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애와 비사표통성냥 주사기/송영욱
- 바지를 내린다는 것은 열 살 내기에게도 금기 사항 같았지만
더는 버티지 못하고 슬금슬금 바지를 내리고
비실비실 엎드려 밀려오는 창피함에 눈을 감았다.
은애가 비사표 사각성냥 통에서 성냥 한 개비를 꺼내 끝을 뾰족하게 잘랐다.
뾰족한 부분으로 궁둥이를 꾸~욱 찔렀다.
정말 주사 맞는 기분이다. 은애가 주사 놓는 시늉을 막 끝내고 바지를 올리려는 찰라 -
그가 답십리 산동네에 고씨 집 문간방을 월세 만원에 얻어 주고 온다간다 말도 없이 사라졌다.
엄마는 먹고 살길이 막막해지자 답십리 시장에 있는 한복집으로 삯바느질을 나가게 되었다.
산동네는 어려운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았다.
집주인 고 씨는 도장을 새기는 일을 했다.
그 집 딸과 나는 동갑내기 열 살이었다.
또래라서 그런지 금방 친해졌다.
어른들이 없는 집에 쌍둥이 남매처럼 늘 붙어 다녔다.
둘은 병원 놀이를 자주 했다.
나는 의사이고 그 애는 간호사 역할을 했다.
어느 날 나는 열이 펄펄 나는 환자 역과 의사 역을 동시에 하는 일인이역 이었다.
“선생님 열이 나고 목이 아픈 대요.”
“아~ 어디 봅시다.”
“감기 같군요.”
“간호원~, 이 환자에게 큰 주사 한 대 놔주세요.”
“어디에요?”
“궁둥이”
“아~ 네.”
“바지 내리고 엎드려요.”
간호사 같은 은애의 명령이 똘방지게 떨어졌다.
바지를 내린다는 것은 열 살 내기에게도 금기 사항 같았지만
더는 버티지 못하고 슬금슬금 바지를 내리고
비실비실 엎드려 밀려오는 창피함에 눈을 감았다.
은애가 비사 표 사각성냥 통에서 성냥 한 개비를 꺼내
끝을 뾰족하게 잘랐다.
뾰족한 부분으로 궁둥이를 꾸~욱 찔렀다.
정말 주사 맞는 기분이다.
은애가 주사 놓는 시늉을 막 끝내고 바지를 올리려는 찰라
고 씨가 돌아와 문을 활짝 열었다.
“은애~야! 방에 있었구나!”
“친구랑 재미나게 노는 중이네……”
우리 둘은 혼비백산魂飛魄散 했다.
바지도 올리지 못하고 방바닥에 죽은 것처럼 그대로 누워 있었다.
마치 사냥꾼에게 쫓긴 장끼처럼
땅에 대가리를 처박고 궁둥이는 들어 올린 꼴이 되었다.
그 일이 있은 후 고 씨 아저씨를 볼 때마다 부끄럽기 도하고 답답하다.
뭔가 미안하기도 하지만 보이면 안 되는 것을 보였다는 생각이
꾸물꾸물 되살아나 얼굴이 붉어지곤 한다.
고 씨 집에는 세 가구가 살았다.
공동화장실 옆방에는 젊은 남자 환자가 늙은 엄마와 살고 있었다.
몸이 지저분하고 얼굴도 썩 정이 가는 모습은 아니었지만
수군대는 말에 의하면 술집 여자에게 병이 옮았다 한다.
‘술집에서 얼마나 많은 술을 퍼먹었으면 병이 옮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안 나온다.
엄마나 다른 사람에게 물어 보면 안 될 것 같은 마음이 든다.
답십리 산동네에서 가까운 J 초등학교 삼 학년으로 전학을 갔다.
교실 하나를 세 개 학년이 쓰는 삼부제 수업을 했다.
아침 반이 끝나면 점심 반이,
점심 반이 수업을 마치면 저녁 반이 수업에 들었다.
