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 노트 51 < 수행 노트는 1996년도부터 미얀마 마하시 명상원의 수행지도 스승과 한국인 수행자들의 수행면담을 기록한 내용입니다. 참고는 수행자를 돕기 위한 묘원의 글입니다. >
질문 : 경행을 하면서 발이 바닥에 닿을 때 문득 ‘경행을 하는 자는 누구인가’ 하는 의심이 생겼습니다.
답변 : 경행을 하는 중 발이 바닥에 닿을 때 닿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 외에 다른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왜 그런가, 왜 뜨거운가, 왜 차가운가라고 다른 생각을 하지 말고 닿은 그 자체를 알아차리고 다음 동작으로 옮겨가라. 처음에 수행을 할 때 경행의 중요성은 발의 움직임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좌선을 할 때나 경행을 할 때나 이것을 누가하는가, 내가 아니지 않은가, 라는 생각을 하지 말고 오직 발을 들어서 놓는 움직임만 알아차려야 한다. 이러한 움직임은 계속 일어나고 사라진다. 여기에는 일어남의 원인과 사라짐의 결과만 있을 뿐이고, 몸의 현상만 있을 뿐이다. 누가 경행을 하는가, 하는 것은 알아차림의 대상에서 벗어난 것이다. 수행자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라. 무엇이나 생긴 그대로 알아차려야 한다. 찾아내려 하지 말고, 사라지기를 바라지 말고, 생기기를 바라지 말고 그냥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기만 하라.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면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없어진다. 무엇을 만들거나 바라지 마라. 아무 것도 하지 않을 때는 어리석음을 키우는 일이다. 알아차리는 것만이 수행자가 할 일이다. 끊어짐 없이 알아차리는 것이 수행자가 해야 할 본분이다. 무엇이나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이 팔정도다. 팔정도가 위빠사나 수행이다. 오직 이 방법만이 도에 이르는 길이다.
< 참고 >
위빠사나 수행은 무엇이나 할 때 하는 것을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그러려면 마음이 항상 현재의 몸과 마음에 있어야 합니다. 경행을 할 때는 경행을 하는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좌선을 할 때는 좌선을 하는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좋아할 때는 좋아하는 것을 알아차리고, 싫어할 때는 싫어하는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생각할 때는 생각하는 것을 대상으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의심이 생겼을 때는 의심이 생긴 것을 대상으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의심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하지만 의심이 의심을 낳으므로 일단 의심하는 것을 알아차릴 대상으로 삼아야 합니다. 수행은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대상이 있어서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의심은 생각인데 수행은 생각을 끊고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수많은 세월동안 생각하면서 살았지만 생각으로 법을 얻지는 못했습니다.
생각은 학문적이고 철학적이고 예술적이고 지적인 성향을 향상시킬 수는 있지만 지혜를 얻어 괴로움을 해결하는 데는 크게 기여하지 못합니다. 생각은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 자체는 혼돈상태입니다. 혼돈상태에서는 명쾌한 답을 얻지 못합니다. 그래서 의심하기에 앞서 의심하는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생각은 업에 의해서 생긴 과보이기 때문에 새로운 질서를 찾으려고 할 때는 장애요인입니다. 그래서 수행을 생각 끊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의심을 하면 믿음이 없어서 수행을 하지 못합니다. 믿음이 있어야 노력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무조건 믿으라는 것은 아닙니다. 먼저 몸과 마음을 알아차려서 생긴 지혜로 확신에 찬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수행에 앞서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가 나야 합니다.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가 연기법입니다. 모든 것은 조건에 의해서 생긴 원인에 따른 결과가 있습니다. 이때의 원인이 무명과 갈애입니다. 무명과 갈애는 어리석음과 욕망입니다. 모든 것이 어리석음과 욕망으로 인해서 생긴 원인과 결과라는 사실을 알면 이제 지혜와 관용이란 새로운 원인을 만들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원인과 결과를 알아야 의심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의심에서 해방되어야 비로소 위빠사나 수행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수행자가 처음에 연기법을 배울 수 있는 여건이 마려되지 않으면 어쩔 수 없이 위빠사나 수행으로 시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연기의 지혜가 나기에 앞서 의심할 때는 의심하는 것을 대상으로 알아차리는 것이 가장 현명한 대처방법입니다.
