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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월은 음력으로 새 해가 시작되는 첫째 달이다. 정월 초하루 설날이 지나고 보름달이 휘영청하게 처음 뜨는 날이 정월대보름이다. 분강촌(부내ㆍ분천동) 아랫마을(아랫마)로 들어오는 삽지껄 어귀에 태산처럼 우뚝 서 있는 새당나무 아래로 도타이 가족을 이루고 있는 크고 작은 당나무 자손들이 정초부터 찾아오는 손님맞이로 부산하다. 설날이 지난 지 보름이 되었는데도 마실의 터줏대감 나무인 구당나무와 새당나무를 찾는 손님들의 발걸음이 끊이질 않았다.
부엉새들과 소쩍새들과 까막까치들과 비들기들과 종달새들과 참새들과 물새들의 행렬이 새당나무 숲으로 이어졌다. 춘하추동 사계절 동안 아낌없는 쉼터를 내주는 새당나무에게 분강촌 군조들이 바치는 과세 문안 인사인 양 싶었다.
동네 어른들과 아이들도 대보름날을 맞아 새당나무를 찾았다. 섣달그믐날부터는 아랫마 연세든 족친들이 삼삼오오 사랑방에 모여서 깨끗하고 튼실한 볏집을 가지고 길다란 새끼줄을 꼬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정월 초순경에 손 없는 길한 날을 택해 먼동이 트기 전에 여명이 밀양대서 서성거릴 무렵 타래타래 감아둔 새끼줄을 풀어서는 당집 주변의 느티나무 군락에 사연 많은 축원을 올리며 이리저리 정성껏 걸었다. 정월대보름날 마을 사람들이 신성하게 치르는 당집 제사를 얼마 앞두고 동네에 들어오는 잡귀와 액운을 막고 한 해 동안 마실의 안녕과 무탈을 기원하는 일종의 부적이자 제방이었다. 새당나무는 몸집이 억수로 웅장하고 세상을 안아주는 품이 넉넉했다. 천방둑 높이 만큼이나 커다랗고 풍성한 몸태로 널따란 그늘을 만들어서 분강촌 온 생명들에게 모자람이 없는 적선을 베풀었다. 무성한 가지에는 크고 작은 날짐승들이 집을 짓고 대가족을 거느리는데도 부족함이 없었다.
부내 사람들은 이 전설의 구당나무와 새당나무를 마치 동네의 큰 어른을 대하듯 유순히 따르고 숭상했다. 태고의 수령이 주는 관대함과 인자함은 사람에 비할 바가 못되었다. 마을 노인들은 새당나무에게 지난한 삶을 넋두리하며 위안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분강촌을 찾는 타지 사람들은 이 신령스러운 서낭당 주변과 새당나무 숲을 두려워 하며 쉬이 범접하지 못했다. 한정없이 범상하되 위엄이 있었고 자애로움이 넘쳐나되 경외함이 가득히 묻어났다.
족친 할배들은 구당나무와 새당나무를 농암할배가 분강촌 자손들을 대대손손 온전히 건사하기 위해 심어놓은 터줏대감 수호신이라고 했다. 어느 누구도 정확한 나이는 모르지만 농암바위와 분천방구 그리고 감퇴바우와 같은 전설의 숭대들과 연갑이라고도 했다. 효잠 할매와 녹동 할매는 서낭당 할매신과 새당나무 할배신이 당집 앞에서 서성이는 모습을 여러 번 본 적도 있다고 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구당나무와 새당나무에는 성결한 정령이 적실히 깃들어 있다고 믿었다. 마실 아이들이 이 장대한 나뭇가지에 올라가서 노는 모습은 흡사 할아버지가 손자를 보듬는 인자한 모습과도 닮아 보였다. 부내 사람들은 수백 년 동안 구당나무와 새당나무를 통해 마을의 길흉을 예언하고 평안을 기원하는 기복의 대상으로 삼아왔다.
