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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문양 우물정(井)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
중국길림성 환인지방에서 정(井)자가 음각된 토기병이 나왔고 우리나라의 김해(金海) 예안리에서도 토기인
고기대배의 외부측면에 정자가 새겨진 토기가 출토되었으며 풍납토성에서도 정자명이 있는 토기병이 발굴
되었다.
그리고 아래 그림은 경주 호우총에서 출토된 우물정(井) 문양이 새겨진 그릇이다.
이것은 명백한 고구려의 상징임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해석자에 따라서 다양한 의견이 제시 되기는 하였지만 " 을묘년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호우십(乙卯年國 岡上廣開 土地好太 王壺
玗 十) " 이라는 글씨에서 보듯이 고구려의 호태왕의 명문이 새겨진
그릇이 출토 되었으므로 그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되었기 때문이다.
경주에서 처음으로 이 유물이 발굴되었을때 어떤 학자가 말하기를
고구려와의 교역품 내지는 조공품이었을 것이라고 설명을 하였다.
무턱대고 이런 망발부터 늘어 놓는 학자를 우리는 철밥통이라고
한다.
어떻게던 한반도 경주를 신라의 수도라고 주장해야만 하는 똥배짱을
이제는 불쌍하게 생각하고 싶다.
최근에 상고사학회에서 대륙답사시 어느 주유소간판에 새겨진 우물정(井) 문양을 사진으로 찍어 왔을 때
나는 적지 않게 놀랐다. 아직도 현지 사람들의 의식 속에는 고구려의 숨결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상고사학회의 박인수씨는 이 문양이 고구려를 상징하는 것으로 하백(河伯)의 후손임을 표시하는 것 이라고
하였다.
긴 설명이 필요없는 말이다. 고구려는 유목민 중에서 가장 먼저 물가에 터전을 잡고 나라를 세웠다.
하백(河伯)은 물의 신(神)으로 유목생활을 하던 고대민족에게는 하느님 같은 존재이다.
그런 뜻에서 우물정(井)은 천상(天上)의 궁궐을 뜻 하기도 한다.
경주에서 발견된 호우(壺玗)의 글을 해석해 보면 " 乙卯年國 岡上廣開 土地好太 王壺玗 十, 을묘년(乙卯年)
국강상(國岡上) 광개토지(廣開土地) 호태왕(好太王) 호우(壺玗) " 가 된다.
즉 ‘고구려 19대 광개토왕이 돌아가신(412년) 3년 후인 을묘년(415) 만주 집안 국강상에 영원히 잠드신
광개토왕을 기념하는 항아리’라는 말이다.(호우총 발굴보고서. 1948년).
맨 끝의 ‘十’ 표는 무덤의 주인이 좋은 곳에 가라는 뜻으로 새긴 문양 으로 사람이 태어난 곳(자궁, 무극의
자리)을 뜻하며 넓게는 우물정(井) 과 같은 의미 이다.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호우 바닥문양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호우
지금까지 본인이 소개했던 몇가지 해석들을 다시한번 소개한다.
임용택
호태왕(好太王)의 성(姓)은 정(井)씨이다.
[井]或曰黃帝所作 ※정(井)자가 들어있으면 황제처소에서 제작한 것으로 되어 있다.
[姓]虞大夫食邑於井. 謂之丘. 後爲氏. ※성씨이다. 우대부식읍지가 정(井)이란 곳이다.
즉 128가호(家戶)가 되는 취락소(丘)의 이름을 후에 정(井)씨 성(姓)으로 호칭하게 되었다.
[黃帝] 古帝名. 姓 公孫. 生於軒轅之丘. 國於有熊. 故亦曰有熊氏.
※황제는 고대의 임금 이름이다. 성은 공손이다. 태어난 곳이 헌원이란 취락소(丘)여서 고대의 원(轅)씨라
고도 하였다. 이 나라에는 곰이 살고 있는 연유로 또한 웅씨라고도 호칭하였다.
[複姓]路史云. 軒轅帝初姓. 公孫.
※두 글자로 된 성이다. 노사(路史) 즉 송(宋)나라 나필(羅泌)이 지은 책에는 헌원제(軒轅帝) 초성(初姓)이
공손(公孫)이라고 하였다.
