의 회고록-미국의 배반).
최원정: 처음에 대구사건이 발발을 했고 이게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두 달여 지속이 되잖아요, 교수님. 이 움직임들이, 시위가 약간 좌익의 지도에 의해서 전국적으로 이루어진 건지, 사실 대구항쟁하면 좌익폭동이라고 얘기하는 분들이 많거든요. 그리고?
이시원: 아까 최능진 수사과장도 처음 시작은 좌파의 책동이었다 라고 말을 했잖아요. 얼만큼 관련이 있는지 이게 진짜인지~?
박태균: 제가 프랑스 혁명을 말씀 드릴게요. 프랑스 혁명을 시작할 때에 시작단계에서 제일 중요한 역할을 한 거는 좌파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저희가 프랑스 혁명을 극좌모험주의다 이렇게 얘기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누가 시작하고 누가 조직을 처음에 했느냐 불을 누가 부쳤느냐도 분명 중요하지만 문제는 그랬을 때에 왜 그 많은 사람들이 같이 들고 일어났을까 공산주의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안좋아하는 사람들도 있었을텐데 이 사람들이 일어나는 조건들이 만들어졌느냐고 평가를 해야 돼요. 이후에 있었던 제주 4.3사건, 여순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걸 볼 때 공산주의자들이 시작해서 이 사건을 폄하한다 그러면 안돼죠 (박태균 생각-공산주의자들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서 전체를 폄하해서는 안돼). 그 당시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그런 부분들이 필요합니다.
최원정: 너무 아쉬운게 이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이후에도 좌익세력들 다 전멸시킨다 해 가지고 학살이 일어나지 않았나요?
유동훈: 소위 좌파 빨갱이로 몰리게 되면 사살이 되거나 즉각 처형이 되는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 했구요. 7500명 정도가 검거돼서 고초를 치렀다고 하고(대구,경북지역-대구사건 참여자 7,500여명이 좌파로 몰려 검거-진실화해위원회), 박정희 前대통령의 형이 있어요. 박상희 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박상희(1906~1946)-독립운동가, 언론인, 일제강점기 신간회에서 활동), 이 분도 경북 선산에서 여러가지 건국준비 활동을 하다가 요 때 10월 3일날 사건이 터지고 선산에서 진압과정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당시 조선공산당 선산군 당위원장). 이 분에 대해서 조금 더 말씀 드리면은 사실 선산경찰서를 습격을 해요. 시위대를 모아서 습격을 하는데 모아놓았던 쌀 150여 가마를 빼앗아 나누어 주거든요. 이러면서 흥분한 시위대가 경찰을 공격할려고 했을 때 경찰을 공격하지 못하게 합니다 (경찰을 공격할려는 시위대를 저지한 박상희). 오히려 온건한 분이었다고 생각을 하는데 결국 대구가 진압이 되고 10월 6일날 다른 지역에서 경찰들이 와서 목숨을 잃었죠.
최원정: 1946년 가을에 일어났었던 대구사건의 비극이 먼 미래에도 계속 이어진다고 들었어요. 그 비극을 함께 보겠습니다.
------------------군과 경찰의 대대적인 유혈진압------------------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되자 군과 경찰은 대대적인 유혈진압을 벌인다. 그 결과 민간인 1,000여명과 경찰 200여명이 사망한다.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경북 경산의 한 폐광에서 발견된 수백구의 유해들 (경북경산 코발트 광산-민간인 학살 유해발굴 현장). 한국 전쟁 당시 대구형무소 재소자들을 비롯한 3,500여명이 이 폐광에서 집단 사살을 당했다 (1950년 대구형무소 재소자 포함 3,500여명 집단사살). 대구경북 지역에서만 수만명의 사람들이 좌익사범으로 몰려 학살됐다 (한국전쟁 전후 대구, 경북 지역에서 약3만 명이 학살(이복녕 증언)이들 중 상당수의 ‘대구사건 관련자’ 포함). 이들 중 상당수가 일명 대구사범, 10월 봉기에 참여했던 이들이었다 그리고 여기에 아홉살 이쁜이도 있었다.
