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에서라도 고향에 / 이임순
학교를 다녔던 몇 년을 제외하고 나는 줄곧 태어난 고장에서 살고 있다. 길을 가다가도 종종 친정이나 시댁 일가친척을 만나 안부를 묻고 소식도 듣는다. 섬에 사는 일가친척이 없으니 명절이 되거나 태풍이 온다 해도 발 묶일 걱정이 없다. 텔레비전에서 추석을 앞두고 밤새워 줄지어 서서 열차표를 예매하는 광경을 본 적이 있다. 요즘은 인터넷이 대중화되어 지루하게 차례를 기다리지 않고 귀성이나 귀경길 표를 예매하니 편리하긴 해도 오가는 불편함은 여전할 것 같다.
고향 하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십수 년 전이었다. 독실한 불교 신자인 지인의 소개로 그분을 만났다. 이제 막 인사를 나누었을 뿐인데 고향이 어디냐고 물었다. 사는 곳이 고향이라고 했더니 “참 복 받은 분이네요.” 했다. 함경북도가 고향인 그분은 서른한 살 되던 해에 6.25 사변이 일어났다. 시아버지의 권유로 남편과 세 아이와 함께 월남했다고 한다. 시아버지가 집안에 돈이 될만한 것은 모조리 싸주며 어떻게든 따뜻한 남쪽으로 가서 아이들 잘 키우며 살라고 신신당부를 하셨단다. 큰아이는 걸리고 남편과 둘이 한 아이씩 업고 무조건 남쪽을 향해 걸었다. 이웃 동네에 살던 남편 후배를 만나 일행이 되었다. 열흘을 함께 하는 동안 큰아이를 등에서 내려놓지 않아 무척 고마웠다고 했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찧는다’고 했던가. 밤에 잠든 틈을 타 전재산이 들어있는 가방을 가지고 후배가 줄행랑을 쳤다. 아이들이 배고파 우는데 우선 당장 끼니도 때울 수가 없었다. 굶는 날이 허다했다. 그런 와중에 아이들이 시름시름 앓았다.
고향으로 돌아갈 수도, 남쪽으로 더 내려갈 수도 없는 상황에서 몸이 불덩이인 두 아이를 잃었다. 억장이 무너졌다.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 아이를 묻었다. 약이라고는 먹여보지도 못한 죄책감에 아이들이 묻힌 옆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가지고 있던 수건으로 무덤을
덮어주고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으며 이를 악물었다. 막내만은 어떻게든 건강하게 키우겠다는 일념으로 다시 남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자식 앞세운 년이 무슨 염치로 밥을 먹겠느냐며 허기는 물로 채웠다. 먹은 것이 없으니 젖이 나올 리 없었다. 어쩌다 일손이 필요한 사람을 만나면 남편은 서슴없이 도와주고 작으나마 수고비를 받았다.
충청도 어디 쯤에 당도했을 때 전쟁 중인 데도 규모가 큰 집을 짓고 있었다. 남편은 무조건 일을 시켜달라고 통사정을 했다. 남의 집 대문간 방을 얻어 살면서도 끼니를 때울 수 있음이 감사했다. 그녀는 아이를 돌보면서 집에서 할 수 있는 일거리를 찾았다. 다행히 딸아이 또래를 돌보아주고 반찬값이라도 벌 수 있었다. 틈틈이 남의 콩밭을 매주고 콩잎을 따다 장아찌를 만들고, 고구마며 감자를 캐주고 칠거리를 주워와서 밥에 넣어 먹었다. 어떻게든 남편이 벌어온 돈은 모으고 당신의 수고로 생계를 꾸렸다. 밥을 먹으면 죽은 아이가 눈에 밟혔으나 열심히 사는 것이 아이들을 위한 길이라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남편의 현장 일이 끝날 즈음 감독이 계속 일할 의사가 있느냐고 물었다. 새로운 공사장에서는 막노동이 아니라 자재를 사다 나르며 감독하는 일이었다. 몸이 수월한 것도 좋았지만 일정한 수입이 있어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여유가 생기니 마음에 빚을 갚고 싶었다. 죽은 아이 또래를 보살펴주는 일이었다. 남편도 흔쾌히 승낙했다. 막내 딸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일하는 데도 지장이 없었다.
딸아이가 학교에 가고 나면 그녀는 고아원으로 출근을 했다. 성심성의껏 아이들을 살폈다. 일에 몰두할 때는 아이들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어 남을 돕는 것이 자신을 위한 일이기도 했다. 남편이 봉급을 받아오면 일정한 금액을 어려운 이웃을 위해 내놓았다.
