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전 / 송덕희
“이 가방 새로 산 거야?” 분명히 나갈 때는 못 보던 것이다. 딸은 검지를 입에 대고 ‘쉿’ 한다. 사위에게는 말하지 않은 눈치다. 한눈에 봐도 비싸게 보인다. 각이 잘 잡혀 있고 검은색 가죽은 윤기가 흐른다. 손잡이와 잠금장치에서 빛이 난다.
딸은 두 돌 지난 손자를 혼자 키우다시피 한다. 사위는 직장 일로 새벽에 나갔다가 밤늦게 올 때가 많다. 딸이 힘들어해서 틈이 나면 손자를 봐주기도 한다. 지난해 연말, 아이는 내가 볼 테니 영화나 보고 오라고 했다. 몇 시간이나 흘렀을까? 영국의 비(B)사 가방을 메고 들어왔다.
‘아니 얘가 통도 크네? 3년 전 결혼할 때 산 에스(S)사 가방은 모셔 놓고, 이걸 또?’ 속으로 적잖이 놀란다. 손자와 놀고 있는 사위가 눈치채지 못하게 빈방으로 들어갔다. “어떻게 된 거야?” 가방을 가리키며 딸을 취조하듯이 묻는다. 다른 아기 엄마들도 다 저런 가방 메고 다닌다고 한다. 육아 스트레스로 힘든 자신을 위로하고 싶어 큰마음 먹고 샀다고. 딸의 말을 들으니 이해는 된다. 그러나 좋은 말이 안 나온다. “엄마는 이런 가방 하나 없는데, 넌 이게 덥석 사지더냐?” 딸의 심기를 건드렸다. “엄마도 사면 되지? 돈 많잖아요?” 하면서 언성을 높인다. 말문이 턱 막힌다. 가시 돋는 말이 튀어나오고 감정싸움으로 번질 찰나다. 내가 참아야지 별 수 없다. 저게 뭐라고 사위의 월급보다 많은 돈을 주고 샀는지 이해가 안 된다. 아이 키우려면 돈 쓸 데가 많을 텐데 너무 무리한 건 아닌지 생각해 보라고 차분히 타이르고 싶었다.
딸은 물건을 살 때 참 판단이 빠르다. 며칠을 찾아보고, 이리저리 비교하다 결국 못 살 때가 많은 나와 다르다. 어디서 돈이 나서 저런 비싼 것을 사나 싶을 때도 있다. 이 가방도 그렇다. “돈은 아깝지 않았어?” 눈치를 살피며 물어본다. “나는 엄마 생각하고 달라요. 싼 거 여러 개 산 것보다 좋은 거 하나 사서 오래 쓸 거고, 비싸도 필요하면 살 거예요.” 묻는 말에는 대답도 안 하고, 자존심을 건든다. 나는 싸구려를 산 사람, 비싼 건 못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는 거냐고 말꼬리를 잡는다. 계속 삐딱하게 가고 있다.
딸은 나를 잘 알고 있다. 맞는 말을 했다. 그만저만한 가방은 많지만, 요즘 유행하는 명품 가방은 없다. 그래서 하나 사려고 백화점을 돌아다닌 적도 있다. 흰 장갑을 끼고 외래어를 섞어 가며 설명하는 판매원 앞에서 알은척하자니 기가 죽는다. 값이 비싸서 못 산다는 말은 안 한다. 고민해 보겠다며 매장을 나올 때 뒤통수가 따갑다. 인터넷 중고 사이트를 뒤져 보기도 한다. ‘당근’ 알림 소리에 손이 바빠지고 촉각이 곤두선다. 유행이 지난 것도 비싸다. 어쩌다 괜찮은 게 있지만 머뭇거리는 사이에 발 빠른 누군가가 먼저 사 간다. 기운이 달리는 일이다. 사지도 않으면서 헛고생만 하는 것 같아, 앱을 지웠다.
