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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9년 탁영 김일손의 「두류기행록」을 좇아서 I
▣ 일 시 : 2023년 07월 15일(토)~16일(일)
▣ 코 스 : 함양관아-제한역-오도재-등구사-탄촌-엄천사-사근역참-신안-단성-단속사-불영-백운동-오대사-묵계사-좌방사
▣ 인 원 : 1일차 2명/2일차 3명
▣ 날 씨 : 폭우
계속되는 장맛비에 파란 하늘을 보기가 어렵다. 침수 피해가 속출하고 산사태로 매몰사고 소식도 들려온다. 내가 아는 지인도 금강 둑이 터져 애써 가꾼 시설 작물이 침수피해를 당했다. 하늘이 뚫린 듯 비가 쏟아진다. 지리산 국립공원 정○○ 주무관과 오래 전에 잡은 약속이라 우천불문하고 1박 2일 답사를 진행하였다. 다행히 차량과 도보로 답사가 가능한 구간이다. 탁영 김일손의 「두류기행록」을 좇아서 함양성을 출발하여 하동 좌방사(坐方寺)까지 연결하였다.
탁영 김일손의 「두류기행록」을 좇아 답사를 하면서 가장 의문이 드는 부분은 오대사(五臺寺)를 거쳐 천왕봉으로 올랐다는 점이다. 탁영은 함양을 출발하여 제한역과 오도재를 거쳐 등구사에서 하룻밤을 묵는다. 다음날 금대사를 둘러보고 임천을 건너 군자사로 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임천에 물이 불어 계획에 차질을 빚는다. 탁영의 처음 계획은 군자사를 경유하여 백무동에서 천왕봉에 오르고자 한 듯하다. 함양에서 이 코스가 가장 빠르다. 탁영 일행은 계획을 변경하여 용유담(龍游潭)-탄촌(炭村)-사근역(沙近驛)[宿]-환아정(換鵞亭)-오대사(五臺寺)[宿]-묵계사(黙溪寺)-좌방사(坐方寺)를 거쳐 동상원사(東上元寺)에서 유숙하고 천왕봉에 오른다. 단속사에서 덕산을 경유하여 중산리에서 천왕봉에 오를 수도 있었다. 탁영은 왜 먼 길을 돌아 굳이 오대사를 경유했을까.
탁영이 오대사에 들른 이유는 스승인 김종직의 「유두류록」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유두류록」에 “공무에 매여 바쁘다 보니 청학동을 찾아가고 오대사(五臺寺)를 들르는 등 그윽하고 기이한 곳을 두루 유람하지 못하였다.”라고 아쉬움을 토로(吐露)하고 있다. 같은 김종직의 제자인 추강 남효온은 탁영보다 2년 전인 1487년 청학동을 유람하고 오대사에도 들렀다. 탁영이 남효온의 「지리산일과」를 접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추강과 탁영은 스승인 김종직의 「유두류록」을 읽었을 것이다. 추강과 탁영이 오대사를 경유한 이유는 스승인 김종직이 생전에 간절히 가보고자 했던 오대사를 스승 사후에 들른 것으로 짐작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에 오대사에 대한 기록이 자못 자세하다. 오대사(五臺寺) 살천현(薩川縣) 남쪽에서 고개 하나를 넘으면, 다섯 봉우리가 벌여 서서 그 모양이 대 같은데, 절이 그 복판에 있으므로 절 이름으로 되었다. 또 수정사(水精寺)라 하기도 한다. 따오기알 만한 수정주(水精珠)가 있는데, 여의주(如意珠)라 부르며, 은으로 된 끈으로 얽어서 보배로 전해 온다. 절 중의 말에는, “구슬을 반 동이 물에다가 담그면 물이 곧 넘친다.”라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실린 권적(權適)의 "五臺山水陸精社記(오대산수륙정사기)에 “본래 오대사라는 사찰이 있었는데 폐사가 되었다. 대각국사(大覺國師)가 일찍이 남쪽에 갔다가 이곳에 와서 배회하며 두루 돌아보고, ‘여기가 큰 법이 머물 곳이다.’라고 하였다. 진억선사(津億禪師)가 이 얘기를 듣고 용기를 내어 가서는 그곳에 머물 터를 닦았다. 송나라 선화(宣和) 5년 계묘(癸卯, 1123년) 7월에 짓기 시작하여, 건염(建炎) 3년 기유(己酉, 1129년) 10월에 마쳤다. 집이 86칸이다. 선사는 수정 하나를 얻어서 아미타불상(阿彌陀佛像)에 걸어서, 신심을 표명하고, 인하여 수정사(水精社)라 이름하였다.”라는 기록을 볼 때 오대사는 상당한 규모의 대찰임을 짐작할 수 있다. 대찰 또한 탁영이 오대사를 찾게 된 이유일 것이다. 권적(權適)의 "「五臺山水陸精社記(오대산수륙정사기)」 비석은 송나라 소흥(紹興) 8년(1138)에 세운 것이었다.
■ 옛 문헌에 나오는 오대사
① 유두류록 - 점필재 김종직(1472년 8월 14~18일)
우리가 오늘이 산에 한 번 올라 유람하여 겨우 평소의 소원을 풀기는 했지만, 공무에 매여 바쁘다 보니 청학동을 찾아가고 오대사(五臺寺)를 들르는 등 그윽하고 기이한 곳을 두루 유람하지 못하였다. 어쩌면 이 산이 우리로 하여금 그런 곳을 만나지 못하게 한 것은 아닐까? 두자미(杜子美)의 "방장산(方丈山)은 바다 건너 삼한(三韓)에 있네"라는 구절을 길이 읊조리니, 나도 모르게 정신이 아득해진다.
② 지리산일과 - 추강 남효온(1487년 9월 27일~10월 13일)
12일(무인). 해한이 나에게 굳이 머물기를 청하므로 어쩔 수 없이 묵기로 하였다. 식사를 마친 뒤 해한·계징 등과 함께 아래로 내려가 오대사(五臺寺)에 들렀다. 절 앞에는 고려시대 국자사업(國子司業)을 지낸 권적(權適)의 수정사기(水精社記)가 새겨진 비석이 있었는데, 송나라 소흥(紹興) 8년(1138)에 세운 것이었다. 수정은 일명 여의주(如意珠)라고도 한다. 무자년(戊子年)에 맹승(盲僧) 학열(學悅)이 임금에게 아뢰어 탈취해서 그 명품을 낙산사(洛山寺)의 탑 속에 숨겼다. 비문을 읽고 난 뒤, 절 안으로 들어가 누대 위에 올라가 쉬었다. 한 승려가 나에게 감을 대접했다. 한동안 있다가 사자암으로 돌아갔다.
③ 두류기행록 - 탁영 김일손(1489년 4월 14일~28일)
(단속사를 출발하여) 서쪽으로 10리를 가서 큰 시내를 건넜는데, 바로 살천의 하류였다. 살천을 따라 남쪽으로 가다가 돌아 서쪽으로 20리가량 지났는데, 모두 두류산의 기슭이었다. 들은 넓고 산은 나지막하였으며 맑은 시내와 하얀 돌이 있어 모두 즐길 만하였다. 방향을 바꾸어 동쪽으로 향했다. 시내를 따라가는데 냇물은 맑고 돌은 자른 듯이 모나 있었다. 또 북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시냇물을 아홉 번이나 건넜고, 다시 동쪽으로 꺽어들어 판교(板橋)를 건넜다. 수목이 빽빽이 들어차서 하늘이 보이질 않았다. 길은 점점 높아졌다. 6~7리를 가니 압각수(鴨脚樹) 두 그루가 마주 서 있었다. 크기는 백 아람이나 되고, 높이는 하늘에 닿을 듯하였다.
