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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대와 최치원_양산시 원동면 화제리
시야가 탁트여 마음이 시원하다. 양산8경중 하나다.
< 양산 8경 >
1.영축산 통도사
2. 천성산
3. 내원사 계곡
4. 홍룡폭포
5. 배내골
6. 천태산
7. 오봉산 임경대
8. 대운산 탑골휴양림
낙동강의 하류 원동~ 물근을 지나는 이곳이 예로 부터 <황산강> 이라는 별칭이 있었다. 낙동강 중에서도 가장 수량이 많고 강폭이 넓으며 경치가 가장 좋은 곳이다. 이곳의 경치를 일컬어 <임경대>라고 부른다. 낙동강을 거울 대하듯 한다는 것.
낙동강 건너는 김해시 상동면이다.
문학의 힘은 크다. 약 1,100 년 전 고운 최치원 선생이 여기서 시한 편을 읊음으로 해서, 평범한 곳으로 주목 받지도 못하였을 이 곳이 양산 8경으로 곱히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임경대의 본시를 감상해 보자.
< 임경대 > / 최치원
뾰족 뾰족 안개 낀 산 봉우리 유유히 흐르는 물
거울 속 인가는 푸른 산봉우리를 마주보노라
어느 곳으로 돛단배는 한가득 바람싣고 떠나가는 데
나는 새들은 순식간에 눈앞에서 아득히 사라진다.
임경대에서 낙동강을 바라보면서 1시 방향의 산 밑이 이재익 시인이 태어난 고향이다. (양산시 원동면 서룡리 범서부락 수청마을)
정자앞에 자연송을 생긴 그대로를 보호하다 보니 길을 막고 있다.
근년에 새로 지은 정자 . 누각 이름은 아직 안붙였다.
학정 이재익 시인은 이곳이 고향이라 어릴 때 추억으로 만감이 교차한다.
임경대 1.
-고운孤雲 선생* 임경대 유상기
이 재 익
낙동강 700리가 끝없이 이어지고
가파른 절벽 아래로 배들은 유유하다.
먼 산봉우리와 골짜기는 신의 손길인데,
그 속에 어옹은 누가 도와 그렸을까
천지간에 四知*가 있다더니
강물은 내개 귀 기울이건만
사람들은 들으려 않네.
종일토록 시름타가 석양에 문득 바라보니
물안개 피어오르고 고운 노을은 단풍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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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운 ; 최치원 崔致遠(857˜?)선생의 호, 13세로 당나라에 유학하고,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하다가, 신라에 귀국 후 894년 시무책 10여 조를
진성여왕에게 상소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외직을 자청하였다.
6두품 출신이라 출세에 한계가 있었다.
* 四知 ; 四知란 ; 天知, 地知, 我知, 子知. 하늘과, 땅과, 나와, 그대가 알고 있다.
아무리 두 사람만의 비밀이라도 어느 때고 남이 알게 됨을 이르는 말이다.
출전은 중국 후한서 양진전. 양진이 형주 자사로 부임하였을 때 왕밀이 밤중에
양진을 찾아가 뇌물을 바치자 청렴한 상관인 양진이 한말이다.
여기서는 내 마음을 강 거울에 비춰보니 '그대' 즉 강물은 내 심정을 알고 있다는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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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번-75 / 시집명 이재익, <<함께 가는 길>> 2011, 시선사 / 분류-자연 ]
임경대는 고운대, 최공대라고도 한다.
임경대 2.
- 새 정자에 붙여
이 재 익
양산시 화제리 오봉산록 돌아가는
고불고불한 길가는
발 길 절로 멎는 절경이로다.
일천백년된 공허가
새 정자에 다시 매달렸다.
신라 고운선생 유상지 임경대臨鏡臺*는
역사흥망 되돌아보는 채찍
찾아온 향인은 상념에 젖고
강 굽어보는 정자는
가을비에 처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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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경대 ; 경남 양산시 원동면 화제리 오봉산 기슭 낙동강변.
신라고운 최치원 선생이 은퇴 후 이 곳에 발길을 옮겨 시를 짓고 놀던 유상지.
옛 임경대 정자의 자취를 더듬어 향민鄕民이 최근에 새로 정자를 세우고 최치원
선생이 여기서 읊었던 시 <임경대>를 걸어두고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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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번-76 / 시집명 이재익, <<함께 가는 길>> 2011, 시선사 / 분류-자연 ]
양산군지 고적조에 기록이 있다. 낙동강 문학의 원조이다.
통일신라말, 고운 최치원 선생이 이 자리에 와서 시를 읊고 노닐다가 가신 후로 이곳은 경치좋은 <임경대>로 소문이 나서 역대 시인 묵객들이 많이 찾아와서 후속 시를 읊었다.
권만 ; 1688년(숙종 14), ~ ?. 조선후기 문신 주로 영조 때 활약. 본관은 안동. 호 江左.영조때 이인좌의 난에 공을 세움. 병조좌랑까지 오르고, 사후에 이조참의로 추증되었다,
시비에 '고운의 푸은바다' 푸른 바다이다. 오타 발견!