성실하게 생활하고 알뜰하게 살림을 꾸린 덕에 집을 장만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자동차도 샀다. 딸이 결혼하여 집 가까이 신혼살림을 차렸다. 사위가 고아 출신이라 그분 내외를 친부모처럼 섬기며 주말이면 나들이를 다녔다. 신도 시샘을 했을까? 사고가 난 날도 가족나들이를 갔다 돌아오는 길이었다. 음주 운전한 차가 추돌 사고를 냈다. 사상자가 세 명이나 났다. 불행중 다행으로 그녀만 무사했다. 살아있어도 산 목숨이 아니었다. 처음으로 시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장례를 치르고 남편과 함께 살았던 집에서 더 이상 살 수가 없었다. 절을 전전하며 몇 년을 지냈다. 시아버지가 따뜻한 남쪽으로 가서 살라는 말씀이 생각났다. 절에서 우연히 만난 신도가 믿음이 갔다. 동병상련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신도 역시 가족을 교통사고로 잃었다. 신도가 사는 곳으로 이사를 했다. 햇볕이 많은 따뜻한 곳이라는 말에 망설임 없이 결정했다. 사람들이 그분을 북한댁이라 불렀다. 북한댁은 정이 깊었다. 눈동자 가득 고향을 담고 있었다.
그분은 ‘고향’소리만 들어도 먼 산을 바라보며 눈을 깜박거리다 눈물을 쏟았다. 그 연세에 웬 눈물 바람이냐고 하면 고개를 수그리고 그리움을 달랬다. 그분의 소원은 고향에 가는 것이었다. 꿈에서라도 가보고 싶었다. 주위에 사람은 많은데 일가친척은 물론이려니와 단 한 명의 고향 사람도 없었다. 고향 사람을 만나면 그가 누구라도 밥을 먹으며 실컷 이야기도 하고 싶었다. 죽어서 시아버지를 만나면 무슨 낯으로 뵐 것이며, 피난 중에 잃은 두 아들이 고향에 가보았냐고 물으면 어떻게 하냐고 걱정이 많았다. 바람은 희망 사항일 뿐 이뤄지지 않았고 타향살이 52년 만에 83세를 일기로 한 많은 세상을 떠났다.
고향에서 산다는 것은 그리움이 채워져 있고 언제 손을 내밀어도 잡아주는 든든한 버팀목이 있다는 것을 그분을 통해 깨달았다. 어머니의 치마폭 같은 넉넉함과 따스함이 있는 곳. 거기서 평생을 지내는 것은 옹달샘의 맑은 물이 늘 내 가슴에 흐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태어나고 자란 곳에서 살고 있습니다.” 했을 때 내 손을 덮섭 잡으며 “참 행복한 분을 만났습니다.”하고 지그시 바라보시던 그 표정이 오늘따라 새삼스레 생각난다. 시아버지의 배웅을 받으며 떠나온 고향, 평생 그리움의 대상이 되었던 그곳을 꿈엔들 잊을까 보냐며 눈시울을 적시던 모습이 오늘 내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친정 식구들과 시간을 보냈다고 하면 이렇게 좋은 말을 듣고 왜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다며 손수건을 꺼내던 분이었다.
자나깨나 고향을 그리워하다 고인이 되신 그분의 명복을 빈다.
첫댓글 한 편의 소설같아요.
소설 같은 삶을 사신 북한댁이었습니다.
아이고, 북한댁 그분은 전쟁의 비극, 민족의 아픔을 이렇게 고스란히 온몸으로 당하셨네요. 마음이 아픕니다.
글을 쓰는 내내 저도 울었습니다.
슬퍼요.
강한 의지의 북한댁이었습니다.
슬픔을 인내로 버틴 분입니다.
이런 인생을 사신 분도 있네요. 그 마음이 어떨지 짐작도 안 됩니다.
늘 눈물로 사셨습니다.
그 분, 꿈에서라도 만나셔서 행복한 시간 보냈으면 좋겠네요.
꿈에서 조차도 고향이나 친정식구들을 보지 못했답니다.
저는 꿈에서 두번 뵈었습니다.
나도 고향이 곁에 있어서 참 좋습니다. 운전대를 잡으면 20 여분만에 갈 수
있어 그런면에서 나는 행운아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저도 행운아입니다.
그분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걸 몰랐습니다..
참 아픈 글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아픔도 약이 되다는데 북한댁에게는 상처일뿐입니다.
참 박복한 인생이네요. 그 아픔을 어떻게 견디며 살았는지 하늘나라에서는 행복하셨으면 좋겠어요.
하늘나라에서는 온가족이 오순도순 살고 있기를 바랄뿐입니다.
고향 언저리에서 사는 저도 행복한 사람이네요.
북한댁의 사연은 한 편의 드라마로 써도 부족할 것 같네요.
곁에서 많이 위로해 드리셨을 것 같습니다.
저도 명복을 빕니다.
뮌가 해드리고 싶은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마음하나면 족한 분이기도 했습니다.
북한댁의 지난한 삶이 절절하게 와닿아 먹먹합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소설이나 영화로 만들어도 될 만한 애달픈 사연이네요. 전쟁이 낳은 비극이 이렇게 처절하다니요. 우리는 시대를 잘 타고 나서 그저 감사해야겠어요.
누군들 북한댁보다 나을 것이란 생각에
늘 감사하며 살려고 노력합니다.
우리 주변에 있어서는 안 될 일이네요. 글 고맙습니다.
제2의 북한댁이 있어서는 안 되지요.
공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