(오대사) 문에 들어서니 오래된 비석이 있는데, 그 머리에 "五臺山水陸精社記(오대산수륙정사기)라고 씌여 있었다. 읽으면서 좋은 글임을 새삼 깨달았다. 다 읽어보니 고려 때 학사(學士) 권적(權適)이 송나라 소흥(紹興) 연간에 지은 것이었다. 절에는 누각이 아주 장대하고 방이 매우 많으며, 깃발이 마주 보고 있었다. 오래된 불상이 있었다. 한 승려가 말하기를 "이 불상은 고려 인종이 주조한 것입니다. 인종이 쓰던 쇠로 만든 여의(如意)도 남아있습니다."라고 하였다. 해는 저물고 비도 내려 절(오대사)에서 묵었다.
④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卷三十 慶尙道 오대사(五臺寺)
오대사(五臺寺) 살천현(薩川縣) 남쪽에서 고개 하나를 넘으면, 다섯 봉우리가 벌여 서서 그 모양이 대 같은데, 절이 그 복판에 있으므로 절 이름으로 되었다. 또 수정사(水精寺)라 하기도 한다. 따오기알 만한 수정주(水精珠)가 있는데, 여의주(如意珠)라 부르며, 은으로 된 끈으로 얽어서 보배로 전해 온다. 절 중의 말에는, “구슬을 반 동이 물에다가 담그면 물이 곧 넘친다.”라고 한다.
○ 권적(權適)의 기문의 대략에, “절 주지 진억(津億)이 일찍이 동문승(同門僧) 혜약(慧約) 등과 더불어 탄식하기를, ‘출가한 자는 오직 한 가지 해탈만을 기약할 뿐인데, 진실로 이것을 빙자하여 높은 명예와 후한 이를 구한다면, 이것이 어찌 출가한 본심이리오.’라고 하고, 이로부터 깊이 숨으려는 뜻이 있었다. 이에 이름난 산에 정사(淨社)를 지어서 동림(東林) 서호(西湖)의 유풍을 따르고자 하였으나, 알맞은 곳이 없었는데, 지리산 오대라는 황폐한 절이 있다는 것을 들었다. 지리산은 해동의 큰 진산(鎭山)으로 높고 깊고 넓고 큰 것이 천하에 견줄 데가 없으며, 오대사는 또 그 산의 남쪽에 있다. 그 산이 일어났다 낮아졌다 한 것이 다섯 겹이어서, 은은하게 대를 쌓아 놓은 듯한 까닭에 그것을 절 이름으로 한 것이다. 천 봉우리가 고리처럼 호위했고, 백 골짜기가 모여들어 현성(賢聖)이 그 속에 숨어 살고 있는 듯하여, 보는 자는 눈이 부시고 마음이 취하였다. 대각국사(大覺國師)가 일찍이 남쪽에 갔다가 이곳에 와서 배회하며 두루 돌아보고, ‘여기가 큰 법이 머물 곳이다.’라고 하였다. 진억선사(津億禪師)는 이 얘기를 듣고 용기를 내어 가서는 그곳을 발견하였다. 인하여 머물 터를 닦아, 시주를 모집하고, 몸소 목공을 거느리고 도끼를 잡고 빨리 지었는데, 집이 86칸이다. 선사는 수정 하나를 얻어서 아미타불상에 걸0어서, 신심을 표명하고, 인하여 수정사(水精社)라 이름하였다. 송나라 선화(宣和) 5년 계묘(癸卯, 1123년) 7월에 짓기 시작하여, 건염(建炎) 3년 기유(己酉, 1129년) 10월에 마쳤다. 3일 동안 낙성법회를 베풀고, 엄천사(嚴川寺)의 수좌 성선(性宣)을 청해서 경을 설하였다. 임금께서 동남해 안찰 부사 기거사인(起居舍人) 지제고(知制誥) 윤언이(尹彦頤)에게 명하여 향을 올리고, 이어 은 2백 냥을 하사하였다. 이로써 먼 데서나 가까운 데서 신심이 쏠리어 와서 속인이 폭주하였다.” 하였다.
五臺寺 自薩川縣南踰一嶺 有五峯列立 其狀如臺 寺在其中 故名 又稱水精社 有水精珠如鵠卵 號如意珠 纏以銀索 相傳爲寶 寺僧云:“以珠沈半盆水 卽溢”
○權適記略曰:“社主津億嘗與同門僧慧約輩嘆曰:‘夫出家者 期一解脫耳 苟託此而爲高名厚利 豈本心哉.’ 自爾有長往志 乃欲結淨社於名山 追東林 西湖之風 而難其處 聞智異山有廢寺曰五臺 蓋智異爲海東巨鎭 高深博大 天下無比 而五臺又居山之陽 其山起伏 五重隱隱 如累臺然 故取以爲寺號 千峯環衛 百谷會同 若有賢聖隱處乎其中 觀者目眩而心醉 大覺國師嘗南遊至其所 徘徊周覽曰:‘此大法住處也’ 師聞而勇往 往而得所 欲因留而除地焉 乃募集檀信 順賢躬率工人 操斤斧疾作 凡爲屋八十有六間 師乃索水精一枚 懸無量壽像 以表明信 因以名其社 經始於大宋宣和五年癸卯七月 至建炎三年己酉十月告畢 設落成法會三日 請嚴川寺首座性宣說經 上命東南海按察副使 起居舍人 知制誥尹彦頤行香 仍賜銀二百兩 自是遠近歸心 緇素輻湊”
■ 함양성 함양관아
■ 제한역(마을회관 주소 : 경남 함양군 함양읍 조동길3, 구룡리 418-3)
■ 오도재
十二覺詩 - 靑梅禪師
覺非覺非覺 : 깨달음은 깨닫는 것도 깨닫지 않는 것도 아니니
覺無覺覺覺 : 깨달음 자체가 깨달음이 없어 깨달음을 깨닫는 것이네.
覺覺非覺覺 : 깨달음을 깨닫는다는 것은 깨달음을 깨닫는 것이 아니니
豈獨名眞覺 : 어찌 홀로 참 깨달음이라 이름하리요.
* 청매선사는 박여량선생의 「두류산일록」에 나오는 도솔암의 인오스님이다.
두류시-탁영 김일손
滄波萬頃櫓聲柔 : 푸른 물결 넘실넘실 노 소리 부드러워
滿袖淸風却似秋 : 소매에 찬 맑은 바람 가을 인양 서늘하다.
回首更看眞面好 : 머리 돌려 다시 보니 참으로 아름다워
閒雲無跡過頭流 : 흰 구름 자취 없이 두류산을 넘어가네.
지리산-일두 정여창
風浦乏乏弄輕柔 : 갯부들 바람에 한들한들 가볍게 너울대고
四月花開麥已秋 : 사월봄날에 꽃이 피는데 보리는 이미 누렇구나.
看盡頭流千萬疊 : 두류산 수많은 봉우리들을 모두 다 구경하고
孤舟又下大江流 : 큰 강물에 배를 띄어서 고요히 아래로 흘러가누나.
