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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누가복음3장18~38절
제목 : 예수, 하나님의 아들
세례요한은 자기자신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생각할 때에
나는 그리스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그 선지자도 아니고,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요1:23)고 자기 자신의 위치을 분명히 밝힙니다.
그리고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라고 말씀합니다.
세례 요한은 겸손하였습니다.
또 오시는 이는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고 전합니다.
[알곡과 쭉정이는 무엇이 어떻게 다른 것일까요?]
첫째로, 속을 보면 다릅니다
둘째로, 날려 보면 다릅니다
셋째로, 심어 보면 다릅니다
우리는 알곡 성도가 되어야 하는데, 알곡 성도가 되려면
1. 속사람이 강건한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2. 겸손한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3. 종자를 남기는 성도가 되어야 합나다.
4. 고난 중에 빛나는 성도여야 합니다.
바람이 불면 알곡은 안으로 더욱 파고들지만 쭉정이는 날아가 버립니다.
그처럼 문제가 있을 때 더욱 예배에 힘쓰고, 더욱 기도하고,
더욱 헌신하는 성도가 알곡 성도입니다.
교회도 약해질 때 더욱 교회를 위해 헌신하는 성도가 알곡 성도입니다.
오늘 본문은 주의 길을 예비하던 요한은 옥에 갇히고,
예수님은 세례로 공생애를 시작하십니다.
하늘의 소리와 족보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만민의 구주임을 보여줍니다.
1. 옥에 갇힌 요한(18~20절)
본문 말씀은 헤롯의 악행과 세례요한의 투옥과,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심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의 메시지는 신랄한 경고와 책망이었음과 아울러 '좋은 소식'이었습니다.
18절 “또 그밖에 여러 가지로 권하여 백성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였으나”
타작마당의 심판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명확한 방법을 제시하는 것은
'좋은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례 요한은 메시야를 통한 절대적 구원의 길을 제시하고,
자신의 사역을 마감하게 됩니다.
1) 헤롯은 악행을 행하였습니다(19절)
“[19]분봉 왕 헤롯은 그의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과 또 자기가 행한 모든 악한 일로 말미암아 요한에게 책망을 받고”
여기 헤롯은 헤롯 안디바스(Herod Antipas)입니다.
헤롯은 A.D. 26년경 그의 첫번째 부인인 아라비아 왕 아레타스(Aretas)의 딸을 버리고 그의 조카이자 동생 빌립의 아내인 헤로디아와 결혼했습니다. 이것은 유대적 전통으로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패륜(悖倫)이었습니다.
레 18:16;20:21“[16]너는 네 형제의 아내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 이는 네 형제의 하체니라 [21]누구든지 그의 형제의 아내를 데리고 살면 더러운 일이라 그가 그의 형제의 하체를 범함이니 그들에게 자식이 없으리라”
또한 헤롯의 난잡한 생활과 악행은 유대 백성들에게 적지 않은 지탄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2) 요한의 책망과 체포(20절)
“[20]그 위에 한 가지 악을 더하여 요한을 옥에 가두니라”
요한은 백성에게는 '권하여' 말씀을 전하였지만,
헤롯에게는 '책망'을 했습니다.
요한의 책망은 헤롯의 무분별한 삶을 청산하고,
하나님 앞에 회개할 것을 촉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요한의 헤롯에 대한 공공연한 책망은 많은 백성들의 공감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의 불만과 요한의 직선적인 공격은 헤롯의 권력 구조에 위기감을 조성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헤롯은 자신에 대한 반감 분위기의 진원지(震源地)라고 생각한
세례 요한을 체포하게 됩니다.
이로써 헤롯의 악행은 절정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은 자신의 죄악을 뉘우칠 줄 모르고,
더욱 큰 죄악으로 빠져들어 갔던 헤롯의 타락된 심성을 잘 표현해주는 말입니다.
세례 요한의 활동이 백성들 가운데서 계속되는 한 자신의 행동에 여러가지 제약이 따를 것이고 나아가 자신의 권위마저 땅에 떨어질 것을 염려한 헤롯은 악한 권력자의 전형적인 모습을 드러냅니다.
