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图1
그림 1 베이징 서성구 부흥문 밖에서 출토된 요나라 황유계 관호
图2
그림 2 베이징 퉁저우(通州)구 侉(。)점에서 출토된 랴오다이(代) 장(釉)황유(镫) 말총호
图3
료다이치단 귀족은 붕당을 맺고 있는데, 그 유형이 다른데, 황실의 구성원들로 구성된 태자당, 대원수당, 삼장후족이 각각 결성한 가족붕당, 그리고 다른 거란 귀족들이 결성한 권이 있다.료 세대 200여 년, 황위 계승, 후위 다툼, 궁정에서의 각종 권력다툼 등으로 거란 귀족 명당은 수없이 사라지고, 료대의 역사무대에서 피비린내 나는 공연을 펼쳤다.
요대 초기 거란 황태자당과 대원수당, 후당이 황위 계승권을 놓고 벌이는 당쟁이다.요태조 예율아보기건원칭제(称)는 거란요(政权) 정권을 수립한 후, 원왕조제를 본떠서 황위의 부사자(태자)를 계승제(。)로 정하였으므로, 그의 집권 기간에는다.태조 황제의 차남 예율덕광은 아버지 거란의 초원에서 민족이 전쟁을 할 수 있는 유전자를 물려받았고, 거란의 건국 전후 여러 차례의 정전에서 전공이 발현되어 예율아보기에 걸렸다.또한 거란 민족사상 전통적인 민주인 '세선'선한제의 잔재도 거란료 건국 초기에 존재했다.그래서 군공을 세우고 군권을 쥐고 있는 대원수 예율덕광도 황무지로서 자격이 충분하다.그리하여 예율아보기가 죽은 후 거란랴오의 왕위 계승을 위하여 예율아보기가 살아 있을 때에, 이미 맏아들 예율배를 위시한 태자당과 차남 예율덕광을 핵심으로 하는 대원을 형성하였다.결국 요태조 예율아보기가 죽은 뒤 예율덕광의 대원수당은 율태후를 모술하는 중심의 후당의 지지를 받아 승리했고, 예율덕광은 차남으로 순조롭게 출발했다.두 당이 힘을 합쳐 한 당에 맞서 싸우면 어찌 이길 수 있겠는가?그는 이후 눈을 가리고 차남을 '공평하고 합리적'으로 등극시켰고, '소욕'을 입힐 수 있도록 '신'을 연출했다.거란 국지에 따르면, 이 율을 말한 뒤에 둘째 아들 덕광을 사랑하여, `이왕을 세우려고 하면 서쪽 누각에 이르러, 명제(덕광)와 돌욕(예율배)이 모두 말을 타고 서니,辔光의 싸움꾼은 대원수당과 후당이 대부분이었다.태자당의 실력이 열악해 예율배는 '경선' 패배를 자인할 수밖에 없었다."태조가 부고하면 배가면 날마다 산릉으로 간다.황태후가 덕광을 세우려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데, 이를 두고 '대원수공덕 및 인신, 중외유속, 의주사직'이라 하였다.
요초 황위 다툼, 대원수당과 후당이 연합하여 태자당을 이기자, 예율덕광은 순조롭게 즉위하여 황제라고 칭하였다.그러나 이번 궁정 당쟁은 완전히 끝나지 않았고, 태자당은 "야에 있다"고 졌지만, 여율덕광은 형의 편으로부터의 위협을 느꼈고, 승리 측은 "여승은 남은 적을 쫓는다"고 했다.우선, 전 양당은 계속 연합하여 태자당의 잔당을 토벌했다.율태후와 태종 황제가 먼저 칼을 뽑은 것은 랴오난위안 이이리제비여율디리와 랑군 예율피루다.역사는 태조가 무너지고 순흠(述)황후가 제제하여 대원수로 계승하려 하였다.(예율) 디리건은 제위가 적장을 먼저 모시고, 지금의 동단 왕(예율배)이 조선에 가서, 당립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하였다.불순한 뜻에서 비롯되다.에당은 동단 왕에게 조서를 보내어 옥살이를 하였고, 신문하여 포인을 하였더라매복하지 않으면 죽여야 하고, 그 집의 본적은 그 집이다.'이에 따라 변살계는 크게 열리고, 범당 부폐태자와 정견이 맞지 않는 자는 모두 술책 태후 등으로부터 핑계를 대고 주살당했다.