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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교육대학교 1978년
교지(校誌)에 실린 글 -
"뿌우웅~~~!”
길게 기적을 울리며 동대구역을 빠져나온 완행열차는 종착역인 부산을 향하여 쉴 새 없이 달리고 있었다.
1978년 5월 1일 오후 1시 47분.
장0환 학장님을 비롯하여 몇 분의 교수님들과 후배들의 전송을 받으며 기차에 오른 우리들은 곧 즐거운 기분이 되어서 졸업여행에 잠길 수가 있었다.
가만히 눈을 감으니 이번여행을 위하여 바쁘게 뛰어 다니던 과대표들의 구두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저희들은 꼭 제주도로 졸업여행을 다녀와야겠다.”
는 우리들의 주장에 학교 측에서는 나름대로의 사정을 들어가며 제주도 여행 불가론을 얘기하였다.
그렇게 쉽게 해결이 되지 않던 일이 막상 학장님의 승낙이 떨어졌다는 소식에 접한 우리들은 환호에 또 환호성 일색이었다.
동참하지 못하는 몇몇 학우들에게 아쉬움을 느끼며 이런 저런 상념에 잠기는 동안에 기차는 서서히 종착역인 부산역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역에서 도보로 15분 거리에 위치한 제주발 「카페리호」선착장을 확인해 두고는 불이나게 수정동 누나 댁으로 가서 저녁식사를 마쳤다.
출항시간이 되자 선착장으로 내려왔다.
「동양고속 카페리 1호」
우리 일행을 제주도까지 실어다 줄 거대한 선체가 버티고 있었다.
너무 엄청난 규모이기 때문에 배라기보다는 Apt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겠다.
이 배는 원래는 부산과 일본을 운항하던 초호화 국제선(부관연락선)이었다.
그 후 부관연락선은 성능이 더 뛰어난 배가 취항을 하고 지금은 부산과 제주를 운항하는 국내선이 되었다고 한다.
3,800톤이나 되는 이 배는 승용차 적재능력이 2백여 대이고 승선인원이 6백 명이 넘는다는 사실에 접한 우리들은 또 한 번 대구촌놈이 될 수밖에 없었다.
“뚜우-!”
길게 고동소리를 울리며 부산항을 뒤로한 카페리 호에 몸을 실은 우리들은 석양에 곱게 물든 제주행 항로를 찾아들기 시작했다.
부두에서 하얀 손수건을 흔들며 열심히 전송을 하는 수많은 인파들을 보는 순간에 그 속에 담겨있을 각양각색의 사연들을 상상해 보았다.
어두워지는 부산항엔 불빛이 하나 둘 늘어나고 석양에 비친 바다는 인간의 능력으론 도저히 만들어 내지 못할 신비로운 빛깔을 만들고 있다.
저녁노을 속을 헤엄쳐 다니는 갈매기들은 조화로운 한 폭의 그림을 만들고 있었다.
‘태종대’를 지나서 ‘오륙도’가 아물거리기 시작했을 때 바다는 완전히 어둠으로 뒤덮였다.
시야에서 멀어져가는 오륙도를 바라보며 열창한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우리 일행들에게 여행의 감흥을 더욱 돋우워주었다.
아래 영상은 2019년 가을에 포항 '효자아트홀'에서 수많은 시민을 관객으로 모시고 공연한 영상이다.
2016년 2월 정년퇴임 후 여가활동으로 참여한 '하모니카 동아리'활동으로 백수의 세월보내기로 딱이다.
다른 어떤 악기나 보조 반주가 없이 하모니카 만으로 연주하는 4중주로, 완벽한 공연이 가능한 매력적인 연주이다.
꽃피는 동백섬에 봄이 왔건만
형제 떠난 부산항에 갈매기만 슬피 우네
오륙도 돌아가는 연락선 마다
목메어 불러봐도 대답 없는 내 형제여
돌아와요 부산항에 그리운 내 형제여
♩♪♬ ~ ♩♪♬ ~
가고파 목이 메어 부르던 이~거리는
그리워서 헤매이던 긴긴날의 꿈이었지
언제나 말이 없는 저 물결들도
부딪쳐 슬퍼하며 가는 길을 막았었지
돌아왔다 부산항에 그리운 내 형제여
♩♪♬ ~ ♩♪♬ ~
어두워진 다음에는 통제를 하는 바람에 갑판에는 못 올라갔다.
