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인의 소확행과 문학적 형상화
강 돈 묵
과학과 산업의 발달은 현대인의 삶을 획기적으로 변화시켰다. 같은 세상을 바라보고, 같은 시대를 숨 쉬고 있어도 변화를 수용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사이에는 극명한 차이가 있다. 이들 사이에는 대화마저 원활하지 않아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처럼 괴리감이 느껴질 때가 많다.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에도 차이가 있지만, 그보다도 그들이 소통에 사용하는 기기 자체가 완전 다르다. 한쪽에서는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기기를 다른 한쪽에서는 무서워서 손도 차마 대지 못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변화의 축에 선 사람은 시간이 흐를수록 속도감을 가지고 달려가는데, 뒤에 처진 사람은 따라가려 하기보다는 포기의 늪에 빠지고 만다. 어쩔 수 없이 다른 삶을 살기를 강요당하는 꼴이 된다. 그러면 앞선 사람은 행복하고 뒤에 처진 사람은 불행한 것일까. 이 문제에 있어서는 그렇다고 속단하기에는 많은 문제점이 있다.
변화하는 삶은 끝없이 속도를 요구하고, 성취에 대한 기대감으로 긴장되어 있다. 이 긴장은 한시의 여유도 없이 달리기만을 주문한다. 거기에 기대감은 시간이 흐를수록 커지기 마련이어서 결국은 자기 자신을 스스로 노예로 전락시키기도 한다. 남보다 더 빨리 달리고, 남보다 더 높이 올라 소유하겠다는 욕망은 끝 모르게 치솟는다. 인간의 욕망이 얼마나 다급한지 융프라우 산악열차를 보면 알 수 있다. 다른 사람보다 더 높이 수월하게 알프스를 오르겠다는 욕망은 철로에 톱니바퀴를 부착했다. 톱니와 톱니가 맞물려 돌아가는 세상. 마음대로 옆을 바라보거나 잠시 쉼을 가질 수도 없는 톱니. 오로지 다가오는 톱니를 놓치지 않으려 전념하다 보니, 개인적 삶은 찾아볼 수 없고 돌아가는 세상에 떠밀려 이동한다. 이렇게 살아가는 게 현대인이다.
급기야 빠른 속도와 과도한 기대감에 지친 현대인은 스스로 자신 안에서 행복을 찾아 나서는 데에 눈을 뜬다. 변화의 앞에 서서 누리던 물질의 소유보다 비록 작고 보잘것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경험과 감정의 질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다른 사람의 이목에 관심을 두고 밖으로 드러나는 자신의 모습을 가늠하며, 소비를 통한 짧은 만족을 추구하던 삶이 일상 속에서 찾은 소박한 즐거움에 오래 머물러 있기를 갈망하게 된 것이다.
이웃을 의식하고 서로의 소비를 견주며 받아야 했던 스트레스에서 벗어나 자신이 소유한 작은 일상에서 진정한 기쁨과 즐거움을 찾아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게 훨씬 지혜롭다는 걸 깨닫기 시작했다. 너무 큰 것의 노예가 되지 않고, 자신의 안에 있는 작은 것에서 행복을 찾는 삶에 눈뜬 현대인은 자연스럽게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에 관심을 두게 된다. 모든 것이 자신 안에서 소유한 것으로 시작하는 삶이다 보니 매우 편안하다. 자신 안의 작은 행복, 그리고 내가 마음껏 추구할 수 있는 행복, 이제 톱니바퀴 궤도에서 이탈하여 철저히 자신의 길을 걸으며 소확행을 꿈꾼다. 사람들의 굴레에서 빠져나와 나만의 길을 내가 선택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다.
지금까지 질주하던 궤도에서 빠져나오니 세상 살 만하다. 그동안 마음은 있었으나 하지 못하였던 일에도 과감하다. 나의 창의력으로 열어가는 삶이 즐거움으로 가득하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니 호기심도 발동한다. 지금까지 엄두도 못 내었던 일에 관심을 모아본다. 문득 새로운 시도가 자신의 또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희망을 품게 한다. 뭔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기대감이 또 다른 일을 모색하게 하고, 스스로 달라진 자신의 모습에 감동한다.