이런 나에게 결정 장애가 있다고 한다. 어떤 걸 얼마에 살지 잘 판단하려면 책에서 배운 '현명한 소비 생활'을 다시 공부해야 한단다. 이왕 살 거면 얼른 사야지 미루면 피곤하기만 하다. 정신 건강에도 안 좋다. 이제부터는 너무 재지 않고 후딱 사겠노라 약속한다. 그런데 엄마한테 장애라는 단어까지 쓰는 건 좀 심하다고 했다. '돈은 있어, 가방이 사고 싶어, 그런데 안 사는 이유가 있냐.'고 몰아붙인다. 보통 사람 기준으로 명품 가방은 비싸다. 가격대가 몇 백 만원에서 몇 천 만원까지다. 쉽게 사지 못하는 건 당연하다. 형편이 안 되는 사람들의 박탈감은 크다. 나도 꽉 막힌 사람은 아니라 젊은이들의 명품 소비를 이해는 한다. 하지만 "사람이 명품이어야지 가방만 명품 가지고 다니면 되겠냐?" 나는 꼰대 같은 말을 계속한다. 오늘 산 가방은 명품 중에 싼 편이고, 유행도 안 탄다며 잘 샀다고 말해 달란다. 알았다는 말 대신, 왜 에스(S)사 가방은 모셔 두냐고 물었다. 샤테크(S사 이름과 재테크를 합친 말)를 한다나? 요즘 값이 두 배로 뛰어서 더 기다렸다 팔면 돈을 벌 수 있단다. 아무리 좋은 거라도 세월이 흐르면 변한다. 세상에 끝없이 오르는 재화는 없다며 서른 넘은 딸을 가르친다.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을텐데 말이다.
명품 가방 하나로 딸과 나는 팽팽한 신경전을 벌인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가죽 공방에서 가방을 만드는 것으로 방학을 마무리했다. 적당한 크기로 자른 가죽에 망치로 두드리며 자잘한 꽃무늬를 새긴다. 염색약을 바르며 문지르기를 무수히 반복해서 원하는 색을 낸다. 돋보기를 쓰고 한 땀 한 땀 온 신경을 모아 바느질을 한다. 어깨는 아프고 눈이 침침하다. 사흘 동안 매달려 손자의 가방을 완성했다. 세상에 하나뿐인.
첫댓글 딸에게 요즘 아이들이 말하는 딱 꼰대같은 말씀만 했네요. 돈이 있어도 못쓰는 우리 세대를 이해하기 어려울 겁니다.
제가 주변에서 살펴보면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곳에 돈을 쓰더라구요. 글 잘 읽었습니다.
점점 라떼가 되어가니 나이는 어쩔 수 없나 봐요.
요즘 아이들 이해하기 참으로 벅찹니다.
저도 따님과 생각이 같습니다. 싼 거 여러 개 보다는 좋은 거 하나가 좋아요.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우리 세대와 젊은 세대의 생각의 차이가 글에 잘 나와 있어서 재밌어요.
내가 아는 젊은이도 외국 여행 갔다 올 때는 작은 거라도 꼭 사 와서 모으는 게 목표라네요.
샤테크. 문화가 다르니 인정해야 할 것 같네요. 더 어린 우리딸들은 '포카테크'하는 것 같더라고요, 좋아하는 아이돌 포토카드 구입에 돈을 많이 씁니다. 이제는 그들의 문화라고 이제 이해합니다.
주변에서 보면 안 쓴다고 잘 살고 쓰고 산다고 못 사는 건 아니더군요.
문화의 세대 차이는 무시 못 한다는 걸 새삼 깨닫게 하는 글입니다. 잘 읽었어요.
하하.
딸이 둘이나 있는 저도 공감하며 읽었습니다.
아이들이 사 준 가방이 하나(드는 것 아니고 매는 것) 있는데, 기껏 선물해 놓고는 큰딸이 주로 들고 다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