■ 등구사(登龜寺)
■ 금대사(金臺寺)
■ 임천(瀶川)
■ 용유담(龍游潭)
■ 탄촌(炭村, 숯꾸지)
■ 엄천사(嚴川寺)
■ 사근역(沙斤驛)
■ 환아정(換鵞亭)
鏡湖主人- 덕계(德溪) 오건(吳健, 1521~1574)
瑤池何必作仙遊 : 요지에서만 어찌 신선이 놀겠는가.
此地風光足上流 : 이곳 풍광이 그만 못하랴
一笛聲中春欲暮 : 한가락 피리 소리에 봄날은 저무는데
滿江明月載孤舟 : 강물 가득 밝은 달 외로운 배에 실려 있네
*요지(瑤池): 중국 곤룡산에 있는 신선이 산다는 못.
■ 광제암문(廣濟嵒門)
■ 단속사(斷俗寺)
贈山人惟政(증산인유정)-남명 조식
유정산인에게 주다.
花落槽淵石 : 꽃은 조연(糟淵)의 돌에 떨어지고
春深古寺臺 : 옛 단속사(斷俗寺) 축대(築臺)엔 봄이 깊었구나.
別時勤記取 : 이별(離別)하던 때 잘 기억(記憶) 해 두게 나
靑子政堂梅 : 정당매(政堂梅) 푸른 열매 맺었을 때.
단속사에서 들린 사명대사에게 준 시이다.
■ 탁영대(濯纓臺)
■ 오대사(五臺寺) 터(백궁선원)
■ 묵계사(默溪寺)
■ 좌방사(坐方寺) : 경남 하동군 묵계리 1159-2
1489년 탁영 <김일손> 선생의 [두류기행록]
1. 두류산 유람을 떠나다.
선비로 태어나 한 지역에 조롱박(匏瓜)1)처럼 매여 있는 것은 운명이다. 천하를 두루 보고 나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자질을 기를 수 없다면, 나라 안의 산천은 당연히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사람의 일이 기쁘기도 하고 어긋나기도 하는 것을 감안하면, 항상 뜻은 있어도 원하는 것에 부응하지 못하는 것이 열에 여덟, 아홉은 된다. 내가 애초에 진주의 학관(學官)이 되기를 구했던 것은, 부모님을 봉양하는 데 그 뜻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구루(句漏)2)의 수령이 되었던 갈치천(葛稚川)3)의 마음도 단사(丹砂)4)에 없었던 것이 아니었다. 두류산은 진주의 지경에 있는데, 진주에 도착하고 나서는 날마다 두 짝의 나막신을 준비하였는데, 두류산의 운무(雲霧)와 원학(猿鶴)이 모두 나의 단사이기 때문이었다. 학관으로 있던 2년 동안 녹봉만 축낸다는 비방에서 거듭 벗어나 병을 핑계로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였는데, 드디어 한가하게 노닐고 싶은 뜻을 이루었다. 그럼에도 한 번도 두류산에 발을 들여놓은 적이 없었으니, 어찌 평소의 뜻에 부응하지 못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두류산을 마음속에서 잊어본 적이 없었다. 매번 조태허(曺太虛)5) 선생과 함께 한번 유람하고자 했으나, 조태허가 벼슬살이로 인해 나와는 왕래가 끊어졌다. 더욱이 오래지 않아 조태허는 어머니 상을 당해 천령(天嶺)으로 떠났다.
注
1) 포과(匏瓜) : 박. 표주박. 한 자리에 매여 있음을 비유하는 말임.<논어論語 양화陽貨>
2) 구루(句漏) : 갈홍(葛洪)이 이곳에서 신선술을 수련했다고 하는 중국 광서성(廣西省) 북류현(北流縣) 동북쪽에 있는 산 이름.
3) 갈치천(葛稚川) : 진(晉)나라 갈홍을 일컬음.
4) 단사(丹砂) : 선약(仙藥)의 재료로 쓰인다는 수은과 유황의 화합물. 신선세계를 뜻하는 듯함.
5) 조위(曺偉, 1454~1503) : 본관은 창녕, 자는 태허(太虛), 호는 매계(梅溪)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김종직의 처남이며 제자이다.
천령에 사는 상사(上舍)6) 백욱(伯勗) 정여창(鄭汝昌)은 나의 정신적 벗이었다. 올봄 도주(道州)7)에서 녹명(鹿鳴)8)을 노래할 적에 그가 마침 내집 앞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그때 두류산을 유람하자고 약속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상국(相國) 은경(殷卿) 김여석(金礪石)9)이 영남에 내려와 살피면서 누차 편지를 보내와 만날 것을 기약했지만 찾아가지 못했다. 4월 11일 기해일에 그의 행차를 따라가 천령에서 만났다. 천령 사람에게 물으니, 백욱이 서울에서 이조부(二鳥賦)10)를 노래하고 자기 집으로 돌아온 지 5일이나 되었다고 하였다. 드디어 어긋나지 않고 서로 만날 수 있어서 오랜 소망이 이루어졌음을 매우 기뻐하였다. 상국 김은경이 나를 붙잡고 따라가자고 하였으나, 나는 산행할 약속이 있다고 사양하였다. 상국이 간청하다가 내 의지를 돌릴 수 없게 되자, 노자를 주며 전송해주었다. 이어 공무에 매이고 너무 허약해서 유람에 따라갈 수 없음을 한탄하며 섭섭해하는 것이 그치지 않았다. 천령에 새로 부임한 이잠(李箴) 선생은 바로 내가 성균관에 있을 때 경서(經書)를 가르쳐주신 분이었는데, 나에게 노자를 준 것도 후하였다. 천령 사람 임정숙(林貞叔)도 따라나서서 세 사람의 행장을 준비하였다.
6) 상사(上舍) : 소과(小科)인 생원과에 합격한 사람.
7) 도주(道州) : 경상북도 청도(淸道)의 고려시대 이름.
8) 녹명(鹿鳴) : 《시경(詩經)》의 편명으로 고대에 임금이 신하나 귀빈을 위하여 연회할 때 사용하는 악가이다. 〈녹명(鹿鳴)〉에, “우우 우는 사슴이 들 부들을 뜯어먹도다. 나에게 귀빈이 있어서 비파를 타고 생황을 불었도다.〔呦呦鹿鳴 食野之萍 我有嘉賓 鼓瑟吹笙〕”라고 하였음.
9) 김여석(金礪石) : 1445(세종 27)∼1493(성종 24).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은경(殷卿). 할아버지는 김원손(金遠孫)이고, 아버지는 강화부사 김수(金洙)
10) 二鳥 : 당(唐) 나라 한유(韓愈)가 지은 부(賦). 감이조부(感二鳥賦). 한유가 젊었을 때 서울에 갔다가 실의에 차서 동으로 가는 길에 어떤 사자(使者)가 귀한 새인 백오(白烏)와 백구욕(白鸜鵒) 두 마리를 천자에게 진상하러 가는 것을 보고 느낀 바 있어 지은 작품으로, ‘무지한 새는 오직 깃과 터럭이 이상하다 해서 천자의 빛을 보게 되는데, 사람은 지모와 도덕을 지니고도 새만 못하구나.’ 하는 내용임. [네이버 지식백과] 이조부 [二鳥賦] (한시어사전, 2007. 7. 9., 국학자료원)
士生而匏瓜1)一方. 命也. 旣不能遍觀天下. 以畜其有. 則域中之山川. 皆所當探討者. 惟其人事之喜違也. 常有志而未副願者. 什居八九. 余初求爲晉學. 其意則便養也. 而句漏作令. 葛稚川之心. 又未嘗不在於丹砂焉. 頭流在晉之境. 旣到晉則日理兩屐. 頭流之煙霞猿鶴. 皆余之丹砂也. 二載皐比. 徒重腹便之譏. 則引疾于鄕. 以遂徜徉之志. 而足迹未嘗一及干頭流. 豈非素志之未副者也. 然頭流不敢忘懷也. 每與曺太虛先生共卜一遊. 而太虛簪纓有累. 余阻於道途之往來. 未幾. 太虛丁內艱而去天嶺矣.