※ 앞의 글을 체계화하면 황제(黃帝)의 성은 공손 원 웅씨라고 되어 있다.
이 황제소작(黃帝所作)이란 징표가 정(井)자라고 하였고 우대부식읍지가 정(井)인데 이 128가호가 사는
구(丘)부락의 이름인 정(井)이 후에는 성(姓)으로 호칭하게 되었다.
중국길림성 환인지방에서 정(井)자가 음각된 토기병이 나왔고 우리나라의 김해(金海) 예안리에서도 토기인
고기대배의 외부측면에 정자가 새겨진 토기가 출토되었으며 풍납토성에서도 정자명이 있는 토기병이 발굴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보다 결정적인 증거를 들면 생전에는 영락태왕이고 사후에는 위대한 왕 즉 호태왕의 위패를
씻는 욕기인 청동기 외부 저면의 관(款)자 위에도 우물정(井)자의 마크인 징표가 확실하게 색인되어 있다는
사실을 보아 북부여의 17세손인 호태왕은 성이 정(井)씨이고 이 정씨의 궁부(宮府)에서 제작한 기물(器物)
이기에 정(井)자의 징표가 각인되어 있다고 보는 바이다.
헌원(軒轅)은 지명(地名)인데 지금의 하남성(河南省)이다.
진치신정현(秦置新鄭縣)이고 명청속(明淸屬) 하남개봉부(河南開封府)로 되어 있다.
※상시대(商時代)의 유물(遺物)이 많이(多量) 출토(出土)된 곳(處所)이다.
풍납토성은 낙랑군에 무너지다
'井'字가 들어 있으면 황제궁부(黃帝宮府)에서 제작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우대부(虞大夫)의 성(姓)을 후에는 井씨라고 호칭하였다고 되어 있다. 虞씨 성을 가진 황제(黃帝)가
태어난 곳은 헌원지구(軒轅之丘)여서 고대에 원(轅)씨 또는 헌원(軒轅)씨 등으로 호칭하였다.
중국문헌에 의하면 황제(黃帝)는 지금부터 4256년전경의 현재의 하남성(河南省) 개봉부(開封府) 지역의
요왕(堯王) 이전의 군주(君主)이고 우(虞)씨 성인 순왕(舜王)의 선조(先祖)로 되어 있다.
이 우황제(虞黃帝)의 성씨가 변하여 井씨가 되었다는 역사적인 기록이다.
우씨황제(虞氏黃帝) 궁부(宮府)의 표징(標徵)이 들어있는 토기(土器)가 한반도의 풍납토성, 김해, 길림(吉林)
지방에서 출토되었다는 사실은 이런 토기들이나 청동기등을 제작한 사람들은 모두가 중국황제(中國黃帝)
우씨(虞氏)의 후예들이라고 여겨진다.
그렇다면 호태왕(영락태왕)계의 우왕종족(虞王種族)이 한반도로 진입하기전에 기자계(箕子系)의 우왕종족이
먼저 한반도를 점거하였다는 사실이 되고 풍납토성은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王)인 기준(箕準)이 통치한 마한
(馬韓)의 것이고 이 풍납토성을 기원전후에 점령할 수 있었던 나라는 한사군(漢四郡)의 하나인 낙랑(樂浪)
밖에 없었다고 생각한다.
광개토지호태왕의 성이 정(井)씨라는 근거
[井]혹왈황제소작(或曰黃帝所作).
*황제(黃帝BC2697-2597)는 헌원(軒轅)이란 구(丘)취락지(聚落地)에 살았다.
``재금하남신정현(在今河南新鄭縣)`` 그래서 헌원씨(軒轅氏)라고도 하였고 궁궐(宮闕)에서 쓰는 기물(器物),
의복, 화폐 등도 만들었다고 되어 있다.
그러므로 정(井)자 표시(標示)가 있으면 황제소작이니까 궁궐용 기물이 되는 바이고 또한 정자(井字)는
황제의 이칭(異稱) 성씨(姓氏)도 된다는 뜻이다.
정(井)자는 성(姓)이다. 우대부식읍어정(虞大夫食邑於井), 후위씨(後爲氏).