[계단국지] `율평'을 불러다가 추장처를 불러다가 `내가 지금 과거하고 있으니 너는 나를 본받지 않을 수 없소 ?'하고 말하면서 남편을 모아 흐느껴 물었다고 한다.앞뒤가 백수다."또 태자당과 관련 있는 일부 사람들은, 비록 목을 죽이지는 않았지만, 예율탁진과 같이 감옥에 갇히거나, 두려움으로 타향으로 망명하거나, 예율돌여불처럼.물론 원태자당의 당총재, 폐태자, 동단왕 예율배의 말로도 더 비참하다.요태종 예율덕광은 그를 시기하고 감시하다가 동단국의 남진을 구실로 그 실력을 약화시켰다.이어 "작은 산이 큰 산을 누르고, 큰 산이 힘이 없다.고향 사람을 부끄럽게 여겨 외국으로 건너갔다고 말했다.그 후, 궁지에 몰린 그는, 해발해 국적의 부인에게 배를 타고 '부해'를 타고 중원(中唐)의 후당(。)으로 끌려갔다가, 결국 타향에서 객사했다
요태종 예율덕광이 죽은 후, 폐태자 예율배당의 서여와 술율태후당의 당쟁을 위해 다시 불을 지폈으나, 이번에는 폐태자당이 상봉을 차지하였고, 예율배는 영구히 영전하였다.그 과정은 요태종 대동원년(947) 4월에 요태종 예율덕광이 멸망 후 진북에서 나라를 철수하다가 갑자기 칭청(今城, 지금의 허베이滦현)의 살림(。)으로 죽었다.나라가 한눈을 팔지 못하고, 군대에 있는 여율배의 아들 예율응은, 주변의 원태자 당인들의 옹립 아래, 군대에서 즉위하여 황제라고 선포하였다.사재, 예율 응우옌은 태종의 사망 소식을 전해들은 후, 즉위하여 황제라고 칭할지에 대해 주저하여, 예율암보 등을 찾아가 대책을 상의하였다.안보는 "대왕(영강왕 예율응온을 지칭)은 슬기롭게 용서하고, 인황왕(예율배)의 적장이며, 선제(랴오태종 예율덕광을 뜻함)는 수안(태종의 아들)이지만지금 이 순간을 후회해도 소용없다고 말했다.예율암보는 과거 술타후가 처형한 태자당 멤버 예율디리의 아들로, 에율응온과 친하게 지내며 황제 즉위에 대한 지지를 아끼지 않았다.이와 함께 남원대왕 예율호, 북원대왕 예율거도 원태자당 편을 들어 예율응우옌을 지지했다.예율호는 예율구에게 하늘과 땅을 하루도 비워서는 안 되며 태후를 부르면 반드시 이호에게 속할 것이며, 이호가 포악하고 잔인하며, 능한 백성을 미워할 것이요, 영강왕을 세우리라 하였다.그리하여 예율과 변호는 중장에게 `대행상빈, 신기무주, 영강왕인 황왕의 적장, 천인의 소속, 당립.따르지 않는 자가 있다.군법으로 한다"고 주장했다.율태후를 위시한 후당은 예율응을 황제로 세우려 하지 않았는데, 그녀는 자신의 막내아들, 태종황제의 동생인 천하병마태원수 예율리후를 새 황제로 세우려고 하였다.그러자 후당과 폐태자당의 여서(。) 갈등이 터져나와 첨예하게 대립했다.그는 진양(今, 지금의 허베이성 북쪽)에서 황제로 군림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예룬 리후를 급파해 군사를 맞아 무력으로 황위를 탈환하려 했다.세종 예율응우옌은 난징(今南京, 지금의 베이징시)에 가서도 주변 대장 예율안단(耶安端), 예율유고(。) 등 통군을 보내 전투를 거부하였다.테드 샘에서 싸웠고, 리후병은 철퇴하고, 세종 영병은 북으로 쫓아갔고, 결국 황하(지금의 서라 목륜강) 양안에서 더 큰 내전이 벌어졌다.이 위험한 고비에서 황족 맹부방을 매단 거란족의 정치가 예율옥질은 비록 율을 말하는 쪽에 있지만 의연하게 세종 예율응을 지지했다.결국 예율옥질의 중재를 거친 후 당은 마지막에 타협하여, 예율환 즉 황제위의 기성 사실을 인정하고, 쌍방이 '집책'하여 화해하여, '횡단극'을 피하고 옥으로 화했다.사후에 료세종 예율응온은 황위의 굳건함을 잘 알고, 절대적으로 강대한 세력을 가진 후당의 지지와 도움을 얻기 위하여, 그의 즉 황제가 있던 해 8월에, "존모가 되었다.요대 삼장 후족 중 하나인 '국외삼촌별장'이다.