天嶺上舍鄭伯勖. 余之神交也. 今年春. 歌鹿鳴於道州. 適過吾門. 約觀頭流. 無何. 金相國殷卿. 出按嶺南. 屢以手柬. 期而未赴. 四月十一日己亥. 追其行上謁於天嶺. 問天嶺之人. 則伯勖賦二鳥於京師. 而還其廬已五日矣. 遂得相遻. 雅喜其宿願之不悖. 金相國將挽余以自隨. 余辭以山行有約. 相國強之而不能奪也. 則資行以送. 仍恨簿書爲累. 羸瘵已甚. 未得從之遊. 介介不已. 新天嶺李先生箴. 乃余杏壇執經者也. 資我亦厚. 天嶺人林貞叔亦從. 以備三人之行.
2. 두류산으로 향하는 여정
14일, 임인일.
드디어 천령의 남쪽 성곽의 문에서 출발하였다. 서쪽으로 10리쯤 가서 시내 하나를 건너 객사에 이르렀는데, 제한(蹄閑)이라고 하였다. 제한에서 서남쪽으로 가서 산등성이를 10리쯤 오르내렸다. 양쪽으로 산이 마주하고 있고 그 가운데 한줄기 샘이 흐르는 곳이 있었는데, 점점 들어갈수록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몇 리를 가서 한 고개(오도재)를 오르니, 따르는 자가 말하기를, “말에서 내려 절을 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누구에게 절을 하느냐고 묻자 그가 답하기를,
“천왕(天王)입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천왕이 무엇인지 살피지 않고 말을 달려 지나쳤다. 이 날 비가 물을 대듯이 내렸고 안개는 온 산을 감고 있었다. 따르는 자는 모두 도롱이를 입고 삿갓을 썼다. 진흙 길이 미끄럽고 질퍽하여 서로 잃어서 뒤처졌다.
나는 말을 믿고 몸을 맡겨 등구사(登龜寺)에 이르렀다. 솟아오른 산의 형상이 거북과 같은데, 절이 그 등에 올라앉아 있는 것 같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오래된 축대가 빼어났는데 축대의 틈새에 깊숙한 구멍이 있었다. 석간수(石澗水)가 북쪽에서 흘러 그 속으로 흘러내렸는데 졸졸 소리를 내는 듯하였다. 그 위쪽엔 동, 서로 두 사찰이 있었는데, 일행은 모두 동쪽 사찰에 묵기로 하고 따르는 자를 가려서 보냈다. 내리는 비의 기세가 밤까지 계속되었고 아침까지 그치질 않았다. 마침내 절에 머물며 각자 낮잠을 잤다.
한 승려가 문득, “비가 개어 두류산 가는 길이 보인다.”라고 알려주니, 우리 세 사람이 놀라서 일어나 졸린 눈을 비비고 내다보니, 세 개의 푸른 봉우리가 문 앞에 우뚝 솟아 있는 듯했다. 흰 구름이 가로지르듯 감싸고 있어 짙푸른 봉우리만 희미하게 보일 뿐이었다. 조금 뒤에 다시 비가 내렸다. 내가 농담 삼아 말하기를, “조물주도 역시 마음이 있는가 봅니다. 산의 형세를 숨겼다가 보여주었다가 하니 시기하는 것이 있는 듯합니다.”라고 하니, 백욱이 말하기를,
“어찌 산신령이 객을 오랫동안 잡아두려는 계책인지 알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날 밤에 다시 맑아져서 달빛이 환하게 비추자, 푸른 산의 모습이 모두 드러났다. 굽이굽이 이어진 골짜기에는 선인(仙人)과 우객(羽客)이 와서 너울너울 춤을 추고 있는 듯하였다. 백욱이 말하기를,“사람 마음이 밤기운을 받아 이때에는 속세의 찌꺼기라곤 전혀 없군요.”라고 하였다. 나의 어린 종이 제법 피리를 불 줄 알아서 불게 하였더니, 빈산에 메아리가 울리기에 충분하였다. 세 사람은 서로 마주 대하여 놀다가 밤이 깊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15일, 계묘일.
다음날 새벽에 나는 백욱과 짚신을 신고 지팡이를 짚고 등구사(登龜寺)에서 1리 정도 걸어 내려갔는데 볼 만한 폭포가 있었다. 다시 10리쯤 가서 한 외딴 마을을 지났는데 그 마을에는 감나무가 많았다. 험한 고개를 넘어 산허리를 거쳐 오른쪽으로 돌아 서북쪽으로 가니 바위 아래에 샘이 있어서 두 손으로 물을 움켜 마시고 이어 세수를 하였다.
그곳에서 나와 한걸음에 금대암(金臺菴)에 닿았다. 한 승려가 나와·물을 긷고 있었는데 나와 백욱이 암자 내로 들어섰다. 뜰 가운데는 모란 몇 그루가 있었는데, 반쯤 시들었지만 꽃은 매우 붉었다. 누더기 승복를 입은 승려 20여 명이 가사(袈裟)를 입고서 뒤따르며 범패(梵唄)를 하고 있었는데 그 속도가 매우 빨랐다. 내가 물어보니 이곳은 정진 도량(精進道場)이라고 했다. 백욱이 그럴듯하게 해석하기를, “그 법이 정일(精一)하여 잡됨이 없고, 나아가되 물러섬이 없고, 밤낮으로 쉬지 않고 부처가 되는 공덕을 쌓는 것이니, 조금이라도 게을리하는 자가 있으면 그 무리 가운데 민첩한 한 사람이 긴 막대기로 내리쳐 깨우치게 하여 번뇌와 졸음을 없애게 합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부처가 되는 것도 고된 일입니다. 배우는 자가 성인이 되는 공부를 이와 같이 한다면 어찌 이루는 것이 없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암자에는 여섯 개의 고리가 달린 석장(錫杖)이 있었는데 매우 오래된 물건이었다. 정오가 되어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좁은 바위 계곡을 내려다보니 갑자기 물이 불어나 호수와 같았다. 아득히 상무주암(上無住庵)과 군자사(君子寺)를 바라보면서 가보고 싶었지만 냇물을 건널 수 없었다. 산길을 내려가려니 매우 험난해서 발을 땅에 붙일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지팡이를 앞으로 내 짚으며 미끄러지듯이 내려갔다. 안장을 얹은 말이 산 아래에 기다리고 있었다. 말을 타고 가는데, 겨우 한 걸음을 옮기자마자 내가 탄 말만 한쪽 다리를 절룩거려 방아를 내려 찧는 것 같았다. 내가 백욱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절뚝거리는 노새를 타고 가는 풍미(風味)는, 시인이 참으로 면할 수 없는 것인가 봅니다.”라고 하였다.