세례 요한은 헤롯의 탄압으로 옥에 갇히게 되고,
결국에는 해로디아의 농간에 의해 참수형을 당하게 됨으로써,
헤롯 정권의 윤리적, 도덕적 상황은 참담할 지경에 이릅니다.
누가는 본서에서 요한을 체포한 죄를 헤롯이 저지른 악행 중에서 가장 악한 죄였다고 기록하였습니다.
그것은 헤롯이 그리스도의 선구자인 요한에게 손을 대어
그의 복음 전파를 침묵시켰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도 불의한 자들은
그들의 잘못을 말하는 자들을 제거하기 위해 발버둥 칩니다.
한편 요한의 죽음에 관해서는 9:7-9과 막 6:17-29이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2.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21~22절)
“[21]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22]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12살 때 예루살렘에 와서 랍비들과 변론한 후 고향 나사렛으로 돌아가 성장 기간을 보내셨으며(2:52),
그 후 착실히 성장하여 마침내 공생에의 시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기 위하여 세례 요한을 찾아 오셨을 때에,
세례요한은 사양하였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이 물러가고 예수님께서 나타나야 할 시기가 된 것입니다.
그는 결국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그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것은 깊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자 하신 것은
① 그의 무한하신 겸비입니다.
② 모든 사람과의 교분을 가지시기 위한 것입니다.
③ 모든 의를 행하시는 중보자로서 취하신 행동이십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지만 죄인은 아닙니다(히 4:15).
*히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따라서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심은 회개 할 것이 있는 죄인이어서가 아닙니다. 다만 예수님은 자신이 구원할 사람들과 스스로를 동일시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마3:15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세례를 받으므로 '모든 의(義)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다'고 하며 세례를 받는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한편 마샬(marshall)은 '백성들이 다 세례를 받을 새'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요한의 활동이 절정에 달한 것을 나타낸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세례가 요한의 사역의 정점에 위치하였다는 뜻입니다.
누가는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나서 기도를 했다고 언급합니다.
이는 누가복음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첫 번째 기도모습입니다.
(눅6:12;9:18,29;22:41).
예수님은 일생 동안 기도의 삶을 사셨습니다.
그의 혼신을 다하는 기도는 하늘을 열리게 합니다.
*막1:10“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늘이 열렸다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이제 곧 계시나 말씀을 주시려고 한다는 상황적 암시를 나타내며, -하나님께서 오랜 침묵의 기간을 깨시고 다시금 그의 능력과 권위를 행사하시기 시작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아울러 이는 예수님께서 본래 하늘에 계시던 분이며(요 3:13),
하나님과 하나이심을 암시합니다.
*요3:13“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구약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시기 위하여,
여러가지 모습으로 현현(顯現)하시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출 24:10, 11;33:11;신 5:4).
그러나 이곳에서는 성령이 비둘기 같이 강림했다고 전합니다.
누가는 성령이 임할 때 오직 예수님만이 그것을 의식했고 그곳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의식하지 못하였다는 식의 별다른 보도를 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아마도 그곳에 있었던 다른 사람들은 성령 강림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 채 비둘기 같은 형체가 내려오는 것만을 보았을 것입니다.
한편 '비둘기'가 의미하는 바에 대해서는 학자 간에 다양한 견해가 있으나 온유하고 평화스런 속성을 나타낸다고 봄이 무난할 것입니다.
우리도 성령의 임재를 체험해야 합니다.
-죄를 소멸시키며 성결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사 6:1-7;행 2:3)
-영적인 삶을 충만하게 넘치도록 채우시는 힘이 있습니다.(요 7:37-39)
-신자를 당신의 것으로 소유하셔서 완전하게 영원한 교호(交互)를 약속하심(엡 1:13) -기름 사역을 위해 부여되는 능력(행 10:38)이 있습니다.
한편 이러한 성령 임재는 구약의 예언대로 하나님이 그의 종에게 성령을 부어 주시리라하신 약속(사 42:1)과 성령이 그 새로이 생겨난 가지에 임할 것이란 예언을 성취시키는 것이기도 합니다(사 11:2).
또한 예수님이 하늘나라의 일을 위하여 위임을 받고 그 일을 시작하기 이전의 준비 절차로 왕, 제사장, 선지자로서 기름부음을 받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늘로부터의 음성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독생자이심을 직접적으로 공표하신 말씀입니다.