임경대 차 고운운 / 권만
높은 대 한편으로 강물이 늠실늠실
강 서편 뒤쪽 산봉우리 마주 앉으니
지나는 새 돌아가는 배는 어디로 갔나
고운의 푸른 바다 아득히 자취가 없네.
김극기 ; 생몰연대는 미상. 고려무신정권기 명종 때의 문신. 본관 廣州.(경기도), 뛰어난 문장가. " 문장의 표현이 맑고 활달하며 말을 많이할 수록 내용이 풍부하다" 는 평을 들음. 벼슬에 연연하지 않은 양심적인 지식인 이었다.
임경대 / 김극기
맑은 강 거울 씻어 푸른 빛 늠실늠실
강에 임한 외딴 마을 산봉우리 등졌네
고기잡이 한 노래에 배 한 닢
푸른 버들 깊은 곳엔 사람 자취가 드물구나
김효원(1532 중종 27)~ 1590(선조 23) ; 조선 선조 때 문신. 본관 선산. 호 성암省庵.
조식, 이황의 문인. 사림파의 대표적 인물. 이조전랑직을 둘러싸고 심의겸과 대립하여 동서분당의 원인이 되는 인물이었다, 김효원 편을 드는 자들은 동인이 되고 심의겸 편을 드는 자들은 서인이 되었다. 중앙으로 들어 오지 못하고 외직으로 돌다가 영흥부사 재직 중에 죽었다.
임경대 / 김효원
임경대 가에서 잔치자리를 크게 여니
석양의 노래 음악소리 술잔 자주 보내네
좌중에 그 누가 사각사각 춤을 추나
홍장중에 제일 미인 마음 둔 사람이로다.
남경희(1748년 영조 24,~1812년 순조 12년) 본관 영양. 호 치암癡菴. 자신을 송나라 소강절에 비유 하고, 사간원 정언 벼슬을 하다가 뿌리치고 고향 경주로 돌아갔다. 자신도 돌보지 못하면서 민생, 세도를 논한다고 스스로 호를 치암이라 하였다.
장발 우제 / 남경희
산그림자 강에 빠져 푸른 봉우리 꺼꾸러지고
층층 대 아래로 뵈는 강물은 늠실늠실
바람 높은 포구에는 늦가을의 피리소리
달 지는 선방에는 한 밤중에 종소리
동구에 이끼 덮였으나 중 다니는 길이 있고
바위 머리 솔은 늙었으나 학은 자취 없네.
고운의 옛집은 신선 사는 곳과 같아
자던 객 돌아감을 잊고 짧은 지팡이 멈추노라.
이만도(1842년, 헌종 8~1910년) , 본관 진성. 호 향산響山. 고종 때 양산군수를 지냈다. 3사의 요직을 지냈으며 강직하였다. 을사조약 체결에 항의하는 상소를 올렸고, 한일 합병이 되자 24일 단식하여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 수여.
과임경대 / 이만도
임경대 앞에 물거울을 열어 놓고
몽몽한 보슬비가 나그네 마음 재촉하네
최고운 선산 떠나가고 소식 없으나
그래도 고깃배는 달을 싣고 오누나.
정사룡( 1491 성종 22~1570 선조 3) 조선중기 문신, 문인. 시문에 뛰어남. 영의정 정광필의 조카. 신광한과 쌍벽. 중국에 사신으로 가서 문명을 떨치고, 사신을 접대하였다. 그러나 탐학한 면이 있었다는 평을 받는다.
임경대 양산지 최치원소유처 / 정사룡
유선이 물에 지나간 흔적 억지로 찾았더니
아득한 생학은 이미 높이 날아갔네
바람 안은 돛단배 가고 공연히 시만 남았으니
뉘 알리 늙은 노인 옛 시를 번안한 것을.
허적(1563, 명종 18년~ 1641년 인조 19). 조선 중기 문신. 본관 양천, 호 水色. 형장刑杖을 남용하거나 제례 형식 문제로 탄핵을 받기도 하였으나. 1628년 유효립의 모반사건에 공을 새워 영사공신이 되고, 양릉군 군호를 받았다. 판서를 지내고 시문에 능하였다.
등임경대 용전운 최고운소유처 / 허적
높은 대에 올라 강물을 굽어보니
몸은 한 척 배처럼 가볍네
절벽은 가을 구름을 감싸 합치고
봉오리는 떠오르는 해가 밝은데
진인의 구역은 오직 풀에 덮이고
신선의 구경은 이미 기러기 간 흔적이로다
옛 사적 흞어보며 저무는 해에 상심하여
홀로 서글픈 심정 노래하노라.
임경대 부근
임경대 아래는 경부선 철도가 지나가며, 철도변 산슭에는 <용화사> 등 작은 절이 몇개 있다.
용화사의 통일신라시대 석불, 옮겨온 것이다.
임경대의 화제리는 소설가 김정한의 소설 < 수라도> 문학의 무대가 되는 곳이다.
임경대의 원동면에서 가장 유명한 곳은 원동의 매화로 유명한 순매원이다. / 이것은 현지 안내 사진이다.
토곡산 등산로 / 임경대 우전방 먼 산이 원동 토곡산이며 임경대가 위치한 산은 양산 오봉산이다. 임경대는 오봉산의 서남쪽 산록에 위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