흥종조 이후의 후족 붕당과 그 당쟁.요대 후족에게는 국삼촌의 세 장부가 있고, 또 앞의 두 장부는 각각 두 집, 즉 안장을 뗀 큰 부잣집과 적은 부잣집으로 나누어졌다.을실이 끝난 대옹방과 소옹방.요대 구제(,), 《요사·후비전(辽···后·,·》·传)은 16명의 후비가 기록되어 있으며, 위규각 선생은 전인 연구의 기초 위에 또 역사 문헌 및 근년 요묘에서 출토된 석각 자료를 통해, 그 중 14위를 고증하였다.흥종조(开始朝)에서 시작된 후족(后)의 붕당(党) 다툼, 즉 주로 배리장(拨) 두 방(。)의 후족 사이에서 벌어진다.
먼저 성종 황제의 두 미망인, 흠애태후를 위시한 소부방후당과 인덕태후가 주축이 된 대부방후당 간에 태후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당쟁이다.실제로 이들의 싸움은 성종 황제가 생존해 있을 때 이미 단초를 드러냈다.인덕태후는 성종 때의 제천황후("인덕"은 사후에 시호를 쫓는다), 명보살형이며, 그 아버지는 경종승천황의 후족 동생인 쇼우인(。)으로, 나라의 외삼촌을 위해 배리장을 맡았다.제천후 두 명의 황자를 낳았으나 모두 요절했다.카이타이 5년(1016)에 궁인 쇼우耨근이 황자(。子, 즉 나중의 흥종황제 예율종진)를 낳고, 사이 천황에게 넘겨 후생하였다.샤오는 황자 출산으로 순성 원비(()로 승진했다.원비계는 외삼촌이 계좌를 떼어 아버지의 집 족속과로 갔다.원비는 황자를 낳아 제천황을 질투한 뒤 성종에게 "백단을 참소하고 성종은 끝내 믿지 않는다"고 했다.성종 임금은 죽기 전에 제천을 황태후로, 순종을 태비로 명하였다."(순성)원비가 숨기고."이것은 성종 사후의 후족당을 위해 복선을 깔았다.성종이 죽고 흥종이 즉위하자 원비는 자신이 낳은 아들이 황제가 되자 황태후(,太后), 즉 흠애태후(。太后, '흠애'는 사후에 시봉되었다)로 자립하였다.흠애태후를 비롯한 소부방후당은 인덕태후를 핵심으로 하는 대부방후당을 사경에 몰아넣었다.흠애태후는 먼저 자기의 동생, 당시의 국외삼촌 상온, 난징통군사, 상경유수직의 소효를 먼저 궁중으로 불러 금위군을 다스리게 하고, 동시에 풍가인을 호위하게 하였다.흥종황제는 "황후가 40년 선제를 모시면서 절을 하고 태후로 삼았으며, 지금의 불과, 죄를 뒤집어쓰지 않았느냐"며 인덕태후 등의 모반을 믿지 않았다.흠애태후는 "이 사람이 있다면 후환이 될 것"이라고 했다.그러자 흠애태후는 인덕태후를 강제로 중경으로부터 "작은 수레를 싣고 죄수를 상경"하게 했다.소는 복을 잡고, 소피는 처형당하고, 이 사건과 관련된 인덕후당은 '인원좌죄자40여 세대가 모두 대척하여 그 집안으로 귀향하였다.'이와 함께 흠애태후는 흥종황제가 인덕태후 가문에 장가들었던 황후를 귀비로 격하하고 친조카(제수 소효목의 딸)를 흥종황후로 세웠다.이로써 인덕태후당은 패배해 원기를 크게 상하게 했으므로, 이번 후족당쟁은 태후의 소부방을 흠모하는 것으로 일단 승리했다.이에 흠애태후(朝太)는 북중(朝中)에서 자신의 가문을 현관(显) 요직에 발탁해 집안의 붕당(。)을 키워 황권을 장악했다.흥종이 즉위하여 철애섭정하고, 그녀는 "증조는 난릉군왕이 되고, 아버지는 제왕이 되고, 제제들은 모두 왕이 되니, 비록 한오후는 잘못이 없다"고 추서하였다.그녀의 자매는 영부인이다.제자인 구사가 또 상연국공주, 형해리 상평양공주, 진육상 남양공주는 모두 驸마도위를 섬겼다.또 형인 효목녀가 흥종한 후, 제9녀가 제제비가 되었다.앞뒤의 은혜는 이루 다 기억할 수 없다.제연의 인척들이여, 현관을 발탁하라"고 지시했다.태후를 경외하는 큰 권력을 쥐고, 그 나라를 전제하고, 공신을 많이 죽이고(모두 인덕 태후당인) 소씨 형제뿐 아니라 남북 번한사를 분감하여 황태후가의 노예를 섬긴다.이들 흠애당원들은 궁을 드나들며 조신을 헐뜯고, 매관매작을 하며, 번한을 해친다.제비가 무행하는 자들이니 노예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결국 조정의 '음학 행각', 형정치문(刑政驰), 남북 번한공사(南。公事)는 형제의 손에 넘어갔다.무릇 상연하는 것은 형제가 모여서 의논하고 각기 권력을 가지고조정의 신하와 붕당은 매사를 반드시 안다."