나는 3학년 7반 64번이 되었다.
한 반 학생 수는 칠십 여명이 넘었다.
들리는 이야기로는 세계에서 제일 큰 학교라 한다.
체육 시간에는 축구공 하나에 육십여 명이 달라붙어 뛰어다녔다.
말이 축구경기를 하는 것이지
여러 학년 반 애들이 서로 뒤엉켜서 부딪치고 넘어지기가 다반사茶飯事였다.
2학기에 전학 온 학생에게 학교생활은 만만치 않았다.
담임선생님은 여女 선생님이었다.
내가 어느 구석 자리에 있는지는 고사하고 이
름조차 기억도 못 하실 것이다.
인사를 해도 못 본 척 눈길 한 번 마주쳐주질 않는다.
아마도 내가 자기네 반 학생이라는 사실조차 모르는 것 같았다.
아니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바뀐 학교생활은 많은 어려움을 안겨 주었다.
시골학교에서는 서울 놈이라고 돌림을 당했고
서울학교에서는 촌놈이라고 왕따를 당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도전자들에게 쉬는 시간마다
구석진 화장실에서 뒤에서 코피가 터지든 터뜨리든
주먹다짐을 해야만 했다.
그중에 덩치가 몹시 큰놈하고 한판 붙었는데
나는 그놈의 쌍코피를 터뜨렸고
그놈은 나의 입술을 터뜨려
다른 애들보다 두툼한 입술을 두 세배 부풀려 놓았다.
“야~ 제 입술 좀 봐!”
“두툼이래요!~”
“두툼이래요!”
애들이 놀리는 소리가 화음이 맞는 돌림 노래 마냥 들리기 시작했다.
그 뒤로 내 별명은 두툼이가 되었다.
집으로 돌아온 나를 마당에서 은애가 반겨준다.
“어서 와.”
“입술이 터졌네!”
“싸웠어?”
“아프겠다. 내가 호해 줄게”
안쓰러워하며 입술을 뾰족이 내밀고
터진 입술을 호호 불어 주는 은애에게 조금 창피했지만,
위안이 되었다.
내일은 꼭 이겨버린다고 속으로 다짐했다.
다음날 나는 아침반이라 일찌감치 학교에 갔다.
졸지에 나를 두툼이로 만든 녀석 M이란 놈이 오기를 기다렸다.
녀석이 교실을 들어서며 나를 보더니 흠칫 놀란다.
“화장실 뒤로 와. 너 오늘 죽었어!”
주먹을 그 녀석에게 눈 밑에 들이대고는 짧게 말했다.
가슴이 두근두근 요동치고 손발이 떨렸지만,
전학 온 학교에서 살아 남기 위해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그 녀석 주위를 빙빙 돌면서
그 녀석의 콧등을 향해서 주먹을 날렸다.
M은 날쌔게 피하면서 주먹으로 배를 쳤다.
서로 엎치락뒤치락하는 사이
그 녀석은 입술이 터졌고 나는 코피가 터졌다.
수업 시작종이 나자 싸움을 멈추고 옷을 털어 입는 그 녀석에게
“점심시간에 한 번 더 뜰래?”
겁이 났지만 호기를 부렸다.
코는 아렸지만, 수돗가에서 대강 씻고 교실에 들어가
수업을 받고 점심시간에 또 붙었다.
악바리라는 소문이 조금씩 퍼져갔다.
애들도 이제는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것이 위안이 되어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학교가 파하는 시간쯤 되면 반장이
미국구호물자로 들어온 옥수수 가로로 만든 빵을 몇 명에게 나눠준다.
참 향기롭고 맛있어 보인다.
배고픈 위장보다 냄새 맡은 코가 더 벌렁거리고 야단을 떤다.
빵이 몇 명에게 나누어진다.
다들 덩치가 크고 반에서 한가락 하는 녀석들 손으로 들어간다.
