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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이웃 그리고 나 / 시 124:1-8, 마 5:1-10
우리 옛말에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다. 이는 마음을 비우지 못해 그 속에 아직 평안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정치판을 보니 선진국으로 가려면 아직 멀었다는 느낌이 든다. 나를 낮추고 남을 높여야 하는데 다른 사람이 인기가 있다고 그 자를 낮추려고 있는 허물, 없는 허물을 만들어서까지 진흙탕 싸움이 한창이다. 이런 자들이 정치를 하니 이 나라의 앞날이 구름이 끼어있는 것 같다. 평화가 찾아올 날이 아직 멀기만 하다. 그래서 오늘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산상수훈 여덟가지 영적인 축복을 본문으로 잡았다. 그 가운데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한 부분을 가지고 말씀을 드리려고 한다. 화평하게 한다는 말은 미움이나 싸움을 통해서 멀어진 자리를 좁히는 일, 다리를 놓는 일, 이해와 용서를 통해서 불편해진 사이를 원만하게 만드는 일, 가로 막힌 담을 허는 일 등을 말한다. 우리는 인간관계의 막힌 담을 헐거나 다리를 놓는 일이 몹시 어려운 일임을 잘 알고 있다. 예수께서는 이런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될 때에만 가능함을 강조하고 있다. 인간의 시조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 에덴에서 추방되었을 때부터 우리 인간들은 세가지를 멀리하고 살게 되었다. 하나님과 이웃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살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이 내적으로 분열된 상태, 곧 자아를 잃은 소외된 상태에서 사는 것이다. 우리는 이 세분야에서 화목을 이루며 살아야 한다.태초에 그렇게 살도록 지음을 받았다. 화평, 또는 평화는 히브리어로 샬롬이다. 이 말의 원래 뜻은 최고의 축복, 희락, 건강, 기쁨, 평화 등을 의미한다. 우리가 만복의 근원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살고, 이웃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살며, 자아가 분열되어 살 때는 샬롬의 축복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1. 하나님과 더불어 화목해야 한다.
하나님과 가까이 지낸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이다. 하나님을 통하여 모든 삶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모든 것의 근원이 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아담 때부터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을 멀리하고 마음대로 살기를 더 좋아했다. 타락한 인간의 특징을 열거한 바울은 그 첫 번째로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한다’라고 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제멋대로 방종하고 자유 분방하게 살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불신자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사라들 중에서도 하나님을 떠나 살기를 더 좋아하는 사람이 많은 것을 보신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다’라고 탄식하셨다. 하나님을 멀리하고 사는 생활은 바로 하나님의 부재를 의미한다.
인류 역사에서 신의 부재, 또는 신이 없다고 외친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그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1900년에 죽은 프리드리히 니체이다. 니체는 신이 죽었다며 축하하자고 했다. ‘신의 개념은 썩은 기독교의 유물이다’라고 하면서, 인간은 신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하며, 인간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그 자리에 앉아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인간의 능력을 신봉하면서 그것을 우상화했다. 그는 힘의 의지를 부르짖으며 인간의 힘을 높이 평가했다. 질그릇처럼 약한 인간을 너무나 맹목적으로 숭상한 그는 정신병자가 되어 죽는 날까지 정신병원에 감금되어 15년을 고생하다가 길거리에서 비참하게 쓰러져 죽고 말았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니체가 생각했던 것처럼 하나님을 대신하거나, 멀리하고 살 수는 없다. 피조물인 인간은 하나님처럼 높아질 수도 없고, 하나님을 대신하여 제가 주인 노릇을 할 수도 없다. 기독교는 아편이며,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던 공산주의자들의 허황된 꿈과 이론들이 공산주의 국가들의 몰락에서 잘못되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니체 다음으로 신의 부재 또는 비존재를 강조한 사람들은 미국에서 할동하던 해밀턴이나 알타이저 같은 유명한 신학자들이다. 그들은 사회학적인 측면에서 신의 죽음을 선포했다. 그래서 1966년 부활절에 ‘하나님의 죽음을 선언한다’라고까지 말하게 되었다. 그래서 미국은 점점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나라가 되었다. 학교에서 기도를 페지하는 것은 물론 심지어 졸업식 때 항상 있엇던 기도나 축도 순서까지도 비헌법적이라하여 없애버렸다. 이처럼 미국의 본래 건국이념이 흐려지면서 청교도들의 기본정신이 미국 국민들의 의식구조에서 점점 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미국 학교의 교실이나 졸업식에 초대도 환영도 받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어디나 임재해 계신다.