흥종 초에는 흠애태후가 붕당 세력이 급속히 팽창해 상대(인덕태후가 붕당)를 사지로 내팽개쳤을 뿐 아니라 제삼촌이 만조하고 권세가 세찬 황권도 위협받았다.중희 3년(1034)에, 흠애태후는 흥종 폐지를 밀모하여, "제동생들의 의를 음소거하여 소자 중원을 세우려 하였다.중원이 모략으로 황제(흥종)에게 백을 주었다"고 주장했다.랴오싱종 예율종진은 선제공격을 가해 황족 대신들과 상의를 거쳐 폐태후를 일으켜 후당을 타격하고 친정을 구하고 황권을 강화하는 '전투'를 벌였다.거란국지(志國国)는 흥종황제와 성전에서 모두 예율희손(耶), 호위태보예율유삼(太保) 등을 점검하여 폐위한 후, 무리를 불러 호위하였다.제 외삼촌이 차분병으로 포획하거나 죽거나 옮기고, 여당이 함께 징벌한다"고 주장했다.흥종황제의 이번 타격과 수습을 거쳐 후당 세력은 당분간 '균형'을 이루게 돼 황권 강화와 조정 안정에 도움이 된다.
그러나 호경기는 길지 않다.도종대에 이르러 잠시 꽁무니를 뗀 두 집안의 후족 붕당세력은 또 바람을 타고 두 차례에 걸쳐 조정당쟁에 휘말려 들면서 서로 승부를 갈랐다.도종 황제는 도종집권 후족인 붕당의 세력을 더욱 약화시키기 위해 청녕 7년(1061)에 소효무의 아들 쇼아라를 처형하고 이방 사람들을 진노케 했다.청녕 9년(1063), 친애태후의 동생 소효우와 그의 아들 소후는 황태숙 예율중원과 여율 네루구 부자의 반란을 선동해 황권을 빼앗으려 했다.그러나 이 반란은 곧 도종 황제와 그의 지지자들에 의해 평정되었고, 소부방후당 음모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도종 통치 막바지에 이르러서는 형세가 역전되었다.권신 예율 을신이 의덕황후의 모자(诬子)를 모함한 것은 외견상 예율 을신을 비롯한 권신당과 황태자 예율濬(jùn동준)이 핵심인 태자 간의 경쟁으로 보면 된다.이 중 예율을신당의 후원자는 소효목 가문이다.또 이 후손의 중진인 지북추밀원 사소여리, 조마도위 소하미도 예율 을신의 동당이 됐다.예율 을신은 예율 중원의 반란 행동을 평정하는 데 있어 전공이 있고, 영접에 능했기 때문에 도종황제의 중용을 얻어 북원추밀사로 승진되었다.그리하여 예율을신은 도종이 자신을 중용하고 신뢰하는 유리한 조건을 이용하여 조정에서 당과 사를 맺기 시작하여 이반을 배척하고, 북원 중추 밀사 예율인선과 여율량 소한 가문에 밀당하였다.랴오사예룬을신전(赂)의 말처럼 을신은 당시 외세에 충격을 받아 문하(門下)가 무너져 내렸다.무릇 아순이는 천거하고, 충직한 자는 배척당했다"고 말했다.이와 함께 을신은 한관 장효걸과 거란 권귀여율연형, 소십삼 등과 함께 권신의 당을 결성한 뒤 소효목 가문 후당의 지지로 "악을 저지르고 원기를 꺼리다"먼저 을신당은 선의황후(태자의 어머니)를 무고하고 영관 조와 유일하게 사통했고, 황후는 대강원년(1075) 11월 도종 황제에게 죽음을 당했다.