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여섯
소녀와, 중년의 유부녀와, 백발의 노인이 탐닉하고 있는 대상은, 성애화된 육체가 아니다. 자신의 삶으로 편입시킬 수 없는 미지의
존재로서의 ‘삶-살’을
두고 그들은 배회하고, 숨고, 미끄러진다. 물론, 이토록 빤한 ‘타자’문법을 드러내 보인다는 점에서, 영화는 지나치게 빤한 프랑스産이다.
척박한
우주환경에서 생명을 움트게 하고자 고군분투했던 영화 <마션, 2015>은
SF물에서 접하게 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던 ‘육아영화’ 속 뻐근한 고단함을 관객들에게 마구 흩뿌렸고, 그 대가로 쏠쏠한
‘수확’을 스크린 밖에서 얻었음을 우리는 여태 기억한다. 그런가 하면, 마음과 마음 혹은 사연과 사연을 제대로 이어 줄 마땅한
매질/매체가 부재하는 ‘사람 사이’라는 진공관 속 세속을 건조하게 유영 중인 이 영화는, 우주를
배경으로 하는 SF물 특유의 둔중한 아련함을 전달하며 먹먹히 다가온다.
화성 한복판에서는 흙 내음이 진하고, 파리 한복판에서는 진공의 울렁임이 심하다니, 어디가 ‘밖’이고 어디가
‘안’이란 말인가.
‘술래잡기영화’라는 특수 영화장르가 있어도 좋겠다는 쓸데없는 생각을 해보았다. 술래는
영원히 잡힐 수 없다는 게임의 법칙이 적용되고 있다는 점에서, 타인의 몸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는 소녀
이사벨의 걷잡을 수 없는 욕망은, 얼마만큼 형이상학이며, 적잖은
초월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장영화가 맞다. 성장이라는 게 꼭 ‘사춘기’라는 특수한 시기를 지칭할 필요는 없는 일이며 그래서는 안될
일이다. 평생 ‘성장’ 중인
것이 인간이라는 한심함이자 어리석은 ‘신비’다. 더군다나 이 영화 속 모든 등장인물은 유난히 빠른 속도로 성장 중이다. 너와
나를 이어줄 실다운 매질/매체가 없어도, 인간은 무섭게 성장한다는
것. 어미에게 깃들어 볼 ‘탯줄’ 따위가 없어도 세속의 태아들은 무럭무럭 자란다는 것. 이토록 섬찟한
초과학적인 현상과 대상의 도래를 위해 굳이 ‘우주’로 지평을
확대하거나 ‘외계인’까지를 호들갑스럽게 호출할 필요는 없었다.
네
안의 검푸른 슬픔은 이미 블랙홀이며, 내 곁을 감싸는 희부연한 우울이야말로 괄목할 성운이었고, 한 번의 스침을 향한 제대로 된 기약도 없이 자전과 공전만을 반복 중인 물질의 실체가 우리가
아니면 무엇일까. 이런 것을 두고 어찌하여 저 먼 우주를, 그곳에 터를 둔 알수 없는 존재를 부러 찾을까.
오! 나의 이사벨! 나를 딛고 너에게 가보는 한 걸음이 이토록 이 세상
밖의 난관이니, 너와 나의 어긋남은 진실로 ‘우주의 신비’쯤 된단 말이더냐.
나의 이 싸구려 자의식은 무중력에서도 그예 살아남는
최후의 ‘그것’이란 말이더냐.
첫댓글 -Do we see us again?
-You have my number.
-Are you available for the night?
-No, only in the evenings. And I cannot do weekends.
-What a pity.
-Good bye.
-Good bye.
프랑수아 오종의 '천재'는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