신의 부재는 자연히 윤리적인 타락을 가져오게 마련이다. 하나님을 멀리하려는 심리적인 동시는 바로 제멋대로 살자는 것이다. 오늘날 종교계나 일반사회가 이처럼 타락하게 된 것 역시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여’ 멀리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극도로 타락했을 때도 역시 하나님을 멀리할 때였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지 못한다’라고 말하면서, 심지어는 ‘이스라엘 각 족속의 장로들이 우상의 어두운 방안에 들어가 못된 짓을 한다’라고 에스겔 선지자는 말하고 있다. 신의 부재 사상은 옛날 이스라엘의 장로들뿐만 아니라 오늘의 사회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신학자는 현대인들의 신앙상태를 ‘신의 부재’ 대신에 ‘신의 빛이 가리어짐’이라는 새단어를 사용한다. 로날드 스미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엄청나게 많은 기독교인들은 신이 가리어져 있기 때문에 많은 고통을 받고 있다. 그들은 태양을 볼 수 없다. 그들은 그림자 속에서 방황하면서 태양빛이 얼마나 찬란한 것인지조차 잊고 있다. 그들이 신이 가리어져 고난을 받는다는 말은 하나님과 그들 사이에 무엇인가가 가로놓여 있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분명히 가리어져 있다.’ 유대인의 철학지 마틴 부버 역시 ‘우리는 지금 빛과 하나님이 가리어진 세계에서 살고 있다’라고 하였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가리어진 담을 우리는 헐어버려야 한다. 그것이 곧 하나님과 화평하게 하는 일이다.
우리는 속히 하나님과 화목해야 한다. 욥 22:21-28절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 청하건대 너는 하나님의 입에서 교훈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네 마음에 두라. 네가 만일 전능자에게로 돌아가면 네가 지음을 받을 것이며, 또 네 장막에서 불의를 멀리 하리라. 네 보화를 티끌로 여기고. 오빌의 금을 계곡의 돌로 여기라. 그리하면 전능자가 네 보화가 되시며, 네게 고귀한 은이 되시리니, 이에 네가 전능자를 기뻐하여 하나님께로 얼굴을 들 것이라. 너는 그에게 기도하겠고 그는 들으실 것이며, 너의 서원을 네가 갚으리라. 네가 무엇을 결정하면 이루어질 것이요, 네 길에 빛이 비치리라.’ 우리는 멀리 떠나 외롭게 사는 탕자와 같은 생활을 청산하고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야 한다. 그것이 곧 하나님과 화목하는 길이요, 화평하게 하는 길이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온갖 영적 축복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도망하였다고 생각하여 숨어있던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은 조용히, 그러나 분명한 목소리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부르셨다. 사실 히브리어의 ‘아담’은 문자 그대로 인간을 의미한다.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어 사는 모든 인간들을 지금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계신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하나님과 우선 화목을 이루고 살아야 한다.
2. 이웃과 화목해야 한다.
현대 사회를 신의 부재로 보는 한편, 이웃의 부재로 보는 사람들도 많다. 이웃이 없는 사회, 이웃을 의식하지 않는 사회, 곧 극단의 이기주의적인 사회로 평가한다는 것이다. 나 이외에는 전혀 관심을 주려고 하지 않는 이웃이 없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지난 수요일 밤 뉴스에서 같은 폐병 환자라 병원도 같이 다녔는데 그 동료가 오랫동안 안보이고 그 집에 전화를 해도 안받고 해서 아파트로 찾아가보니 죽어 썩은 냄새가 나는데도 이웃에서는 몰랐다는 것이다. 아파트 촌 주변에서 강도를 만나거나, 강간범을 만나거나, 살인범을 만나 구원을 호소하며 소리를 질러도 누구하나 창밖으로 내려다보려고 하지 않는 고독한 사회로 변질된 것이 요즘의 사회이다. 우리는 실존주이 철학자들이 늘 말하는 ‘대중 속의 고독’을 피부로 느끼면서 살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살아감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이웃이 고통을 받고 해를 당하면 곧 나에게도 상응하는 결과가 온다는 상관관계를 모르는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이웃집에 불이 났을 때, 네 재산에 위험이 몰린다’라고 호소한 호라티우스의 말이나, ‘우리들은 친구는 없어도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이웃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라는 지혜로운 말을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공존하도록 창조주로부터 지음을 받았기 때문이다. 세월이 흘러갈수록 하나님의 창조원리를 무시하며 이웃과 담을 쌓아놓고 나만을 위하는 사회에 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런 세상에 오신 예수께서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새로운 계명을 주셨다.
