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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현실주의
제1차 세계 대전 후 다다이즘의 뒤를 이어받아 프랑스에서 일어난시인, 화가들의 전위 예술 운동으로 인간을 이성의 속박에서 해방하고, 파괴와 창조가 함께 존재할 수 있는 지고점(가장 높은 경지)을얻으려고 한 20세기 전반기 최대의 예술 운동이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의 영향을 받아, 무의식의 세계 내지는 꿈의 세계의 표현을 지향하는 20세기의 문학·예술운동. 쉬르레알리슴이라고도 한다.
초현실주의라는 말은 1917년 시인 아폴리네르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는 처음에 쉬르나튀랄리슴이라는 명칭을 생각했으나, 철학용어로 오해받을 것을 염려하여 초현실주로 고쳤다고 한다.
초현실주의가 명확한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은 앙드레 브르통이 《쉬르레알리슴 선언》을 발간한 24년부터이며, 25년에는 이 운동의 첫 종합전이 파리에서 개최되었다. 초현실주의는 이성의 지배를 받지 않는 공상·환상의 세계를 중요시한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초현실주의는 사실주의나 추상예술과는 대립되는 것으로 간주하기 쉬우나,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달리의 작품 속에서 찾아볼 수 있는 세밀한 묘사력은 사실의 극치라고도 할 수 있으며, 또 A.마송, J.미로, M.에른스트의 작풍에도 추상화의 경향을 볼 수가 있다.
따라서, 이것은 기술적으로는 사실성·추상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타당하다. 초현실주의 뿌리를 찾는다면 그것은 다다이즘에서 찾아야 한다.
초현실주의 기원을 더 먼 곳에 찾아본다면, 그것은 당연히 입체주의 운동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것은 20세기의 예술운동 속에서 야수파나 표현주의 이상으로, 입체주의는 혁신적인 공간의식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한 개의 화면을 완벽한 평면으로 보는 관점이며, 일찍이 세잔이 추구한 원근법이라든지 전경·후경의 배치와는 별도의 구성, 별도의 공간개념을 필요로 하였다. 초현실주의 공간은 많은 경우, 상상적 공간이며 비현실의 공간이다.
따라서 초현실주의는 간접적으로 입체주의의 계열을 잇는 공간파악을 특색으로 하고 있다.
초현실주의는 그 때까지 빙산처럼 수중에 가리어 있었던 무의식의 영역에 눈을 돌렸다.
즉, 이성의 반대의 극점, 합리의 반대쪽의 세계이다.
초현실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조형이념을 표현방법으로는 예기치않은 것과의 만남이라는 의외성을 통한 경의를 제시하는 방법인 데페이즈망, 그리고 의식을 잠재워 우연성에 의지하는 오토마티즘등이 있다.
정교한 사실주의 기법으로 무의식의세계를 편집광적으로 표현한 달리,단순하면서도 정확한 표현을 통해 사물을 일상적 의미로부터 해방시켜 본질적인 의미로 복귀시키려한 마그리트, 심리근저의욕망을 몽한적으로 표현한 델보, 오토마티즘을 총해 무의식의 세계를 표현한 마송, 혼합체형식을 사용했던 에른스트와 투명회화 기법을 통해 고전적 이미지를 표현한 피카비아 등은 초현실주의 이론의 한 근간이 되었던 프로이트의 성의 심리학과 잠재된 무의식 속의 에로스를 보여주고 있다.
억압된 무의식의 세계를 가능한 한 참되게 표현하려고 하는 초현실주의의 갖가지 시도는 시·회화·사진·영화 속에서 현실적인 연상을 뛰어넘는 불가사의한 것, 비합리적인 것, 우연한 것 등을 표현하였다. 이런 표현은 당시의 모순된 현실과 결부되어 예술일반의 인식을 비약시키고 20세기 특유의 환상예술을 발흥(勃興)시키게 된다.
특히 미술의 경우 초현실주는 종래의 공간의식과는 별도의 비현실세계를 겨냥하고 있으므로, 당연히 새로운 테크닉을 필요로 하였다.