이시원: 아홉살 이쁜이요?
최원정: 대구사범에 9살 짜리가 들어가요?
유동훈: 제가 자료를 하나 보여드리면은요. 당시 영천경찰서에서 작성한 9살 이쁜이라는 아이의 인적조사서입니다. 보시면 한국 전쟁 때 빨갱이 가족이라고 해서 처형을 한 겁니다. 여기 맨밑에 보면 10.1 당시 요인암살 방화 등 행위한 자. 그래서 50.7.10 처형 41년생이 거든요. 그러면 대구 10월항쟁 때는 5살~
최원정: 5살짜리가 무슨~?
박상영: 영천은 제 선산이 거든요. 그런데 거기는 진짜 가보시면 아시겠지만 그냥 농촌이에요. 농업지대에 사는 5살 짜리 꼬마 아이가 어떤 사상범으로 몰려서 사살을 당한 그런 일인 거잖아요. 정리해 보자면 너무 충격적으로 와 닿고 제가 이런 사건을 대구시민으로서 전혀 모르고 살았고 또 소설가로서 이런데 관심을 안가졌다는 데에 대해서 책임감도 생깁니다.
박태균: 그 당시에 이 사건으로 인해서 많은 분들이 체포되어서 감옥엘 가요. 그런데 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이 분들이 풀려나지를 못한 거죠. 감옥에 있다가. 그런데 북한군이 남침에 의해서 밀고 내려오니까 대구사건에 가담했던 사람들은 나중에 북한군이 와서 이 사람들 풀어주면 북한군을 위해서 일하겠구냐 하고 감옥에 있는 사람들을 집단학살을 한 거죠 (일명 ‘좌익사범’-대구사건 가담자들이 북한에 협조할 것이라 여긴 정부).
유동훈: 위험분자 라고 생각을 한 거죠 (이념대립이 빚은 집단학살).
박태균: 逆도 있습니다, 逆도~ 나중에 인천상륙 작전하고 나서 북한군이 쫓겨갈 때에는 대전형무소에 있는 사람들을 학살하고 갔는데 (인천상륙작전 후 북한군이 대전형무소 수감자 학살), 그런 사건들이 사실 전쟁이란 비극 속에서 일어났고 그것의 기원 중에 하나가 사실 대구사건이 되는 거죠 (학살사건의 뿌리가 된 대구 10월사건), 여기에서 사실은 적대감들이 서로 발생을 하는 거예요 (이념대립).
이시원: 보통 사람들은 그냥 먹고 살려고 진짜 배가 고파서 나갔는데 왜 그렇게 이념에 묻히고 정치에 이용되고 전쟁에 이용되는지 굉장히 비극적이고~ 정말 반성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기아에 허덕인 사람들이 이념-정치-전쟁에 이용된 현실-한반도에서 벌어진 참담한 비극).
박상영: 당시의 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도 이 사건이 알려지지 않게 뭔가 정치 색깔이 계속 입혀지면서 어떤 팩트의 사람들이 접근하는 것을 막고 있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거든요. (박상영 생각-지금까지도 대구 10월사건에 정치색이 입혀지고 있는 건 아닐까),
다니엘: 대한민국도 이시원씨가 말하는 것처럼 스스로 과거청산을 할 때가 된 것 같애요. 이제는 그런 것 좀 드러내서 얘기 많이 하고 청산해야지 그 사람들한테 조금이나마 좋은 일 하는 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10월 항쟁 위령사업 지원조례-대구 10월사건의 ①희생자 유해발굴작업, ②평화공원조성),
박태균: 제가 굉장히 아쉬워 하는게 뭐냐면 모든 것에는 때가 있는 것 같애요. 타이밍 얘기를 하죠. 그런데 더 늦지 않게 이걸 했어야 되는데 시간이 지나가니까요 정치적인 문제가 되어 버렸어요. (해방후 풀었어야 할 과제들이 시간이 지나며 정치적 문제로 변해가), 친일청산한다고 그러면 진보나 좌파가 되는 거고 (친일청산 문제조차 자유의 이념으로 갈라져), 친일문제를 왜 지금 와서 과거를 가지고 들먹여 하면 보수나 우파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사실은 이게 어떤 정치적 이데올로기나 무슨 파 무슨 파의 문제가 아니고 이것은 국가적이고 민족적인 일입니다. (친일청산-시대이데올로기가 아닌 국가와 민족의 문제), 여기에 좌우가 없고요 진보 보수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 때를 놓지니까 이런 거죠.