부처님께서 수행에 대하여 법문을 하실 때 가장 많이 사용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 가지 말씀 중의 하나가 사띠(sati) 삼빠잔냐(sampajañña)입니다. 사띠(sati)는 알아차림이고 삼빠잔냐(sampajañña)는 분명한 앎입니다. 분명한 앎은 바르게 안다는 뜻으로 정지(正知)라고도 합니다. 또 주의, 고려, 분별, 이해, 용의주도하는 뜻도 있습니다. 알아차림과 분명한 앎 두 가지를 새의 두 개의 날개에 비유하기도 하고, 수레의 두 개의 바퀴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수행을 할 때 알아차림 하나만 가지고는 안 되고 분명한 앎이 함께 할 때 바르게 수행을 한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수행을 할 때 알아차림은 일차적 행위고 분명한 앎은 알아차림을 보완하는 이차적 행위입니다.
분명한 앎은 네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목적에 대한 분명한 앎으로 자기가 알아차리고 있는 대상이 이익이 있는지에 대한 앎입니다. 둘째, 적합성에 대한 앎으로 대상이 시기와 상황에 맞는지에 대한 앎입니다. 셋째, 수행의 대상에 대한 바른 앎으로 지금 올바른 대상을 선택하고 있는지에 대한 앎입니다. 넷째, 실재에 대한 앎으로 지금 대상을 대하는 자세가 어리석음이 있는지에 대한 앎입니다.
현재 수행자가 질문한 내용을 요약하면 두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는 경행을 하는 자가 누구인가에 대한 것입니다. 둘째는 수행자가 의심을 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 사항을 분명한 앎에 대비하면 네 가지에 모두 저촉이 됩니다. 첫째, 경행을 하는 자가 누구인가는 철학적 사유이지 수행의 알아차림이 아니라서 이익이 없습니다. 둘째, 경행을 하는 자가 누구인가는 경행을 할 때 가질 탐구가 아닙니다. 경행은 걷는 동작을 알아차리기 위해서 하는데 탐구의 시기가 맞지 않습니다. 셋째, 이런 의문을 수행의 대상이 아닙니다. 수행자가 알아차려야할 영역의 대상에서 벗어난 의문입니다. 그래서 의문은 올바르지 못한 대상입니다. 넷째, 이런 의문은 풀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것으로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수행에서는 미혹한 행위입니다.
특히 ‘경행하는 자는 누구인가’에 대한 의문은 위빠사나 수행과 궤를 달리하는 탐구입니다. 평소에도 이런 질문을 많이 받는데 이는 그간 한국에서 행하던 수행의 영향이라고 봅니다. 이런 수행방법은 선가의 문답에 해당되는 것으로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위빠사나 수행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보고 있는 자는 누구인가?’라고 했을 때 ‘보고 있는 자’가 있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보고 있는 자’가 있다는 전제로 보면 영원히 답을 얻을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보고 있는 자’는 존재의 실체가 있다는 전제가 있습니다. 사물의 궁극의 이치에 다다라서 아는 무상, 고, 무아의 지혜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런 질문에는 실체가 없는 무아가 설 자리가 없습니다. 아무런 전제 없이 몸과 마음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렸을 때 비로소 무상, 고, 무아의 법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결국 무아인데 자아가 있는 것처럼 접근하는 것이 문제의 본질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수행자의 의심은 지혜가 나야 해결될 수 있는 사항으로 수행자가 생각으로 알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설령 의심이 해결되었다고 해도 자기 수준에서 의심이 해결된 것이지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도에는 세 가지 단계가 있습니다. 첫째가 기본도입니다. 기본도는 연기의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가 나서 의심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둘째가 예비단계의 도입니다. 의심에서 해방되면 몸과 마음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서 무상, 고, 무아의 지혜를 얻는 여러 단계의 과정이 있습니다. 이 예비단계의 도가 팔정도 위빠사나 수행입니다. 셋째가 성스러운 도의 단계입니다. 연기법으로 의심에서 해방되어 몸과 마음을 알아차리는 위빠사나 수행으로 통찰지혜가 나면 도와 과의 지혜를 얻습니다. 도와 과의 지혜가 열반입니다. 세 번째 도가 깨달음입니다. 이 깨달음이 있을 때 비로소 괴로움뿐인 윤회가 끝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