2등 객실 난간에 기대어 밤바다를 내려다보니 뱃머리에 부딪쳐서 부서지는 파도가 거대한 소용돌이를 치며 물결을 만들고 있었다.
‘저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면 어떻게 될까?’
하는 잠시 방정맞은 생각에 온몸이 오싹했다.
밤바다를 타고 불어오는 바닷바람이 무척 짭짤하다고 느끼는 순간에 내 팔뚝에 채워져 있는 고물시계는 정확하게 자정 15분전을 가리키고 있었다.
오늘밤 우리들의 침실이 되어 줄 2등 객실로 들어오니 일행들은 모두가 여행기분을 만끽하며 끼리끼리의 놀이에 열중하고 있었다.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추는 일행이 있는가 하면 카드놀이와 동양화연수로 밤이 깊어 가는 줄 모르고 여행을 즐기는 팀들도 있었다.
▶ 2일차 : 5월 2일
새벽 5시!
군 생활 습관 탓인지 저절로 눈이 떠졌다.
어젯밤 너무 늦게 잠자리에 든 탓에 몸이 찌뿌둥했지만 용기를 내어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커튼을 열어젖히니 창밖은 이미 환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선상에서 맞이하는 해돋이가 일품이라는 미술과 박0영교수님의 말씀에 갑판으로 나오니 아직 해는 오르지 않았다.
이런 저런 얘기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어느 순간에 바다 밑을 헤치면서 황홀한 태양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똑같은 태양인데도 그 해는 엄청나게 크다.
아마도 아무런 장애물이 없이 바다속에서 솟아오르는 장면을 눈앞에서 바로 보았기 때문이리라!
새벽안개가 너무 자욱한 바람에 희미한 안개 속에 쌓인 태양이었지만 그래도 그 나름대로의 매력은 천 냥을 주고도 가질 수가 없을 것 같아서 태양을 비켜서서 한판을 ‘찰칵’해 두었다.
10여 시간의 긴 항해 끝에 바다 저 멀리 제주도의 한 부분이 나타났다.
하룻밤 항해가 이리도 길게 느껴지는데 오랜 세월을 항해한 끝에 신대륙을 발견한 「컬럼부스」의 기분은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새벽안개에 휩싸여 공중에 붕- 뜬 것 같은 한라산을 등에 지고 자리 잡은 제주시의 모습은 또 하루의 시작을 위하여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서라벌 여행사」에서 나온 「광신교통」관광버스 3대에 각 반별로 분승한 우리 일행은 아침식사를 위하여 제주시에 위치한 「경해식당」으로 향했다.
가이드의 설명에 의하면 44만 제주도민은 제주시에 11만이 거주를 하고 나머지가 각 지방에 흩어져 살고 있단다.
행정구역은 1개시(제주시). 2개 군(북제주군, 남제주군). 3개 읍(서귀포읍,한림읍,대저읍)으로 구성이 되어있다고 한다.
이국적인 정취가 물씬 풍기는 이곳 제주에서 첫눈에 들어오는 것이 가로수로 심어진 열대수종인 [종려나무]였다.
육지에서는 한번도 보지 못한 나무라서 특이하였다.
시내 도로를 따라서 일렬로 늘어선 나무는 이국적인 느낌을 주기에 충분하였다.
관광 섬의 특색을 살린 제주고유의 [초가집]은 제주시 한가운데 몇 채 보존 중이었다.
새끼줄이나 고무밧줄로 동여매어진 채 돌담 밑에 나직하게 엎드려 있었다.
바람이 얼마나 세게 불면 지붕에 저렇게 밧줄을 동여매었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자세히 살펴보니 새끼줄 대신에 고무밧줄로 동여맨 집도 많이 보인다.
전통적으로 새끼줄을 매는 한국적인 풍물이 기계 문명인 고무밧줄에 밀려난 것이 오늘의 현실인 것 같아서 약간은 얄미운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아침 식사 후에는 [5.16횡단도로]를 달리며 본격적인 제주관광길에 올랐다.