'사랑하는'을 나타내는 헬라어 '아가페토스'는 예수님이 유일한 아들,
즉 독생자임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성령에 의해서 잉태될 것이라는 천사의 수태고지(受胎告知)에서도(1:32) 예수는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고 언급되어 있습니다.
또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는 말은 하나님과 예수님의 유일무이하고도 특별한 인격적 관계를 나타냅니다.
요컨대, 예수님께서 받으신 것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공동 사역이라 할 수 있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심으로 인간의 구원을 향한 공생애를 시작하고, 성령도 성자가 그 일을 감당하도록 협동하여 힘을 공급해 주시며,
성부도 그 일을 시작한 아들에게 하늘을 열고 땅을 향해 기쁨과 승인의 음성을 발하였던 것입니다.
3. 예수님의 족보(23~31절)
1) 예수님의 공생에 시작한 때(23상반절)
본문은 예수님이 공생애 시작 당시 나이가
“30세 쯤”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3:23상반절입니다.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할 때에 삼심 세쯤 되시니라”
예수님의 나이가 기록되고 있는 유일한 구절입니다.
누가가 공생애 시작 당시 예수님의 나이를 '30세 쯤' 으로 밝힌 것은,
30세라 하는 나이가 제사장들이 그들의 본격적인 임무를 시작하는 시기(민 4:3)인 점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침을 시작하신 때인 30세는
-헬라인 남성이 공직을 시작하는 나이었으며,
-레위인 남성이 성전봉사를 할 수 있는 나이였습니다.
*민4:3 “곧 삼십 세 이상으로 오십 세까지 회막의 일을 하기 위하여 그 역사에 참가할 만한 모든 자를 계수하라 ”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마침내 예수님은 인류와 하나님 사이를 중재하는 영원한 대제사장의 사역을 수행하실 시점에 이르신 것입니다(히 5:10).
*히5:10“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
즉, 예수님은 스스로는 전적으로 무죄(無罪)하신 분으로서,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제물로 삼아 죄악의 장벽을 제거하심으로써 하나님께로 나아갈 새롭고 살 길을 여실(히 10:20) 시점에 이른 것입니다.
*히10:20“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한편 그리고 요셉은 30세에 총리가 되었고(창 41:46)
*창41:46“요셉이 애굽 왕 바로 앞에 설 때에 삼십 세라”
다윗도 30세에 왕위에 올랐습니다(삼하 5:4).
*삼하5:4“다윗이 나이가 삼십 세에 왕위에 올라 사십 년 동안 다스렸으되”
또한 산헤드린의 회원 자격도 30세가 되어야만 주어졌습니다.
따라서 누가는 이러한 여러 배경을 감안하여 예수님의 나이를 밝혔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한 인간으로서의 일반적인 연륜을 감안해볼 때,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또 신앙적으로도 사역을 하기에 충분한 시기에 이르러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생애를 통하여 항상 자신의 '때'를 잘 알았습니다(요 7:6).
*요7:6“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2) 예수님의 족보
3:23하반절~31절은 예수님으로부터 다윗까지의 족보를 말씀합니다.
“[23]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위는 헬리요 [24] 그 위는 맛닷이요 그 위는 레위요 그 위는 멜기요 그 위는 얀나요 그 위는 요셉이요 [25] 그 위는 맛다디아요 그 위는 아모스요 그 위는 나훔이요 그 위는 에슬리요 그 위는 낙개요 [26] 그 위는 마앗이요 그 위는 맛다디아요 그 위는 서머인이요 그 위는 요섹이요 그 위는 요다요 [27] 그 위는 요아난이요 그 위는 레사요 그 위는 스룹바벨이요 그 위는 스알디엘이요 그 위는 네리요 [28] 그 위는 멜기요 그 위는 앗디요 그 위는 고삼이요 그 위는 엘마담이요 그 위는 에르요 [29] 그 위는 예수요 그 위는 엘리에서요 그 위는 요림이요 그 위는 맛닷이요 그 위는 레위요 [30] 그 위는 시므온이요 그 위는 유다요 그 위는 요셉이요 그 위는 요남이요 그 위는 엘리아김이요 [31] 그 위는 멜레아요 그 위는 멘나요 그 위는 맛다다요 그 위는 나단이요 그 위는 다윗이요”
누가는 예수님이 인류의 역사 속에 구체적으로 임하셨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족보를 소개합니다.