이번 계간 현대수필(2024. 여름. 통권 130호)에는 현대인들의 소확행이 문학적으로 형상화에 성공한 작품이 다수 보인다. 그중에서 김재숙의 <제주살이>와 김진진의 <내 마음의 조율사>, 그리고 최영애의 <버튼을 누르다>를 살펴보기로 한다.
김재숙의 <제주살이>--나사 빠진 삶
질주하는 대열에서 이탈하고 보면 세상이 새롭게 다가온다. 커피 한 잔 마시는 여유와 책 읽는 조용한 시간, 심지어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볼 수 있음이 행복으로 다가온다. 모두가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다. 주말을 맞아 정원의 꽃을 살펴보는 것도, 지금까지 해 보지 못한 요리를 만들어 보는 것도, 가족들과 모여앉아 하루의 일과를 이야기하는 것도 그들에게는 새로운 행복이다.
김재숙의 <제주살이>는 현직에서 물러 나와 한 달 정도 ‘제주살이’를 떠난 이야기다. 현장에서 바삐 돌아가는 업무에 지치고 사람에 치이었던 삶들을 모두 내려놓는 현실에서의 이탈이다. 온전한 모습으로의 삶이 아니라 나사 한둘이 빠진 것처럼 홀가분하게 떠난 제주살이다.
지금 제주가 아닌 자택에 머물러 있었다면 분명 눈에 잡히는 현실의 경제 활동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게 분명하다. 빠르게 움직이는 대열을 지켜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동참하고야 마는 모습을 발견할 것이 뻔하다. 모두 내려놓고 떠났기에 소확행을 즐길 수 있다. 이런 경우 행복의 극대화는 현실에 묶여서 시도하지 못했던 그동안의 일들을 과감히 실행에 옮길 수 있음이다. 진정한 행복은 삶의 굴레에서 짊어졌던 짐을 고스란히 내려놓고, 장애 없이 마음대로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작가는 그동안 쓰고 싶었던 글을 편안히 쓸 수 있기를 갈망해 왔다. 하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이제 마음의 평화와 행복을 누릴 수 있다. 일상에 만족하고 즐거움을 찾더라도 자기 스스로 자신의 행동을 선택하고 결정한다는 게 더없는 행복이다.
부부는 나름대로 ‘따로 또 같이’ 서로의 욕망에 충실하다. 작가는 실생활에서 매번 우선순위로 밀렸던 일을 맨 앞으로 내세운다. 매일 글 쓰는 일에 몰두한다. 남편은 걷기의 모든 것을 주관하며 의욕적으로 조사하고 연구한다. 매일 창의력으로 가득 찬 삶을 꾸리고, 호기심 속에서 하루를 열고, 새로운 관심사를 찾아 나선다. 비록 크지는 않지만, 자기 스스로 개발하고 자아실현에 만족해한다는 건 실로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 아닐 수 없다.
‘매일 쓰기’, 그렇다. 제주살이 동안 나는 저녁이면 컴퓨터 앞에 앉아 그날의 단상을 글로 써서 블로그에 올렸다. 글을 올리는 일이 신이 나기도 했지만 매일 쓴다는 건 부담이기도 했다 어떤 날은 올리기에 급급해 내 글이 너무 개인적이지 않을까 하는 회의가 들어, 지우고 싶은 충동이 일기도 했다. 그런데도 블로그에 올려 공개한다는 것은 누군가를 염두에 두고 적는 공적인 행위가 되어 멈추지 않고 처음 약속을 지켜내게 했다.…<중략>…
제주살이에서 내가 한 일은 무조건 밖으로 나가기였다. 무심하게 하루를 보내기, 그러기에 가장 좋은 장소는 역시 제주다. 27코스나 되는 올레길이 있어 오늘은 어딜 갈까 망설임 없이 자연스럽게 그날의 목표가 정해져서 좋았다. 남편은 걷기의 모든 것을 주관하며 의욕적으로 조사하고 연구했다. 아침이면 일찍 밥을 먹고, 일과처럼 하루도 거르지 않고 제주 올레길을 돌아다녔다. …… 내가 바람이, 때론 떠가는 구름이 된 듯도 했다. 아는 사람이 없는 그곳은 나에게 무인도나 다름없어, 조르바를 품고 춤을 추며 다녀도 아무도 개의치 않았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내가 생각하던 자유로움을 다 적용해 보았다.