최원정: 아, 너무 속상하네요. 미군정시기에 잘못 꿴 단추가 사실 오늘날 우리의 삶까지 영향을 주고 있는 거잖아요.
이시원: 미군정에게 인류학자를 보내지 그랬어요 라는 말을 해주고 싶어요. 미국도 잘 하고 싶었겠죠. 그런데 그게 능력 부족이었던 건 확실하고 그런 의미에서 능력부족을 채우기 위한 방법으로서 문화연구가 필요하지 않았는가 (이시원 생각-한국의 문화와 정서를 이해하려는 연구와 노력이 필요하지 않았나).
유동훈: 미군은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유능한 군인이었지만 유능한 행정가는 아니지 않았나 이런 생각을 하거든요. 아쉬움이 남습니다.
최원정: 역사저널 그날 팀의 미군정에 대한 평가를 여기 박스에 담아서 다시 이 박스를 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박태균 교수에게). 더 깊이 있는 연구 열심히 파 주시기 바랍니다. 다음 회에 또 결정적인 그날로 다시 인사 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끝. (KBS 역사저널 그날 255회에서 정리).
① 1946년 10월 대구시위에 대해서도 5, 60년전 학교에서 배우지 못했다. 희생자 가족들과 학자들의 지속적인 관심과 연구와 비밀자료공개가 맞물려 일제 식민지 시대를 거쳐서 46년 9월 대구에서의 수백, 수천여명 부녀자들이 배고파서 쌀을 달라는 최초시위가 10월, 12월에 수도권까지 확산 총300만명이 참여하게 되었고(전체인구의 15%)와 6.25 한국전쟁시 국군에 의해 대구시위자 집단학살사건이 지하에 파묻혀있다가 2005.5.31 참여정부(노무현) 때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기본법에 의해 조사하게 되었다. 진실은 밝혀져야했다.
② 해방이 되자 남한에서는 미제24군단 사령관 존 하지(1917~1963) 중장에 의해서 미군정(1945~1948)이 실시되었다. 하지 중장은 야전군 출신이다. 미국은 한국에서 군정을 할 생각이 없었고 한국에 올 사람들을 훈련시킨 적도 없었다. 그런데 해방이 되고 한국 사람을 보니 군정이 필요하다고 판단을 하였다. 그때 북한에는 이미 소련군이 진주하자 한반도에서 제일 가까운 오키나와에 있던 미제24군단이 차출되었다. 소련이 한반도에 진입할 당시 미군은 아직 일본 본토에도 못들어갔었다.
③ 하지는 오키나와에서 인천으로 들어왔고 서울에서 일본군 항복조인식을 마치고 조선총독부에서 일했던 일본관리들은 자리를 떠나지 말고 계속해서 일하고 지시했다. 그리고 1주일 후 45년 9월 8일 트루만 대통령은 한국을 언젠가는 자유롭고 독립된 나라로 만든다고 성명을 발표했다. 일본인 관리들을 임시적으로 쓸 수 밖에 없다. 이 사람들은 통치를 해본 기술이 있기 때문이다.
