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시 30:5) 이것은 아주 대조적인 단어들로 이루어진 구절이다. “울음” 대 “기쁨”, “저녁” 대 “아침”, 불확실하다는 뜻의 “일지라도” 대 확실하다는 뜻의 “오리로다.”
하루는 24시간이다. 여름에는 낮이 길고 밤이 짧은 반면, 겨울에는 낮이 짧고 밤이 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둠을 밤이라 칭하신 이래 지금까지 밤과 낮은 꼭 정해진 시간에 찾아온다.
우리가 궁금해 하는 모든 질문들에 대해 어떤 일정한 답이 있는 것은 아니다. 가령, 왜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언제나 그 은혜 가운데서 햇빛을 쬐고 있는 반면, 어떤 사람들은 어둠 가운데서 그토록 많은 시련을 당해야만 하는가 하는 질문이 바로 그런 것이다. 그 질문에 대해 나는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가지고 오직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라”는 확신만 줄 수 있을 뿐이다.
“저녁이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고난당하는 환자들은 “하나님께서 아침을 주셨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모든 사람들과 당신에게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올” 것이다.
하나님은 혹시 시계가 멈춘 것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 시계를 흔들어 보실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시계는 항상 가고 있으며, 그것도 아주 정확하기 때문이다.
살다 보면 당신 자신의 손조차 볼 수 없을 만큼 어두운 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절대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의 손이 거기 계시기 때문이다.
독일군이 영국제도(내가 알기로 코벤트리였던 것 같은 데)에 야간 폭격을 감행했을 때, 독일군의 급강하 폭격기가 떠난 후, 그곳 시민들은 그 폐허 속에서 죽은 사람, 죽어가는 사람, 잃어버린 사람들을 찾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들이 찾고 있는 사람들 중에 어떤 할머니 한 분이 영 보이지를 않았다. 그러다가 자신의 조그마한 침실에서 곤히 잠들어 있는 그 할머니를 누군가 발견했다.
“할머니, 이 북새통에 어떻게 그렇게 태평하게 주무실 수가 있어요?” 누군가 소리쳤다.
그 할머니는 즉시 아주 단호한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하 셨다.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는다’고 했어. 그래서 나는, 하나님이 깨어 계신데, 굳이 나까지 깨어 있을 필요는 없겠다고 생각했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언제나 아침이 찾아온다.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그러니 경건치 않은 부유한 사람들을 조금도 부러워하지 말라. 지금은 그 사람이 대낮 가운데 거하고 있을지 모르나, 사실 그는 끝없는 밤을 향해 다가가고 있는 것이다. 반면 하나님의 백성들은 지금 밤 가운데 있을지 모르나 영광스러운 아침을 향해 다가가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밤이 전혀 없는 영원한 아침을 향해.
우리 대부분은 “일할 수 없는 밤이 속히 오리라”고 찬송한다. 그러나 나는 이것보다 무디 성경학교의 피츠워터 박사가 작사한 “아침이 속히 오리라”는 찬송을 더 좋아한다.
그런데 이 좋은 찬송을 좀 더 많은 사람들이 부르지 않다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사실 그 찬송은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라는 복된 진리를 너무나 잘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폴 루드 박사의 이야기다. 어느 날 저녁 집에 손님이 찾아왔다. 그런데 어린 아들이 무언가 놓칠까봐 두려워서 그랬는지 도통 잠을 자러 가지 않으려 했다고 한다. 물론 결국은 자러 갔지만. 아무튼 그 아들은 두 번이나 다시 내려왔다가 겨우 올라가서 잠을 잤다고 한다. 이튿날 아침 조반을 먹으러 아래층으로 내려온 그 아들이 아빠에게 이렇게 말하더란다. “아빠, 저는 천국에 가고 싶어요.” 물론 이 말을 들은 폴 루드 박사의 마음은 기뻤다. 그러나 왜 그런지 이유가 궁금해서 “그런데 왜 하필이면 지금 천국에 가고 싶다는 거냐?”라고 물었다. 그러자 그 아들은 “거기에는 밤이 없을테니까요”라고 대답하더란다. 비록 오래 전에 들은 말이지만, 나는 아직도 이 말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설레인다.
- 에릭 존슨 -
하나님 이야기는 항상 끝이 좋다
바이올라 왈덴 저. 생명의말씀사