--김재숙의 <제주살이>에서
그러나 지난 삶의 습관은 어디 가지 않는다. 올레길을 걷다가 여기저기 널브러진 무를 발견하고, 하나를 취하여 가방에 넣는다. 그동안 삶의 현장에서 가졌던 욕심이 발동한 것이다. 가방에 든 무는 그동안 삶에서 접했던 고통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무게감은 더욱 커진다. 버리려 하니, 여태 들고 온 수고가 아깝다. 올레길의 오름이 나타날 때마다 무의 무게를 절감한다.
또 아름다운 바다, 제주의 들녘, 곶자왈, 오름 등을 지나며 인생의 희로애락을 느끼는 작가는 그 다양성에 만족을 느낀다. 올레길을 완주하고 벅찬 기쁨에 젖은 작가는 소중한 소확행을 맛보며, 비로소 제주에 안긴 듯이 제주를 사랑한다고 실토한다. 자연은 건강하고 행복한 사회 구성원을 만들어준다. 마침내 자신이 거처하는 자연과 가까워지고 그곳을 보호하게 된다. 진정한 현대인의 소확행을 보여주고 있다.
김진진의 <내 마음의 조율사>--밀실에서 호미질하는 삶
현대인의 소확행을 말하면서 자주 접하게 되는 말은 ‘일상의 소박한 행복’, ‘작은 소유’, ‘감정의 질’, ‘긴 만족’, ‘자의의 삶’, ‘자기개발’, ‘자기실현’, ‘자연 친화’ 같은 것들이다. 커다란 성취도 아니고, 보통 사람의 일상에서 찾을 수 있는 아주 소소한 것들이다. 그러나 그것은 확실한 행복이다. 누가 봐도 특별할 게 없지만, 많은 사람이 흘리기 쉬운 것이기에 더욱 소중하다.
작가 김진진에 있어서 ‘텃밭(흙)’은 ‘얽히고설킨 감정의 찌꺼기를 몰아내게 하는’, ‘일상의 권태와 무력감을 소리 없이 무너뜨리게 하는’, ‘만사를 잊게 해 주는 명약 같은’, ‘온갖 부대낌을 어루만져 주는’, ‘물질에 대한 욕망을 시들하게 하는’, ‘정신적 충만을 누리게 하는’, ‘사람다운 향기를 품게 해 주는’ 것이기 때문에 그는 거침없이 ‘내 마음의 밀실’이라고 단언한다. 그래서 그는 그 밀실에서 끝없는 호미질을 반복하며 행복을 누리고 있다.
여하튼 내가 이 작은 땅을 사랑하는 까닭은 사소하다. 농군도 아닌 주제에 농사에 대해 무어 그리 심오한 철학이라도 있는 양 아는 체를 하느냐고 빈정댈지도 모른다. 허나 지난 삼십여 년 간 손바닥만 한 텃밭을 경영하면서도 하나의 일관된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식량 조달의 목적이 아니라 단지 나는 삽자루와 괭이, 호미 등으로 흙을 제멋대로 파고 덮고 씨 뿌리는 질박한 노동 자체를 즐긴다는 점이다. 세련된 문명인같이 고고한 차원의 문화를 영접하기보다는 야만인처럼 활발하게 몸을 놀리는 노동의 쾌감을 본능적으로 좋아하는 모양이다. 여차하면 소싯적부터 명동이나 을지로, 광화문 일대를 제 집처럼 드나들며 살았으니 흙과의 밀착은 스스로 놀랍지 않을 수 없다.…<중략>…
땅은 곧 내 마음의 조율사다. 온갖 부대낌을 어루만져 주었다. 바로 그것이 어딘가 데데한 척하는 도시인의 못난 감성을 제대로 벗어나도록 만들었다. 물질에 대한 욕망을 시들하게 만들어준 가장 큰 요인도 따지고 보면 흙과의 오랜 친화력 덕분이었다. 정신적인 충만을 오래 누리는 한 가지 방법을 터득하도록 나를 길들이고 사람다운 향기를 품게 했다. 아마도 이런 모든 것들은 애초부터 내게 가장 부족한 시골의 정취를 조금이라도 누려보고자 애쓴 욕심의 결과물들이다. 그동안 텃밭 위에서 곰삭혀 온 묵은 시간들을 가만히 다독거려 본다. 내 삶의 여백을 보다 넓디넓게 확장시켜 준 작은 텃밭에 감사하다.