도밍게스의 데칼코마니, 에른스트의 프로타주, M.레이의 레요니슴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지만, 이와 같은 테크닉이 충격의 효과를 미리 계산하고 있었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벨기에의 초현실주의자인 R.마그리트에 이르면 큰 바위덩어리를 공중에 띄워놓는다든지, 낮이 밤으로 변해 있는 등 정신의 전위(데페이즈망)를 볼 수 있다.
이렇게 기법에 있어서의 데페이즈망과 정신에 있어 그것이 초현실주의의 최대의 표현기능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 달리(1904~1989)
극사실적 표현 기법으로 편집광적 환각을 표현하였으며, 중복된 사물들이 서로 배경이 되고 형태가 되는 착각을 이용하여 초현실을 이끌어 냈다. 1904년 스페인의 피그라스 태생인 살바도르 달리는 마드리드의 미술 (Beaux-Art) 학교에서 공부한 후 시카고로 가서 미래주의에 심취한다.
그 후에 그는 파리로 건너와 피카소를 만나고 미로에 의해 초현실주의자들에게 소개된 그는 편집광적 비평방법을 창안했고, 모든 수단과 기교의 솜씨를 발휘하여 환각에 싸인 세상을 묘사했다. 또 뷔뉘엘(Bunuel)과 함께 [안달루시아의 개](1928)라는 영화를 제작하기도 한 그는 시나리오작가이기도했다.
그런데 대중적인 과장 취향, 스캔들을 좋아하는 성향 때문에 초현실주의자들로부터 그룹에서 축출당하는 등 많은 일화를 남겼다. 1931년에 그린 [기억의 습작]은 그의 초현실주의를 상징하는 대표작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기억의 고집'에서의 시계들은 무서운 운명을 당하고 있는 자기학대적 대상물이다. 시계들은 마치 넙치가 납작하게 엎드려 상어에게 먹힐 준비를 하고 있는 것처럼 기계적 시간이라는 상어들에게 삼켜지리라는 걸 알면서도 바닷가에서 기다리고 있다. 시간의 흐름 속에 축 늘어진 시계들과 새 모습과 사람의 눈까풀을 동시에 연상시키는 기이한 형상들이 해변가에 놓여 있다.
달리는 꿈이라는 무의식 속에 나타난 의식의 잠재된 욕망- 특히 성적 욕망-을 이런 상징적인 물체들로서 표현하고 있는데, 시간의 존재에 대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신비로운 의식을 드러내는 것이다. 흐물흐물한 물체의 형상은 그의 많은 회화 속에서 계속해서 등장한다. 1937년의 [수면]이라는 작품에서는 인간의 형상이 늘어져 있는 유동의 물체가 나타난다. 무겁고 긴 머리가 몇 개의 가느다란 장대에 위태롭게 의지해 잡을 청하고 있다. 멀리 보이는 수평선 위의 배와 마을이 이 머리의 크기를 더욱 강조하고있다.
우리는 그의 이러한 그림들을 보면서 언제인가 한번 꾸었던 꿈의 헌 장면을 들킨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프로이드를 읽고 꿈과 무의식세계에 열광하기 시작 '편집광적 비평방식'을 개발하여 기존하는 형태에서부터 다른 형태들을 찾아냄으로써 자신의 강박관념과 환상등을 표현해낸다. 흐물렁거리는 형태, 두가지의미를 지닌 형태등이 등장하여 독특한 세계를 이루고 있다.
▶ 미로(1893-1983)
환각적인 자동기술법 회화를 거쳐, 오브제, 콜라주의 작품을 하였다. 상형 문자 같은 아동화적 화면을 창출하였다.
미로는 스페인의 화가이다. 1898년 바르셀로나 태생인 호안 미로가 그림을 시작한 것은 1912년경이다.
고전적인 화법을 익히고 있던 중 1919년 파리로 와서 1924년경에 초현실주의자들과 알게 되면서 그의 그림에는 환상적인 요소가 등장하게 된다.