을신은 이어 같은 당 소하와마도위 '미이현'의 여동생 소탄스를 도종황제에게 추천했고, 종신(宗)을 받아 궁에 납서(驸宮)하고 황후(。)를 찾았다.예율 을신의 의도는 명백하다.예율 을 신붕당이 황후를 두려고 하는데, 태자 모자가 죽은 이유는 태자 예율조가 임금의 명령을 받고 북남추밀원사를 겸하여 조정에 참여하여 조정을 하였기 때문이다.선의황후가 죽은 후, 태자 예율은 예율 을신을 더욱 증오하며, 일찍이 "우리 어미를 죽인 예율 을신아, 그가 날마다 이 도적을 징벌하는 것은, 남의 아들이 아니다."라고 큰소리를 쳤다.이 말이 을신붕 당인들에게 전해지자 태자당을 하루빨리 척결하겠다는 다짐이 더욱 거세졌다.대강은 3년(1077) 5월에, 예율 을신의 동당인 소십삼이 을신에게 "지금 태자가 살아 있고, 신하와 백성이 마음에 든다.대왕은 원래 뿌리가 없어 도움을 주지 못했는데, 다시 황후를 모함한 원한이 있다.만약 태자가 서 있으면, 왕은 어디에 두었는가?이에 숙계하여라.그러나 도종의 '그대로는 안 된다'는 이유로 을신당 사람들의 음모는 허사가 되었다.한 가지 계획이 안 되면 한 가지 계책을 더 써라.예율 을신이 또 소와와 도斡과 예율 타령을 매수하여 도종에게 가서 `자수'하여, 그들이 여율사래 등과 함께 을신립태를 죽이려고 했다고 말하였다.이번엔 도종황제가 믿고 태자를 을신당에 넘겨 심문했다.결국 억울한 옥살이가 되고, 황태자는 서인으로 폐위되어 '명수 상경'하게 되었다.11월에 폐태자는 또 예율 을신에게 `음파인이 죽여서 그 입을 멸하게 하였다.'눈엣가시를 뽑고 을신당 대희, 취중수일.그러나 소인은 끝내 자기를 해치고, 곧 태자당은 지남원 추밀사 쇼우나를 위하여, 이이비 쇼우타오隗 등은 도종에게 을신권당을 약탈당하고, 예율 을신은 좌천되었다.예율 을신당의 멸망도 그를 지지했던 소효목 가문의 당파세력을 다시 좌절시켰다.
요말천조(天祚)에 이르러서는 황존(皇) 다툼으로 다시 후족 양당의 당쟁(。)과 화싸움이 벌어졌다.천조 황제에게는 일후 삼비가 있었는데, 그 중 문비인 소슬한 '국외삼촌 대부방의 딸'이 황자를 낳아 진왕으로 봉하였다.원비 소귀형, 국외삼촌 소부방의 딸로 두 황자를 낳아 각각 수왕과 허왕으로 봉하였다.황저립 진왕이냐 수왕이냐를 놓고 문비족당과 원비족당이 치열한 당쟁을 벌였다.문비는 동생 소욱이, 형부 예율이 타오, 매제 예율여정이 한 당을 이루면서 진나라 왕을 황제로 세우고, 원비는 그의 형 추밀사와 소봉선, 소보선 등과 함께 결성하였다.당시 소봉선은 조중에서 높은 지위에 올라 천조제의 총애를 받아 원비당 세력이 득세했다.얼마 후 소봉은 권력을 믿고 당우를 시켜 문비당원 소욱여율여정 등에게 무고하여 폐립을 모의하고, 문비에게까지 이르렀으며, 천갈제에게 '사망'당하여 소욱이 살해되었다.그러나 이 계단 후족의 당쟁은, 승리하는 쪽도 덧없었다.(장국경 《요대사회사 연구》에서 발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