한라산 중턱을 깎아서 만든 이 도로는 관광전용도로로 만들어졌다.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넓은 초원과 목장, 그 속에 뛰어 노는 조랑말과 노란색을 한껏 뽐내는 유채꽃 속에 펼쳐지는 이름 모를 아열대성 식물들의 끊임없는 등장은 정말로 볼만한 구경거리였다.
한라산 등반로중 [성판악코스] 입구에서 버스는 멎었고 간단한 기념촬영을 하였다.
관광용으로 몇 마리 있는 조랑말 위에 용감하게(?) 올라타서 카메라 초점을 향하는 몇몇의 여학생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등반시간은 1시간이라는 주의말씀을 명심하고 우리 몇몇은 한라산 등반을 시작했다.
하늘은 맑고 바람마저 적당하게 불어와서 산을 오르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선두다툼을 벌였는데 국어과 김 교수님을 비롯한 우리 몇 명이 결국 선두를 차지하며 올라갔는데 즐거움 그 자체를 느끼며 올라갔다.
이름 모를 나무와 풀들이 너무 많아서 교수님께 배워가면서 산을 올라갔다.
무한한 자연 앞에 모든 이름을 알고자 하는 것은 결국은 욕심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현재위치 해발 1,020m
정상인 백록담까지의 남은 거리가 6km라고 알려주는 이정표가 쓸쓸하게 보이는 것은 왜일까?
혼자만의 욕심으로는 한두 시간만 더 오르면 정상을 정복하고 백록담에 발을 담글 수가 있겠다 싶은데 「단체행동」이라는 악조건에 하산을 해야 하는 마음이 편치를 못하다.
나중에 알아보니 성판악으로 정상을 오르는 코스는 8시간 정도가 소요된다고 한다.
너무 많은 아쉬움을 가진 채 다음으로 달려간 곳이 「천제연 폭포」이다.
듣던 바와는 다르게 가뭄에 물이 말라버려서 웅장한 규모에 비해서 너무 초라하게 보이는 ‘천제연’을 뒤로하고 버스는 아스팔트를 질주하기 시작하였다.
6.25때 활용한 대한민국 [육군제1훈련소] 장소를 지나서 얼마를 더 달리니 「산방굴사」가 나타났다.
땀을 뻘뻘 흘리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부지런히 올라갔다.
정상에 당도하니 확트인 시야에 새마을 운동으로 잘 가꾸어진 아담한 촌락들과 망망대해가 끝없이 펼쳐진 곳엔 갈매기 때들이 오락가락 하고 있었다.
버스로 돌아오니 여독이 쌓여 오늘은 이제 그만 관광을 마쳤으면 싶었다.
그러나 버스에 몸을 맡기니 다시 시원한 바닷가에 위치한 「망부석」으로 데려다준다.
옛날 그것도 아주 먼 옛날에 영감님과 할멈 단 두 분이 정답게 살고 있었다.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그 날도 할아버지는 고기잡이를 나갔단다.
도중에 풍랑을 만났고 할아버지는 그만 돌아가시게 되었단다.
그래서 할머니는 매일같이 그 바닷가에 나와서 돌아오지 않는 할아버지를 기다렸는데 기다림에 지친 할머니는 마침내 돌이 되었단다.
이름하여 [망부석]
애틋한 전설을 뒤로하고 일행은 서귀포로 향하다.
가는 도중에 전 국무총리였던 김종필씨가 만들어 놓은 '귤농장'에 들렀다.
밭을 일굴때 나온 돌로 돌담을 쌓았는데 그게 또 그렇게 멋이 있을 수가 없구나!
제주의 멋이 돌담에 다 있는 것 같다.
농장이 완성되기까지의 어려움은 돌담으로 미루어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이곳에서 나오는 1년 수익이 1억이 넘는단다.(1978년 기준)
이 수익금으로 「운정장학회」라는 장학재단을 만들어 전국의 유능한 학생을 대상으로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단다.
오늘 관광의 마지막 코스인 「정방폭포」는 물이 곧바로 바다에 떨어진다.
이런 방식의 폭포는 동양에서는 이곳이 유일한 곳이라고 한다.
석양에 비친 저녁노을을 만끽하고 있는데 바로 옆에는 해녀들이 작업 중이었다.
시야에서 사라진 그녀들이 잠시 후에 건져 올린 것은 싱싱한 '해삼과 전복'들이었다.