클레(Klee)와 칸딘스키(Kandinsky)의 영향을 받은 그의 예술은 구상의 수법에서 떨어져 나와 많은 기호들의 세계 속에서 전개되었다. 그러한 기호들에서 선이나 색채는 어린시절의 상징들과 직접적인 서정성을 나타낸다. 그는 그림을 그릴 때 창작의 재료 앞에서 느끼는 감동에서 시작하여 정열 속에서 작업을 이루어 나아갔다.
그는 단순히 초현실주의자로서만 한정해서 설명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그가 초현실회화의 중요한 기법인 자동기술법을 사용하지 않았으며, 그의 그림은 무의식이나 꿈의 내용을 기술한 것이 아니라 고전적인 재현화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초현실주의가 막을 내린 1940년이후에도 계속해서 자신의 기법을 고수해 나가면서 자신만의 사조를 완성해 나아갔다. 일반 학교교육에 흥미가 없었던 그는 일찌기 열네살때 바르셀로나 미술학교에 들어간다.
1915년경 미로의 초기작품들은 입체주의와 야수주의를 혼합한 것이다. 그후 풀잎하나까지 풍경을 세밀히 분석한 세밀화의 시기를 맞는다. 1919년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를 접하게 된다.
1924년에는 시적 사실주의에서 완전한 몽상의 세계로 이행하고 있다. '베니스의 축제'에서 그의 꿈의 세계는 절정에 달한다. 빛이 만들어내는 비사실적인 공간위에 사실적인 것의 모습을 바꾸어 놓음으로써 상상의 셰계로 퍼져나가면서 각각의 모트프는 그자신고유의 독자성을 확보함으로써 하나의 기호로 변해나가게 된다. 미로는 초현실주의의이론적 토론이나 자동기술법에는 그다지 관심을 표명하지 않는다.
1920년대에는 네덜란드의 박물관을 방문하여 과거의 그림에서 영감을 받고 거기에서부터 모트브를 빌려 그것을 미로식의 형태와색채로 변형시키는 작업을 한다. 그후 여러 다양한 자료를 모아 콜라쥬와 아상블라쥬를 함으로서 '회화를 말살하는 '유머가 넘치면서도 공경성이 내표된 작품에 임한다.
2차 세계대전이 다가오자 그는 꿈의 세계특히 여성,새,별이 수놓인 밤의 세계로 도피한다. 1942년 다시 새와여자를 작품의 주요주제로 취급한다. 세계적 명성을 얻기 시작한 회화외에도 1944년에도 세라믹에도 착수하였고 페품을 이용한 아상블라쥬도 발표하였으며 오브제를 변형시킨 대형조각도 발표한다.
1928년과 29년사이 미로는 17세기 네덜란드의 실내화에서 영감을 얻어 많은 작품을 제작하게 된다. 그는 네덜란드 풍경화를 초현실주의적인 기법으로 번안해서 그리게 되는데, 환상적인 인물표현, 몽환적인 대상의 왜곡을 통해 해학적인 형상들을 창조해내고 있다.
사실적인 요소들을 과감하게 확대시키거나 축소시키는 기법이 바로 미로의 환상미술의 특징 중 하나이다.
빛이 만들어내는 비사실적인 공간위에 사실적인 것의 모습을 바꾸어 놓음으로써 상상의 세계로 퍼져나가면서 각각의 모티브는 그 자신 고유의 독자성을 확보함으로써 하나의 기호로 변해나가게 된다. 사실적인 요소들을 과감하게 확대시키거나 축소시키는 기법이 바로 미로의 환상미술의 특징 중 하나이다.
주요 작품 : 회화, 달을 보고 짖는 개 등
▶ 에른스트(1891-1976)
프로타주 기법을 통한 초현실 세계를 표현하였다.
1891년 독일의 브뤼힐 태생인 에른스트는 본에서 철학 공부를 한 인문학도였다. 1914년 한스 아르프를 알게 되고, 이즈음 아방가르드의 모더니즘 이념에 전도되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독일 표현주의자들과 함께 활동한다.