시냇물 북쪽 언덕을 따라 동쪽으로 가서 용유담(龍游潭)에 닿았다. 용유담 남북은 깊고 그윽하며 기이하고 빼어나서 풍진과 천 리나 떨어진 듯하였다. 임정숙이 먼저 도착하여 용유담 바위 위에 음식을 차려놓고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점심을 먹고 길을 떠났다. 때마침 날이 맑아졌지만 물이 양쪽 언덕에 넘실거려 용유담의 기이한 장관은 볼 수가 없었다. 임정숙이 말하기를, “이곳은 점필공(佔畢公) 이 고을을 다스릴 때, 기우제를 지내기 위해 재계하던 곳입니다.”라고 하였다. 용유담 바위의 비늘 같은 모양들은 밭을 갈아엎은 것같이 완연한 흔적이 많았고 항아리와 가마솥 같은 부류의 것들도 있었는데, 모두 기록할 수 없었다. 백성들은 용이 사용하던 그릇이라고 하였는데, 이들은 산골짜기의 급류가 계곡의 돌을 굴려 오랫동안 서로 연마되어 이런 모양을 이루게 된 줄을 전혀 알지 못하니, 백성들이 사리를 헤아리지 않고 허탄한 말을 좋아하는 것이 이처럼 심하구나.
용유담을 돌아 동쪽으로 나아가는데 길이 매우 험난하였는데, 그 아래를 보니 천척이나 되는 절벽이어서 떨어질 것 같아 두려웠다. 사람과 말이 숨을 죽이고 거의 30리를 지나갔다. 강가 언덕에서 두류산 동쪽 기슭을 바라보았다. 푸른 등나무와 고목 사이로 선열암(先涅庵)․고열암(古涅庵) 등을 가리키며 바라보았는데,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한 조각의 배가 약수(弱水)를 사이에 두고 있는 듯하여, 한 걸음에 올라 보고 싶었지만 할 수가 없었다.
길이 점점 낮아지고 산세도 점차 평평해지고, 물의 흐름도 점점 안정해졌다. 산이 북쪽에서 우뚝 솟아 세 봉우리가 된 곳이 있었는데, 그 아래에 겨우 10여 호 정도 민가를 이루고 있었다. 탄촌(炭村)이라고 하였는데, 그 앞에는 큰 시내가 있었다. 백욱이 말하기를, “이곳은 살 만한 곳입니다.”라고 하여, 내가 말하기를, “문필봉(文筆峯) 앞이 더욱 살 만한 곳입니다.”라고 하였다. 앞으로 5, 6리를 가니 대나무 숲 속에 오래된 절이 있었는데, 엄천사(嚴川寺)라고 하였다. 토양이 평평하고 넓어서 집을 짓고 살 수 있었다. 절을 돌아 동쪽으로 1리를 가니, 천 길 절벽이 있었다. 사람들이 절벽 사이로 1리 정도 갈 수 있는 비스듬한 길을 뚫어놓았다.
작은 고개 하나를 넘어 북쪽으로 가니 임정숙의 전원(田園)이 있는 아랫마을로 나왔다. 임정숙이 자꾸 자기 집에 가자고 청하였지만 날이 저물고 비가 내려 물이 더욱 불어날까 근심이 되어 사양하기를, “왕자유(王子猷)는 문 앞까지 갔다가 대안도(戴安道)를 만나지 않고 돌아갔는데, 지금 정숙과 여러 날 함께 유람하였으니, 집에까지 들어갈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임정숙이 발에 병이 나서 끝까지 모시고 다닐 수 없다고 하여 정숙과 작별하였다. 저물녘에 사근역(沙斤驛)에 이르렀는데, 두 다리의 통증이 심하여 걸을 수가 없었다.
十四日壬寅. 遂自天嶺南郭門而出. 西行可一十里. 渡一溪水. 抵一逆旅. 名曰蹄閑. 自蹄閑西南行. 上下岡隴可十里. 兩山對峙. 一泉中注. 漸入佳境矣. 行數里陟一岾. 從者曰當下馬拜. 余問所拜. 答曰天王. 余不省天王是何物. 策馬而過. 是日雨下如注. 嵐霧渾山. 從者皆蓑笠. 泥滑路澁. 相失在後. 信馬到登龜寺. 山形穹窿如龜. 以寺登其背而名也. 古砌絶峻. 砌隙有幽竇. 澗水自北而注其中㶁㶁然. 其上有東西二刹. 一行皆寓於東刹. 汰還從者. 雨勢竟夜. 終朝殊未已. 遂留寺宇. 各就午寢. 僧忽報雨霽. 頭流呈露. 吾三人驚起. 刮睡眼視之. 則蒼然三峯. 偃蹇當戶. 白雲橫斜. 翠黛隱映而已. 少選又雨. 余戲曰. 造物其亦有心者歟. 潛形山岳. 似有所猜. 伯勖曰. 安知山靈久關騷客爲計耶. 是夜復晴. 皓月流光. 蒼顏全露. 稜稜壑谷. 若有仙人羽客來舞翩翩也. 伯勖曰. 人心夜氣. 於此都無査滓矣. 余之小蒼頭. 頗調觱篥令吹之. 亦足以傳空山之響. 三人相對. 夜分方寢.
遲明. 吾與伯勖. 着芒屩策扶老. 步下登龜一里許. 有瀑布可觀. 行十里許. 穿一孤村. 村多柹樹. 崎嶇經丘. 緣山腰右轉而西北行. 巖下有泉. 掬而飮之. 仍盥手. 出一步到金臺菴. 一僧出汲. 余與伯勖. 率爾而入. 庭中有牧丹數本半謝花甚紅. 百結衲子廿餘. 方荷袈裟. 梵唄相逐. 回旋甚疾. 余問之. 云. 精進道場也. 伯勖頗解之曰. 其法精而無雜. 進而不退. 晝夜不息. 以爲作佛之功. 稍有昏惰. 其徒中捷者一人. 以木長板. 拍而警之. 使不得惱睡. 余曰. 爲佛亦勞矣. 學者於作聖之功. 做得如此. 則豈無所就乎. 菴有六環錫杖. 甚古物也. 日亭午. 由舊路而返. 下瞰石澗. 暴漲如湖. 遙指上無柱君子寺. 欲往而不可渡矣. 山路將下甚側. 足不停地. 遂以杖拄前滑瀡而下. 鞍馬已候於山下. 騎行纔移一步. 吾所乘獨蹇一足. 如下舂然. 顧謂伯勖曰. 蹇驢風味. 詩家固不免矣. 沿澗北崖. 東行至龍游潭. 潭南北. 幽窅奇絶. 塵凡如隔千里. 貞叔先待於潭石上. 具饌以待. 點罷遂行. 時適新晴. 水襄兩崖. 潭之奇狀. 不可得而窺矣. 貞叔云. 此佔畢公爲郡時禱雨齋宿處也. 潭石鱗鱗. 如田之畇畇. 多宛然之迹. 又有石如瓮如金鼎類者. 不可勝紀. 民以爲龍之器皿也. 殊不知山澗湍急. 水石流轉. 相磨之久. 而至於成形. 甚矣. 細民之不料事而好誕說也. 由潭而東. 路極險阨. 下臨千尺. 竦然如墜. 人馬脅息而過者幾三十里. 隔岸望頭流之東麓. 蒼藤古木之間. 指點先涅古涅等方丈. 不知其幾也. 一葦如隔弱水. 雖欲跋一步以登而不可得矣. 路漸低而山漸夷. 水漸安流. 有山自北而斗起爲三峯. 其下居民僅十數屋. 名曰炭村. 前臨大川. 伯勖曰. 此可居也. 余曰. 文筆峯前. 尤可卜也. 前行五六里. 篁竹林中. 有古寺曰巖川. 土壤平廣. 可以廬其居也. 由寺而東一里. 峙壁千尋. 人鑿斜逕於壁間而行一里許. 踰一小峴北行. 出貞叔田園之下. 貞叔邀請不已. 日已暮. 又恐雨益甚水益漲. 辭曰. 王子猷. 到門而返. 不見安道. 況今與貞叔共數日之遊. 不必更入門矣. 貞叔謝以足疾. 未得卒陪杖履云. 與之別. 曛黑投沙斤驛. 兩股疼痛. 更不可步.