밤이 주는 정적의 깊이는 두려움과 비례한다. 환한 낮에는 노소 할 것 없이 새당나무 아래에서 발(가렴)을 피고 살다시피 했지만 칠흑 같은 밤이 되면 어느 누구도 이 터줏대감이 편안히 쉬는 것을 방해하려 들지 않았다. 아니 어둠이 내리면 근접할 수 없는 근엄한 기운이 새당나무 주변을 감쌌으며 서낭당 주위를 둘러싼 당나무 숲에는 두려움과 외경심을 불러일으키는 정령들의 깊은 숨소리만 들리는 듯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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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강촌 뒷동산 송곳배알 위로 정월대보름달이 휘영청하게 높이 솟아올랐다. 신작로 바깥에 있는 우릉골 할매네 청보리밭에서는 망우리놀이가 한창이었다. 아직도 날이 추운 봄밑이라 밭에는 작물도 없고 또한 밭이 넓어서 걸리적거리는 것도 없고 또 뒷산과 한참 떨어져 있어서 산불이 일어날 일도 없었다. 아이들이 쥐불놀이로 야단을 지겨도 대보름날 만큼은 동네 어른들도 별말 없이 그냥 넘어갔다. 대보름날이 아니면 난리가 날 일이었다. 아마도 정월대보름날이고 어른들 또한 유년시절에 조상들로부터 내려오던 민속놀이를 따라서 답습했던 추억이 있기 때문이라 여겨졌다.
천방둑 위에도 혼불 같은 불빛들이 마구 번쩍번쩍 눈에 띄었다. 아랫마 아이들이 관솔이 벌겋게 잉글거리는 불잉거리를 간스메(통조림 깡통) 깡통에 넣고 천방둑 위에 올라가서 마구 빙빙 돌리다가 공중으로 각중에 냅다 던지면 깡통에서 타던 불씨들이 하늘에서 여러 갈래로 퍼져서 떨어지는 모양새가 마치 불꽃놀이를 하는 것처럼 멋지게 보였다.
선돌할매네 사랑방에서는 저녁인데도 마을 청년들이 아랫마(아랫마을) 윗마(윗마을)로 패를 나누어서 윷놀이를 하고 있었다. 아재요 행님요 할배요 하며 잘 놀다가도 항상 윷말을 놓을 때면 그것도 자기네 편끼리 마치 철천지 웬수처럼 시다이 싸우는 일이 허다했다. 또 괜히 상대방 윷말에 훈수를 들며 정신을 팔다가 자기네 윷말이 졸지에 비명횡사하는 경우도 종종 발생했다. 그러면 또 일수불퇴라고 옥신각신하며 생난리를 지겼다. 윷판에 윷말을 놓는 순간은 마치 노름꾼들이 하토판을 지켜 보는 것처럼 양편 모두의 눈에서 독기가 흘렀다. 생각건대 민속놀이 가운데 한편끼리 사마귀처럼 죽잡고 싸우는 놀이는 아마도 매번 윷말을 놓아야 하는 윷놀이 뿐인 것 같았다. 어느 때는 말판을 뒤집어엎는 큰 변고가 터지기도 했다. 성정이 좋으신 선돌할배가 윷놀이를 하는 청년들이 추울까봐 장작불을 얼마나 피워 댔던지 방구들이 달아올라서 방바닥이 뜨시다 못해 빈대떡을 부쳐 먹어도 될 만큼 화끈화끈 거렸다. 풍산할매네 넓은 마당에서는 큰 멍석을 여러 개 펴 놓고 할매들과 아지매들이 모여 떡과 감주와 식혜를 먹으면서 달노래를 부르며 덩실덩실 어깨춤을 흥겹게 추었다.
망우리놀이를 끝낸 아이들은 아랫마 새벽할매네 건너방에 옹기종기 다시 모여 앉아서 밤늦게까지 대리놀이를 하며 놀았다. 축시로 접어들자 뒷동산 솔낭구 숲에 둥글게 걸쳐져 있던 대보름달이 점차 기울면서 마을을 건너 분강 위로 황홀하게 내려앉았다. 왕버들 아래로 적요하게 흘러가는 강물 위로 일렁이는 황금달빛이 한정없이 고왔다. 양수장 아래 강변 쑤(솔밭)에 앉아서 울던 부엉이 가족도, 사시사철 울고불고 야단지기던 구여울도 이 순간 만큼은 아름다운 전경에 취해서인지 소리를 내지 않고 조용히 이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새벽까지 대리놀이를 하면서 밤을 지새운 아이들이 인시에 접어들자 하나 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보름달이 빛을 잃고 기운이 부친 탓인지 귀가하는 실거랑 징검다리 길이 칠흑같이 깜깜했다. 발걸음은 재바르게 앞으로 가는 듯 한데 어찌 눈빛은 자꾸만 실거랑 위에 있는 고숫바우(곶이바위) 쪽으로 향했다. 갑자기 머리 속에 고숫바우에서 일어났던 안 좋은 오만 사고들이 다 떠오르며 머리카락이 쭈뼛쭈뼛 서는가 싶더니 이내 몸이 써늘해져오면서 소름이 오싹오싹 돋기 시작했다. 때마침 실거랑 도랑가에 있는 재봉이 아재 초막집 앞으로 훽 지나가는 살쾡이의 뒷모습에 시껍먹고 놀라서 장가지다시피 한 매란당인 몸을 겨우 추스려서 입에 거품을 물고 마구 윗마로 사정없이 내달았다.