1919년 쾰른의 다다그룹에 참여하였으며 1922년에 파리로 와서는 초현실주의에 참여한다.
1919년 부터 입체파에 의해 이미 사용된 콜라주의 새로운 활용법에 전념,1925년 초칠을 하는 방법을 발명하였다.
초현실적인 작품이 등장하는 시기에는 데칼코마니도 사용했다. 풍부한 상상력을 가지고 현실을 생생하게 관찰하고 그것에다 자신의 환상을 펼쳐나간다.
자신의 환상과 스스로가 유발시킨 환각을 그리는 일이 그에게는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에른스트가 이야기하는 숲은 매우 빽빽하고 불길한 곳. 태양이 숲위에 비쳐도 빛이 숲속까지 깃들지는 않는다. 에른스트는 숲이 상상을 위한 완벽한 장소라고 또한 한 사람이 죽음에 처학게 되는 장소. 환상과 공포가 뒤섞이는 곳이다.
1920년에 최초로 콜라쥬기법을 활용한 작품을 발표하고 곧 이 기법은 포토몽타쥬, 유화 위에 콜라주등으로 확산되며 가시적인 것에 혼란을 야기하는 작품을 제작한다.
1921년에 그린 [셀레브의 코끼리]는 에른스트의 초현실주의 회화작품 중 첫번째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화면 중앙에 반은 코끼리를 닮은 동물의 형태를 하고,반은 기계와 같은 모습을 띄고 있는 몸집이 거대한 괴물이 들어 차 있다. 이것은 한편 난로와 같은 이미지를 띄고 있는데, 중앙으로 늘어뜨린 튜브 끝에는 소머리를 연상시키는 투구를 매달고 있다. 매우 낮게 자리잡은 수평선과 하늘 위로 헤엄쳐 다니는 물고기를 보면, 이 그림이 데 키리코의 형이상학회화에서 영향받았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한편 이 알 수 없는 괴물은 작가 자신의 어린 시절 추억과도 연관이 있다. 즉 꼬마 에른스트가 친구들과 함께 등하교길에서 점잖은 어른들을 놀리기 위해 불렀던 약간은음탕한 가시의 노래 속에 셀레브섬에 있는 엉덩이 큰 코끼리가 등장하는 것이다. 또한 차가운 기계 이미지와 화면 오른쪽 아래를 차지하고 있는 목이 없는 여인 누드는 에른스트가 직접 겪었던 1차대전의 악몽 같은 기억에서 기인한 것이다. [이 남자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에른스트가 브르통의 동료이자 시인이었던 폴 권유로 파리에 정착하게 된 다음해인 1923년에 그려진 것이다. 어두운 밤하늘을 가들 메우는 초생달과 둘로 나뉘어진 해, 그리고 그 바로 아래 남녀의 섹스가 상징적으로 그려져 있다.
날카로운 직선과 사선에 의해 분열되어 있는 화면 중앙에 산인지 굴뚝인지 알 수없는 원통이 땅위로부터 우뚝 솟아있다. 화면 맨 아래에는 인간의 내장 같기도 한유기체가 늘어져 있다. 제목이 암시하듯이, 관객은 이 그림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 수 없을 것만 같은 소외감을 느끼게 된다. 괴기스러운 악몽을 연상케 하는 이 작품은 구상과 추상의 요소가 뒤섞여 평범한 감상의 시각에는 난해하기만 하지만, 한편으로는 우리의 무의식을 펼쳐 놓은 것만 같은 상상도 가능하게 한다. 1924-38년에는 초현실주의활동에 적극 참여한다.
1925년 프로타쥬K(문지르기)기법을 고안한다. 이는 평면이 매끄럽지 않은 판 위에 종이를 놓고 연필로 그위를 문지름으로써 동물과 같은 형태를 발견해내는 기법으로 '명상적이고 환각적인 능력을 강화시키는 '데생을 만들어낸다.1926년에 발표한 '박물지'가 이 기법으로 모든 종류의 다른 재료에도 다채롭게 적용하였다. 나뭇잎, 헝겊조각, 등이 그것으로 이는 초현실주의적 꿈을 표현하는 수단이 되었다.