3. 단속사를 거쳐 오대사에 묵다
16일, 갑진일.
이틑날 천령에서 따라온 사람들을 모두 돌려보냈다. 말을 타고 1리 정도 가서 큰 내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갔는데 모두 엄천(嚴川)의 하류였다. 서쪽으로 푸른 산을 바라보니 봉우리가 첩첩이 빽빽하게 들어섰는데 모두 두류산의 지봉(支峯)들이었다. 정오에 산음현(山陰縣)에 이르렀다. 환아정(換鵝亭)에 올라 기문(記文)을 보니, 북쪽으로 맑은 강을 대하니, 유유하게 흘러가는 물에 대한 소회가 있었다. 그래서 잠시 비스듬히 누워 눈을 붙였다가 일어났다. 아! 어진 마을을 택하여 거처하는 것이 지혜요. 나무 위에 깃들여 험악한 물을 피하는 것이 총명함이로구나. 고을 이름이 산음이고 정자 이름이 환아(換鵝)니, 아마도 이 고을에 회계산(會稽山)의 산수를 연모하는 사람이 있었나 보다. 우리들이 어찌 이곳에서 동진(東晉)의 풍류를 영원히 이을 수 있겠는가.
산음을 돌아 남쪽으로 내려와 단성(丹城)에 이르렀는데, 지나온 계곡과 산들이 맑고 빼어나며 밝고 아름다웠으니, 모두 두류산에 서린 여운이다. 신안역(新安驛)에서 10리 정도 떨어진 곳에서 배로 나루를 건너 걸어서 단성에 이르러 관에 투숙했다. 나는 이곳을 단구성(丹丘城)이라고 바꾸어 부르며 신선이 사는 곳으로 여겼다. 단성의 수령 최경보(崔慶甫)가 노자를 후하게 보내왔다. 오죽(烏竹) 백여 그루가 있어, 지팡이로 삼을 만한 것을 두 개를 베어 백욱과 나누었다.
단성에서 서쪽으로 15리를 가서 험하고 굽은 길을 지나니 넓은 들판이 나왔는데, 맑고 시원한 시냇물이 그 들판의 서쪽으로 흘렀다. 암벽을 따라 북쪽으로 3, 4리를 가니 계곡의 입구가 있어서 들어서니 바위를 깎은 면에 ‘광제암문(廣濟嵒門)’이라는 네 글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글자의 획이 힘차고 예스러웠다. 세상에는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의 친필이라고 전한다. 5리쯤 가자 대나무 울타리를 한 띠집의 피어오르는 연기와 뽕나무밭이 보였다. 시내 하나를 건너 1리를 나아가니 감나무가 겹겹이 둘러 있고, 산에는 모두 밤나무였다.
장경판각(藏經板閣)이 있는데 높다란 담장으로 둘러져 있었다. 담장의 서쪽으로 백 보를 올라가니 숲 속에 절이 있고, 지리산 단속사(智異山斷俗寺)라는 현판이 붙어 있었다. 문 앞에 비석이 서 있는데, 바로 고려시대 평장사(平章事) 이지무(李之茂)가 지은 대감사명(大鑑師銘)이었다. 완안(完顔)의 대정(大定) 연간에 세운 것이었다. 문에 들어서니 오래된 불전(佛殿)이 있는데, 주춧돌과 기둥이 매우 질박하였다. 벽에는 면류관(冕旒冠)을 쓴 두 영정(影幀)이 그려져 있었다. 거처하는 승려가 말하기를, “신라의 신하 유순(柳純)이 녹봉을 사양하고 불가에 귀의해 이 절을 창건하였기 때문에 단속(斷俗)이라 이름하였고, 임금의 초상을 그렸는데, 그 사실을 기록한 현판이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그 말을 비루하게 여겨 초상을 살펴보지 않았다.
행랑을 따라 돌아서 건물 아래로 내려가 50보를 나아가니 누각이 있었는데 매우 빼어나고 옛스러웠다. 들보와 기둥이 모두 부패하였으나 그래도 올라가 조망하고 난간에 기댈 만하였다. 누각에서 앞뜰을 내려다보니 매화나무 두어 그루가 있는데, 정당매(政堂梅)라고 전하였는데 바로 문경공(文景公) 강맹경(姜孟卿)의 조부 통정공(通政公) 이 젊은 시절 이 절에서 독서할 적에 손수 매화나무 한그루를 심었고 뒤에 급제하여 벼슬이 정당 문학에 이르러 이 이름을 얻게 되었다. 자손들이 대대로 북돋워 번식시켰다고 한다.
북문으로 나와서 곧장 시내 하나를 건넜는데, 덤불 속에 신라 병부령(兵部令) 김헌정(金獻貞)이 지은 승려 신행(神行)의 비명(碑銘)이 있었다. 당나라 원화(元和) 8년(813)에 세운 것으로 돌의 결이 거칠고 추악하였으며, 그 높이는 대감사비에 비해 두어 자나 미치지 못하고, 문자도 읽을 수가 없었다. 북쪽 담장 내에 있는 정사(精舍)는 절의 주지가 평소 거처하는 곳이었는데, 주위에는 동백나무가 많았다. 그 동편에 허름한 집이 있는데, 치원당(致遠堂)이라 전해온다. 당 아래에 새로 지은 건물이 있는데, 매우 높아서 그 아래에 5장(丈)의 깃발을 세울 만하였는데 이 절의 승려가 수를 놓아 만든 천불상(千佛像)을 안치하려는 것이었다. 절간이 황폐하여 승려가 거처하지 않는 곳이 수백 칸이나 되었다. 동쪽 행랑에는 석불(石佛) 5백구가 있는데, 그 기이한 모양이 각기 달라 형용할 수 없었다.
주지가 거처하는 정사로 돌아와 절의 옛 문서를 열어보았다. 그중에 백저(白楮) 세 폭을 연결한 문서가 있었는데, 정결하고 빳빳하게 다듬어져 요즘의 자문지(咨文紙)같았다. 그 첫째 폭에는 국왕 왕해(國王王楷)란 서명이 있으니, 바로 인종(仁宗)의 휘(諱)이다. 둘째 폭에는 고려 국왕 왕현(高麗國王王睍)이란 서명이 있으니, 곧 의종(毅宗)의 휘인데, 바로 고려 국왕이 대감국사에게 보낸 문안 편지였다. 셋째 폭에는 대덕(大德)이라 씌어 있고, 황통(皇統)이라고도 씌어 있었다. 대덕은 몽고 성종(成宗)의 연호인데, 그 시대를 고찰해보면 합치되지 않으니, 자세히 알 수 없다. 황통은 금(金)나라 태종(太宗)의 연호다.
