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
<밴드부의 추억>
강릉농고는 브라스 밴드로 유명했다. 60년대 당시 강릉은 학교마다 브라스 밴드가 있었고 모두 상당한 연주 실력을 갖췄던 것으로 기억된다. 행사가 있을 때마다 각 학교 밴드부들은 실력을 뽐냈는데 길거리를 행진하는 마칭밴드 퍼레이드(Marching Band Parade)도 유명했지만 강릉시민회관에서 고등학교 밴드부 경연대회도 있었고 독주 경연대회도 있을 만큼 강릉시민 모두가 밴드를, 아니 모든 장르의 음악을 사랑했던 것 같다.
밴드경연대회장은 항상 시민들로 발 디딜 틈도 없이 성황을 이루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내가 중학교 3학년이 되던 해, 농고에서는 나에게 고등학교 3년 동안의 장학금을 줄 테니 밴드부원이 되지 않겠느냐는 제안이 왔다. 당시 고등학교에 갈 형편이 되지 않던 나에게는 귀가 솔깃한 제안이었고 더욱이 음악을 좋아하고 멋진 복장의 마칭밴드를 동경하던 나는 집에 와서 어머니를 졸라 곧바로 농고 밴드부에 들어갔다.
밴드부 단원은 모두 고등학교 형들이었고 신입부원은 농고 1학년생 3명과 나를 포함하여 네 명이었는데 고등학교 밴드부에 중학생은 나 혼자였던 셈이다.
상급생 형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나는 무슨 악기를 하고 싶냐고 하기에 냉큼 트럼펫을 골랐더니 밴드부장 형은 나에게 우선 트럼펫을 배정해 주었다.
쌍두의 독수리(Under The Double Eagle March), 성자의 행진(When the Saints go Marching in), 지상최대의 작전(The Longest Day), 미해군가(Anchors aweigh) 등이 당시 마칭밴드의 단골 레퍼터리였고 나도 열심히 연습을 했다. 당시 밴드부는 규율이 엄하기로 유명했는데 연습이 부족하다고 밴드부장이 밴드부원 줄빠따를 때릴 때도 나는 항상 열외였다.
원래 악기는 집에 가져가지 못하고 학교에서만 연습하게 했는데 나에게는 특별히 집에 가져가서 연습해도 좋다고 하여 트럼펫을 집에 가지고와서 혼자 연습을 하고는 했다.
집에 와서 행진곡을 조금 연습하다가는 훨씬 쉬운 ‘밤하늘의 멜로디’ 같은 곡을 마당 구석에 나와 불면 동네 사람들이 모여와 신기하게 쳐다보곤 했다.
형 친구들은 나도 한 번 불어보자고 하기도 했는데 얼굴이 시뻘겋도록 배에 힘을 주고 불어도 소리가 나지 않거나 고작 ‘뿌억~’ 하는 소리 밖에 나지 않는데 나이도 어린 내가 그것으로 행진곡을 연주하는 것을 보곤 신기해 했다.
우리 고모부는 내가 한 손엔 책가방을, 다른 손엔 트럼펫 케이스를 들고 가는 것을 보시면 ‘너는 맨날 시커먼 똥장군 같은 걸 들고 다니는데 그게 뭐냐?’ 하시곤 했다.
중학교를 졸업할 즈음 친구들은 대학을 가겠다고 모두들 강릉고등학교(인문고)에 원서를 쓰는데 반에서 줄곧 5등 내외의 석차를 유지하던 나는 아무리 3년 장학생이라지만 농사꾼이 되겠다고 농고에 진학하는 것에 도저히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나는 일곱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누나, 형, 어머니와 네 식구가 살았는데 내가 중학교 3학년 때 공교롭게도 형님이 군에 입대하는 바람에 고등학교 입학금과 등록금은 고사하고 집안 형편이 입에 풀칠하기도 빠듯했다.
독한 마을을 품고 담임선생님의 권유를 뿌리치고 졸업을 한 후 1년을 쉬며 내 스스로 입학금을 마련하여 이듬해 강릉고등학교 입학시험에 합격했다.
입학 후에도 등록금을 대기가 난감했는데 내 사정을 아신 담임선생님께서 교내 조경수(造景樹)를 전정(剪定)하는데 보조하면 학교에서 한 학기 등록금을 보조해 준다기에 그 일을 하며 첫 학기 등록금을 벌었고, 곧 이어 친구들의 주선으로 입주(入住) 가정교사로 들어가 내 스스로 등록금을 벌며 학교를 다녔다.
통학거리(6km)가 멀었던 내게는 먹여주고 재워주고 후하게 월급도 주는 입주 가정교사가 매우 도움이 되었는데 내 자신의 공부에는 지장이 많았던 것 같다. 그렇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렇게라도 하여 고등학교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는 것에 크게 감사하고 있다.
강릉고등학교에서도 밴드부가 있었는데 아무도 밴드부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다. 내게도 중학교의 경력이 알려져 밴드부를 하라고 난리였는데 나 뿐만 아니라 모두들 대학을 가겠다고 인문고에 왔는데 밴드부라니 어림 반 푼 어치도 안되는 이야기였다. 당시 강릉고등학교의 학습 열기는 대단해서 모두들 죽기 살기로 공부에만 매달렸는데 학교의 전통이었다.
학교에서는 그러면 연습은 하지 말고 학교행사 때 애국가나 교가 정도만 연주해 달라고 사정을 했는데 중학교 때 밴드부였던 아이들은 교복을 입은 채로 행사곡만 연주해 주곤 했지만 나는 끝가지 참석하지 않았다.
제대로 배우지도 못한 중학시절 일 년 간의 밴드부 생활이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나에게는 소중하고도 큰 경험이었고 지금 우리 집에는 후일 구입한 트럼펫이 고이 모셔져 있다.
나는 요즘도 이따금 시간이 나면 집안의 온 문을 모두 꽁꽁 닫고 작은 소리로 ‘해변의 길손(Stranger on the Shore)’, ‘넬라판타지아(Nella Fantasia/영화 Mission의 주제곡)’ 등을 몰래 불곤 한다. 집사람은 그래도 시끄럽다고 난리고 동네 사람들이 흉본다고 질겁을 한다.
첫댓글 강릉 교육의 역사~, 저이때도 형님때와 크게 차이는 없었습니다. 저는 황지 중학교를 졸업하고, 강릉고(강고11회와 동기)를 희망했지만, 큰 형님이 집안형편이 어려우니..., 황지고를 입학하여, 쬐금 반항하여 흐트러진 모습으로 고교를 다니든 기억이..., 글이 재미있으며, 그 당시의 사회상까지도 그려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