금방 잡아 올린 그것들은 즉석에서 회로 만들어져 팔고 있었다.
싱싱한 회를 안주 삼아 소주 한잔을 들이키고픈 마음이야 간절했지만 교수님 앞이라서 얌전을 뺄 수밖에 없는 사정이야 어찌 나 혼자뿐이었겠는가?
아쉬움을 간직한 채 [서귀포관광호텔]에 우리는 여장을 풀었다.
저녁을 마친 후 우리는 끼리끼리 시내구경을 나섰다.
배짱이 맞는 우리 일행은 낮에 못 먹은 해삼회에 대한 미련을 풀려고 주점을 찾아 나서다.
소주 몇 잔에 해삼회가 술맛을 돋우니 흥에 겨워서 노랫가락이 절로 나온다.
▶ 3일차 : 5월 3일
제주에서 이틀째!
아침에 일어나서 무심코 창밖을 보니 창밖은 바로 바다이다.
어제 저녁에도 바다는 그 자리였을 텐데 왜 보지를 못했을까?
항구로 내려오니 밤새 조업을 하던 통통배들이 만선의 깃발을 나부끼며 속속 입항을 하고 있었다.
삼치, 고등어, 갈치, 오징어 등의 고기가 냉동이 된 채로 배에서 내려지는 광경을 정신없이 구경하고 있는데 식사준비완료를 알리는 전달이 왔다.
호텔로 올라오니 일부에서는 이미 식사가 시작이 되었다.
오늘의 첫 일정은 하늘과 땅이 마주본다는 [천지연 폭포]다.
이곳도 가뭄 탓에 수량이 적어서 볼품이 없지만 제대로 된 수량이 흐를 때는 가관이라는 가이드의 설명에 딴을 그런가 싶기도 하다.
폭포수가 떨어져 내린 곳에는 오랜 세월 떨어져 내리는 물과 씨름한 덕분에 한 개의 아담한 호가 만들어져 있었다.
2m가 넘는 무태장어(뱀장어 종류)가 살고 있다는 이곳은
‘신선이 정말로 존재했었다면 탐하지 않았을까?’
하는 부질없는 상념에 잠기며 [성산 일출봉]으로 방향을 돌리다.
제주도 여행 중에서 가장 멋있고 인상 깊은 곳이 이 곳이다.
땀을 뻘뻘 흘리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정상에 올라서니,
“야호!”
하는 탄성이 절로 나온다.
4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으니 시원함이야 언급을 안 해도 되겠고 264킬로 제곱미터의 넓은 화산분화구가 마음껏 펼쳐져 있다.
제주에는 화산폭발의 흔적을 뚜렷하게 볼 수 있는 곳이 2곳이 있다.
한 곳이 백록담이고 다른 한 곳이 이 곳 성산 일출봉이라고 한다.
백록담 구경을 못했지만 이곳을 구경할 수 있음에 감사드리고 고개를 들어 보니 조랑말, 홀스타인, 에어셔 등의 젖소들과 양떼들이 무리 지어서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다.
놓치고 싶지 않는 순간들이기에 또 한 번의 셔터를 누르고 말았다.
운동에 관심이 많아서 일까?
이 넓은 분화구를 축구장으로 만들면 어떨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을 해 본다.
빙 둘러진 바위 더미는 그대로 스탠드가 될 것이고…….
일출봉을 내려오니 자운영이 만발한 초원이 우리를 유혹한다.
가축이 못 달아나게 쳐놓은 목책을 넘어 들어가서 교수님들과 함께 싱싱한 전복 회를 안주 삼아서 일 잔을 기울이고 있는데 신혼부부 한 쌍이 눈에 뛴다.
"행복하세요!"
하는 말과 동시에 우리 일행은 축하의 박수를 보내니 신부가 예쁜 미소로 답해 온다.
「만장굴」
총길이가 20여리나 되는 굴이다.
유사시에는 제주도민 모두가 피난을 할 정도의 어마어마한 규모를 자랑한다.
전기를 끌어들여서 대낮같이 환하게 밝혀 살펴보도록 했으니 횃불 들고 구경하던 앞서간 여행자들에게 조금은 미안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만장굴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는 곳에 위치한 「사굴」은 전설로 더 잘 알려진 굴이다.