④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미국은 일본이 관리했던 한반도를 관리하게 됐다, 혼란이 없어야 했다. 미국은 한국 사람들의 반일감정을 이해하고 있었으나, 35년 동안 남한을 관리했던 사람들을 그냥 일하도록 했다. 그게 미국의 우선순위였다. 그런데, 미국은 더 급한 문제가 있었다. 독일과 일본의 전체주의 군국주의를 꺾자 새로운 전체주의자가 나타났다. 그게 바로 소련이다. 그런데 해방 이후의 한반도 상황은 사회주의적 공산주의자들이 득실거렸다. 이걸 막아야 된다. 그렇다면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를 탄압했던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필요했다. 그게 바로 친일경찰이었다.
⑤ 미군정은 돈이 없었다. 국민들로부터 세금을 거둘 수도 없었다. 해방 직후 사람들이 외국에서 막 귀환하니까 주소가 일정치 않고, 누가 어디에 사는지도 모르고, 고지서를 발부할 데도 없고, 일본 기술자들이 가버리니까 공장은 안돌아가고 일자리가 없다. 소득이 없으니 세금을 못낸다. 본토에다가 돈 좀 달라고 했는데 줄 돈이 없으니 자체에서 알아서 해결하라고 한다. 미군정은 일본의 공공재산과 일본인 사유재산을 다 압수해, 그걸 매각하는데 살 사람이 없었다. 돈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경제가 전반적으로 돌아가지않았다.
⑥ 해방이 되자 초기에 모든 문제점이 한꺼번에 터졌다. 설상가상으로 1946년 여름에 콜레라가 대구 경북지역에 확산 1946년 말에 환자가 약 2천5백명이었는데 그 중에 1700명이 죽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민중들은 살아가기가 힘들고 죽을 노릇이었다, 46년 9월에 처음 대구시위가 일어났고, 경북의 22여개 군으로 확산 되었고, 12월에는 수도권 쪽으로 확산되어 전국 73군데의 시-군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총 참여인원은 300만명 정도, 전체인구의 15% 정도의 큰 시위였다.
⑦ 대구 폭동은 공산주의자들의 책동에 의한 불행한 사건이지만, 그 원인제공은 국립경찰이 했다. 당시 경찰들은 무턱대고 농장을 찾아가서 농민들에게 쌀을 내놓으라고 강요했고, 말 안들으면 수갑을 채워서 경찰서로 압송, 몇날 며칠이고 굶기고 가두어두었다고 한다, 민중을 보호해야 할 경찰이 농민들을 괴롭혔는데 그들이 바로 노덕술 같은 친일경찰들이었다, 국립경찰은 친일파와 부패한 경찰들의 피난처 역할을 하였다.
⑧ 미군이 쌀 공출 제도를 도입하자 쌀 수집에 친일경찰들을 기용했다. 미군과 관리가 부족했기때문이다. 당시에 경위 이상의 경찰 중에 일본 총독부에 고용되었던 비율이 82%다. 사람들 입장에서 저게 일제 강점기 때도 나를 괴롭혔는데 나라를 되찾았는데 지금 또 와서 쌀을 뺏어간다. 쌀을 수집하는 과정에서 벌금을 내게 하고, 잡아가두고 심지어 신체형까지 가했다. 머리가 잘 돌아가는 경찰은 쌀을 모아서는 바로 보고하지 않고 자기들이 갖고 있다가 암시장에서 팔아 치부행위를 했다, 경찰들이 가지고 있던 쌀이 평균 3말 정도 되었다고 한다,
⑨ 1946년 10월, 대구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되자 군과 경찰은 대대적인 유혈진압, 그 결과 민간인 1,000여명과 경찰 200여명이 사망,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946년 10월 대구시위 사건으로 인해서 많은 분들이 체포되어서 투옥된다. 그런데 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이 분들이 감옥에서 풀려나지를 못하고 있다가 북한군이 남침에 의해서 밀고 내려오니까 대구사건에 가담했던 사람들은 나중에 북한군이 와서 이 사람들 풀어주면 북한군을 위해서 일하겠구냐 판단하고 감옥에 있는 사람들을 집단학살을 해버렸다. 경북 경산의 코발트 광산에서 수백구의 민간인 유해들 발견됐고, 한국 전쟁 당시 대구형무소 재소자들을 비롯한 3,500여명이 이 폐광에서 집단 사살을 당했다. 대구경북 지역에서만 수만명의 사람들이 좌익사범으로 몰려 학살됐다. 이들 중 상당수가 일명 대구사범, 10월 봉기에 참여했던 이들이었다.