그것을 먹기 위해 책상 위에 금을 그어 놓고 연필 따먹기를 했다.
연필을 손가락으로 튕겨서 상대 연필을 금 밖으로 내몰면 내 것이 되는 것이다.
연필로 알까기를 하는 셈이다.
연필을 따는 날은 빵조각과 바꿔 집에 돌아와
은애에게 슬그머니 내밀었다.
은애는 조금씩 빵조각을 떼어내 맛을 음미하듯 천천히 먹는다.
나도 먹고 싶었지만, 꾹꾹 참았다.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깨꽃이 빨갛게 달아올라 오고
노랑국화가 피기 시작한 교정은 아름다웠지만,
하루하루 지나갈수록 나는 조그만 악마로 변해가고 있었다.
내게 행복한 유일한 시간은 집주인 딸 은애와 붙어 있는 시간 뿐이었다.
만 원짜리 사글셋방을 얻어 주고는
얼굴 한번 비치지 않는 그의 존재는 거의 무시해버렸다.
엄마는 자존심이 무지 강했다.
아무리 어려워도 그가 다니는 K 은행 근처도 안 가셨다.
가끔 할아버지가 오셨다.
그녀는 어렵고 바쁘셔도 할아버지가 좋아하는
보신탕을 멀리까지 가서 사다가 정성껏 대접한다.
그날 밤에는 어머니의 숨죽이며 우는소리가 밤 새워 들린다.
가슴이 아려온다.
가을은 지나가며 바람에게 매서운 소리를 만들어 주었다.
아련한 그리움이 날이 서 조그만 가슴을 야금야금 파먹어 간다.
고생하며 산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대전에서 외 당숙모께서 우리 모자를 찾아왔다.
귀한 쌀 한 말을 사서 누런 봉지에 담아 들고
고씨 집 마당에 서 있는 외당숙모를 보는 순간
반가움보다 창피함이 앞섰다.
모든 것이 부족하게 사는 것을 보고
말을 잊지 못하며 대전으로 내려가셨다.
많은 세월이 흘러갔다.
2008년 가을비가 축축하게 내리는 어느 날 퇴근 후 집에 들어섰다.
어머니의 안색이 어두웠다.
당신의 유일한 사촌 올케인 큰외당숙모께서 유방암에 걸리셨다.
늦게 발견되어 치료시기를 놓치는 바람에 위험한 단계이며
일산에 있는 모 병원에 입원 중이라는 소식이 들렸다.
외 육촌형에게 문병을 간다고 말씀드렸으나
수술하신지 얼마 안 되어 절대 안정이 필요하다며 다음에 오란다.
그러다 때를 놓쳐 그해 추운 겨울날 외당숙모는 먼 길을 떠나셨다.
장지는 충북 옥천에 있는 선산이고
장례식장은 대전 모 대학병원 장례식장이었다.
열일을 제쳐 두고 장례식장을 찾았다.
눈앞에 사십여 년 전 쌀 한 말을 사 들고
만 원짜리 월세방 앞에서 암담하게 서 계시던 모습과
고운 손으로 찰흙을 빚어 만들어주신
여름 방학숙제 거북이를 생각해 내고는
큰 눈물 덩이를 쑥 빠뜨렸다.
장례식장에 도착하자 경황이 없는 상제들은 나를 보더니 눈물만 흘렸다.
가까운 곳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날 발인제를 지내고 장지로 따라나섰다.
장례행렬을 선도하는 차량처럼
내 차를 앞세워 갈림길마다 앞서서 안내와 정리를 해 드렸다.
하관하는 것을 보며 안타까운 마지막 이별을 했다.
그 후 일 년도 못 되어 외당숙께서도 돌아가셨다.
두 분은 잠시 떨어져도 존재할 수 없다는
부부간의 사랑을 본보기로 보이시며 다른 차원의 세계로 떠나가셨다.
*송영욱의 미니 픽션<< 타인의 주머니에 든 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