마태복음의 족보는 아브라함까지 42명을 언급합니다.
누가복음의 족보는 아담과 그 위의 하나님까지 77명을 언급합니다.
그리스 로마시대의 권력자들은 신화 속 영웅들이 족보상 조상인 듯 꾸몄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족보는 달랐습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며 선조의 이름을 상세히 소개하는 예수님의 족보에는“스룹바벨”이라는 유명인도 있습니다.
스룹바벨은 바벨론에서 귀환한 유대 공동체의 지도자였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한 번만 이름이 언급되는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떤 것을 증명하려고 영웅들의 이름으로 꾸민 족보가 아니라,
각 시대마다 실제로 살았던 평범한 사람들의 족보였습니다.
헬리 - 학자들에 따라 요셉의 의붓 아버지이거나,
마리아의 아버지일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맛닷 - 이는 '선물'이라는 뜻을 담고있습니다.
이 이름은 29절에서 또 나타나고 '맛다다'(31절)와
'맛다디아'(25, 26절)라는 이름과 비슷합니다.
레위 - 이 이름의 어원은 불확실 하나 히브리어 '레위'의 뜻을 따라 일반
적으로 '점착(粘着)하다', '연합하다'등의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 이름은 29절에서 다시 등장합니다.
멜기 -이 이름은 아마도 '말기야'(말키야, '나의 왕은 야웨이시다')의
축소형인 것 같습니다(G.Kuhn). 이 이름은 28절에서 다시 나타난다.
안나 - 이 이름의 뜻은 '조롱하다'입니다. 이 이름은 다른 곳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맛다디-'여호와의 선물'이라는 뜻이며 26절에서 다시 언급된다.
아모스 -이 이름의 인물은 성경 상에서 이사야의 아버지로(왕하 19:2) 혹은 선지자(암 1:1)로서 나타납니다.
이 이름은 '짐지는 자' 또는 '강함'이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나훔 - 예수님의 조상으로서 그리고 선지자로서 성경에서 언급됩니다.
'위로하고 돕는자'라는 뜻입니다.
에슬리 -이 이름은 다른 곳에서는 나타나지 않으며, '나를 가까이 함'이라는 뜻입니다.
낙개 - 대상 3:7에 나오는 '노가'와 비슷합니다. '빛나다'라는 의미입니다.
마앗 - '끊는 것'을 뜻합니다.
대하 29:12;31:13에서 나오는 마핫과 비교됩니다.
서머인 - 히브리어로 '시므이'(출 6:17등)가 됩니다. '몰약성'이라는 뜻입니다.
요섹 - 바벧론 포로 이후의 인물인 듯한데 이곳 외에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요다 - 바벧론 포로기 때의 인물입니다.
요아난 - 히브리어 '요하난'의 헬라어 음역입니다.
요하난이란 이름은
(1) 유다 왕 요시야의 장남(대상 3:15)
(2) 다윗의 여덟번 째 용사(대상 12:8-12)
(3) 느헤미야 당시 도비야의 아들(느 6:14)등에게도 붙여진 바 있습니다.
레사 - '황태자'라는 뜻의 아람어로서
원래 스룹바벧의 칭호로 소개된 말이라고 주장되기도 합니다.
스룹바벧이 유대의 지도자로 바벧론에서 포로들을 인솔해 유대 땅으로 귀환하자 백성들은 그를 유대 왕의 계승자로서 여겼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에게 '황태자'라는 칭호가 주어졌는지도 모른다.
'스룹바벧'과 '스알디엘'은 마태복음 1장의 족보에도 나타납니다(마 1:12). 스룹바벧이 스알디엘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성경의 여러 곳에서 뒷받침됩니다(스 3:2;학 1:1). 그러나 대상 3:19에는 스룹바벧이 브다야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문제는 앞서 설명되었듯이 수혼(嫂婚) 관계에서 해결될 수 있습니다.