아주 먼 옛날 이 굴에는 커다란 뱀 한 마리가 살고 있었는데 이놈의 성격이 워낙 고약해서 매년 마을에서는 처녀 하나씩을 제물로 받치는 큰제사를 지냈단다.
조금이라도 성의가 부족하면 마을에는 반드시 우환이 들었다는 전설이 있는 곳이다.
다음에 들른 곳은 「용두암」이다.
용이 되어서 승천을 하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바위가 되었다는 용의 머리를 닮은 용두암을 뒤로하고 제주도 여행에 마지막 순서가 될 「삼성혈」로 들어섰다.
‘고을나’, ‘부을나’, ‘양을나’의 삼신(三神)이 땅에서 솟아 나와 탐라국을 세웠다는 전설이 담긴 곳이다.
그래서 굉장히 큰 기대를 건 곳이었는데 막상 느낌은 기대만큼 미치지 못한 곳이었다.
제주시에 위치한 「미도여관」에서 여장을 풀고 나니 피곤이 몰려온다.
저녁을 마친 후에 시내에서 몇 가지 선물을 사서 돌아오니 벌써 방에서는 놀이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우리 같은 서민들은
“쌀로 만든 비싼 술을 먹지 말고 보리술을 먹어야 된다!”
는 박0영교수님의 말씀에 우리 모두는 큰 박수를 보냈다.
이어서 교수님들께서 기부한 맥주로 파티가 벌어졌다.
내일이면 떠나온 육지로 다시 향해야 한다는 생각에 모두들 정말 열심히 놀았다.
▶ 4일차 : 5월 4일
하늘은 맑고 바람은 고요하니 우리들의 안정된 여행을 신께서 마련해 주신 것 같다.
아침 후 제주항에 당도하니 우리를 싣고 갈 「안성호」가 정박해 있다.
들어올 때 이용한 페리호에 비해선 반도 안 되는 작은 배였지만 안정성은 있어 보인다.
승선을 완료하고 얼마간의 기다림의 시간이 흐른 후에 긴 고동소리를 울리며 제주항을 서서히 빠져 나오기 시작했다.
갑판에 올라서니 짧은 기간이었지만 정들었던 제주의 모습이 시야에서 멀어져 가고 있었다.
계속되는 망망대해!
너무 단순함에 화가 치밀어 객실에서 한잠을 푹 자고 나오니 멸치로 유명한「추자도」를 지나고 있었다.
다도해를 곡예 하듯이 요리 저리 잘도 빠져 나온 배는 목포를 향하여 계속 항해중이다.
목포는 항구다!
이 곳 명물인 해장국밥으로 저녁을 때우고 나니 기차출발시간까지는 얼마간의 여유가 있었다.
[유달산]에나 올라가 볼까 생각하고 이리 저리 동지를 규합했지만 실패하다.
결국은
‘혼자 올라가야 하나?’
하고 고민 중인데
“김 사세요!”
하고 외치는 김 파는 아지매의 고함이 어찌나 극성스러운지 한 축의 김과 500원권 지폐 한 장을 결국에는 바꾸고 말았다.
야간열차!
밤차는 떠났다.
너무나 인상 깊었던 생애 처음인 그 곳 제주에서의 졸업여행!
신혼여행은 꼭 제주에 와야지!
그래서 아무것도 모르고 감탄사만 연발할 내 아내를 위하여 난 조금은 뻐기면서 부지런히 설명을 해야겠다.
밤새 달려 삼랑진에 도착하니 먼동이 터 온다.
피곤한 탓일까? 자꾸 졸음이 몰려온다.
멀리 동대구역이 보이기 시작하자 고향에 돌아온 평안함이 밀려왔다.
그곳에는 동아리 후배(미네르바)들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이곳에서 좋은 인연으로 이어질 뻔한 후배여학생과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 인연은 복학생 동기 녀석의 집요한 방해로 결국에는 마무리가 되지 못했다.
함께 '테니스'를 치고 영화구경을 했던 추억만 간직한체 그렇게 끝이났다.
아마도 나와는 '인연'이 아니었던 것 같았다.
4박5일간의 제주도 졸업여행은 그렇게 끝이 났고 이젠 추억의 한 페이지가 되었다.
1978년 5월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