신작로를 간신히 넘어서 드디어 윗마로 접어들었다. 그런데 영월할매네 거름테미 옆에서 갑자기 나타난 희끄무레하고 으시시한 토째비 그림자에 홀캐서 또 한 번 엄청난 공포와 한기를 느꼈다. 이윽고 우릉골 할매네 집 앞을 지나 원촌할매네 복상나무 밭을 삼십육계 줄행랑 쳐서 겨우 벗어났는가 싶었더니 웬걸 이번에는 길목을 떡 버티고 있던 개갈간지떼들이 마구잡이로 흙을 퍼붓고 도랑섶에서는 담부떼들까지 나타나서 고만 기절을 해 버렸다.
한동안 도랑 둔덕에 누워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어매~ 날 살려주소~" 하고 기진맥진하면서 소리치며 삽지껄 안으로 엉금엉금 겨우 기어 들어서자 그제서야 안도의 숨이 땅이 꺼질듯이 절로 나오며 고만 마루에 털썩 넘어졌다. 오늘 따라 마루 끝에 있는 감실이 벽장이 하나도 무섭지가 않았다. 택호가 구레실댁인 예수 할머니는 안방에서 손자가 왔는지도 모르시고 하느님 품에서 쿨쿨 잘도 주무시고 계셨다.
아~ 분강촌에만 왜 이리도 많은 온갖 물귀신들과 토째비들과 개갈간지들이 다 모여 살고 있는지... 도산골에 사는 모든 토째비들이 비단 부내 동네에만 다 모여 사는 듯 싶었다.
어제 대보름날에는 동네 어른들이 새당나무 아래에 있는 서낭당에서 서낭제를 지냈다. 서낭신은 분강촌의 전답과 마실을 지켜주는 수호신이다. 서낭제는 올 한 해 풍년 농사와 무사태평을 기원하는 동네 차원의 큰 행사인 당제堂祭인 것이다. 당집 제사가 끝나자 서낭대에 서낭신을 태우고 아랫마 윗마 할 것 없이 집집마다 돌아다니는 서낭대놀이로 온 동네가 떠들썩 했다. 서낭대 끝에 오색 빛이 나는 꿩 꽁지깃을 여러 개 꽂고서는 서낭대를 받든 대잡이 어른이 앞서가면 뒤에서는 서낭대놀이꾼들이 징과 꽹과리를 두드리며 막춤을 추면서 따라다녔다. 그러다가 갑자기 서낭신이 앉아있는 서낭대의 끝이 가파르게 기울어지면서 가리키는 집으로 마구 사정없이 뛰어들어갔다. 땅에 닿을 듯이 기울어진 길다란 서낭대를 어렵사리 받들고 비틀비틀 뛰어가는 모양새가 무척 힘들어 보였지만 어른들은 서낭신이 다 점지하는 일이라서 힘이 하나도 들지 않는다고 태연자약했다. 아이들인 우리는 그저 곧이곧대로 다 믿으면서 두려워 했다. 서낭대를 맞이한 집은 정결하게 상을 차려 놓고 정화수를 올리며 서낭신을 경건히 모셨다. 서낭신은 평상시에는 당집인 서낭당에 있지만 마을을 나들이 할 때는 서낭대에 신체神體를 의지하여 이동을 했다. 즉, 이때 만큼은 서낭대를 이동식 신당神堂이라고 보면 된다. 서낭신은 보통 정월대보름날 서낭대에 좌정하여 동네를 나들이 했다. 마을의 가가호호를 돌아다니면서 잡귀와 액운을 쫓아내고 막으며 동네를 지키는 수호신 역할을 단단히 야무지게 했다. 정월대보름날이 다가오기 얼마 전 길한 날에 서낭당 주변에 새끼줄을 쳐서 금역을 하는 것은 당집 제사와 함께 서낭신이 나들이를 하는데 있어 부정이 타지 않도록 주변을 정결히 하기 위해서다. 유년시절 분강촌에 살 때 당제는 물론 서낭신이 나들이 하는 것을 거의 매년 보았다. 아이들은 이 토속적인 전통 민속 행사를 서낭대놀이라고 불렀다. 두려우면서도 신성시 여기는 가운데 숭배하는 분위기였으며 또 한편으로는 기이함과 호기심을 동시에 자아내는 의미심장한 행사였다. 서낭신과 구당나무와 새당나무는 분강촌을 지켜주는 수호신이었으며 마을 사람들과 숱한 애환을 함께 해 온 친근하면서도 신령스러운 정령들이었다.