대상 3:17, 18를 보면 스알디엘과 브다야는 여고냐의 아들로서 서로가 형제지간이었습니다.
따라서 스알디엘은 스룹바벧의 법적 아버지이며
브다야는 그의 원래 아버지가 되는 것입니다.
스알디엘의 아버지가 여고냐라고 대상 3:17에 기록되어 있는데 반해
본문은 그의 아버지를 네리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 역시 수혼 제도로써 설명되어질 수 있습이다.
즉 여고냐가 아들이 없이 죽자(렘 22:30) 네리의 친아들이 여고냐의 법적 아들이 되었다는 것이다(Machen, Plummer).
멜기 - 스룹바벧의 증조부로서 '왕'이란 뜻입니다.
앗디 - 스룹바벧의 5대조이며 그 이름은 '붙들다'라는 뜻입니다.
고삼 - '나누다'라는 의미입니다.
엘마담 - 창 10:26의 '알모닷'이라는 이름과 비교됩니다.
바벧론 포로 이전의 사람이며 그 이름은 '광대'라는 의미입니다.
에르 - 이 이름의 인물은 구약성경에 두 명 등장합니다.
한 명은 가나안 여인에게서 난 유다의 장자이며(민 26:19)
다른 하나는 겔라의 자손입니다(대상 4:21).
예수(Jesus) - 구약의 '여호수아'(수 1:1)와 같은 이름입니다.
유대 사회에서는 보편적인 이름으로 '여호와의 구원' 혹은 '구세주'라는 뜻입니다(마 1:21).
엘리에서 -이 이름은 '엘리에셀'을 달리 번역한 것입니다.
이는 창 15:2;출 18:4에 나타난 이름과 같은 이름으로
'하나님은 구원자이시다'라는 뜻입니다.
요림 - '여호와의 칭찬'을 뜻합니다.
유다 - 역시 이스라엘에서는 보편적인 이름입니다.
본문의 인물은 바벧론 포로 이전의 사람입니다.
요남 - 다윗 이래 약 200년 후의 인물로 추정됩니다.
엘리아김 - 왕하 18:18에 나타난 것과 같은 이름입니다.
이 사람은 바벧론 포로 이후의 사람으로 추정됩니다.
멜레아 - 이 이름은 다른 곳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 이름의 주인공은 다윗의 고손(高孫)이며 이름의 뜻은 '충만'입니다.멘나 - 이 이름 역시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습니다.
이는 다윗의 증손이며, 이름의 뜻은 '큰 고통'입니다.
나단 - 다윗의 셋째 아들로 예루샬렘에서 출생했습니다
(삼하 5:14;대상 3:5;14:4).
이 이름은 '양심' 또는 '주는 자'라는 뜻이다.
다윗 -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유다 지파이며 이새의 막내 아들입니다.
이스라엘의 세 임금이며 지혜와 용맹과 많은 시편의 저작들로 유명합니다(삼상 16장-왕상 2장). 이름의 뜻은 '사랑함'입니다.
예수님의 겸손을 본받고, 예수님처럼 때를 알아
우리의 사명을 감당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실존했던 누군가의 후손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인간의 역사 속으로 찾아오셨습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누군가의 삶 속으로 개입하십니다.
그리고 성도 역시 복음을 들고 누군가의 삶 속으로 찾아갑니다.
4. 하나님의 새로운 가족(32~38절)
3:32~38절 “[32] 그 위는 이새요 그 위는 오벳이요 그 위는 보아스요 그 위는 살몬이요 그 위는 나손이요 [33] 그 위는 아미나답이요 그 위는 아니요 그 위는 헤스론이요 그 위는 베레스요 그 위는 유다요 [34] 그 위는 야곱이요 그 위는 이삭이요 그 위는 아브라함이요 그 위는 데라요 그 위는 나홀이요 [35] 그 위는 스룩이요 그 위는 르우요 그 위는 벨렉이요 그 위는 헤버요 그 이상은 살라요 [36] 그 위는 가이난이요 그 위는 아박삿이요 그 위는 셈이요 그 위는 노아요 그 위는 레멕이요 [37] 그 위는 므두셀라요 그 위는 에녹이요 그 위는 야렛이요 그 위는 마할랄렐이요 그 위는 가이난이요[38] 그 위는 에노스요 그 위는 셋이요 그 위는 아담이요 그 위는 하나님이시니라”
이새 - 다윗에서 아브라함에 이르는 족보는 마 1:2-6에 나오는 족보와 거의 같습니다.