--김진진의 <내 마음의 조율사>에서
현대인들이 꿈꾸는 소확행의 냄새가 여기저기에서 풍긴다. 하나라도 더 소유하기 위해 질주하고, 소비를 통한 짧은 만족에 빠지고, 날밤을 새워가며 자신을 노예로 전락시키던 데에서 탈출을 시도한다. 옴짝달싹할 수 없는 톱니바퀴와 같은 운명의 삶에서 살짝 빠져나와 삽자루와 괭이 호미 등으로 흙을 제멋대로 파고 덮고 씨 뿌리는 질박한 노동을 즐긴다. 자연스럽게 자연과 공존의 길을 선택한다. 정원수들이 쏟아내는 낙엽과 주방에서 나오는 쌀뜨물로 진한 거름을 만들기도 한다. 흙을 체내에 끌어들여 박테리아를 배양해 내놓는 지렁이의 삶이 눈에 들어오는 것은 당연하다. 현대인의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행복은 사회 변화의 길목에서 방향키의 역할을 충실히 하게 된다.
최영애의 <버튼을 누르다>--건널목에서 멈춰 선 삶
이 수필은 ‘낯선 길이다. 산길을 걷고 다리를 건너 험한 돌길과 거친 비탈길을 걸었다. 건널목에 서서 초록 신호를 기다렸다. 한참을 기다렸건만 빨간불은 쉬 바뀌지 않는다.’로 시작한다. 단순한 건널목의 상황 묘사가 아니고, 인간의 삶을 형상화하고 있음을 안내하는 문구가 틀림없다.
아무도 없는 한적한 건널목에서 멈춰 선 작가는 갈등한다. 바뀌지 않는 신호등을 기다리느니 잠시 양심을 접고 건널까 하나, 아들의 목소리가 환청으로 들린다. 건너기를 포기한 작가는 여기서 우리의 삶을 소환하여 의미를 부여한다. 그러면서 이 글의 의미를 내보인다. 자신만의 기준으로 사는 삶이 맞는 것인가, 적당히 타협하고 사는 게 편리하지 않을까, 융통성 없는 게 한심한 건 아닐까, 만사에 소심하니 힘들고 불편한 것은 아닐까.
적색 신호등은 바뀌지 않는다. 고장 신고를 하려 연락처를 찾던 작가는 신호등 기둥에서 안내 문구를 발견하고 아연실색한다. ‘빨간 버튼을 누르면 신호가 바뀝니다.’ 여태 바보짓을 하고 있었다고 질책하는 문구다. 이 신호등은 보행자가 적은 한적한 곳이라서 ‘보행자 작동신호기’로 설치되어 있었다. 이쯤 오면 독자는 작가가 노리는 바가 무엇인지 쉽게 알아차릴 수 있으리라 믿는다.
본 적도 경험한 적도 없는 신호기다. 빨간 버튼을 누르면 신호등은 초록 불로 바뀌고, 달리던 차들은 정지선에서 멈추게 된다. 그때 보행자는 안전하게 건널목을 건널 수 있다. 제법 오래전부터 있었던 것 같다. 왕래하는 사람이 한적한 건널목에 신호장치가 설치되어 있다는 것을 나는 여태껏 알 턱이 없었다. 더 빨리 판단했더라면 초록 신호를 기다리며 조바심으로 속 태우지 않았을 것을. 세상살이에 예민했던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무뎌졌을까. 가야 할 길은 너무 먼데, 도착해서 해야 할 일은 기다리고 있는데, 한 걸음이라도 빨리 걸어가야 하는 처지가 아닌가. 건널목에서 발이 묶여 아까운 시간을 낭비한 셈이다.