우리 인간들은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할 수도 있고 원수처럼 미워할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이 어린 소녀에게 이렇게 물었다. ‘너는 엄마와 아빠가 싸운다면 누구의 편을 들겠느냐? 네 엄마 편이냐, 아니면 아빠 편이냐?’ 얼마를 생각하던 그 소녀는 ‘저는 엄마나 아빠 그 어느 편도 들지 않을 거에요. 중간에거 서로 화해하도록 힘쓸 거에요’라고 대답을 했다. 어릴 때 싸움을 시켜본 일이 있다 ‘누가 너를 이긴다고 하더라...’ 우리는 이처럼 사람 사이를 이간시켜 관계를 더 악화시킬 수도 있지만, 또한 막힌 담을 헐게 하여 친근한 사이가 되도록 할 수도 있다. ‘미움이 있는 곳에 평화의 도구가 되게 해 달라’는 성 프란시스의 기도와 같이 평화의 도구가 되는 것이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이요 사명이었다. 평화의 도구가 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인간들은 바울이 말한 것과 같이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야고보 사도는 우리의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악한 생각이 가득하다’라고 했다. 이 시기와 악한 생각을 무엇보다도 먼저 뽑아버려야 화평하게 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 마음 속에 시기와 미움과 원한이 가득한 채로는 도저히 그 누구와도 화평을 이룰 수가 없다. 인도의 성자 간디는 네루 수상에게 ‘당신이 미움의 비수를 마음 속에 품고 있으면, 차라리 그것을 꺼내 사용하는 편이 좋을 것입니다’라고 타일렀다. 이 미움의 비수를 품고 있는 한 우리는 이웃과 멀어질 수밖에 없다. 이 악한 마음을 예수님의 성품으로 변화시켜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이웃을 미워하기는 쉬워도 내 몸처럼 사랑할 수는 없다.
이웃과 화목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을 이간시키는 일 대신에 언제나 좋은 말만 해야 한다. 우리가 말을 잘못함으로 다른 사람과의 화목을 깨뜨리고 원수를 만드는 일을 많이 볼 수 있다. 잠언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되도록 말을 적게 하는 것이 현명하다. 영국 속담에 ‘음식을 많이 먹는 자는 언제나 기분이 언짢고, 말을 많이 하는 자는 이웃과 친할 수 없다’라는 있다. 칼멜교단의 유명한 수녀 맛다레나 파츠가 ‘이웃 사람에 대하여는 할 수 있는 한 말을 하지 않는 편이 좋다. 왜냐하면 대화는 좋은 것으로 시작되나, 대개는 나쁜 것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이웃 사람은 너무 자주 손을 대면 곧 깨어지는 유리와 같은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 말이 칼 힐티가 쓴 ‘행복론’에 수록되어 있다.
미국의 노스타코타주의 어느 작은 마을에서 생긴 일이다. 젊은 부부가 두 아이를 데리고 아주 행복하게 살았다. 남편이 퇴근할 때가 되면 언제나 부인이 대문에 서서 기다리고 집안에는 웃음이 항상 그치지 않았다. 저녁을 먹고나면, 아빠와 아이들은 뒷 정원에서 뒹글며 재미있게 놀았다. 모든 이웃들이 한없이 부러워하는 가정이었다. 그런데 짓궂은 이웃 여인들이 이상한 소문을 퍼뜨리기 시작했다. 그 행복한 가정의 남편에게 애인이 따로 있다는 헛소문이었다. 이 근거없는 소문이 온 동네로 퍼지더니 드디어 그 집 부인의 귀에까지 흘러 들어갔다. 말할 것도 없이 부인에게는 마른 하늘에 날벼락과 같은 소문이었다. 남편이 퇴근했다. 늘 문간에거 맞아주던 아내의 모습이 안보인다. 구수한 음식냄새가 부엌에서도 나지 않는다. 웃음고리도 들리지 않는다. 싸늘한 공기만 집안에 가득했다. 아내를 불렀다. 아이들을 불렀다. 아무런 대답이 없다. 온 집안을 뒤졌지만 식구들은 보이지 않는다. 결국 지하실에서 남편은 끔찍한 광경을 발견하게 되었다. 아내는 두 어린아이를 목매달아 죽이고 자신마저도 그 옆에 나란히 목매어 죽었다는 이야기이다. 부질없는 헛소문이 이 행복한 가정을 일시에 전멸시킨 것이다. 우리는 이웃을 행복되게 할 수도 있고, 이처럼 죽이는 잔인한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항상 우리의 입을 조심하여 이웃 사람들 사이에 ‘평화의 도구’가 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이웃들 사이에서 평화의 도구가 되려면 예수님처럼 모든 사람을 선하게 볼 수 있어야 한다. 주님은 간음한 텅녀까지도 하나님의 아름다운 딸로 보셨다. 만인을 선하게 보며, 내 혈육처럼 볼 수 있을 때 우리는 화평하게 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히브리서 기자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라고 단언하고 잇다. 우리가 모든 사람으로 화평하게 할 수 있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고,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말이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였을 때 하나님은 가인에게 이미심장한 질문을 하셨다. ‘네 동생 아벨이 어디 있느냐?’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똑같은 질문을 하신다. ‘네 이웃이 지금 어디 있느냐?’ 이 하나님의 분명한 물음에 우리는 가인처럼 ‘내가 동생을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반문하는 대신에 내 동생을,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 원수와도 화평을 도모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3. 잃어버린 자신을 다시 찾아야 한다.