이새는 베들레헴 에브랏 출신으로 다윗왕의 아버지입니다(삼상 17:12).
사 11:1은 '이새의 줄기'에서 메시야가 출현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오벱 - 보아스와 룻의 아들입니다(룻 4:17, 21, 22;마 1:5).
룻은 이방 여인으로서(룻 1:4)
다윗과 예수를 잇는 가계(家系)의 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보아스 - 룻의 남편이며 살몬의 아들입니다.
그는 또한 베들레헴의 큰 부호였습니다.
보아스는 룻이 모압땅에서 시모 나오미와 함께 돌아왔을 때 그녀를 다방면에서 돕고 그녀의 효성에 탄복하며 그녀와 결혼하게 되기까지 이릅니다(룻기)
살몬 - '그늘'이란 뜻.
가나안 땅 여리고 성의 기생이었던 라합의 남편이다(마 1:5비교).
나손 - '점쟁이'란 뜻. 보아스의 조부입니다(룻 4:20). 마 1:4과 비교.
아미나답 - 유대 헤스론 계통인 '람'의 아들입니다(룻 4:19;대상 2:10).
그리고 아론의 아내 엘리세바의 부친이기도 합니다(출 6:23).
이 이름의 뜻은 '나의 친척은 고귀하시다'입니다.
아니 - '높은 땅'이란 뜻. 룻 4:19과 대상 2:9에 히브리 이름 '람'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헤스론 - '닫힌'이란 뜻. 유다의 손자로 창 46:12;민 26:21;룻 4:18;대상 2:5;마 1 :3 등에서 언급됩니다.
베레스 - '파괴'란 뜻. 유다와 유다의 며느리 다말 사이에 태어난 쌍동이의 형입니다(창 38:24-30;46:12).
베레스에게서 두 종족이 생겼습니다(민 26:20, 21;대상 2:4, 5).
유다 -'찬송'이란 뜻. 야곱의 넷째 아들로 레아의 소생입니다(창 29:35;마 1:2).
그는 밧단아람에서 출생했으며 그의 며느리 다말을 통하여 쌍동이 베레스와 세라 두 아들을 얻었습니다.
야곱 - '발 뒤꿈치를 잡다'란 뜻. 이삭과 리브가 사이에 태어난 쌍동이의 동생입니다(창 25: 21-26).
그는 형 에서에게서 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권을 사고,
그의 아버지 이삭을 속여 장자에 대한 축복을 가로챘습니다.
야곱은 하단의 외삼촌댁 라반의 집으로 피하여 레아와 라헬과 결혼하고,
그 두 부인과 부인들의 하녀 빌하와 실바를 통하여 12아들을 얻었으며 이 아들들을 통해 이스라엘 12지파가 형성되었습니다(창 29장).
야곱은 애굽 근교 고센 땅에서 살다가 147세의 나이로 일생을 마쳤습니다.
이삭 - '웃음'이란 뜻.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낳은 아들입니다.
그는 브엘세바에서 태어났으며 그때 그의 아버지가 100세, 어머니는 90세였습니다(창 17:17;21:2, 3, 5).
이삭은 어렸을 때 아브라함에 의하여 하나님께대한 믿음의 증거로 제물로 바쳐지기도 했습니다(창 22:1-18).
그는 아버지 아브라함의 동생 나홀의 아들 브두엘의 소생 리브가와 결혼하며 쌍동이 아들 에서와 야곱을 낳았습니다.
그는 노후에 기럇아르바 마므레에서 살다가 180세에 죽었습니다(창 35:27, 28).
아브라함 - '열국의 아버지'란 뜻. 데라가 70세에 낳은 아들이며
나홀과 하란의 형입니다.
갈대아 우르 출신이었으며 이복 누이 사라와 결혼하였습니다.
그는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자신이 살던 땅과 집을 버리고 가족을 이끌고 하나님이 지시하는 땅으로 떠났습니다.