*우대부 즉 순임금의 부임지가 정(井)이란 취락지(聚落地)이고 이 취락지의 정(井)이란 이름이 후에는 성씨
(姓氏)가 되었다.
그러므로 이리치나 저리치나 정자(井字)가 들어있으면 정자(井字)는 황제의 성씨가 되는 바이고 정자(井字)
표시가 되어있는 기물은 궁궐에서 제작한 궁궐용기물이 되므로 이 정자(井字)가 새겨진 기물이 사용된 국강
상광개토지호태왕의 성은 정씨(井氏)가 된다는 결론이다. 사원(辭源)에 의함.
*정(井)자 마크*
김해(金海) 예안리에서는 정(井)자명의 고배(高杯)가 한무제(漢武帝 BC140-87) 시대에 사용된 오수(五銖)
동전과 함께 출토되었다.
이 말은 광개토지호태왕 즉 영락태왕시대 이전부터 정(井)자마크가 이미 있었다는 뜻이고
뿐만 아니라 순임금시대(BC2357-2254)에 순임금의 성씨(姓氏)였고 황제헌원씨(黃帝軒轅氏 BC2697-2597)
시대 궁궐에서 궁실용으로 만든 기물(器物)등의 표시(標示)로 사용된 마크가 정(井)자로 되어 있다는 사실
(史實)이다.
노중평
광개토대왕비와 경주 호우총 출토 청동 호우, 중원 누암리 출토 제기(祭器) 등 각종 고구려 유물에서는
정(井)자를 새긴유물이 발견 됩니다. 우물 정(井)은 사람이 태어난 곳, 북두칠성을 가리킵니다.
" 북두칠성은 배달국과 단군조선시대, 그리고 고구려, 신라, 백제, 가야는 물론 고려와 조선의 별이었다.
고조선 시대에 만든 고인돌의 뚜껑돌 위에 이미 북두칠성이 새겨져 있었다.
특히 고구려 왕릉의 천장 벽화에서는 북두칠성의 형상이 다량으로 발견된다.
그리고 광개토대왕비 상단 경주 호우총 출토 청동 호우, 중원 누암리 출토 제기(祭器) 등 각종 고구려 유물
에서는 정(井)자도 함께 발견된다.
소설가 최인호씨가 96. 8 SBS가 방영한 「왕도의 비밀」에서 고구려의 상징 문양으로 제기한 우물 정(井)
자는 북두칠성이 있는 곳을 나타내는 것이다.
최인호씨는 이 井자를 백두산 천지일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는데, 이것은 井을 땅에 적용시킬 때는 맞을
것이나 하늘에 적용시키면 북두칠성이 있는 곳을 가리킨다.
광개토대왕을 비롯한 고구려인들은 스스로를 하늘 북두칠성의 자손 즉 천손민족으로 적고 있다.
고려시대 고분에도 북두칠성이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우리는 제 5부 예언편 격암유록과 토정비결에서 말세 도탄의 위기에서 사는 방법으로 한결같이 석정 水(石井:
돌우물 물) 또는 석정곤(石井崑)이 거론된 것을 알았었다.
이 석정수는 바로 북두칠성의 정기가 고인 우물이다.
석정곤의 곤(崑)은 곤륜산의 약자다.
옛날 사람들은 북두칠성이 상조금궐 하부곤륜(上照金闕 下覆崑崙: 칠성경)이라고 하며, 위로는 금궐(호천
금궐: 옥황상제가 계시는 곳)을 비추고 아래로는 땅의 중심인 곤륜산을 비추는 곳에 있다고 하였다.
이 곤륜산은 북두칠성의 정기가 비추어지는 지구 모든 산의 조종(祖宗: 아버지격)이다.
명나라 사람 주장춘은 곤륜산의 제4지맥의 왕기(旺氣)가 백두산 지맥을 통해 금강산으로 들어가 증산(甑山)이
모악산 아래에서 출현한다고 하였다.
/ 칠성신앙 (참고: 노중평저 「유적에 나타난 북두칠성」) "
최인호 (소설가) : 백두산 천지일 가능성 (1996. 8 . SBS방송 「왕도의 비밀」)
(朴民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