이를 보면, 고려 인종․의종 부자는 오랑캐의 연호를 받아들였던 것이고, 이들이 이처럼 선불(禪佛)에게 삼가하였지만, 인종은 이자겸(李資謙)에게 곤욕을 당했고, 의종은 거제(巨濟)에 유배되는 곤욕을 면치 못했으니, 부처에게 아부하는 것이 국가에 이로울 것이 없는 것이 이와 같도다. 또 좀먹은 푸른 비단에 쓰인 글씨가 있었는데, 서체는 왕우군(王右軍)과 유사하고 필세(筆勢)는 놀란 기러기 같아서 내가 도저히 견줄 수 없을 정도였으니, 기이하도다. 또 노란 명주에 쓴 글씨와 자색 비단에 쓴 글씨는 그 자획이 푸른 비단에 쓴 글씨보다 못하였고, 모두 단절된 간찰(簡札)이어서 그 문장도 자세히 알 수가 없었다. 또 육부(六部)에서 함께 서명한 붉은 칙서(勅書) 한 통이 있는데. 지금의 고신(告身)과 같은 것으로 절반이 빠져 있었지만, 옛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보고 싶어 할 만한 것이었다.
백욱이 발이 부르터 산에 오르길 꺼려해서 하루 쉬었는데, 석해(釋解)라는 승려가 있어서 대화할 수 있었다. 저물녘에 진주 목사 경태소(慶太素)가 광대 둘을 보내 각자의 기업(技業)으로 산행을 즐겁게 하였고, 공생(貢生) 김중돈(金仲敦)을 보내 붓과 벼루를 받들고 시중을 들게 하였다. 날이 밝을 무렵 가랑비가 부슬부슬 내려 도롱이를 입고 삿갓을 쓰고서 길을 떠났다. 광대가 생황과 피리를 불면서 먼저 길을 가고, 석해는 길잡이가 되어 동네를 나갔다. 돌아서서 바라보니, 물이 감싸고 산이 에워싸서 집터는 그윽하고 지세는 아늑하여, 진실로 은자(隱者)가 살 만한 곳이었지만, 애석하게도 지금은 승려들이 사는 곳이 되어 고사(高士)들이 사는 곳이 되지 못하였다.
서쪽으로 10리를 가서 큰 시내를 건넜는데, 바로 살천(薩川)의 하류였다. 살천을 따라 남쪽으로 비스듬히 가다가 서쪽으로 대략 20리를 지났는데, 모두 두륜산의 기슭이었다. 들은 넓고 산은 낮았으며 맑은 시내와 흰 돌이 모두 볼 만하였다. 방향을 바꾸어 동쪽으로 향하면서 계곡을 따라가는데 냇물은 맑고 돌은 자른 듯하였다. 또 북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시냇물을 아홉 번이나 건넜고, 다시 동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판교(板橋)를 건넜다. 수목이 빽빽하여 우러러 하늘을 볼 수 없었고 길은 점점 높아졌다. 6, 7리를 가니 압각수(鴨脚樹) 두 그루가 마주 보고 서 있었는데, 크기는 백 아름, 높이는 하늘에 닿을 듯하였다.
문에 들어서니 오래된 비석이 있는데, 그 머리에 오대산수륙정사기(五臺山水陸精社記)라고 씌어 있었다. 읽으면서 좋은 글임을 새삼 깨달았는데, 다 읽어보니 바로 고려의 학사(學士) 권적(權適)이 송나라 소흥(紹興) 연간에 찬술한 것이었다. 절에는 누각이 있었는데 매우 장대하여 볼만 하였고 방이 매우 많았으며, 깃발은 마주보고 있었다. 오래된 불상이 있었는데, 한 승려가 말하기를, “이 불상은 고려 인종이 주조한 것입니다. 인종이 쓰던 쇠로 만든 여의(如意)도 남아있습니다.”라고 하였다. 날은 저물고 비도 내려 절에서 묵기로 했다.
翌日. 盡還天嶺來隨人. 騎馬行一里許. 竝大川而南. 皆巖川之下流. 西望蒼山. 纍纍然抑抑然. 皆頭流之支峯也. 午投山陰縣. 登換鵝亭覽題記. 北臨淸江. 有逝者悠悠之懷. 少攲枕而覺. 噫. 擇而處仁里. 知也. 棲而避惡水. 明也. 縣號爲山陰而亭扁以換鵝. 其有慕於會稽之山水者乎. 吾輩安得於此永繼東晉之風流乎. 由山陰而南及丹城. 所歷溪山. 淸秀明麗. 皆頭流之緖餘也. 新安驛十里. 舟渡津而步. 投館丹城. 余喚丹丘城而仙之. 丹之守崔慶甫. 資送加厚. 花砌上有烏竹百竿. 擇其可杖者. 根斬二竿. 分與伯勖. 自丹城西行十五里. 歷盡阻折. 得寬原. 一淸泠注其原之西. 緣崖而北三四里. 有谷口. 入谷有削巖面. 刻廣濟喦門四字. 字畫硬古. 世傳崔孤雲手迹也. 行五里許. 見其竹籬茅屋. 煙火桑柘. 渡一溪進一里. 柹樹環匝而山之木. 皆栗也. 有藏經板閣. 巋然繚以周垣. 垣之西上百步樹林間有寺. 扁曰智異山斷俗寺. 有碑立門前. 乃高麗平章李之茂所撰大鑑師銘. 完顏大定年間建也. 入門有古佛殿. 礱斲甚樸. 壁畫二冕旒. 居僧云. 新羅臣柳純者. 辭祿舍身. 創此寺. 因名斷俗. 圖其主之像. 有板記在焉. 余卑之不省. 循廊而轉. 行長屋下. 進五十步. 有樓制甚傑古. 梁柱橈腐. 猶可登眺憑檻. 臨前庭有梅數條. 相傳政堂梅. 乃姜文景公之祖通亭公. 少讀書於此. 手植一梅. 後登第. 官至政堂文學. 遂得名. 其子孫世封植之云. 出北門. 驀過一澗. 榛荒間有碑. 乃新羅兵部令金獻貞所撰僧神行銘. 李唐元和八年建也. 石理麁惡. 其高不及大鑑碑數尺. 文字不可讀. 北垣之內有精舍. 住持所燕居也. 繞舍多山茶樹. 舍之東有弊宇. 世傳致遠堂. 堂之下有新構一架極高. 其下可建五丈旗. 寺僧以此欲安織成千佛之像也. 寺屋之廢. 而僧不居處者. 多數百架. 東廊有石佛五百軀. 逐軀各異其形. 怪不可狀. 還就住持之舍. 披寺之故. 有白楮紙連三幅. 搗鍊精勁. 如今之咨文紙. 其一署國王王楷. 卽仁宗諱也. 其二署高麗國王王晛. 卽毅宗諱也. 乃正至起居於大鑑師狀也. 其三書大德而一書皇統. 大德則蒙古成宗之年也. 考其時不合. 不可詳. 皇統則金太宗年也. 仁毅父子. 旣稟夷狄之正朔. 又致勤於禪佛如是. 而仁宗困於李資謙. 毅宗未免巨濟之厄. 佞佛之無益於人國家. 如此夫. 又有蠹餘靑綾書. 字體類右軍. 勢如驚鴻. 不可得以附翼. 奇矣哉. 有黃綃書者. 紫羅書者. 其字畫下於靑綾書. 而皆斷簡. 其文亦不可詳矣. 又有六部合署. 朱勅一通. 如今之告身. 而亦逸其半. 然亦好古者之所欲觀也. 伯勖足繭. 憚於登陟. 遂留一日. 有釋該上人者可語. 薄暮. 晉牧慶公太素. 遣兩伶. 各執其業. 以娛山行. 又遣貢生金仲敦. 以奉筆硯. 黎明. 細雨絲絲. 蓑笠以行. 伶執笙笛先路. 而釋該爲鄕導出洞. 回望則水抱山圍. 宅幽而勢阻. 眞隱者之所盤旋也. 惜其爲緇流之場. 而不與高士爲地也. 西行十里. 涉一巨川. 乃薩川之下流也. 由川而南. 斜轉而西. 約行二十里. 皆頭流之麓也. 野闊山低. 淸川白石. 皆可樂也. 折而東向. 行澗谷. 澗水淸. 石斷斷然. 又折而北行. 九涉一澗. 又東折而行. 渡一板橋. 樹木蓊鬱. 仰不見天. 路漸高. 行六七里. 有二鴨脚樹對立. 大百圍高參天. 入門有古碣石. 額曰五臺山水陸精社記. 讀之殊覺好文. 卒業則乃高麗權學士適. 趙宋紹興年中撰也. 寺有樓觀甚偉. 間架甚多. 幡幢交羅. 有古佛. 僧言高麗仁宗所鑄. 仁宗所御鐵如意. 亦在云. 日暮雨濕. 遂止宿.