또한 그는 하나님과의 약속의 표시로 할례를 행하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아들 이삭을 100세에 얻었습니다.
그의 신실한 삶은 성경에서 믿음의 표상(表象)이 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175세에 죽어 막벧라 굴에 장사되었습니다(창 25:1-9).
데라 - '표백'이란 뜻. 아브라함과 나홀과 하란의 아버지입니다.
그는 다른 신들을 섬기며 우상을 만들어 파는 장사를 했다고 하며(수 24:2), 갈대아 우르에서 살다가 하단으로 이사가서 205세에 죽었습니다(창 11:24-32).
나홀 - 아브라함의 조부입니다.
스룩 - 아브라함의 증조부이며(창 11:20-23;대상 1:26)
이 이름은 '활'이라는 뜻입니다.
르우 - '친구'란 뜻. 셈의 6대손입니다(창 11:19).
벧렉 - 셈의 자손 에벧의 아들입니다(창 10:25-29;11:16).
'나뉘다'는 뜻의 이름은 그가 태어날 즈음 세상 사람들이 나뉘어졌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정확히 어떠한 사건이 일어났는지는 모르겠으나 종교적 정화 운동 혹은 바벧탑 사건이 일어났다고 짐작하는 견해가 있습니다.
헤버 - '과거'라는 뜻. '헤벧' 또는 '에벧'을 달리 번역한 것입니다.
그는 노아의 6대손입니다.
살라 - '보내다'는 뜻. 노아의 고손이며 창 10:24;11:13;대상 1:18, 24에는 '셀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이난 - '철공'이란 뜻. 셈의 손자이나 창 10장에는 언급되지 않습니다.
아박삿 - 셈의 셋째 아들 '아르박삿'을 가리킵니다(창 10:22, 24;대상 1:17, 18), 그는 노아의 홍수 이후에 출생했으며 35세에 셀라를 낳았고 그후 403년을 더 살다가 438세에 사망했습니다(창 11:10-13).
셈 - 노아가 500세에 낳은 아들로 3형제 중 맏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대홍수 심판을 피해 아내와 같이 방주에 들어가 구원을 받았습니다(창 7:7;벧전 3:20).
또한 그는 술 취한 아버지의 실수를 조심성있게 덮어주어 축복을 받기도 했습니다(창 9:20-27).
또한 그는 셈족의 조상입니다. 그의 이름은 '이름'또는'명성'이라는 뜻입니다.
노아 - 아담의 10대 손입니다.
이 이름이 붙여진 연유에 대해 창 5:29은 "이름을 노아라 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고 설명합니다.
그는 의인이어서 하나님과 동행하였습니다(창 6:9).
그리고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하나님이 물로 세상을 심판하실 것을 백성들에게 전파하며 그 심판을 피할 방주를 건축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오직 그의 가족과 동물 암수 한 쌍씩만이 구원받았습니다.
노아가 대홍수를 만났을 때가 600세였으며,
그는 홍수 후 350년을 더 살다가 950세에 죽었습니다(창 9:28).
레멕 - 구약성경에 '라멕'으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그는 182세에 아들 노아를 낳았다.
그는 노아를 낳은 후 595년을 더 살며 자녀를 낳고 777세에 사망했습니다(창 5:25, 28-31;대상 1:3).
므두셀라 - 셋의 후손 에녹의 아들입니다(창 5:21-27).
그는 969세까지 산 것으로 기록되 성경상에서 그리고 인류 역사상 최장수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대확장' 또는 '창을 던지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에녹 - 아담의 7대 손이며 야렛이 162세에 낳은 아들입니다.
그는 65세에 인류 역사상 최장수자(最長壽者) 므두셀라를 낳으며
그후 하나님과 동행하며 365세를 향수하며 자녀를 낳았습니다.
성경은 그가 하나님과 동행했으며 하나님이 그를 데려갔으므로 죽음을
맛보지 않았다고 전합니다(창 5:18-24;히 11:5;유 1:14).
그의 이름은 '교수' 또는 '시작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야렛 - 에녹의 부친으로 마할랄렐이 65세에 낳은 아들입니다(창 5:15-20;대상 1:2).
그는 므두셀라 다음가는 자로(962세) 알려져 있습니다.