이 시기에 에른스트는 그 특유형태를 소재로 하여 밀도 높은 시성이 가득찬 세계를 보이는 회화를 발표한다. 그는 또한 로망 콜라주의 발명자이기도 하다. 1938년초현실주의와 결별한다. 프랑스로 돌아온 후 국제적명성을 얻게되어 1954년에는 비엔날레의 대상을 수상하고 마긋 에른스트이 작품은 인간정신의 탐구능력에 관해'회화를 넘어선 상태'를 밝히고자 하는 욕구를 담고 있다.
▶ 마그리트(1898-1967)
전혀 상관없은 사물을 병치시킴으로써 독특한 이미지를 드러내 보였다. 이후 '팝아트'에도 영향을 주었다. 마그리뜨는 1898년 벨기에 레신느 태생인 그는 브뤼셀의 미술아카데미에서 공부한 후, 회화에 대한 여러 실험을 시도했다.
어린 소년시절에 본 무성영화에서 큰 감명을 받아 상상력을 크게 키우게 되었다는 그는 1927년부터 1930년까지 프랑스에서 브르통과 가까이 지내면서 초현실주의의 화풍을 성립해냈다. 또한 보들레르, 말라메르와 미국의 괴기소설작가 에드가 알렌 포의 문학에서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마그리뜨는 대상을 세밀히 표현하면서 동시에 관례적인 틀로부터 그 대상을 떼어내어 다른 곳으로 공간이동을 시킨다. 그는 대상을 그것의 본질로 되돌려 놓기 위해서는 일상적 의미작용을 대상으로부터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꿈 속의 환각과 결합하는 통합적인 비젼 속에서 현실을 창조하고자 하였다.
그림에 나타나는 엄청난 형이상학 덕택에 '신비의 거장'이라는 별명을 얻었다.그의 최초 초현실적인 작품은 1925년과 1929년 사이에 시작되는데, 1928년에 그린 [폭풍우의 조짐]은 그 대표작 중의 하나이다. 여인의 석고 토루소, 튜바, 그리고 등의자의 서로 전혀 어울릴 것같지 않은 세 개의 오브제가 바다위 허공에 두둥실 떠올라 있다.
토루소는 화가의 아틀리에에, 튜바는 연주회장에서 그리고 등의자는 평범한 거실에서 볼 수 있는 물건들이지만 물결이 이는 바다와 어딘지 짐작하지 못할 한적한 해변가의 상공이라는 엉뚱한 장소로 옮겨 놓아, 이들 오브제가 가지고 있는 일상의 친밀성을 완전히 배제시켰다.그대신 우리는 세가지 물건과 바닷가, 그리고 푸른 하늘 모두에 낯설고도 엉뚱한 괴리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마그리뜨의 괴이함은 1934년에 그린 [붉은 모델]에서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이 작품은 마그리뜨의 콤바인 오브제(Combines Objects)즉 '혼합된 물체'라는 형식의 그림이다. 이 콤바인 오브제는 실제 현실에서는 절대 존재할 수 없는 새로운 형체지만, 그의 꼼꼼한 사실주의적 화법에 의해 그림안에서 그럴싸하게 존재함으로서, 보는 이로 하여금 당혹감과 혼동을 일으키게 한다. 구두와 발이 서로 다른 물체지만 우리는 습관적으로 사람의 발과 거기에 신겨지는 신발에 대해 친밀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여기 마그리뜨의 그림에서와 같이 신발의 앞부분이 다섯 발가락을 가진 사람의 발로, 발의 뒷굼치 부분이 낡은 구두로 연결되어있을 때 비로서 우리는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일상의 상식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는것이다.
그림을 통해 인간이 사고가 벌이는 연극을 표현한다는 개념.즉 외부의 모습이나 가시적인 것에서 출발하여 기이하면서도 시성이 담긴 사고의 양상을 보여준다는 회화개념을 마그리트는 갖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