우리의 비극은 신의 부재에서 출발하여 이웃의 부재, 그리고 자아의 부재에서 그 절정을 이루게 된다. 다시 바울의 편지를 보면, 인간의 비극을 나열하면서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인간들에게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셨다고 말하고 있다. 지각 곧 지성을 상실했기 때문에 자아와 자존심을 상실한 허수아비 인간으로 떨어지게 된 것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표현한다면 영어로는 미친 사람을 crazy나 mad라는 단순한 말 대신에 Out of mind, 또는 lost one's mind라는 말을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 상실한 마음이란 제정신을 완전히 잃어버린 상태를 의미한다. 지성을 잃어버리면 미친 존재가 된다. 인간이 짐승과 다른 점은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지능을 소유한데 있다. 인간이 지정의의 규정을 잘 유지할 때에 비로소 동물과 다를 수 있다. 지정의 중 중요한 요소임 지능이 그 기능을 상실하면 동물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지성을 잃고 흥분하여 감정의 지배를 받는 불쌍한 사람들이 많은 시대이다. 인간이 이렇게 마음(온전한 제 정신)을 완전히 잃어버렸기 때문에 마음 속애 진정한 평화를 유지할 수가 없는 것이다., 진정한 마음의 평화는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에 의하여 조화를 이룰 때’만 가능한 것이다. 상실한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도저히 알 수도 없고 찾을 수도 없으며 어둠 속에서 헤매게 된다. 하나님을 의식할 수 있는 마음 속에서만 참 평화가 있다. 이처럼 마음을 상실했을 때 인간은 참 평화를 이룰 수가 없다. 평화의 근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풍랑이 심한 갈릴리 호수에서 타고 있던 배가 뒤집히기 직전인데도 편안하게 잠을 자고 있었다. 제자들은 죽음의 공포 속에 몸부림을 치고 있을 때, 예수께서는 주위의 환경과 여건에 관계없이 마음에 평정을 누리고 있었다. 그의 심지가 하나님께 있었기 때문이다.
바다를 항해하던 여객선이 갑자기 높은 파도에 흔들리면서 위기에 놓였다. 많은 승객들이 초조하고 불안해 햇다. 그러나 한 어린 여자 아이가 콧노래를 부르며 재미있다는듯이 즐거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상히 여긴 한 승객이 물었다. ‘너는 저 심한 풍랑이 하나도 무섭지 않느냐?’ ‘아니요, 우리 아바가 선장인걸요. 아빠가 무사히 배를 몰고 가실 것을 믿어요.’ 어린 여자 아이의 의미있는 대답이었다. 우리도 어떤 어려움을 만나도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믿음만 있다면 두려울 것이 하나도 없다. 상실한 마음을 다시 찾아 마음의 화평을 이룩한다는 것이 우리의 가장 중요한 과제이다. 우리의 행과 불행이 온전한 마음, 평화의 마음을 유지하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의 신앙도 상실한 마음 바탕에서는 깊이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 노벨 평화상을 받은 유명한 달라이 라마에게 한 미국 여자가 ‘우리가 만일 세계 평화를 위하여 어떻게 기여할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먼저 당신 자신의 마음 속에 평화를 이루시오’라고 그는 대답했다. 이 인간들이 상실한 마음을 다시 찾아 화평을 자신 속에 이룩하는 것은 물론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만 가능하다.
신의 부재로는 도저히 화평이란 불가능한 것이다. 오늘날 신의 부재를 외치는 사람들은 ‘하나님은 아무데도 없다(God is nowhere!)’라고 말한다. 그러나 같은 영어의 표현이지만 아무데도 없다는 nowhere를 띄어쓰면 now here로 표현할 수 있다. 곧 아무데도 없는 하나님이 ‘바로 지금 여기에’ 계신 분으로 표현된다는 말이다. 신이 없는 상태에서 일생을 살 것이 아니라 지금 바로 옆에 계시는 하나님을 체험하면서 조화된 마음, 평화를 이루는 마음으로 돌아가 영원한 샬롬, 곧 기쁨과 희락 속에서 몸과 마음의 건강과 인생의 풍요를 누리며 살기를 바란다.
(1997-0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