4. 묵계사를 둘러보다
17일, 을사일.
이튿날 아침 절의 승려가 짚신을 선물로 주었다. 골짜기를 빠져나와 북쪽으로 가는데, 오른편은 산이고 왼편은 냇물이어서 길이 매우 위험하였다. 숲속을 10리쯤 가니 골짜기 입구가 조금 열렸다. 기름진 들판이 있어 밭을 갈며 살 만하였다. 또 10리를 가니, 거처하는 백성이 나무를 휘거나 쇠를 달구는 것을 생업으로 삼고 있었다. 내가 말하기를, “꽃이 피면 봄인 줄 알고 잎이 지면 가을이라 느낀다더니, 여기에 이러한 것이 있구나.”라고 하였다. 따라온 승려가 말하기를, “여기는 땅이 궁벽하여 이정(里正)이 기탄없이 횡포를 부려 백성이 번잡한 조세와 무거운 역으로 고통받은지 오래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5리를 가서 묵계사(默溪寺)에 이르렀다. 절은 두류산에서 가장 빼어난 사찰로 이름이 나 있었지만, 와서 보니 전에 듣던 것 처럼 빼어나지는 않았다. 다만 절간이 밝고 아름다우며 사이사이 금실을 넣어 특이한 비단으로 청홍색으로 만든 부처의 가사와 거처하는 20여명의 승려들이 묵묵히 정진하는 모습이 금대암의 승려들같이 볼 만하였다. 조금 쉬었다가 말을 돌려보내고 지팡이를 짚고 왕대 숲을 헤치며 나아갔는데, 길을 잃고 헤매다가 간신히 좌방사(坐方寺)에 이르렀다. 거주하는 승려는 3, 4명뿐으로 절 앞의 밤나무가 모두 도끼에 찍혀 넘어져 있었는데, 승려에게 왜 이렇게 되었냐고 물었더니, 한 승려가 말하기를, “백성들 중에 밭을 일구려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렇게 되었는데, 못하게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탄식하며 말하기를, “높은 산 깊은 골짜기까지 이르러 개간하여 경작하려 하니, 국가의 백성이 많아진 것인데, 그들을 부유하게 하고 교화시킬 방법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조금 앉았다가 광대를 불러 생황과 피리를 불게 하여, 답답하고 울적한 마음을 떨쳐버리려 하였다. 누더기 승복을 걸친 한 승려가 뜰에서 서성이다가 덩실덩실 춤을 추는데 그 모습이 배를 움켜잡고 웃을 만하였다. 드디어 그와 함께 앞 고개로 오르는데, 나무가 길을 가로막고 있어서 그 위에 올라앉아 보니 앞뒤에 큰 골짜기가 있었다. 푸른 기운이 어스름한 저녁나절 생황소리가 피리와 어우러져 맑고 밝은 소리가 산과 계곡을 울려 정신이 상쾌해졌다. 흥이 다하여 바로 내려오면서 시냇가 넓은 바위에 앉아 발을 씻었는데, 이날도 여전히 음산하여, 동상원사(東上元寺)에서 묵기로 하였다. 한밤중에 깨었는데, 별과 달빛이 환하여 깨끗하고 두견새가 어지럽게 울어대 정신이 맑아져 잠이 오지 않았다. 나의 서형(庶兄) 김형종(金亨從)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내일은 천왕봉에 상쾌한 마음으로 올라 구경할 수 있을 것이네.”라고 하여, 일찌감치 행장을 꾸리게 하였다.
詰朝. 寺僧以芒鞋爲贈. 出洞而北. 右山左水. 道甚懸危. 行樹林中十里許. 洞口稍開豁. 有膴原可以耕而食. 又十里有居民. 揉木爲業. 鍛鐵爲生. 余曰. 花開爲春. 葉落爲秋. 有是夫. 從僧曰. 地僻而里正無忌憚. 民苦於賦煩役重. 久矣. 出五里抵默契寺. 寺在頭流. 最名勝刹. 而及寓目. 殊不愜前聞. 但寺宇明媚. 以間金奇錦. 靑紅雜製. 以爲佛袈裟. 居僧廿餘. 默然精進. 如金臺而已. 少憩. 舍馬扶筇. 披苦竹林. 迷失道. 間關抵坐方寺. 居僧只三四. 寺前栗樹. 皆爲斧斤斫倒. 問僧胡然. 僧曰. 民有欲田之者. 禁亦不能. 余歎曰. 太山長谷. 耕墾亦及. 國家民旣庶矣. 當思所以富而敎之也. 少坐. 呼笙笛吹破湮鬱. 有鶉衣一衲. 班舞於庭. 蹲蹲然其氣象可掬. 遂與之俱登前峴. 有木橫道. 坐其上. 前後臨大壑. 晩色蒼然. 笙聲和笛. 寥亮淸澈. 山鳴谷應. 神魂覺爽矣. 興盡乃下. 坐溪邊盤石濯足. 是日猶陰. 遂宿東上元寺. 夜半夢覺. 星月皎潔. 杜宇亂啼. 魂淸無寐. 吾庶兄金亨從喜報曰. 明日天王峯. 可快意登覽也.
첫댓글 남효온 선생은 덕산사에서 황금능선 넘어에 있는 보암에서 동상원사를 보며 법계사를 찾아갑니다.
김일손 선생은 묵계사, 좌방사를 지나 동상원사 묵고 세존봉(법계사)으로 오릅니다.
동상원사 위치는 두개의 유람록 교집합을 생각해보면 중산리나 순두류 학습원 부근이 아닐까 추측됩니다
민선생님이 보암 추정터를 찾으셨는데
구곡산 상단부, 댐 맞은편에 있다고 하시네요.
남효온의 기록에 7개의 암자터가 있다고 하는데 3개는 못 찾으셨답니다.
현장을 답사해보면 이해가 될 것 같습니다.
@도솔산인 여긴가요?
형님 잘 배우고 갑니다.
봉산님 집이 악양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