⑩ 북한군에 의한 대규모 학살사태도 있었다, 인천상륙 작전하고 나서 북한군이 쫓겨갈 때에는 대전형무소에 있는 사람들을 학살했고, 전국적으로 많은 남자들을 수백명씩 무자비하게 끌어다가 백사장에서 구덩이를 파게하고 학살하고 퇴각해다 (양평읍백사장양민학살사건), 그런 사건들이 사실 전쟁이란 비극 속에서 일어났고 그것의 기원 중에 하나가 대구사건이다. 학살사건의 뿌리가 된 대구 10월사건, 여기에서 적대감들이 서로 발생한 거다. 보통 사람들은 그냥 먹고 살려고 배가 고파서 시위를 했는데 이념에 묻히고 정치에 이용되고 전쟁에 이용되는 굉장히 참담한 비극이 발생했다. 정말 반성해야 된다.
⑪ 미군정은 한국 사람들이 그렇게 청산하고 싶어했던 친일경찰을 왜 끝까지 데리고 있었을까. 여기 그 답이 있었다. As the Korean police force remained loyal, the Command was able to act swiftly and effectively stopped the attempted coup d’etat (한국 경찰은 충성으로 남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령부가 안전했고 또 효율적으로 쿠데타 시도를 막을 수 있었다). 이 쿠데타가 뭐냐 하면, 신탁통치반탁운동 할 때 파업을 말하는 것이다. 파업으로 미군정이 마비가 되었다. 그때 경찰만 파업을 안했다. 여기 remained loyal, 미군정이 믿을 수 있는 건 경찰 밖에 없다.
⑫ 우리 민족이 친일청산을 할 수 있었던 계기와 그런 것들이 다 미국의 편의에 의해서 재편되고 다 실패로 끝났다. 이게 결국은 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사건의 도화선이 되었다. 사실 청산되고 제거되어야 할 친일파들은 미군정 덕분에 살아났다. 이게 당시 해방한국의 현실이었다. 한국 재건전문가 리처드 로빈슨은 이런 말을 한다 미군정이 조선에 대해서 취한 정책이 어떤 것이 있었나 했을 때 “DO NOTHING’ (아무 것도 없다) 라고, 로빈슨은 미국이 공산주의를 막기 위해서 친일파들의 횡포를 어느 정도 눈감았을 때 그걸 상부에 보고 했다. 상부에서는 한국인들은 좀 가혹하게 대할 필요가 있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런 반응에 로빈슨은 이건 미국의 배반이라고 표현하였다(회고록-미국의 배반). 미군은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유능한 군인이었지만 유능한 행정가는 아니었다. 아쉬움이 남는다.
⑬ 이제 대한민국도 스스로 과거청산을 할 때가 되었다. 이제는 과거에 말 못하고 감추었던 것을 좀 드러내서 얘기 많이 하고 청산해야지 무고하게 죽어간 사람들한테 조금이나마 좋은 일 하는 거다 (10월 항쟁 위령사업 지원조례-대구 10월사건의 ①희생자 유해발굴작업, ②평화공원조성 등), 해방후 풀었어야 할 친일반역자 문제가 시간이 지나며 정치적 문제로 변해갔다, 미군정 때 잘못 꿴 단추가 오늘날 우리의 삶까지 영향을 주고 있다. 사실은 이게 어떤 정치적 이데올로기나 무슨 파의 문제가 아니고 이것은 국가적이고 민족적인 문제다. 여기에 좌우가 없고 진보 보수가 없다. 이제 우리나라도 미국의 조지 워싱턴(1789~97)이나 에이브러험 링컨(1861~65) 같은 대통령이 등장할 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