마할랄렐 - 아담의 5대손이며 셋 계통의 한 조상입니다.
그의 이름은 '하나님의 찬양'이라는 뜻입니다.
에노스 - 아담의 손자입니다.
셋은 109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에노스는 90세에 게난을 낳았으며 905세를 향수했다. 가인의 시대가 폭행으로 표현된 반면 에노스의 시대는 경건으로 표현되었다.
셋 - 아담의 셋째 아들로 맏아들 가인이 죽인 둘째 아들 아벧 대신에 하나님께서 주신 아들입니다(창 4:25).
그는 아담이 130세 때 태어났습니다.
셋은 105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912세에 죽었습니다(창 5:3-8).
그의 이름은 '대신 주다'라는 뜻이다.
아담 -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인류 최초의 인간입니다.
그는 타락하기 전까지 하나님이 그의 갈비뼈로 만드신 아내 하와와 낙원 에덴 동산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범죄 함으로 에덴동산을 잃어버리고 노동의 수고로움과 해산의 고통을 맛보며 결국은 흙으로 돌아가는 대가를 치르게 되었습니다.
그는 세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 가인은 동생 아벧을 죽이는 최초의 살인자가 됩니다.
아담은 막내 '셋'을 130세에 낳고 그후 800년을 더 살다가 930세에 죽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사람' 또는 '붉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 - 하나님을 아담의 아버지라 기록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담을 직접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에서 제시된 족보에서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예수가 아담의 아들로서 인류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강조해 주는 점일 것입니다.
따라서 누가는 불순종한 첫째 아담과 대조하여 비록 암시적인 주제이기는 하지만 예수를 하나님께 순종했던 둘째 아담으로 묘사해 줍니다(고전 15:47).
이와 같이 누가는 예수의 족보를 하나님에게까지 연결시킴으로써,
예수께서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무리는 선지자의 날카로운 지적이 불편했지만 달게 받고 회개했지만,
헤롯은 불쾌히 여기며 요한을 투옥합니다.
악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꺼지지 않는 불’로 치달은 것입니다.
죄를 품고 사는 사람에게 회개의 복음만큼 불편하고 불쾌한 소식은 없습니다. 나에게 복음은 ‘좋은 소식’이 되어야 합니다.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 새 예수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21절).
세례는 누가 받습니까? 죄인들이 받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죄가 없는 분인데 왜 세례를 받으신 것입니까?
예수님은 모든 죄인들을 대표하여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세례를 받으실 때 기도하셨습니다.
즉, 하나님과 아들과 교제를 하신 것입니다. 그 때 하늘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22절).
성령이 예수님에게 충만하게 임하셨습니다.
즉, 예수님에게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직접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즉, 하나님 되심을 증거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을 대표하여 세례를 받으시고, 그 분에게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있고, 그 분이 하나님 되심을 하나님이 증거 하셨습니다.
이로써 하나님은 예수님의 구원의 거룩한 사역이 시작되었을 온 세상에 선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자이시며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분만을 바라보며 그분만을 의지하며 사시는 복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우리가 누릴 생명과 행복과 풍성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생명이시며 우리의 풍성함이십니다.
예수님 외에 다른 사람이나 다른 것을 바라보면 생명도 없고 부유함도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외 아들로서 그 어떤 세상 권력보다 크신 권력자셨지만 그것을 누리지 않고, 죽기 까지 하나님께 순종하였습니다.
성도는 이런 예수님을 본받아 살아야 합니다.
족보를 보면 바벨탑의 후예들, 우상 숭배자들, 인류를 타락의 구렁텅이에 빠뜨린 사람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특별히 지명해 은혜를 베푸신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도 나옵니다.
하나님은 죄와 사망을 낳을 수밖에 없는 아담의 후예를 구원하기 위해,
시대마다 은혜로 사람을 택하셨고, 백성을 구원하겠다고 언약하셨습니다.
그 언약대로 예수님이 오시자 죄인의 족보가 메시아의 족보로 변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을 믿어 거듭난 사람은 아담의 후손이 아니라
하나님께 입양된 자녀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먼저 하나님의 가족이 된 우리를 통해,
인류가 하나님의 새로운 가족으로 편입되길 원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