수몰 전 유년시절 분강촌에서 마지막 정월대보름을 보낸 지가 어엿 반세기를 넘어섰다. 객지에서 부초 같은 나그네 신세가 되어 대보름달을 쳐다보는 이내 맘은 심히 아리고 신산하다. 옛 동무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옛 어른들은 이제 모두 구당나무 새당나무와 함께 별이 되었다. 무심한 강물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말이 없다. 청산은 그저 "구름처럼 바람처럼 말 없이 살다가 가라" 하네♧.
♤분강촌 아랫마을에 살았던 조각예술가 이재홍 선생이 2020년 그린 수몰 전 1970년대의 분강촌 전경이다. 왼쪽 중앙에 있는 커다란 느티나무가 바로 그 전설의 새당나무이다. 새당나무 앞에는 솔밭과 천방둑이 보인다. 마실 중간에는 아랫마을(아랫마)과 윗마을(윗마)을 가로지르는 신작로가 뚜렷이 그려져 있다.
♤경기도 광릉수목원의 산림박물관에 있는 안동 임하댐 공사 때 수몰지역에서 가져온 수령 150년의 느티나무 밑둥치이다. 필자가 관리인을 보고 "이 정도 밑둥치이면 수령이 150년은 훨씬 더 되는 것 같은데 혹여 잘못 표기되지는 않았는가" 하고 의문을 제기했다. 왜냐하면 유년시절 고향 분강촌이 수몰 되기 전에 마실에 있었던 새당나무의 밑둥치가 이것보다 두 배나 더 크고 높고 넓었는데 수령이 족히 500여 년 정도는 되었기 때문이다. 느티나무는 보통 평균 수명이 천 년은 된다고 한다. 그래서 노거수 가운데 느티나무가 가장 많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나무의 밑둥치를 보니 그 옛날 분강촌에서 유년시절 함께 했던 자애로운 새당나무의 품과 웅대한 자태가 사무치게 떠올라서 박물관 화장실에 들어가서 아내 몰래 많이 울었다. 만약 안동댐이 없었다면 분강촌 터줏대감 나무 어른인 구당나무와 새당나무는 지금도 고향땅에서 타향살이에 지친 우리들을 보듬으며 한정없는 사랑으로 위로를 베풀고 있으리라.
♤1976년 안동댐 준공으로 분강촌은 강물 속으로 사라졌다. 몇 가구의 족친들이 지대가 높은 송티(송현)로 이전하여 작은 마을을 다시 만들었다. 옛날 분강촌에 있던 당집도 마을 앞 왼편 산자락으로 옮겨왔다. 몇 년 전부터는 정월대보름날 마실에 사는 몇몇 족친들이 모여서 서낭당 제사를 이어가고 있다. 깊은 그리움을 자아내는 광경이다.
"아~ 아직까지도 새당나무와 서낭당의 정령들이 살아 계신다면 이 애잔하고 처연한 사람들을 굽어살피리라~"
사진은 올해 정월대보름날 당집 제사를 지내는 광경이다. 부내 상우 아재가 서낭제를 주관했다. 첫번째 사진에서 잔을 올리고 있는 제주는 마을 이장인 상우 아재이다. 왼쪽부터 영훈이 형님, 춘봉이 아재, 상수 아재, 재랑이 아지매, 인이 할매 모습이 보인다. 1976년 안동댐 준공으로 분강촌이 수몰되면서 동네 뒷산인 영지산 너머 있는 넘티와 송티에 몇몇 족친들이 이전하여 새로운 마을을 형성해서 옛 분강촌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수몰 전 분강촌에 있던 당집도 송티 마을의 왼편 산밑으로 이건해왔다.