세상살이도 막힘없이 시원하게 뻥 뚫려 있다면 참 살 만하겠다. 편안하고 안전한 삶이 어디 있을까. 살다 보면 예기치 않은 불행이 닥쳐올 때가 있다. 그것을 막는 방법은 없다. 인생길에도 필요할 때마다 마음대로 작동시킬 수 있는 버튼이 있다면 살아낸 삶이 얼마나 편안했을까. 그랬다면 밀려오는 슬픔도, 치받는 울화도, 고달픈 육신도, 이별의 아픔까지도 모두 버튼을 눌러 정지시키면 된다. 건강과 사랑, 행복한 삶은 무조건 통과시킨다면 참 즐겁고도 신나 하며 재미있게 살아볼 만하겠다.
-최영애의 <버튼을 누르다>에서
작가 최영애는 지나온 삶을 반추한다. 그러면서 도로 위의 모든 걸 통제할 수 있는 신호기처럼 자신의 생(生)을 관장할 수 있는 신호기 하나쯤 있었으면 좋겠다고 소망한다. 손가락으로 한 번만 누르면 모든 게 내 의도대로 따라주는 버튼. 번지르르한 승용차, 위압감 주는 트럭, 덩치 큰 버스 등이 모두 멈추고 그 한가운데로 당당하게 걸어간다. 보행자에게 무서운 존재였던 온갖 차량을 멈춰 세우고 건너는 호기가 대단하다. 통쾌감을 느끼며 건널목을 가로지르는 모습이 의젓하다. 경쾌한 리듬을 타는 듯 발걸음이 가볍다. 불편했던 작가는 헛헛한 웃음 한번 날리고 건널목을 당당히 건너간다.
달라진 건 하나도 없다. 다만 보행자 작동 신호기였다는 사실을 알았을 뿐이다. 우리의 삶은 이렇게 작은 것으로 하여 엄청난 차이를 유발하는 게 아닐까. 알면 쉬운 걸 미처 알지 못해 힘들었던 삶은 어디에든 있다. 삶이 오래될수록 미처 알지 못해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도 많을 것이다. 모든 건 자신이 알아내고 해결할 따름이다.
이번 《계간 현대수필》에서는 새삼스럽게 현대인의 소확행에 시선을 맞춰 보았다. 빈틈없이 숨 가쁘게 돌아가는 현실에서 방황하는 삶은 과연 어떤 것일까 고민도 해 보았다. 그때마다 대열에서 이탈한 사람의 삶이 아닐까 하고 성급하게 결론을 내린 적이 있었다. 모두가 더 소유하기 위해 부지런히 달리고, 더 높은 곳에 도달하도록 몸부림하는데, 엉뚱하게 혼자서 대열에서 빠져나와 다른 삶을 시도하는 사람이 ‘방황하는 자’라고 여겼다.
그러나 이제는 감히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방황하는 자는 자기 자신에 가장 충실한 사람’이라고. 욕심부리지 않고 일상 속에서 소소한 행복을 추구하는 자가 정말 지혜로운 사람임을 절감한다. 소확행은 결국 자기 자신에 충실한 데서 얻어진다. 2024년 여름은 현대인의 소확행을 형상화한 수필에 많이 공감하는 계절이었음에 만족한다.
교수님 수필 이론
|
첫댓글 여기저기 기웃거리니 호기심도 발동하기도 하겠지만,
호기심이 많아서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사람도 있겠습니다.
집안에 우환 중에도 시간을 내셨군요.
좀 어떠신지요?
쾌차를 기원합니다.
2024년 제24회 수필과비평 행사다녀 와습니다.
교수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수고하셨어요..
좋은 글 많이 쓰시길 빕니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해야 할 것을 움켜 잡느라 하고 싶은 것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 나가는 것을 그냥 보고만 있게 됩니다.
'비록 작고 보잘것 없는 것이라하더라도 자신의 경험과 감정의 질이 더 소중하다'는
교수님 말씀을 그물로 삼겠습니다.
며칠 전에는 귀뚜라미 소리를 들었습니다.
가을을 기다리는 마음이 한결 수월해졌습니다.
감사드립니다.
교수님, 좋은 강의내용 감사합니다. 프린트 하다 멈춘 컴을 보며 애가 타네요. 쥐어 박을 수도 없고. 다시 시도해서 찬찬히 읽고 숙지하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