♤첫번째 사진은 1976년 안동댐 수몰로 인해 산 위로 이전한 현재 분강촌 마을이다. 몇 가구 되지 않으며 지금은 옛 사람들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옛날에 이곳을 송티라고 불렀다. 안동에 있는 예안을 지나 경상북도 산림과학박물관을 넘어 바로 오른편 마을이다. 두번째~네번째 사진은 눈이 많이 내린 올해 정월대보름날 촬영한 사진이다. 두번째는 이전한 송티에서 옛 분강촌 마을 쪽을 보고 찍은 전경이다. 산 아래로 내려가면 강물 속에 잠긴 옛날 분강촌이 망경창파의 모습으로 펼쳐진다. 세번째 사진은 송티 마을에서 옛날 분강촌으로 내려가는 구길(옛길) 입구이다. 사진 왼쪽 산자락에는 옮겨 온 당집이 있다. 네번째는 고수바위 맞은편 즉, 은앙쟁이에서 섬마 쪽을 보고 촬영한 전경이다. 저 강물 속에 고려 말엽 1350년경 농암 선생의 고조부인 이헌 공이 입향한 이래로 670여 년 동안 농암의 후손들이 정착했던 옛날 분강촌 마을이 안치되어 있다. 다섯번째 및 여섯번째 사진은 같은 당집이다. 도산서원 너머 웃토계 퇴계종택 아래에 있는 서낭당(성황당) 모습이다. 옛날 분강촌에 있던 당집도 이 모습와 유사했다. 다만 크고 작은 느티나무 군락이 넓게 퍼져 있었고 그 가운데 당집과 함께 새당나무가 우뚝 솟아있었던 것이 특징이다. 제일 위에 이재홍(이재필) 선생이 그린 그림을 보면 짐작을 할 수 있다. 다섯번째(웃토계 성황당) 및 일곱번째(단천 성황당) 사진은 도산골 고향 마을을 다녀간 어느 선생이 유튜브에 올린 영상을 캡쳐한 것이고 여섯번째 사진은 2021년에 필자가 촬영한 사진이다.
♤진경산수화의 걸작품으로 통하는 겸재謙齋 정선鄭敾(1676~1759)의 "계상정거도(현재 일천 원권 지폐 뒷면 산수화)"이다. 계상정거도는 도산서원을 중심으로 주변의 풍광을 조망한 그림이다. 이 산수화는 서원 마당 오른편 천연대에서부터 시작하여 도산서원을 중심에 두고 왼편 상단에 산과 강이 길게 접한 분강촌 동네까지를 사실적으로 그렸다. 분강촌은 농암과 일생을 함께 한 선생의 터전인 고향 마을이다. 그림 속에는 도산서원 앞 전경인 도산오곡에 해당하는 탁영담과 함께 그림 왼편 상단 분강촌 앞에 무성하게 적수되어 있는 도산사곡 지대인 분강 주변도 훤히 눈에 들어온다. 겸재는 산수화 속 중앙 상단 바로 좌측 산중턱에 고스란히 그림처럼 걸려 있는 농암이 건립한 애일당과 그리고 다시 그 왼편 솔나무 숲에 둘러쌓인 농암종택도 잊지 않고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조선 후기의 그림이지만 유년시절 우리가 뛰어놀았던 그 시절의 분강촌 산천과 진배없다.
♤내살미에서 도산골 관련 그림을 그려서 전시하고 있는 화가 권우선 선생의 작품인 "계상서당" 풍경이다. 도산서원 주차장을 넘어가면 웃토계 퇴계종택이 나온다. 종택 오른편 개울 건너 언덕에 있는 고즈넉한 정자가 계상서당이다. 산과 개울과 정자의 모양새와 전경이 소박한 퇴계선생의 성정과 어찌 이리도 닮았는지 경이롭기만하다.
계상정거도는 겸재 정선이 영조 1746년에 완성한 도산서원 주변의 풍광을 그린 진경산수화이다(보물 제585호). 위에 있는 계상정거도 그림을 자세히 보면 작은 정자 속에서 서책을 읽는 퇴계선생을 만날 수 있다. 퇴계종택 개울너머 있는 계상서당을 도산서원이 자리한 동취병산 오른편에 넣고 주변 산천을 그린 산수화가 바로 이 계상정거도라고 보면 정확하다. 계상정거도 속에는 시사단이 보이지 않는다. 시사단은 정조 때 건립되었다. 계상정거도 보다가 50년 뒤인 1796년에 세워진 관계로 계상정거도 속에는 당연히 없다. 분강촌 족친 상우 아재가 내살미에 갔다가 권우선 선생이 전시하고 있는 여러 그림 가운데 계상서당 그림을 직접 촬영해서 보내주었다(2024.3.3).
첫댓글 간스메 깡통에 못으로 구멍을 여러게 뚫어서 통풍이 되어 불이 잘타도록하고 손잡이로 철사줄을 매고 깡통속관솔나무에 불을 붙여서 논이나 밭에서 빙빙 돌리던 망우리 놀았던 어릴적 추억이 선하게 떠오르네 ...
불꽃이 떨어져 백프로(나이론) 옷에 떨어저 옷에 구멍이 빵빵뚫어저서 혼난적도 있고.
추억을 연상케하는 글 잘보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